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섬진강의 봄
와아~ 와아~와!
4월 6일, 독서사랑방의 봄나들이에서 회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댄다. 섬진강의 봄은 회색도시의 그늘을 걷어내고 생명 있는 모든 존재의 생기발랄한 생의 본연을 드러내게 할 만큼 충분히 넉넉하고 아름다웠다.
출발할 때는, 매화는 이미 졌을 것이고 하동 벚꽃은 부산보다 늦을 수도 있으니 꽃은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가 섬진강변을 들어서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매화와 벚꽃을 동시에 보는 호사를 누리게 될 줄이야! 왼쪽 산등성이로는 무르익은 매화꽃, 오른 편으로는 유명한 하동 백리 벚꽃 터널이 펼쳐지고 있었다. 강물은 화창한 봄날을 맞아 부드럽게 휘돌아 흐르며 반짝거린다. 자연이 빚어내는 봄의 향연이다. 파란 하늘은 곡선의 푸른 강물과 어우러지고 하얀 모래톱과 갈색 갈대밭과 송림, 그리고 강둑엔 노란 개나리가 무더기 무더기로 피었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아 연분홍의 매화꽃잎이 흩날리는 것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의 한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오른 편으로는 이제 막 단장을 끝낸 벚꽃이 다투듯 피어나고 있다. '섬진강 백리 벚꽃길'의 시작이다. 구례 토지면에서부터 하동읍까지 이어지는 장장 40㎞에 이르는 이 길은 벚꽃이 제법 한창이다. 그 중에서 화개장터에서부터 쌍계사까지 4㎞에 이르는 이른바 ’하동 십리벚꽃길‘은 특히 아름다워서 ‘혼례길’이라고도 하는데, 여기는 아쉽게도 아직 봉우리인 채로다. 하지만 이미 우리 속에서 약동하기 시작한 흥취는 멈출 줄을 모른다.
쌍계사-녹차다원-악양벌판-시인과 차 한잔
섬진강 꽃길을 달려 도착한 첫 행선지는 쌍계사. 주차장에서부터 절에 오르는 길 곳곳에는 됫박으로 파는 녹차씨를 비롯하여 각종 산나물, 약초, 야채 등을 파는 즐비한 노점들도 정겹기만 하다. 입구의 안내판 앞에서 강 선생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관람을 시작했다.
쌍계사는 723년 신라 성덕왕대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이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옥천사(玉泉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840년에 진감선사(眞鑑禪師)가 당에서 차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중창하면서 대가람이 되었다. 886년에 쌍계사로 절 이름을 바꾸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2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만은 여기저기 민족 수난의 흔적을 지닌 채 꿋꿋하게 서 있다. 강선생은 쌍계사의 이 비문이 비운의 천재 최치원의 남아있는 유일한 글씨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대웅전 계단 옆에 있는 수십 년 수령의 동백이 꽃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모습이 유난했던 한파를 짐작하게 한다. 잠시 10여년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소담스러운 동백분 하나를 선물로 받아서 정성껏 가꾸었던 기억을 떠 올려 본다. 동백의 생은 오로지 추운 겨울에 정열적인 붉은 색의 커다란 꽃을 피워내는 그 순간을 향해 있다. 이른 봄 꽃이 지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봉오리를 맺어 1년 내내 영양을 비축하며 개화를 준비하는 것이다. 동백의 그 엄숙하기까지 한 존재의 여정을 바라보며 조변석개하는 얄팍한 세태를 반성하곤 했었다. 지금, 쌍계사의 동백 역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려니 하니 새삼 숙연해진다.
다음 행선지는 차의 고장에 와서 다원을 안 갈 수 있느냐는 회원들의 제안으로 즉석에서 결정된 다원 방문하기. 별 수 없이 한창 바쁠 때 일손을 보태지 못할 바에야 연락을 않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 연락하지 않았던 하동에 귀농해서 살고 있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30년 녹차명인이 운영한다는 유명한 oo다원. 다원은 쌍계사 벚꽃길 가에 섬진강을 굽어보면서 야생차밭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원 내부의 운치도 좋았지만 바깥 풍경은 정말 그림이다! 주인장은 설명을 곁들여 종류별로 차를 내 준다. 맨 처음 반발효차인 청차로 입안을 정화한 후에, 살짝 떫은맛이 나는 녹차, 그리고 짙은 색과 깊은 맛의 홍차, 마지막으로 살짝 발효시켜 녹차의 떫은맛과 약간 쓴 뒷맛을 누른 맑고 부드러운 맛의 황차가 나왔다. 이 다원의 황차는 일반적인 황차보다 낮은 12%정도만 발효시킨다고 설명 해준다. 그래서일까, 이 다원이 황차 맛은 정말 특별했다. 맑으면서 깊고, 깊은가 하면 부드럽고...
