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미가 할머니 집과 담을 같이 쓰지만 마당은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집이 경주네 집이다.
맨위에 큰누나,그 아래로 나보다 다섯살 위인 YH에 이어 HJ, KJ,여동생 YS이,JS가 있었다.
아버지는 처음엔 말구루마를 끌다가 지금의 대한통운 전신인 철도화물 하역원으로 다니셨다.
그 때 ‘마래보시’라고 불렀다. 그 아랫집 벽돌막에 사는 옥석이 친구의 아버지가 마래보시
다니셨는데 그 영향을 받아 들어가셨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니는 처음엔 방물장수를 하셨는데 소질이 없으셔서 다른 이웃들보다 수입이 떨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나중에는 무당이 되어 그 옆집 SG이 엄마와 짝을
이루어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굿을 해주고 돈을
벌었다.
굿을 하고 온 뒷날이면 굿에 썼던 떡과 닭고기를 싸와서 HJ형이나 KJ등 자녀들에게 줬고 가끔은 우리도 KJ를
통해 얻어 먹곤 했다.
어머니는 체격이 크신 편이었고 느긋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보통 체격인데 말씀 하시는 속도가 빨랐던 것 같다.농사는 밭 농사만 지었었다.
마당이 넓었는데 한 쪽 담장은 한길과 또 한쪽 담장은 벽돌공장과 경계를 이루었는데 벽돌공장과 경계를 이루는 담장에 화장실,퇴비창고,마구간으로 쓰이던 아랫채가 있었다.
뒤안은 실고 들어가는 길과 접하여 도로변에는 아카시아 나무로 울타리를 이루었으나 집터는
낮아 건물과 도로 턱 사이의 공간은 흡사 군인들의 방공호 같았다.이렇게 생긴 KJ네 집은
숨바꼭질 하기 좋았고 뒤안 아카시아 나무 틈바구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독립된 공간’을
이뤄주어 소꿉놀이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HJ는 성격이 괄괄하고 대가 쎄서 엄마한테 많이 얻어 맞았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KJ는 피부가 약간 검은 편이었고 자그마한 체구에 내성적이었는데
그 형이 자주 찝쩍거려서 아웅다웅 하는 것을 많이 봤다.지금 생각하면 그 밑의 여동생 YS이는
눈이 크고 예쁜 얼굴이었는데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자주 울면서 컷던 것 같다.
그 집도 큰아들인 YH형에게 많은 기대를 하였으나 부모의 기대만큼 잘 풀려주지 않은 것 같았고 무슨 사연이었는지 모르지만 공고 졸업후나이에 비해 매우 일찍 결혼을 했었다.
그 집과 이어진 곳은 높은 굴뚝이 있는 벽돌공장이었다.어른들은 대개 “벽돌막’이라 불렀다.
굴뚝 아래는 벽돌을 굽는 흙집(가마)이 서너 개 있었고 가끔 불을 때면 멀리서도 굴뚝으로 나오는 검은 연기를 볼 수 있었다.그 벽돌공장 터는 매우 넓었고 벽돌 쌓아두는 야적장과 벽돌 만드는
집이 있었으며 실고 들어가는 길은 벽돌공장에서 보면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신작로에서
공장으로 들어가는 문은 얼기설기 철조망으로 엮은 커다란 나무문 두 개로 돼 있었고 그 문은 항상 열려져 있었다.
들어가면서 오른 쪽은 공터였고 벽돌공장이
끝나는 곳은 축대를 높이 쌓아 어린 우리들은
오르내릴 수 없었고 울타리인지 경계표시인지 형식상으로 철조망이 있는 듯 없는 듯
쳐저 있었다.
문에서 한 참을 들어가면 실고로 들어가는 길 언덕 아래 자그마한 외딴 기와집이 나오는데 그곳은 나랑 같은 학년인 유일한 친구 옥석이네 집이다.서옥석.
