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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마지막 순성장 장윤
전라좌도의병을 이끌다
장윤(張潤, 1552~1593)은 순천 출신으로,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선조 15년(1582) 무과에 급제하여 북도 변장을 제수받았다. 다음 해에 발포만호에 제수되었으나, 자존심이 강해 전라좌수사에게 미움을 받자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직전 사천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상관과 의견대립으로 다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천에서 300여 의병을 일으켰다. 보성에서 임계영이 의병을 일으켜 함께 싸울 것을 요청해오자, 임계영 휘하에 들어가 의병부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당시 임계영이 칠순을 눈앞에 둔 고령이었기에 의병 통솔은 사실상 장윤에게 맡겼다.
1592년 8월, 임계영의 전라좌도의병에 합류한 장윤은 남원에서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우도의병과 합세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영남이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경상도로 진출하여 1차 진주성 전투를 외곽에서 지원하여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1차 진주성 전투 이후 1592년 10월부터 1593년 초까지 성주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593년 2월 초에는 개령(김천)의 일본군 본부를 공격하여 200여 명의 일본군을 참살하고 조선인 포로 40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큰 타격을 입고 철수하는 일본군을 선산까지 추격하였다.
전라좌도의병의 성주·개령(김천) 수복 작전 기간은 겨울이었다. 추위와 전염병까지 만연하는 악전고투 속에서도 이루어낸 엄청난 승리였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호남의병은 영남 지역에서 철수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였다.
진주성의 마지막 순성장(巡城將)
1593년 6월, 일본군들이 속속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다. 그 수는 무려 10만에 이르렀다. 명나라 군대와 조정뿐만 아니라 관군과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조차 진주성을 포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명군은 일본군이 진주성만 공격하고 다시 물러갈 테니 성을 비울 것을 제안하였다.
호남 의병장들의 생각은 달랐다. 진주성 함락 후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임진왜란 최후의 보루 호남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를 간파한 호남 의병은 속속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한 이후, 충청병사 황진이 군사 700여 명,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500여 명, 복수의병장 고종후가 400여 명, 남원의병 부장 이잠이 300여 명, 태인의병장 민여운이 200여 명, 그 밖에 남원의 고득뢰, 광양의 강희보·강희열 형제 등이 각각 군사를 이끌고 합류했으며, 장윤 역시 이때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류했다.
6월 21일부터 29일 성이 함락될 때까지 9일간 혈전이 지속되었다. 10만의 병력과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서도 의병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장맛비가 계속되자 성벽 이곳저곳이 무너졌다. 함락을 하루 앞둔 6월 28일, 순성장 황진이 왜적이 쏜 총탄에 전사하였다. 황진의 뒤를 이어 장윤이 2차 진주성 전투 최후의 순성장 되었다. 적이 성을 세 겹이나 에워싸고 때때로 충돌하여 총탄이 비 오듯 하였으나 장윤은 앞장서서 더욱 힘차게 싸워, 의병들이 그를 장장군이라 불렀다. 이렇듯 분전하던 장윤도 결국 29일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진주성 역시 6월 29일 일본군에게 함락당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철종 때 의정부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 인조 때에는 순천에 충신 정려가 세워졌으며, 숙종 때 저전동에 사당이 세워져 정충사(旌忠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흥선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07년에 복원되었고 1946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1960년 승주읍 서평리에 신도비를 세웠다.
