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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방주 패턴>의 줄거리:
보편적인 신앙상식 중 그동안 우리가 오해한 듯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노아 방주에 근거해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의 방주라면 계속해서 그 안으로 사람을 승선토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교회라는 조직 안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해 안달하는 지금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에서는 사람이 다 내리게 됩니다. 결국 방주의 목적은 태우려함이 아니라 내리게 함에 있었습니다. 방주에 얽힌 진실을 새삼 밝혀봅니다.
방주 패턴
(창6:9~22)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방주 패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방주 패턴’
패턴이라고 하면 어떤 양식, 방식, 틀, 이런 의미가 있잖아요.
방주 패턴이라고 했으니 노아의 방주가 패턴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노아홍수 때의 방주와 더불어 있었던 이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가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주패턴이라고 제목을 정한 거예요.
한 일주일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동안 소식이 끊겨졌던 선배목사님이 계십니다.
근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제가 뒤늦게 신학교를 들어가서 학부 1학년생으로 있을 때, 이미 역사신학 파트에서 조교를 하고 계시던 분입니다.
조교로 계시는 분들 중에서 그분하고 구약신학 파트에서 조교를 하시던 분, 그 두 분을 제가 어지간히 괴롭혔어요.
제가 학회 일을 할 때 신학학회에서 내는 학회지의 원고를 써달라, 아니면 개인적으로 가서 리포트 작성하는 법부터 신학 책을 읽으면서 요약을 잘 할 수 있는 방법 등, 하여간 제가 귀찮게도 굴었고, 또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십니다.
근데 독일 유학 갔을 때도 먼저 가계시면서 독일 유학에 가장 필요한 지침을 제게 알려주시고, 제 유학생활에 크게 도움을 주시기도 한 선배목사님인데, 또 밴쿠버에서 목회할 때도 그 자녀분들이 밴쿠버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종종 만나고 그랬다가 한국에 온 후로 그만 소식이 끊겨졌습니다.
그랬다가 저희 방송을 듣는 어느 목사님이 강릉을 찾아오셔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분이 그 선배목사님과 한 달에 한 번씩 독서클럽으로 모이신다는 거예요, 신앙서적을 가지고 토론하시고 하는 독서클럽의 리더를 하고 계신다고 해서 연락이 됐는데, 그렇게 다시 연락한 뒤로 얼마 전 다시 전화를 주셨어요.
그분이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들 안에 있는 많은 분쟁들을 일반 법정에 갖고 나가서 해결한다는 것도 민망하고 그러니까, 이 문제를 어떡하면 좋겠는가 해가지고 법조계의 전문인들, 거기에는 부총장 하신 분도 계시고 법대 교수님들도 여러분 계시고, 또 교계에서 관심이 있는 분들, 그렇게 모여서 학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학회와 관련돼서 연락을 주셔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그거 하시지 마시죠!’ 그랬더니 깜짝 놀라셔서 왜 그러냐고 물으세요.
이제 이 개신교의 상황은 잘잘못을 가려서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져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볼 때 잘잘못이 있고 하겠지만, 도토리 키 재기이고, 결국은 넓게 흐르는 하수도에 서서 깨끗하게 한다고 왼쪽 물을 떠가지고 오른쪽에 붓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예 판을 새로 깔고 새로 시작해야 된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시면서 멈칫 하시고는 한참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생각이 정리가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여간 저는 그 선배목사님을 저를 찾아오는 목사님들께 기회가 있으면 한번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평생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그분처럼 공부 잘하시는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서울대를 나오셨는데, 서울대 나온 사람 여럿 봤지만 다 그분처럼 공부를 잘하는 분은 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거의 천재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얘기와 관계 지어서 방주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 근거해서 자꾸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고들 얘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렇게 듣고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근데 아니, 가만히 본문을 보니까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닌 거예요.
특히 여기서 말하는 교회, 여러분이 다니시는 local church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닙니다.
교회를 비하하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방주와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의 방주가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비유가 잘못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게, 우리가 왜 그동안 이걸 못 봤는지 몰라요, 구원의 방주라면 계속해서 구원의 방주인 배 안으로 사람들을 끄집어 올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 ~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구원의 방주라면, 지금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을 계속해서 끄집어 올려내야 되는 겁니다.