집 앞에는 작은 샘이 하나 있었고 푸성귀를 가꿔먹을 수 있는 텃밭이 있었다.
옥석이 아버지는 ‘마래보시’라 불리는 철도하역 일을 하셨는데 가끔 분유 덩어리를 가져오셔서
옥석이를 통해 얻어 먹게 해 주셨다.당시 우유가루라고 하기도 했던 건조 우유 덩어리는
정말 고소했고 영양식으로서는 만점이었다.
주변에서는 항상 황토를 이겨 틀에 넣고
벽돌을 찍어 내서 응달에 말리는 기술자들이 일을 했고 한 쪽에서는 구운 벽돌을
산더미처럼 무더기 무더기로 쌓아 두었다.
또 정문으로는 말구루마가 황토를 싣고
부지런히 드나들고 어쩔 때는 도락구(트럭)가 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말이나 소가 끄는
구루마(수례)가 구운 벽돌을 싣고 나가기도
했다.
옥석이와 나,그리고 또래들은 해거름 때면 그곳에 모여 숨바꼭질도 하고 가끔은 가마 위에서
“누구 오줌이 멀리 나가나” 시합도 하면서 놀았다.그러나 벽돌공장 사람들은 그곳에 어린 애들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여 그 분들이 쉴 때만 가서 맘 놓고 놀 수 있었다.
가을엔 벽돌막 공터에 코스모스가 만발했고 고추잠자리들이 많았다.
옥석이 아버지는 얼굴이 좀 검은 편이었고 옥석이도 아버지를 닮아 얼굴은 잘생겼으나 피부는
검은 편이라 기억된다.옥석이 어머니는 지금 TV시대에 맞는 미인이셨다.
얼굴이 작고 쌍커풀 진 눈에 체구도 좀 작았던 것 같다.두어 살 위로 기억되는데 엄마를 똑 같이
닮은 경자라는 누나가 있었고 옥석이 아래로는 세 살 아래인 민섭이라는 동생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기억난다.그 식구는 몇 가구 안되지만 동네 끝자락에 살았고 더군다나 넓은 벽돌공장 귀퉁이
먼 곳에 살아서 동네사람들과 왕래는 많지 않았다.옥석이네는 이를 테면 벽돌공장을 지켜주는
대가로 그곳에서 사는 겪이었는데 4학년 때던가 5학년 때던가 아버지 직장과 가까운 순천역
근처인 덕연동에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갔다.옥석이가 이사를 간 후에도 꽤 먼 거리인 그곳까지
놀러가곤 했다. 지금은 다 헐렸겠지만 우명마을을 지나면 구릉지 야산이 나오는데 그 언덕 같은
산을 넘어 왼쪽으로 가면 순천 역의 수많은 기차가 내려다 보이고 맹말 부락이 건너다 보이는 곳에 옥석이 집이 있었다.커다란 아카시아와 도토리 나무가 많았는데 그 야산 끝자락에 옥석이네가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순천 철도역의 “기관고”가 보였다.
‘기관고’는 맞는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무료 목욕탕이었다.지금 생각하니 철도역에서
험한 일을 하시는 공무원들의 복지시설이었던 것 같다.당시만 해도 기차를 움직이는 것은 무연탄을 잘게 다진 조개탄이었기에 역 자체가 석탄 먼지로 뒤
덮여 있었고 일하시는 분들도 얼굴이 거뭇거뭇 했었다.겨울에 그 분들이 목욕을 하고나면 더운물 버리기가 아까와 동네 아이들이 목용하는 것을 묵인해 줬는데 이런 정보를 입수한 우리동네
아이들 몇몇이서 목욕을 하고 오곤 했다.당시엔 돈이 귀해 순천시내 목욕탕에서 돈 내고 목욕할
처지가 못되었기에 입소문을 듣고 공짜 목욕탕인 ‘기관고’로 가서 목욕을 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욕탕이라는 곳을 가 본 곳이 ‘기관고’였다.어른들이 목욕한 땟국물만
남은 물인데도 따뜻한 물에 전신을 담글 수 있는 목욕탕은 극락이었다.하지만 그 기관고 목욕탕
이용도 몇번 못갔다.무료로 목욕하러 오는 애들이 점점 많아지니까 그곳 근무자가 아예 근무자
외 목욕을 금지시켜 버렸다.
