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호산의 정자, 풍영정
무등산 자락과 영산강변에는 100여 개가 넘는 정자가 있다. 나름의 경관과 사연을 안고 서 있지만, 단연 압권은 칠천 언덕의 풍영정이다. 동림동 쪽에서 하남대로를 따라 흑석사거리 쪽으로 가다보면 광신대교가 놓인 영산강이 나온다. 영산강에 걸린 광신대교의 오른쪽 벼랑 위인 광산구 신창동 853번지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김언거(1503∼1574)가 낙향한 후 지은 정자다
풍영정의 주인공 김언거는 아직 일반인에게는 낯선 인물이다. 그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이며 호는 칠계다. 그의 호 칠계는 영산강(극락강)이 풍영정 앞을 지날 때 부르던 이름이다. 가까이의 신창동 유적지에서 다량의 칠기 제품이 출토된 것을 보면 2000년 전부터 극락강 주변은 고도의 칠 제작능력을 갖춘 하이테크 기술을 지닌 사람들의 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중종 21년(1531), 문과에 급제한 뒤 옥당에 뽑혀 교리·응교·봉사시정 등의 내직을 거쳐 상주·연안 등의 군수를 지낸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승문원 판교(정3품)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본 그의 30여 년의 관직 생활은 순탄했지만, 정치적인 갈등은 컸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피곤했던 그가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낙향하여 꿈꿨던 삶은 그의 정자 이름 풍영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풍영의 뜻은 스승과 제자와의 격의 없는 대화 중 최고로 치는 대목인 논어 선진편에 나온다. 공자가 “만약 유력자가 너희를 인정해준다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비파를 타던 증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왈 막춘자 춘복기성 관자오육인 동자육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霧雩 詠而歸)”라고 대답한다. 이에, 스승인 공자가 무릎을 치며 칭찬한 답변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명과 시중들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 읊조리다가 돌아오는 그런 삶을 원합니다.” 증점은 당대의 권력과 호위호식을 버리고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며 사욕 없이 살고자하는 자신의 뜻을 표현했던 것이다. 자연을 벗 삼은 증점의 사욕 없는 삶은 중앙 정치의 파벌싸움에 지친 김언거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오늘 풍영정의 경관은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에 가리고 삐쭉삐쭉 올라 선 고층아파트에 막히면서 그 멋이 덜하지만, 당시는 대단했다. 십 여리에 펼쳐진 백사장과 넓은 들을 마주하고 있어 풍광이 뛰어날 뿐 아니라 멀리 무등산과 금성산, 영암의 월출산도 보인다. 당시의 풍광이 어떠했는지는 풍영정의 편액을 모은 한시 모음집인 풍영정시선에 보이는 다음 시 한편으로 족하다.
“풍영정에서 바라보이는 경관은 동으로는 무등 영봉, 남으로 금성산, 백리밖엔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이 바라보이고, 북녘 담양 용추산에서 발원하여 연중무휴 흐르는 칠천(극락강)이 풍영정 절벽 기슭을 휘감고 돌아, 앞으로 십 여리에 펼쳐진 백사장과 모래톱, 버드나무 숲 광활한 들녘인데……”
경관도 대단했지만 풍영정의 격을 한 층 더 높인 것은 정자 안에 걸린 70여 개의 편액들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 안동의 퇴계 이황이 써 보낸 아름다운 시문을 비롯, 김인후, 박광옥,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 이안눌, 권필 등 당대 최고봉들의 시문이 빼곡히 붙어있다. 그리고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현판인 ‘제일호산(第一湖山)’은 풍영정의 품격을 또 높여준다.