그건 마치 교회가 어떡하든지 교인의 수를 늘리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죠.
근데 본문에 나오는 구원의 방주는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 속에서 그 방주 존재의 목적을 살펴보면 전혀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그 방주 안에 계속해서 사람을 새로 끌어들이려고 만든 배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오히려 방주를 만든 목적은 사람들을 많이많이 끌어서 승선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을 내보내시려고 방주를 만드신 거예요.
방주 안으로 들여보냈다가 그 방주로부터 내보내시려고.
그러면 내보내시고 뭘 하시려고 그랬던 겁니까?
구원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시려고 그랬던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사람들을 많이 구원하라고 만든 방주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새로 시작할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가 그 사람들을 방주로부터 내보내기 위해서 방주가 만들어진 거라는 얘깁니다.
이걸 자꾸 우리가 구원의 방주라고 오해해버렸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나바론의 요새’라는 오래 된 영화가 있습니다.
오래 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독일군의 어마어마한 거포 두 정이 절벽 틈바구니의 요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 해안지역에 상륙해서 점령을 해야 되는데, 그것 때문에 도저히 어떻게 해볼 길이 없어요.
비행기로 아무리 공습을 해도 그 바윗덩어리 틈에 있는 나바론 요새를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배에는 실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이 거포의 사정거리가 엄청나게 멀기 때문에 함포사격으로는 그 해안에 닿지도 않아요.
닿기도 전에 이미 그 대포가 나와서 배들이 그 앞으로 지나다닐 수도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특공대가 보트를 타고 몰래 잠입을 합니다.
이때 이 보트가 구원의 방주입니까?
아군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탄 사람들이 이용하는 배지, 구원의 방주가 아니죠.
그러므로 노아의 방주는 사람들을 많이 승선시키기 위한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게 되는 사람들을 태운 특공대의 고무보트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얘기가 그렇게나 중요한가?
무지무지하게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패턴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패턴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향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방주패턴이.
그러니까 구원의 방주라고 하면, 내가 그 안에 올라타면 홍수가 일어나는데 ‘야, 구사일생으로 내가 목숨을 건졌구나!’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배가 아닌 거예요, 노아의 방주는.
그러면 무슨 마음을 갖는 겁니까?
같이 살던 사람이 다 지금 홍수 때문에 죽게 된 이 상황에서 마음을 두기보다는, 지금 방주에 탄 노아의 여덟 식구는 뭘 생각해야 되나 하면, ‘아, 이 홍수가 끝나고 이제 새롭게 우리로부터 역사가 써지기 시작하는데…’라는 생각을 해야 될 사람들인 겁니다.
‘내가 구원 받았구나’가 아니라 ‘이제 내가 무엇을 하나님에 의해서 하게 될까?’를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완전히 다른 거죠.
그러니까 신앙의 선배들이 조직으로서 교회를 노아의 방주와 연결시킨 것은 잘한 것 같아요.
그런데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특공대의 방주였다는 거예요, 특공대의.
새롭게 시작하는 시조들이 타고 있는 방주였다는 거죠,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시조들.
그러면 이게 어떻게 패턴이 된다는 겁니까?
보세요, 한번.
노아가 믿음의 사람이고 그 다음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6장에서부터 쭉 진행되다가 12장에 아브라함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보겠습니다만, 홍수가 끝나고 이 땅에 다시 정착하면서 셈과 함과 야벳,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다시 번성해나갑니다.
그래서 다시금 일이 터지는데, 노아 홍수 때와 똑같은 일이 터집니다.
노아 홍수라는 사건은 왜 일어나게 됐습니까?
아벨이 죽고 나서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셋이라는 아들을 아담에게 주시잖아요.
그 셋의 계열을 따르는 사람 중에 에노스라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 에노스라는 사람으로 대표되는 셋 계열의 사람들의 특징이 뭐였습니까?
생래적인 죄인 됨을 깨달은 자들이에요.