다향에 취하고 봄의 흥취에 취한 일행은 어느새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벌판을 거쳐서 악양 동매마을의 버들치 시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섬진강변길은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반면, 푸르름을 더해가는 벌판과 드문드문 한산한 농가 풍경은 편안함을 준다. 섬진강 꽃길은 일탈의 욕망을 꿈틀거리게 한다면, 평사리 벌판은 삶의 둥지를 틀고 싶은 욕망를 자극한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회원들은 입으로는 시인에게는 삶의 공간인데 불쑥 찾아가면 결례라고들 하면서도 만나고픈 간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드디어 버들치 시인의 집 마당에 들어선 회원들.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차마 문을 두드리지도 돌아서 나오지도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이쯤되면 생명있는 모든 것에 연민한다는 시인이 문을 열고 나올 수밖에 없겠다! “차 한잔 하고 가세요!” 시인은 차를 달여서 찻잔에 매화 한 송이씩을 띄워 준다. 그런데 막상 다탁을 사이에 두고 회원들은 표정으로만 말할 뿐 소리내어 표현을 하지 못하고 쭈빗거린다. 조금 전 함성을 지르던 그 씩씩함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덕분에 말 수 적고 어눌하기로 소문난 시인의 육성으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하동 맛집 기행
여행에 먹거리가 빠질 수 없는 법, 우리의 하동 섬진강 나들이 역시 먹거리는 중요한 일정 중 하나였다. 행선지는 쌍계사 아래에 있는 ‘단야식당’의 자연식과 광양만의 ‘벚굴’. 사실, 쌍계사 관람하기 전에 식사부터 했으니, ‘단야식당’은 이번 여행의 첫행선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식당은 쌍계사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땅이 주차장터로 수용되게 되자, 돈으로 보상을 받는 대신에 당시로서는 ‘무용한’ 산을 불하받아 매화나무, 차나무, 각종 과실수 등을 심었다는 어느 농부의 딸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산을 가꾼 아버지 덕분에 그 자손들은 모두 산과 나무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데, 딸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꿋꿋하게 ‘자연먹거리’를 지키면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주메뉴는 산채비빕밥, 더덕구이정식, 사찰국수 세 가지고 그 외에 직접 담근 각종 과실주와 파전과 더덕구이, 묵무침 등이 메뉴의 전부다. 우리가 주문한 것은 더덕주, 파전, 산채비빕밥, 그리고 더덕구이.
식사전에 파전과 더덕주가 나왔다. 더덕주의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하고 깊은 맛과 향이 일품이다. 점심이라서 딱 1병만 시켰기 때문에 그 향이 아까워서 차마 잔을 비우지 못하고 코끝으로 흠향하듯 아끼며 마셨다. 더덕주와 함께 나온 파전에 들어간 쪽파의 파랗게 토실토실한 한 모양새, 먹었을 때 깊은 단맛이 나는 것이 도시에서 먹는 여느 파전과는 격이 다르다. 그리고 밑반찬으로 나온 매실초절임의 아삭하고 상큼한 맛이라니. 다음은 산채비빔밥과 더덕구이가 나왔다. 조미료 한 점 없는 산채 특유의 상쾌하고 깊은 향이 살아 있는 산채나물은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낸다. 고백컨대, 일상의 식사로써 매일 먹는 밥을 그처럼 음미하면서 먹기는 처음이었다. 더덕구이는 특이하게도(!) 떡볶이를 닮았는데 고추장에 각종 버섯을 섞은 양념이 아주 정열적으로 화려한데도 맵지도 않고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을 낸다. 왈, ‘이 집 고추장 정말 예술이야!’ 더덕은 부드럽게 녹는 느낌인데, 향이 기대보다 약한 점은 살짝 아쉬웠다.
마지막 여정은 광양 망덕 포구의 벚굴 맛보기. 벚굴은 강굴이라고도 하는데,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경계지역에서만 자라며, 영양분이 풍부해서 얼굴을 가릴 정도로 크게 자란다. 1년에 딱 한 번, 벚꽃이 피는 시절에 수확하기 때문에 벚굴이라 한다. 벚굴은 불고기처럼 석쇠에 구워서 초장에 찍어서 묵은지에 싸서 먹는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자라기 때문에 짜지도 않고, 구울때 곰국처럼 진한 육수가 줄줄 흐르는 것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구운 벚굴에 소주 한잔을 곁들이며, 이제서야(!) 독서모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각자 준비해 온 시낭송을 시작하였다.
에필로그
섬진강 꽃길 여행은 지난 2월 모임에서 토론 주제로 잡은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가 계기가 되었다. 독서모임을 통해 잠시나마 바쁜 일상에 쫓기는 치열한 생존의 공간 너머의 세계도 상상도 해보고 또 때로는 일탈도 해 보자는 데 의견들이 모아졌다. 독서를 통한 간접 체험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 보자는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서 정해진 여정. 아마도 그랬기에 눈길 닿는 곳, 발길 닿는 곳 모두가 상상과 현실의 마주침이라는 새로운 체험 이 될 수 있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마침 평일이어서 하루 온 시간과 여행지 온 장소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회원들은 즉석에서 3개월에 한 번씩은 체험 여행을 하자는 의견에 만장일치로 합의하면서, 연꽃을 주제로 하는 다음 여행을 벌써부터 기다리는 눈치다. 독서모임이 일상의 쉼터와도 같은 여유를 주는 장이라면, 여행은 새로운 활력을 되찾는 삶의 오아시스로의 일탈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3년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여행기인데(이후 꽃을 주제로 한 여행과 올레길, 갈맷길 걷기 여행 등을 다녔지만 글로 쓴 여행기 없이 모두 포토에세이로만 남아 있네요.) 다시 보니 살짝 쑥스럽습니다ㅠㅠ 하지만 이때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 꼭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회자하게 되는 정말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이죠. 얼마전 <주변인과 문학>지에서 이원규 시인(그날 제가 준비해 간 시집은 이분꺼였다는~) 이름을 보자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두 가지 약속이 떠오르네요. 하나는 단야식당에 더덕주 마시러 다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집 사서 사인 받아오기~ㅎㅎ 특히 더덕주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지난해 전주에서 맛본 전주모주를 박스째로 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지요.
첫댓글 지난 여름에 다녀왔는데 봄은 또다른 모양이겠지요. 글과 사진만으로도 악양의 꽃바람이 전해져 오는듯 합니다.
단야식당 더덕주 마시러 같이가기 찜!~
그것도 좋지요^^ 어른이 되어서도 먼 곳의 그리움으로 익어갈 동화로 남겨두는 괜찮구요~
다시 간다면 아마도 처음의 아우라는 없겠지만, 또 하나의 그곳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