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987회 토론, 시를 이야기하는 까닭(이진흥)
‘···우리가 모여서 시를 얘기하는 것은 죽어 가는 사물에 미토스의 언어를 부어 생명으로 살려내기 위한 것이지요.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가 물빛이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시를 이야기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 <2023년도, 물빛 40년을 돌아보며 중에서 / 이진흥>
일시: 2025년 4월 22일(화), 19:00~21:00
T전화 그룹 통화 참석: 이진흥 선생님, 고미현, 곽미숙, 김미숙, 김용순, 박수하, 박유경, 배정향, 이규석, 이자, 전영숙, 황석주, 박경화, 강명자(1회 참관)
토론 작품: (작품 평은 ‘작품 토론방’ 참고)
1. 김미숙 · 병원 가는 길에
2. 박유경 · 꽃을 두고 오다
3. 이규석 · 봄 마중
4. 어질어질 사월 · 곽미숙
5. 사월의 함박눈 · 전영숙
6. 그 사랑의 품, 울컥한 · 이자
7. 빗살무늬 토기장이 · 박수하
8. 다시 서점에 서서 · 배정향
9. 물그림자 · 박경화
987회 토론작 중에 ‘꽃을 두고 오다’의 제목이 눈에 띄었고, 작품도 신선했다. 찜질방에서 읽는 시집, 두고 온 시집을 꽃으로 표현하는 것 등이 재미있었다. 겉모습의 일상을 그대로 표현한 아쉬움이 조금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화자의 속마음은 어렴풋이 전해졌다. 겉모습을 벗겨내는 것, 그것이 시를 보여주는 시작점이 아닐까 싶었다.
제목에서 김소연 시인의 ‘꽃을 두고 오기’가 떠올라 『촉진하는 밤』 시집을 다시 읽어보았다. 내 시를 토론 중에 선생님께서 떠올랐다고 하신 신동집의 ‘빈 콜라병’도 검색하여 읽어보며, 세계는 하나라는 말처럼 어쩌면 시도 제각각으로 이루어진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퍼즐처럼.
제목이나 내용 등은 다르지만 그 속의 상상, 아름다움, 포착, 주제 등에서 흐르는 서정이나 서사 등을 통해 시인들이 하나의(한 편의 시) 퍼즐로 시의 세계(?)를 완성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시, 하나의 퍼즐이 완성되려면 어마어마한 세월이 필요하고 그 끝을 볼 수 있는 이도 없겠지만 그 퍼즐 조각 같은 한 편씩의 시 또한 이미 완성된 하나의 시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한 조각, 한 편의 시의 완성도를 위해 우리는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
꽃을 두고 오기
김소연
마지막 숙소에 도착합니다
여행 가방을 열어 아껴온 햇반을 끓는 물에 담급니다
아껴온 도시락김을 식탁 위에 꺼냅니다
젖은 신발과 양말을 라디에이터에 걸쳐둡니다
잠들 생각이 없었는데 잠이 들었습니다 창턱에 앉아서 창 바깥의 이웃집을 바라보던 자세 그대로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밤새 다투던 이웃집 커플에게도 아침이 찾아왔겠지요 그들이 어떻게 화해했는지 그 끝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함박눈이 밤새 내려 이 집과 저 집 사이를 하얗게 가두고 말았군요
담장 바깥 렌터카는 눈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문을 열면 어느 정도 또 문을 닫으면 어느 정도
눈은 후드득 떨어지고
와이퍼가 또 반원으로 된 시야를 만들고
그렇게 출발하면 됩니다
당신은 잘돼야 해요 당신이 잘돼야 해요
누군가의 응원이 미행하듯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압니다
고마우나 달갑지 않은, 달지만 뱉고 싶은, 소중하되 떨치고 싶은
그런 인사말 같은 것들이
나를 추월해서 앞서가버릴 때까지
속도를 늦춥니다
우산을 쓰는 것도 힘이 들어 눈보라를 다 맞고 도착한 어젯밤에는 외투를 벗고 목도리를 풀고 장갑과 속옷을 빨아두고 뜨거운 욕조 물에 몸을 담가보았습니다 손이 둥둥 떠오를 때에 반지마저 벗었을 때에 수증기처럼 천장에 둥둥 떠올라보았습니다 욕실 천창을 열고
더 멀리까지 가서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가서
이 꽃다발을
두고 오기
꽃다발을 꽃다발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둡니다
이렇게 오래 걸려 찾아왔는데
콧물이 코끝에서 얼고 있는데
그런 곳에도
매일 아침 출근을 하는 가이드가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 묘비를 찾아오고 있다 하네요
· 김소연: 1993년 『현대시사상』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 작품 활동.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J에게』 『촉진하는 밤』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을 수상.
*
빈 콜라병
신동집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빈 콜라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병은 빈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하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이
빈 콜라병을 다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