자아의식이 그렇게 형성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그런 겁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 속에 죄가 들어있고, 내가 말하는 것 속에 죄가 들어있고, 내가 행동하려고 의도하고 계획하고 소원하는 것들 속에 다 죄가 들어있으니까, 이건 안 된다. 아벨의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물과 나를 동일시해서 나를 죽여야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건 내 인격 내 마음이 육체에 종속된 겁니다.
예를 들면 육체가 된 사장님과 영적 사장님이 계신 거예요.
육체가 된 사장님은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육체가 그 상황들을 접수해 마음이 곧바로 반응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 이게 육체가 된 사장님이에요.
그러면 영적 사장님은 어떤 사장님입니까?
육체로 느껴지는 상황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해 반응하므로 회사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이런 상황이면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묻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반응할 때 나타나는 내 판단력과 내 생각과 내 의도와 계획 속에는 죄가 스며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셋의 계열이 진행돼오다가 그만 육체가 돼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육체가 된 이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홍수로 다 멸절하시고 노아의 가족만이 영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할 자들을 방주에 태우신 거예요.
자, 그러면 이제 아브라함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셋의 계열들이 육체가 돼버려서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는데, 그 노아의 자손들이 번성해나가면서 바벨 탑 사건에서 보여 지듯이 또 육체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흩어버리시고 그 다음에 나타난 일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새로 시작합니다.
이게 방주패턴이라는 거예요.
분명히 노아가 선택받은 사람이었고, 그의 자손들이 번성해나가는데, 그들이 또 육체가 돼버리니까, 마치 셋의 계열의 사람들이 육체가 돼버린 것처럼, 또 새롭게 방주에 태운 소수의 한 가정을 통해서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번성해나갔어요. 아브라함과 이삭, 그 다음 야곱의 열두 지파가 번성해서 이스라엘을 이루어냈습니다.
근데 또 예수님 때가 되니까 그들이 또 육체가 돼버렸어요.
심지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같은 지도자들조차도 돈이 좋아서 돈 벌 수 있는 방향으로 종교계를 이끌어갔습니다, 명성을 유지하려고 종교생활을 영위해 갑니다, 육체가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또 어떻게 하십니까?
유대교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모아서 다시 또 시작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로마로 오면서 로마가톨릭교회가 되고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로마가톨릭교회가 번성하다보니까 교황들이 면죄부를 팔아먹기 시작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십자가복음사건에서 죄 사함이 일어나는 것이지, 어떻게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산다고 죄 사함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일을 한 거예요.
그래서 루터와 캘빈, 쯔빙글리 같은 소수의 사람들로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자, 여러분! 그래서 개신교가 시작된 거예요.
근데 지금 개신교가 어떻습니까?
얼마 전에 보니까 학자들이 모여서 종교개혁 기념 세미나를 열었더라고요.
그분들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이대로 갔다가는 예수님 때의 유대교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전락해버리고 마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됐지 않습니까?
목사님들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냉정하게 따져서 지금 이 기독교계가 제대로 돼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또 방주의 패턴이 나타나야 되는 거예요.
빼먹었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영국이 성공회로 인해 신앙의 자유가 억압될 때, 메이플라워호 타고 108명이 나갑니다, 이건 구원의 방주가 아니에요.
신대륙에서 새롭게 신앙의 역사를 써나갈 특공대들이 타고 있는 방주지요.
방주의 뜻이 이거라는 거예요.
새롭게 와서 미국대륙이 만들어진 겁니다, 근데 미국이 지금 또 어떻게 됐습니까?
육체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 구원의 역사 속에서 방주 패턴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아까 제가 선배목사님께 드린 말씀이 그거였어요.
지금 어느 교회에 문제가 있고 분쟁이 있는데, 그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해서 이게 옳고 저게 그르다고 얘기해준다고 해서 개신교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질서를 잡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영적인 본래의 위치로 회복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랬으면 하나님께서 노아 때 홍수로 멸절시키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들을 바꾸지.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라 성경이 말해주는 패턴이에요, 패턴, 반복되고 있는 패턴입니다.
결국 이 개신교가 한국에서 시작되든 미국에서 시작되든, 아니면 독일에서 시작되든, 어디서든 간에 또 다시 방주의 패턴이 실현돼야 될 때가 됐다고 저는 보는 거예요.
