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끌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담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 굽이 누구의 노래 입니까 ?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며
떨어지는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 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이
그칠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아버지의 기침 소리
이미애
내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 중에
아버지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농부였습니다.
이른 새벽 안개를 헤치고 이슬을 밟으며
논둑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골똘하고 성실하며 올곧고 정직했습1니다.
문득 멈춰 서서 한없이 먼곳을 응시할 때면
나는 그의 발가락 사이에서 뿌리가 돋아나
그대로 돌이 되고 나무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소리 중에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있습니다
흙물 누렇게 밴 손에 삽자루를 쥐고 돌아와
대문간에서 한번, 툇마루에서 한번,
툭 던지는 헛기침 소리는
말 없고 뚝뚝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당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짧고 굵은 신호였습니다.
사람의 뒷모습에 얼마나 많은 말이 쓰여 있는지
기침소리 하나에도 얼마나 깊은 사랑이 담길 수 있는지
알게 된 건 아버지가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신 뒤였습니다.
빛바랜 기억 창고 속 내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많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한밤중 비새는 지붕 위에 올라가
날이 하얗게 새도록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던 아버지
눈 먼 아들을 절망에서 건져 준 세상이 너무 고마워
'미담주머니'를 만들어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 둘 나눠주는 아버지
집 나간 아들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 슬프고도 찬란한 풍경 속 아버지
가족의 중심이며 뿌리이고
스승인 우리들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