장판서
장판서는 진정한 충신이라
굳센 용기가 남보다 뛰어났네
난을 당하여 나라 있는 줄만 알고
전쟁에 임하여 자신은 잊었네
창을 들고 말에 올라 사천으로부터 왔으니
진주성에는 의인도 많아라
하늘과 한 성이 나라를 보호하려 하네
공이 능히 성을 지키려 하나 성은 적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성이 함락되어도 도망가지 않네
오직 원하는 것은 죽어서 성 아래의 먼지가 되는 것이네
적병이 성을 오르니 장사가 분기를 내어
빈손이 되어서도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하늘을 부르네
힘껏 싸우다 죽으니 공은 인을 이루셨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진양성(晉陽城)이 수양성(睢陽城)보다 높음을
당시의 열사가 어찌 원(遠)과 순(巡)뿐이었으랴
-조현범의 [강남악부]에서
◈ 부모와 나라를 원수를 갚고자 재봉기한 의병장 고종후
복수의병장,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부모의 원수와는 하늘을 같이 이고 살지 않고, 형제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 같이 살지 않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싸움에서 군사를 돌이키지 않는다는 옛말도 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추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남쪽 땅의 여러 선열이 나라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면서 아버님을 대장으로 추대하였으니 우리는 애초부터 형제와 같은 의미로 맺어져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아버님은 대사를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 나를 어리석다 여기지 말고 추성에서 피로 맹세하던 옛일을 회고하여 국가의 대사를 함께 도모함이 어떠한가?”
1592년 7월 10일 금산에서 고경명이 이끄는 호남 의병은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섰다. 관군의 항전을 예상했지만, 관군 왜적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된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고경명 부대는 순식간에 밀어닥친 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고경명은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쟁에서 패한 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끝까지 싸우다가 둘째아들 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큰아들 준봉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후 스스로 ‘복수의병장’이라 칭하고 재봉기하였다. 위의 글은 재봉기 격문이다.
아버지를 따라 금산전투에 참전하다
선조 10년(157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 예조좌랑 등을 거쳐 임피현령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지제교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탄핵을 받고 향리인 광주로 내려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전라도 관군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다가 왕이 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에서 군대를 해산했다. 부친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여 수원에 있는 광주목사 정윤우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부친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다시 부친의 명에 따라 금구·김제·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다.
이때 왜적이 황간·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곽영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이듬해 4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해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왜적은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였다. 고종후는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했다.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진주성이 무너졌다.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고종후는 북향해 재배한 뒤 김천일·최경회, 숙부 고경형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도승지에 이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포충사와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 김천일의 부장으로 활동한 의병장 양산숙
양산숙(梁山璹, 1561~1593)은 어등산 자락 박뫼마을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기묘명현 양팽손이며, 아버지는 송천 양응정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만 전념하였다. 천문·지리·병학에도 뛰어났다. 동서 분당 때 조헌과 함께 이이·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유성룡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양산룡과 함께 나주에서 창의해, 김천일을 맹주로 삼아 부장이 되고 형은 운량장(運糧將)이 되었다. 향리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며,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하고, 수원에 출진해 활약하였다. 강화도로 진을 옮길 무렵, 김천일은 양산숙으로 하여금 선조 임금에게 상황을 전하도록 하였다. 양산숙은 곽현과 함께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길을 달려서 7월 중순에야 의주에 이르렀다. 양산숙은 선조를 알현하고 현재 왜적의 형세와 전라도와 경상도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 자세히 아뢰었다.
선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오랫동안 남쪽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지금 너를 보고서야 옛 강산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을 알았구나”하면서 양산숙에게 공조좌랑을, 의병장 김천일에게 창의사, 고경명에게 초토사를 각각 임명하고 전라도와 경상도 의병에게 교서를 내렸다.
선조은 양산숙에게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고 하였다. 양산숙은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감격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천리 먼길, 임을 뵙고 이내 속 모두 다 여쭙고
나직이 전하시는 임의 말씀도 내 들었네.
뼈에 사무친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목숨 바쳐 임의 은혜 갚을 때가 바로 지금이리.
양산숙은 다시 김천일의 진중으로 돌아와서 임금의 교서를 전하고,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고경명은 금산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큰아들 고종후에게 전하였다.
적이 경상도로 퇴각하자 김천일과 함께 남하해 진주성에 들어갔다. 군사적 열세로, 김천일은 양산숙과 홍함을 명나라 장군 유정에게 보내 원군을 요청했지만 실패하였다.
