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5년 3월 22일(토)
장소: 진도 일원[용장성-벽파진전첩비-운림산방-왕온묘-진도타워(명량대첩 현장)]
인원: 38명
오늘도 변함없이 '남도학전령사' 노성태 원장의 버스내 특강으로 답사를 시작하는 회원님들!!
고려항몽충혼탑에서 오늘의 현장답사 출발!
용장성터- 용장성(龍欌城)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여·몽연합군에 항전했던 성이다. 고종 18년(1231) 고려는 몽골이 침략해 오자 항전하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그리고 40여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치렀으나,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였다.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어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을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로 남하하여 궁궐과 성을 쌓고 여·몽연합군과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용장성이다. 용장성은 길이가 12.75km이고 높이는 4m 내외로, 산 능선을 따라 용장산을 빙 두르고 있다.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성벽이 남아있고, 성 안에는 궁궐의 자리와 용장사가 있던 절터가 남았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의 왕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궁궐과 성을 만들었는데, 성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자주국방의 기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유적이다.
배중손장군 동상-배중손(裵仲孫, ? ~ 1271) 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장군으로 삼별초의 항쟁을 주도한 무신이다. 1270년 고려 원종은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는데 삼별초는 개경 환도를 거부하며 독자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본거지를 진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연합군이 여러 차례 진도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71년 홍다구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었고, 배중손도 이때 남도석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잔여세력은 김통정(金通精, ? ~ 1273)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계속 항전하였다.
용장성 홍보관에서 삼별초의 잔존세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제주도 삼별초군이 주둔했던 항파두리성이 함락된 2년 후, ‘고려사’의 기록대로 삼별초는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1994년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류큐(琉球) 왕국의 왕궁인 슈리성과 우라소에(浦添)시의 요도레(왕실 무덤)에서 다량의 기와가 발굴된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기와였다. ‘계유년에 고려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암기와가 이역만리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 다량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는 놀랍게도 제작 기법과 형태가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와 동일했다.
‘계유년고려와장조’가 새겨진 암기와의 출토는, 오키나와가 삼별초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 장인이 오키나와에 언제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점이었다. 고려 시기 계유년에 해당하는 연대로는 1153년, 121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 있다. 최근 일본 고고학계는 기와와 함께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계유년은 제주도의 항파두리성이 함락된 1273년(원종 14)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들 기와는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고려인들이 오키나와 류큐 왕국(15~19세기)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하기도 했다.(자료집에서)
왕온묘(王溫 墓)에 대한 노원장의 설명에 집중하는 회원님들! - 진도군 의신면에는 ‘전(傳) 왕온 묘(왕온묘로 전해짐)’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승화후 왕온이 홍다구에 의해 살해되자, 진도 군민들이 그 자리에 시신을 수습하여 묻었다고 한다. ‘전 왕온묘’가 있는 지역은 삼별초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진설리(陳設里)’라 불렸고, 진도읍에서 운림산방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왕 무덤재(王墳峙)’로 불리고 있다. ‘전 왕온’ 묘 20미터 아래에는 묘 하나가 더 있는데, 왕온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한다.(자료집에서)
진도에 또하나의 고려를 건국한 왕온(王溫, ?~1271) 에 대해 설명하는 노성태 원장 - 왕온 (王溫, ?~1271)은 고려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 왕기의 8세손으로, 청화후 왕경의 맏아들이다. 동생으로는 영녕공 왕준과 사공 왕정이 있다. 그리고 아들은 수사도 왕환이다. 정1품인 사공과 사도는 공(公)·후(侯)·백(伯)의 아들과 여서(女婿, 사위)에게 봉작 대신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왕온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진도의 용장성이 함락되던 1271년(원종 12) 여몽 연합군에게 삼별초가 패한 뒤 피살된다. 여몽 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할 때 왕온의 조카였던 왕희와 왕옹이 여몽 연합군의 좌군을 홍다구와 함께 이끌고 있었다. 왕희와 왕옹은 승화후 왕온의 아우였던 영녕공 왕준의 아들이니, 왕온에게는 조카가 된다. 왕준은 여몽 연합군으로 출병하는 두 아들을 불러 큰형님(왕온)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고 특별히 당부한다. 그 내용이 ‘고려사절요’에 다음처럼 나온다. “(왕준이) 왕희와 왕옹을 불러서 말하였다.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왕온)의 죽음을 구하여야 한다.” 왕준의 특별한 당부가 있었지만, 왕온의 목숨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왕준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원나라 장수 홍다구가 지휘하는 군대가 먼저 들어가, 금갑포구로 향하던 승화후 왕온과 왕온의 아들 왕환을 의신면 침계리 인근에서 무참히 살해했기 때문이다.( 답사 자료집에서)
