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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府를 찾다.
바쁘게 맹묘와 맹부를 둘러보고 다시 곡부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삼공이라 일컬어지는 공묘(孔廟)와 공부(孔府), 공림(孔林)이 자리하고 있는데 맹묘와 맹부, 맹림보다 거의 두 배 이상의 크기라는 점이다.
중국의 전통적 건축양식은 물론 송대 봉건지주의 莊園 양식이 잘 구현되어 있기에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40대 관광지중의 하나로 추성에 비해 크게 붐비는 지역이었다. 먼저 공묘로 갔다. 공자의 사당은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 많이 흩어져 있고 우리나라에도 성균관을 비롯해 몇 군데가 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공자를 찾아뵈려는 이들로 유난히 붐비는 듯했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는 중국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이며, 공부는 송나라때 조성된 공자 후손들의 저택 겸 관공서로 지어진 전형적인 봉건시대의 장원(莊園) 형식을 갖고 있으며, 공림(孔林)은 공씨 집안의 무덤으로, 한 집안이 이렇게 큰 묘지를 조성한 곳은 이곳밖에 없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의 땅이었기에 차량의 번호판이 산동성이 아닌 “魯”(노)로 시작한다. 문화대혁명 이후 다시 새롭게 공자를 존숭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공묘의 구조는 아래의 순서로 이어져 있다. 위쪽의 침전이 가장 북쪽이며 아래 쪽이 남쪽이다.
寢殿
啟 崇
聖 大成殿 聖
殿 祠
西 杏壇 東
廡 廡
大成門
十三碑亭
奎文閣
同文門
大中門
弘道門
碧水橋
聖時門
至聖廟
太和元氣
櫺星門
金聲玉振
萬仞宮牆
사진을 통해 남쪽(맨 아래쪽)으로부터 차례로 들여다보자.
사진 : 공묘의 맨 바깥 담장인 만인궁장(萬仞宮牆)이다. 혹자는 이를 조벽(照壁 혹은 照牆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독특한 건축물 양식이다.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대문 바로 안쪽에 벽을 설치하고 무늬를 넣기도 한다)의 효시라고도 한다.
만인궁장은 논어에 나오는 얘기로 노나라 대부 속손무숙이 ‘자공이 공자보다 현명하다’고 하자 이 말을 전해 들은 자공이
“궁궐의 담장에 비유하자면 사(자공의 이름)의 담은 어깨에 미침이라. 담 너머로 궁궐 속의 방이나 집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으나 선생님의 담은 여러 길의 높이라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들의 풍요로움을 보지 못하는데 그 문으로 들어간 자가 혹 적은지라
(譬之宮墻컨대 賜之墻也는 及肩이라 窺見室家之好이어니와 夫子之牆은 數仞이라 不得其門而入이면不見宗廟之美와 百官之富이니 得其門者 或寡矣라)”에서 따온 말로 공자의 학문이 지고함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우리들은 비행기를 타고 제남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왔으니 결코 쉽게 들어간 문은 아니니라.^^
(사진)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 본격적인 문인 聖時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牌坊으로 이루어져 있다.
金聲玉振은 맹자가 공자를, 백이와 이윤과 유하혜와 비교하면서 이 세 분의 성인을 모두 합한 것과 같다는 의미로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
'맹자' 만장편을 보면 “孔子는 聖之時者也시니라 孔子之謂集大成이시니 集大成也者는 金聲而玉振之也라 金聲也者는 始條理也요 玉振之也者는 終條理也니 始條理者는 智之事也요 終條理者는 聖之事也니라”(공자는 성인의 시중(時中)한 사람이시라. 공자가 모아서 크게 이루심(集大成)을 이르시니 모아서 크게 이루었다는 것은 쇠로 소리내고 옥으로 거둠이라. 쇠로 소리낸다는 것은 조리를 시작함(始條理)이오, 옥으로 거둔다는 것은 조리를 마침(終條理)이니, 조리를 시작하는 것은 智의 일이오, 조리를 마치는 것은 聖의 일이니라)라 한데서 패방의 이름을 따았다. 성시문과 대성전 모두 이 글귀에서 따왔다.
앞에서부터 패방인 櫺星門(영성문), 太和元氣(태화원기)방, 至聖廟(지성묘)가 차례로 보인다. (사진) 至聖廟(지성묘)라는 전서체가 돋보인다. 뒤로는 ‘聖時門’이 있고 일곱번째에 碧水橋가 있다.
태화원기란 패방명은 명나라 세종 23년(1544년)에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공자의 학문과 사상이 무한한 하늘(太空天體)과 같이 끊임없이 순환운행하며(循環往復) 영구하다(永恆長存)는 뜻이다.