당시 풍영정 앞 여울엔 섶 다리가 놓여 있었고 마을 이름을 따 선창교라 불렀다. 영산강의 여느 다리들처럼 강물이 줄어드는 겨울철에는 섶 다리를 놓았지만, 강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에는 대신 나룻배를 부렸다. 선창교라 불린 섶 다리와 나룻배는 비아장을 잇는 통로였고, 장성과 임곡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 중 하나였다. 이 여울은 또한 영산강을 남북으로 이었다. 김언거와 절친이었던 서창 사람 회재 박광옥도 거룻배를 타고 풍영정에 자주 놀러오곤 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수심이 깊어지는 여름이면 소금을 가득 실은 소금배도 거뜬히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풍영정에 남은 또 하나의 전설이 소금장수와 장여인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조선시대 말기 쯤, 광주를 가로 지르는 극락강을 오르내리며 소금을 팔던 강원도 총각이 있었다. 해마다 늦여름에 와서 극락강 나루에서 소금을 싣고 다시 길을 떠나곤 했는데, 어느 해인가 가까운 마을에 사는 장 처녀와 눈이 맞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 둘은 견우· 직녀처럼 일 년에 한번 남의 눈을 피해서 짧게 만날 수밖에 없었지만 죽어도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할 만큼 절절한 사이였다. 하지만 양가집 규수와 뜨내기 소금장수와의 결합은 가당할 리 없었다. 그러던 중 무슨 까닭인지 3년 동안 소금장수 총각의 소식이 뚝 끊어진다. 장 처녀는 부모님의 영을 어기지 못하고 시집을 가고 만다. 그 소식을 듣지 못한 강원도 소금장수 총각이 4년 만에 소금배를 몰고 찾아온다. 그러나 그토록 오매불망 하던 사람은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총각은 한 서린 울음만 터트리다 돌아가고 만다. 이를 알게 된 장여인은 밤마다 언덕위의 정자에 올라 총각이 배를 저어 지나간 극락강을 바라보며 한숨과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이내 세상을 뜬다. 이후 그녀가 서 있던 그 자리에 한그루 괴목이 북쪽(강원도 쪽)을 향해 자라 강물을 덮었다고 한다. 장 처녀가 죽어 괴목이 되었다는 곳이 지금의 풍영정 자리다.
풍영정 여울이 나룻터의 기능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1922년, 광주~송정 간 철도가 놓이면서 섶 다리 대신 육중한 철교가 놓인다. 1934년에는 여울 상류에 산동교가, 그리고 1980년대에는 광신대교가 또 놓여 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섶 다리가 현대판 다리로 바뀌면서 정자의 풍광과 여유로움도 많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풍영정은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 살아가길 원했던 증점처럼, 광주인들의 힐링처다.
가늘고 삐딱한 편액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 읊조리겠다”는 공자의 제자 증점의 답변에서 취한 정자 이름 풍영정의 글자 중 ‘風(풍)’자가 다른 두 글자에 비해 다소 가늘고 삐딱하다. 풍자가 가늘고 삐딱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또 만든다.
김언거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자, 당시 임금이던 명종이 기뻐하며 전라도 무주 구천동의 기인 갈처사에게 현판 글씨를 받아 걸라고 명한다. 13번의 헛걸음 끝에 산간 오지의 담배 밭에서 갈처사를 겨우 만난다.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찾은 이유를 물은 갈처사는 즉석에서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풍영정이라는 정자 이름을 써준다. 그리고 가는 길에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다. 글씨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한 김언거는 잠시 쉬는 사이에 종이를 펴보고 만다. 그 순간 갑자기 돌풍이 불어 ‘풍’자가 날아가 버린다. 부득불 갈처사를 다시 찾아 날아가 버린 풍자를 써 주길 간청했지만, 갈처사는 크게 나무란 뒤 그의 제자 황처사를 소개해준다. 지금 풍영정 현판을 자세히 보면 ‘풍’자의 자획이 조금 가늘어 두 글자와 다르게 보인다.
글자가 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일화도 전한다. 당시 풍영정 뒤로 11채의 정자가 더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다른 정자에 불을 다 지르고 마지막으로 풍영정에 불을 던지려던 찰나, 현판에 새겨진 풍자가 오리로 변해 극락강 쪽으로 날아간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인 대장이 서둘러 불을 끄라고 명한다. 그래서 12개의 정자 중 풍영정 하나만 남는다. 또 그때 오리가 되어 날아가 버린 ‘풍’자를 후대에 다시 써 넣었기 때문에 다른 두 글자와 약간 달라졌다는 것이다. 두 일화 모두 그럴듯한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