벽파진전첩비를 배경으로 찰칵~~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 벽파진은 명량대첩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16일간 이순신의 수군이 머물렀을 뿐 아니라 9월 7일과 9일 두 차례 왜군과 전투를 치른 현장이기도 했다. 이곳 벽파진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바위 정상에는 두 차례의 전투뿐만 아닌 명량대첩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비가 서 있다. 이은상 (1903~1982) 이 글을 짓고 진도 출신인 소전 손재형 (1902~1981) 이 글을 쓰고, 진도군민들이 1956년 세운다. 벽파진전첩비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 거북 즉 귀부는 바닥돌을 깎아내어 만들었는데, 비신의 높이는 3.8m, 두께 58cm로 규모가 엄청나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 내용(부분 발췌)-“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李薈, 1567~1625) 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7일 적선 13척이 들어옴으로 물리쳤으며,…… 삼백 척 적의 배들 산같이 깔렸더니 울돌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 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 흘린 의사혼백 어느 적에 사라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라고 새겨져 있다.(자료집에서)
벽파진전첩비쪽에서 바라본 벽파정-벽파정(碧波亭)은 고려 희종3년(1207) 진도의 관문인 벽파나루 언덕에 창건하여 조선 세조 11년(1465) 중건하였으나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있었다. 이 정자는 내왕하는 관리와 사신들을 영송(迎送)하고 위로하던 곳으로 정객과 문인들이 아름다운 경승(景勝)과 감회(感懷)를 읊어 많은 싯구를 남긴 명소이다. 2016년 진도 군민들의 뜻에 따라 새터를 다듬어 이곳에 세운다.
운림산방에서...운림산방(雲林山房)은 조선 말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 선생이 말년에 그림을 그렸던 화실로 첨찰산(尖察山)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2년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許楗, 1907~1987)이 복원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생의 본관은 양천, 자는 마힐, 호는 소치이며 초명(初名)은 허유이다. 20대에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학문을 익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서화를 배워 일세를 풍미(風靡)하는 남종화의 대가가 되었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난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그의 작품은 강한 느낌을 주는 갈필(마른 붓질) 산수가 주를 이루지만, 노송·노매·모란·괴석 등 문인화 또한 일품이다. 선생은 헌종(憲宗, 1834~1849)의 총애를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갈아 왕을 상징하는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는 모란을 그려 바쳤고, 왕실 소장의 고서화(古書畵)를 평(評)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았다. 대표적으로 59세에 운린산방을 그린 '선면산수도'와 스승 김정희의 초상, 묵모란, 파초 등이 있으며, 꿈처럼 지나간 세월을 기록한 몽연록(夢緣錄)이 수록된 소치실록(小痴實錄)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안내판 참조)
운림산방 전경 (全景)
운림산방에 관한 해설사 선생님 말씀을 경청하는 회원님들
청죽(晴竹), 설죽(雪竹), 우죽(雨竹), 풍죽(風竹) 이제 구별 할 줄 아시죠? ㅎㅎㅎㅎ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영인본(影印本)
운림산방의 화맥(畵脈)은...
진도타워에서 이순신 동상을 배경으로..
진도타워에서 바라본 명량대첩 현장 -명량대첩은 이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였다.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 된 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수군을 동원해 일본 수군의 대함대에 맞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지만,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의 배였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일본의 군함 수는 「이충무공전서」에는 333척, 「징비록」에는 200여 척, 「명량대첩비」에는 500여 척, 「난중일기」에는 13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대략 23차례, 그는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 그중 가장 빛나는 전투가 바로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 정유재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명량해전이었다. 그는 명량에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던져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지켜냈다. 울돌목, 명량에 가면 해전에 앞서 고뇌하는 이순신(2m)과 해전을 지휘하는 이순신(30m)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확인해 보세요^^(자료집에서)
맛있는 점심시간...
남역원의 발전~을 위하여~~
진도의 봄 - 하나
진도의 봄- 둘
진도의 봄- 셋
진도의 봄 - 넷
진도의 봄 - 다섯!
선생님들! 이번에도 멋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