얘기가 옆으로 흘렀는데 벽돌막은 낮에는 우리들의 놀이터였지만 밤에는 무서운 곳으로
알려졌었다.그곳은 광양으로 가는 길로 치면 ‘높은 한 질’ 끝이요 실고 들어가는 길로 치면 모퉁이
후미진 곳이었기에 위치상으로도 좀 껄적지근 했다.
무엇보다 여순반란사건 때나 6.25때 그곳에서 학살을 많이 하여 귀신이 많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많았고 건너편 대석마을에서 이곳을 보면 도깨비 불이
아주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시에는가로등이 없던 때라 생목에서 순동교회
다니는 독실한 청년이 수요일 밤이면 실고 길로
가다가 벽돌막 울타리를 따라 푹꺼진 좁은 들길로
가게 되는데 무서워서 목청껏 찬송가를 부르며
지나다녔었다.
가로등 없는 밤 길은 어디든 무섭겠지만 특히 시골 길이나 후미진 모퉁이 길은 아무 생각없이
걸어도 무서울텐데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무서운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무서울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타지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안 할 것이다.
그러나 벽돌공장에 얽힌 갖가지 무서운 이야기들을 많이 알수록 저녁에 그곳을 지나기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높은한질’이라 함은 ‘오르막 한길’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 동네 이름이다.‘높은한질’에 집들은 모두 길 윗 쪽에 있었는데 방앗간 집은 길 아랫 쪽에
있었다.방앗간 집 터는 보통 우리 집터의 3배정도는 됐다.길 쪽으로 붙은 담장은 길과 사이에
도랑을 하나 두고 있었고 논과의 경계 담은 거의 썩어가는 판자 울타리와 사철나무나 탱자나무로된
울타리 나무로 이뤄져 있었다.논 쪽으로 붙어 있는 울타리 아래는 항상 습기가 많았기에 우리들은
낚시용 지렁이를 그 곳에서 팠다.
지렁이를 파다가 들키면 주인 정씨 어르신에게 혼이 났다.울타리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박하나무도 무성하게 자랐었다.
안 채는 대궐 같은 기와로 된 접집이었고 부엌 쪽에는 깊은
샘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왔다. 안 채는 커서 방앗간 쪽으로 난 작은 방은 세를 놓고 살았다.
마당 대부분을 텃밭으로 가꾸었는데 논 쪽 울타리 부근으로 당시 현대식으로 돼지우리가
다섯 칸 정도 있었다. 그 댁 큰아들이 축산업(?)으로 돈을 벌기 위해 그곳에다 돼지를 키웠다.
그 집에는 커다란 때까우가 개를 대신하여 집을 지켰다.때까우는 거위를 말한다.
그 때는 커다란 거위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방앗간 집에는 당시에는 귀했던 단감나무가 두 그루나 있어 9월부터 단 맛이 드는 감이 먹고 싶어
담장 안으로 보이는 감을 볼 때마다 침을 흘렸다.
이 댁은 본시 고흥이 고향이었고 그 곳에서 방앗간을 전담할 기술자인 은일이 아버지 송센을
데리고 와서 방아 일을 보게 했다.송센을 직공이라 불렀다.’송센’은 표준어로 ‘송씨’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정씨 어르신은 아들 넷에 고명딸 하나를 뒀는데 막내 아들이 나보다 5살 정도 위인 길우 형님이다.큰 아드님은 내가 어렸을 때 장가를 가셔서 전통 혼례를 치뤘던 것을 구경한 적이 있고 형수님은 호리호리 하며 키가 컷었고 새색시적 얼굴이 또렷이 기억난다.하지만 지금은 할머니가 되셨을
것이다.