본래는 맹자가 공자를 집대성이라고 표현하면서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으면서 중을 잡고 이치를 온전히 추구한다고
‘三子ㅣ 猶春夏秋冬之各一其時오 孔子則太和元氣之流行於四時也ㅣ라(세 분, 곧 백이, 이윤, 유하혜가 춘하추동의 각각 하나의 그 때라면, 공자는 곧 태화원기가 사시에 유행함과 같음이라)‘ 한데서 나온 말이다.
弘道門을 지나 大中門을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주칠 기둥이 눈을 밝게 한다. 중국의 붉은 색이다.
弘道란 글자 그대로 도를 넓힌다, 논어 위령공편에 "子曰人能弘道요 非道弘人이니라(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지 않는다.) "고 하였다. 본뜻이야 사람이라면 도를 넓혀야 한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태극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음양사상에 기초한 공자의 큰 도를 말한다.
大中이란 주역 火天大有(
)괘 단전(彖傳)에 “大有는 柔 得尊位하고 大中而上下 應之할새 曰大有니 其德이 剛健而文明하고 應乎天而時行이라 是以元亨하니라”
(대유는 부드러운 것이[육오효를 말함] 존귀한 位를 얻고 크게 가운데 하여, 위와 아래가 응하기 때문에 대유라 이르니 그 덕이 강건해서 文明하고 하늘에 응하여 때로 행함이라. 이로써 크게 형통하니라)에서 취한 말이다. 곧 大中이란 뜻은 크나큰 학문을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중용의 도를 잃지 않은 공자의 위대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논어를 보면, 달항(達巷)의 마을 사람들이 공자에 대해 “크시도다, 공자여! 박학하면서도 이름을 내지 않으시도다(大哉라 孔子여 博學而無所成名이시라)”라 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내가 무엇을 할까? 수레를 몰까? 사수가 될까? 차라리 말을 몰리라(吾何孰고 執御乎아 執射乎아 吾執御矣로라)하셨다.
만인궁장으로부터 10번째 되는 곳이 同文門이다. 中庸에 "非天子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今天下車同軌하며 書同文하며 行同倫이니라(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며 법도를 짓지 못하며 글을 살피지 못하니라. 이제 천하의 수례가 바퀴가 같으며, 기록함에 글이 같으며 행함에 질서가 같으니라.) "고 했고, 이어서 "雖有其位나 苟無其德이면 不敢作禮樂焉이며 雖有其德이나 苟無其位면 亦不敢作禮樂焉이니라(비록 그 위가 있으나 진실로 그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짓지 못하며, 비록 그 덕이 있으나 진실로 그 위가 없으면 또한 감히 예악을 짓지 못하니라,) "고 했지만 공자가 편찬하신 詩書易禮樂과 春秋는 漢나라로부터 이래로 모든 법도의 지표가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 위는 없었지만 그 덕으로 글을 짓고 행하셨기에 공자 당시 이미 聖人이라 일컬음이 있었고, 漢나라 때는 세칭 '素王'이라 불렀으며, 당나라에 들어 마침내 文宣王으로 추존되었다. 그러므로 同文門이란 이름 속에는 공자의 位를 天子로 추앙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奎文閣은 우리나라 창덕궁내에 있는 奎章閣과 같은 개념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중국에서 結構部材(결구부재, 서까래를 받치기 위한 공포를 올리는데 두공, 첨자, 소로 등을 짜맞추어 올린 구조로 우리의 전통 가옥 구조는 모두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짜맞춤 架構이다)로 지은 각루라 하여 아주 유명한 건축물이다.
奎는 奎星으로 서쪽의 일곱별 가운데 하나인데 생긴 모습이 구불구불한 글자와 비슷하여 文筆의 신으로 섬긴다. 한편 임금이 몸소 쓴 글을 奎라고도 한다. 文은 북두칠성 옆에 있는 文昌星이라고도 보고, 奎文이나 奎章이라고 할 때는 모든 문장, 곧 학문을 주관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임금과 직접 관계된 것이다.
규문각 의 윗층에는 역대 황제들이 하사한 전적과 묵필 등이 보관되어 있고, 아래층에는 공자에게 제를 지낼 때 보낸 향과 각종 폐백들이 보관되어 있다. 송나라 때(1018年)창건하고,明나라 때(1483年)개축하였다.
同文門과 奎文閣을 지나면 비각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있다. 황제들이 쓴 비문이지라 지붕이 대부분 누런 기와이다. 모두가 53개의 비각이 있다는데 당⋅송⋅금⋅원⋅명⋅청대에 걸쳐 53명의 황제가 쓴 비문이 들어가 있다. 가장 큰 것은 청나라 강희제의 것으로 석재의 무게가 총 65톤에 달한다고 한다.
<사진 :대성문 안쪽 회랑의 용기둥>
학문의 최고 황제로 공자를 예우한다는 뜻이다. 모두 18개의 기둥에 7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각각의 높이는 5.98m, 직경 0.81m이다.
몇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어 공자 당시의 杏壇(행단 : 옆 사진)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며 독서하고 음악을 즐겼던 곳이다.