양산숙이 진주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왜적이 이미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동행한 홍함을 비롯한 몇 사람은 겁을 먹고 모두 탈주하였다. 양산숙은 말하기를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하고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혼자만 죽음에 빠지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하고, 남강을 통해 성에 들어가니 군사들이 모두 놀랐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9일 간의 전투 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양산숙은 창의사 김천일을 부축하고 촉석루에 올랐다. 김천일은 양산숙에게 ‘헤엄을 잘 치니 빠져나가서 후사를 도모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이미 거사를 함께 하였는데 어찌 혼자서만 살길을 찾으리오’ 하면서 먼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윽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도 남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백사 이항복이 이르길, “단정하게 의리를 쫓아 몸가짐을 잃지 않는 사람은 김천일과 양산숙뿐”이라고 추모하였다. 후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양산숙의 처 이씨 부인도 절부(節婦)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삼향포(지금의 나주시 몽탄)로 피난을 가다가 왜적을 만나 시어머니 박씨과 함께 강물에 투신하였다. 그런데 몸종이 물에 빠진 그녀를 살렸으나, 왜적이 다시 가까이 오자 그녀는 가지고 있던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 죽을지언정 적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송제
매와(梅窩) 송제(宋悌, 1547~1592)는 고흥 출신이다. 1593년 강진군수로서 병사 200명을 이끌고 황진의 막하로 들어가서 성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당진현감으로 있을 때 진주성 침공을 예측하고 복수장군 고종후, 해미 현감 정명세와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이 함락된 뒤 왜적이 그를 꿇어 앉히려 하자 적장에게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무릎은 굽힐 수 없다”고 호령하다 목숨을 잃었다. 왜적도 감탄하여 그의 시체를 정중히 매장하고는 “조선의사 송제의 주검(朝鮮義士宋悌之屍)”라고 쓴 나무 표식을 세웠다.
송제의 부인 능성구씨가 남편 순절 소식을 듣고 아들을 남편의 형에게 부탁하며 “이 아이를 잘 보살펴 충신의 가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어 손가락을 깨물어 “촉석을 감아도는 진주 남강의 깊은 물이여, 장군이 순국하였으니 절의가 영광되도다. 충신의 집안에 충신의 첩이 있으니, 충신과 생사를 함께 하고 싶노라”라고 시를 쓰고 물과 곡기를 끊어 순절하였다.
송제의 조카 송덕일은 무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훈련원 첨정으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진도군수로 공을 세워 함경도 부령부사가 되었다. 부령에 있을 때 여진이 침입하자, 정병 700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여 경상좌도병마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 전에 여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조는 숙질간의 충절을 높이 사 쌍충일렬지려(雙忠一烈之閭)라는 정문을 내려 표창하였다.
조선 후기 호조참의를 지낸 윤기는 송제를 기리는 시를 썼다.
매와께서 남긴 순절록 참으로 존경스러우니
적 꾸짖으며 목숨 버린 충의의 혼을 상상하노라
숙질이 두 성에서 충시으로 나라에 보답하였고
부부가 쌍으로 절의 지켜 혈서로 원한 남겼네
명성은 멀리 전해져 천고에 남았고
충렬은 삼연히 한 가문에 모였어라
강상을 수립하였기에 두터이 증직 내리니
성조의 은전이 후손을 감동시켜 울리네
◈ 진주성에서 함께 순절한 형제 의병장 강희보·강희열
강희보(姜希補, 姜希復 1545~1593)와 강희열(姜希悅, ?~1593) 형제 의병장은 광양시 봉강면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강희보(강희복)는 영호남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인 단성(경남 산청)에서 적과 싸우고 있던 백부 강인상을 구원하기 위해 광양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달려가 일본군과 싸웠다. 무과에 급제한 동생 강희열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구례군 토지면의 석주관을 지키던 중에 휘하 군사를 이끌고 단성으로 달려가 백부를 구원하였으며, 싸움이 끝나자 다시금 돌아와 석주관을 수비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 일본군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권율 장군에게 크게 패한 후 위세가 꺾여 4월부터는 서울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관군과 의병, 명군에 밀려 경상도로 남하한 일본군은 1593년 6월,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고립무원에 이르자 많은 장수가 전투를 포기하고 흩어졌으나 김천일 등은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진주성의 위급한 상황을 들은 형 강희보는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하였고, 이후 아우 강희열 역시 소식을 듣고 수성군에 합류하였다. 형제는 수성군의 부장과 전투대장으로 앞장서 싸우던 중 형 강희보는 27일에, 아우 강희열은 29일에 전사하였다.