그 큰 아드님은 우리들 어린이들에게 개구리를 잡아오면 감으로 바꿔주시는 거래를 했다.
개구리 열 마리에 단감 하나. 우리들은 단감을 먹기 위해 개구리를 열심히 잡아 날랐다.
큰 깡통에 끈을 달아 각설이처럼 들고 다니면서 대나무 끝을 여러 갈래로 갈라 중간에 쫄대를 대고 갈구리처럼 엮어서 납작하게 한 이른바 개구리채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개구리를 내리쳐도
상처가 나지 않도록 했다.상품 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낚싯줄에 호박꽃의 노란 조각을 달아 깊은
고랑에 있는 개구리를 낚기도 했다.
이렇게 잡은 개구리는 정씨 어르신 댁으로 집하되어 감과 바꿔준 뒤 삶아서 돼지 사료로 쓰였다.
삶은 개구리를 먹는 돼지는 성장속도가 무척 빨랐다.당시엔 사료라는 것이 없어 보통 집집마다 한 마리
정도씩 키우면서 설걷이 후 나오는 구정물을 멕여
키웠다. 그릇에 붙어 있던 밥알 몇 톨이라도
가축 사료로 써서 완벽한 자연 순환의 섭리에 부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정물에 밥알이 몇 톨이나 있었겠는가? 대신 나락(벼) 방아를 찧고 나면 죽제라는
고운 쌀겨가 나오는데 이 가루를 주된 먹이로 했다.보리나 밀을 찧을 때도 껍질이 나오게 되고
이는 모두 소나 돼지,닭등 가축의 사료로 썼었다.이런 식물성 사료만을 먹고 자라는 돼지는 항상
배가 고파 꿀꿀대며 울었고 성장속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구리를 먹은 돼지는
살이 피둥피둥 찌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컷기에 방앗간 집 큰 아들은 우리들의 노동력을 그렇게
활용했다.
우리 이웃들은 가끔 물을 길르러 그 집을 들락거려야 했으나 항상 얼굴이 붉으신 정씨 어르신은
인상을 쓰고 계셔서 가기가 싫었다.당시 어른들은 모두가 얼굴이 굳어 있었고 이웃인 어린애들에게 엄숙한 표정으로 근엄하게 대했기에 다정다감함을 느끼지 못했다.애들에게 살갑게 대해줬던
어른은 하꼬방에 살면서 장날 동냥으로 살아가는 학벌 좋은 거지 아저씨 뿐이었다.
생목 동네까지 그곳에서 방아를 찌어 갔고 설 명절이면 떡국가래를 뽑기 위해 줄을 서야 했으니
그 집은 분명 동네 이웃들과 격이 다른 부자였다.
보리 수확 철에는 방앗간 앞뜰엔 항상 보리가시와 보릿대 찌꺼기가 날렸으며 기계소리가 요란했다.방앗간 끝에는 직공이 거처하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변전소가 확장되면서 그 앞이 광장이 되자
가게를 볼 수 있게 고쳐 세를 놓았는데 그곳은 변전소 들어가는 길과 물려 있어 광양행 버스정류장 역할도 했다.
방앗간 집 아주머니는 고흥 사투리가 심했는데 까칠했던 아저씨와는 달리 맘씨가 좋으시고
동네 아주머니들과도 잘 어울리셨다.사실 재력으로 보나 아들 많은 것으로 보나 동네 유지임에는 틀림 없었다.아들들의 인물도 체격도 다 좋았다.
둘 째 아들은 연합통신 기자였고 셋째 아들이 나이로는 한두 살 더 먹었지만 형님과 동창이었다.
아들들이 인물도 좋았지만 어머니를 닮아 성격도 좋아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능력이 있어 우리 부모님들이 좋아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