대성전이 워낙이나 커서 총길이 54m, 폭34m, 높이 32m라 한다.
殿내에는 “萬世師表” "生民未有"등 역대 황제들이 쓴 편액이 걸려 있고 공자의 소상(塑像)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72제자의 소상이 서 있다. 중요한 공자 대제에는 역대 황제들이 직접 거행했으며, 황제와 같은 대우를 하였으므로 팔일무(八佾舞)와 함께 제례를 드렸다.
魯壁과 옛 우물. 노벽은 진시황제때 분서사건을 피하고자 후손들이 공자의 저서들을 감추어두었다는 칠서벽경(漆書壁經)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벽이다. 壁은 북쪽의 일곱별 가운데 하나로 옛 사람들은 문필가의 별자리라 해서 세상의 책과 그림 등을 보관하는 하늘나라 도서관으로 보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노벽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옆의 우물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우물이란다. 난간석 가운데 하나는 마치 속이 빈 듯한 공명현상이 일어나는 특이한 돌이다.
공자의 후손들이 송대에 들어서 ‘연성공’으로 봉해지고 황제들이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영지를 내려주어 공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봉건지주의 장원으로 손꼽힌다. 영지가 240묘가 되며 건물들이 총46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東, 西, 中의 三路로 이루어져 있는데, 東路는 家廟가 있으며 조정대신을 접견하는 별칭 ‘東學’ 공간이고, 西路는 연성군이 詩와 禮를 학습하는 곳이다.
일반 방문객을 접견하는 별칭 ‘西學’ 공간이며, 중로는 공부의 중심 공간으로 앞쪽에는 관아부가 있고, 뒤쪽으로는 內宅이 있다.
이 관아부에서는 조정의 六部制를 본따 三堂六廳을 설치해 장원내의 모든 일을 맡아 집행하였다.
그리고 중로의 맨 뒤편은 후원 뜰로 휴식공간으로 이루어졌다. 위의 사진은 후원에 설치된 盆이며, 아래 사진은 정자이다. 1층의 기둥이 유별나게 길다. 정자 앞의 괴석(怪石)들을 중국에서는 태호석(太湖石)이라고 한다.
태호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호수로 제주도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의 큰 호수라고 한다. 이곳에서 나는 돌들이 매우 특이한 모양을 띠고 있음을 보았는데, 중국사람들이 정원 장식으로 꼭 쓰고 싶어하는 수석이란다.
www.startour.pe.kr의 포토갤러리에서 中國 蘇州로 들어가면 留園(유원)에 놓인 태호석을 실컷 눈요기하고 올 수 있다.
공씨의 가족묘지인 孔林. 2400여년간 이어져온 세계 최고, 최대의 가족묘지이다. 공자의 묘가 중심이기에 입구에는 ‘至聖林‘이라고 쓰여 있다.
입구에는 물건파는 상인들이 늘어서 있으나 장가계처럼 한국관광객이 많지 않은 탓인지 호객행위가 치열하지는 않다.
<사진 :공자묘> 유난스럽게 다듬어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어서 보기에 좋았다. 사진은 원래의 비로 “宣聖墓”라 쓰여있다. 전서체가 매우 아름답다. 공자묘의 바로 옆 서편으로는 자공이 시묘살이를 했다는 터에 기와집이 들어서있다.
공묘만 하루해를 넘기면서 둘러보아도 미처 다 보지 못할텐데 바삐 서둘러 다니다보니 나머지는 더욱 제대로 눈여겨 보기가 힘들었다.
대강의 윤곽만 마음과 머릿속에 담아두고, 부족한 부분은 별도의 자료를 뒤적이며 알아보기로 하고 일부는 사진을 찍어두었다가 서울에 가서 정리하며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공림까지 둘러보니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배가 출출하던 차에 공림 입구에서 파는 붉은 무를 사서 돌린다. 순무 비슷하면서도 색깔이 매우 아름다워 한조각 받아들고 우적거렸다.
이곳에서 숙소인 궐리빈사(闕里賓舍)까지는 거리가 가까워 금방 도착했다. 전통적 양식의 호텔로, 분위기뿐만 아니라 음식 맛도 아주 좋았다. 게다가 우리들이 배정받은 방이 일층이라 분위기가 더욱 좋았다. 맛나는 현지식으로포식한 뒤에는 공자쇼인 ‘六藝舞’를 관람했다.
궐리빈사에서 관람한 六藝舞. 군자라면 반드시 먼저 익혀야 할 여섯 가지인 藝로, 禮 樂 射 御 書 數를 말한다.
이 육예를 편종 편경 해금 거문고 완(玩) 고정(古艼) 호적 등과 서양악기로는 첼로가 합세하여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악사들과 무희들의 솜씨가 매우 탁월하였다.
<출처 : 家苑 문화유적답사 문집 (해외편) : http://tae11.org 2006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