있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 때 유대교의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기득권자들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되는 구조 위에 올라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절대로 그걸 놓지 않습니다.
구조 위에 올라타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십자가복음의 생명력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지금 제가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무엇을?
방주 패턴을.
그러면 방주 패턴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이 조직으로서의 교회라고 하는 데는 방주가 돼야 되요. 맞아요, 방주가 돼야 됩니다.
근데 그 방주가 어떤 방주입니까?
그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직장으로 나가면 그 직장이라고 하는 새로운 판에서 십자가복음을 생활화함으로써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라고 하는 곳은 사람을 끌어 모으는 곳이 아니라, 자꾸 사람을 늘리려고 하는 곳이 아니라, 특공대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교회는 뭡니까?
이것은 조직으로서의 이 땅의 교회, 특공대들이 타고 있는 방주라서 계속해서 새로 시작해야 되는 책임을 부여받은 자들이고, 그러므로 가정과 직장 어딜 가서든지 간에 하나님과 동행함을 새롭게 시작해야 되는 사람들이고, 진짜 교회는 뭡니까?
인간의 육체가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게 아니고, 인간의 마음이 모인 곳이 교회인데, 어디에 모입니까?
십자가 너머로부터 승천에 이르는 공간, 주님께서만 만들어놓으신 그 공간, 부활하고 승천하셨기 때문에 공중에 예수님의 그 공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제가 언젠가 ‘제로 랜드’라고 그랬어요, 왜 제로 랜드라고 그랬습니까?
세상에 대해 죽는 것, 이걸 제로로 비유하자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해야 부활을 하는데,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는 게 세상에 대해 죽는 것, 세상에 대해서 내 생각이 제로 되는 것이고 내 소원이 제로 되는 것이고, 세상에서 주어지고 육체로 만나지는 상황에 대한 내 판단이 제로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어버리면 마음이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 너머의 부활과 승천의 사이의 공간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그 공간이 어떤 공간입니까? 마음에 성령이 임하는 공간이에요.
마음이 그곳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아버지와 연합함으로써 몸이 이 땅에서 하나님아버지와 동행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큰 예배당 지어서 많이 모으려고 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모음이라고 하는 참 의미는 예수님 십자가 너머에서부터 하늘나라 보좌까지 이르는 공중의 그 공간에 마음이 모이고, 그 마음이 그 공간에 모이는 자들이 교회를 이루는 겁니다.
그러면 이 지상의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특공대 방주인 거예요.
노아의 식구 여덟 명으로 시작해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모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계속해서 지금 있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새롭게 시작되느냐를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어떻게 이 장소에 사람을 모을 것이냐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장소에 모으려고 생각하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비즈니스가 돼버렸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육체가 돼버렸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개신교 전체가 세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졌어요.
왜냐?
직장에서 가정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육체가 만나는 상황과 마음의 만남을 끊어내고 밀어내지 않는 한, 마음은 세상에 먹혀서 육체가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그 공간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주체성이 임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주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한 사람이 세상에 먹힌 채로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가 또 세상에 먹히는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 안과 교회 밖 세상이 구분이 없어졌어요.
하나나 다른 게 있습니까?
교계에서의 성공과 사회에서의 성공이 똑같은 거잖아요.
물건 많이 팔면 되는 것이고, 교회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게 성공이고.
방주 패턴이 반복되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되는가 틀을 이미 창세기 6장에서 제공하고 있는 거예요.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십자가복음을 주춧돌로 삼고 있는 교회는 새로 시작되어야 됩니다.
지금의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시대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바벨 탑 시절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셋의 계열 사람들의 육체가 된 상태와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을 갖고 묶여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그 사람들의 기득권 놀음을 놔두고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 되지도 못하고 복음은 묻혀버리고 말 것이에요.
방주 패턴, 이거 우리 시대에 또 반복되어야 됩니다.
홍수만 없을 뿐이지 방주의 패턴을 계속되고 있다는 것, 꼭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시대에도 노아의 가족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노아의 가족들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의 시작을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차피 함께하지 않고 새롭게 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는 것이라면, 감사하고 기쁨으로 노아의 가족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