영조 40년에 강희보에게는 호조좌랑(정6품), 강희열에게는 병조참의(정3품)가 추증되었다. 강희보, 강희열 형제가 모두 진주 창열사에 배향되었다. 1970년에는 강씨 문중과 광양의 유지들이 강희보·강희열 형제장군 숭모회를 창립하여 봉강면 신룡리에 묘소와 묘비를 보수하였고 사당 쌍의사(雙義祠)를 건립하였다.
◈ ‘호랑이 정신’으로 일본군에 맞선 심우신 의병장
상무대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대한민국 육군 군사 훈련장 상무대.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맞서기 위해 일어난 의병들의 훈련 장소였다. 이곳에서 의병을 훈련시킨 인물은 심우신(沈友信, 1544~1593)이다. 그는 ‘표의(彪義)’ 즉 ‘호랑이 정신’을 강조하면서 용맹스럽게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심우신은 김포에서 태어났다. 과거시험을 위해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건강에 문제가 생겨 활쏘기로 섭생을 하였는데,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자 24세가 되던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낙향해 있을 때인 선조 15년(1582), 선조는 장수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를 찾아 등용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당시 재상인 박순(朴淳)은 “심우신은 일찍이 고을의 현령으로 있을 때 부하를 엄히 다스리고 덕을 쌓으며 청백리로서 백성을 통솔할만한 인물로 부지런하고 천성이 강직하여 경험을 더 쌓으면 대임도 맡길만하다.”라며 적극 추천했다.
1591년에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은거해 있던 중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한양을 사수하기 위해 도원수로 임명된 김명원의 상소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하지만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식솔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영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심우신은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는 자리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던 날, 이미 나의 이 한목숨을 나라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하물며 모친상 중에도 기용이 된 바에 어찌 농촌에 엎드려 안일하게 내 몸이나 처자만을 돌볼 수 있겠는가”라며 여러 사람에게 합류를 권하였다.
심우신은 ‘호랑이 정신’을 뜻하는 ‘표의’라는 군기를 만들고 지금의 상무대 자리인 영광군 장천리(현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장천마을) 앞 광장에서 의병들을 훈련시켰다.
심우신은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여 청주와 황간 등지에서 일본군을 만나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12월에 마침내 수원에 당도하여 독성산성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때 심우신은 기습작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자, 두려움을 느낀 일본군은 독성산성에서 물러났다.
창의사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심우신은 한양 탈환을 위해 북상하던 중 양화진에서 창의사 김천일 의병장을 만났다. 김천일과 심우신은 의기투합하여 서로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다. 심우신과 김천일, 그리고 행주산성에 주둔한 권율은 힘을 합쳐 일본군을 압박해 갔다. 명나라 군대와 관군, 의병의 공격에 일본군은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이후 김천일은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심우신 “이미 김천일 장군과 더불어 같이 죽기로 약속했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위기를 면하고자 도망할 것인가?”라며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일본군 10만 대군에 맞서 심우신은 진주성 동문 수비를 담당하며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느낀 심우신은 김천일·최경회 등과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적을 섬멸하자.”라 결의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무인이니 헛되이 죽을 수 없다. 끝까지 싸우다 죽겠노라.”라며 다시 동문으로 뛰어가 끝까지 항전했다. 하지만 화살이 다 떨어지자, 북향사배한 후 남강에 투신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심우신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장례원 판결사에 추증하였다가 다시 병조참판을 가증하였다.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등의 의병장과 나란히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숙종 39년(1713) 영광의 유림들이 학성리 장천마을 훈련장터에 심우신 의병장의 위패를 모신 장천사(長川祠)를 세웠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9년 복설이 추진되었으나, 장천마을이 상무대로 편입됨에 따라 1990년 후손들이 살고 있는 삼서면 유평리 부귀마을에 복원하여 표의사(彪義祠)로 이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