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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백일장 산문부 입상작품
장원
〈냄새〉
혜원여자고등학교 3학년
백지윤
지난 겨울, 나는 학교에서 하는 보충수업을 듣지 않았다. 타당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다만 공부가 싫었을 뿐이고 일상이 싫었을 뿐이다.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둔 내게 방학이란 건 무의미 하다고 부모님과 선생님은 말했으나 나는 반항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집―학교―학원’ 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처음 3일 동안은 친구 집에서 시간을 죽였는데 며칠이 지나자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친구 집도 갈 수 없게 되니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날이라도 따뜻하면 좋으련만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학교 가는 시간에 맞추어 집에서 나오면 아침 7시였다. 이른 아침의 바람은 날카로웠고 해는 느리게 떠올랐다. 그 시간에 문을 여는 곳이라고는 편의점밖에 없는데, 편의점에서 오후 다섯 시까지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날도 무섭게 추웠다. 눈까지 온 다음날이라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나와 폐지를 줍는 노인 한명 뿐이었다. 코트 깃을 더 여미고 하염없이 걸었다. 2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손가락부터 잔등까지 얼어버려 감각조차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전철역에라도 들어가서 몸을 녹일까 했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어디서 불어치는지 지하에도 바람이 불었다. 계속 걷기라도 해야 덜 추울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담뱃불을 지펴 불을 쬐어 보기도 했다. 성냥팔이 소녀가 느꼈다던 따뜻함은 거짓말 이었다고 생각하며 필터만 남은 담배꽁초를 하수구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어디 가서든 9시간을 더 죽여야만 했다. 그 때,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종합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은 따뜻할 거란 생각에 무조건 병원으로 갔다.
병원 안은 훈훈했다. 종합병원답게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렸다. 나 하나쯤은 어디 구석에 가서 잠을 청한다고 해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참고서와 연습장, 필통이 전부였다. 천 원 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카페에도 갈 수 없었다.
몸을 녹이고 나니 한 시간을 넘게 걸어다닌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을 찾기 전에 의자에 앉아 좀 쉬기로 했다.
몸이 조금 편해지자 병원의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병원은 몸이 아픈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아플 때에만 병원을 찾곤 했고. 그래서 병원은 언제나 시끄럽고 정신없고 급박하기만 한가보다,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병원을 찾은 내게 그 곳의 풍경도 ‘묘한 일상’으로 다가왔다. 병원 또한 무료하고 무료하게 돌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생生과 사死가 몇 번씩 오가곤 했다. 잠깐 의자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얼굴이 시퍼레지고 숨을 헉헉거리며 부모의 등에 업힌 채로 오는 아이도 있었고, 퇴원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활짝 웃으며 병원을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진료를 접수받는 원무과 직원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에겐 생生과 사死를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얼마간 더 앉아 있다가 꾸벅 졸고 말았다. 눈을 떠 보니 입가에 침이 흥건했다. 큰 병원이니 어딘가에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사람도 없을 것 같고,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다.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철문 하나를 통과해야 했다. 내가 잘못 들어왔나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기까지 했다. 눅눅한 공기가 떠 다니는 가운데, 나는 핸드폰의 작은 불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길이겠거니 했다. 지하 1층과 가까워질수록 눅눅함은 더해 갔다. 그리고 문 틈으로는 자욱한 향 냄새가 새어 나왔다.
그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서 찾을 일이 없었던 곳이기에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문 틈 사이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얼핏 보아도 그 안은 침침했다. 눅눅한 향내가 이곳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남자들은 무덤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향연보다 지독하거나 공허한 담배연기를 한 자락, 한 자락씩 풀어내고 있었다. 손님들은 표정을 부조한 듯했고, 밥상을 내어 준 후에 흑백 영정사진 앞에 모여 앉은 여자들은 밋밋한 곡소리를 냈다. 침침한 형광등은 죽음 같은 냄새를 더욱 농밀하게 하여 산 자들이 조금이나마 죽음에 가깝게 하지만 그들에게 죽음이란 그저 텅 비어 있는, 타인의 빈소 같은 것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맡은 죽음의 냄새는 일상이었고, 무료했으며, 때문에 무취에 가까웠다. 흑백 영정사진 근처를 맴돌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런 것.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느끼기를 바랐건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이미 죽음까지도 일상인 것을, 향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을.
내가 맡은 냄새는 지하에 가득 밴 곰팡이의 냄새도 아니고, 눅눅한 향내도 아니고 장례식장 어딘가에 놓인 탈취제의 냄새도 아니었다. 내가 맡은 것은 일상의 무취였다.
차상
〈뒷모습〉
대광여고
장정윤
나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의 감각에 의지하여 이 세계의 것들을 느낀다. 그것은 신의 뒷모습을 보는 삶이다. 이 세계를 창조한 혹은 이 세계 태초의 모습의 뒷모습은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작열하는 태양밑의 뜨거움과 같은 무지막지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간다. 내가 신의 앞 모습, 그 완전한 태의 형상은 보지 못하는 그저 신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는 채로 존재하는 것에 슬픔의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죽어버릴까’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 순간 소리가 난다. 문이 열리는 소리이다. 하양가운의 의사가 웃음 짓고 나와 마주 앉는다. 그리고 나의 상태를 기록할 체크보드를 꺼낸다.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인간의 한계를 느껴 슬퍼요.”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나 의사는 또 ‘상태 안좋음’에 체크를 했겠지. 의사의 안경 너머로 실망한 빛이 역력하다. 그것이 보기 싫다. “뭔가 필요한 것 없습니까?” “신의 앞모습이요.” 의사는 또 뭐라고 체크보드에 끄적였다. “산책이라도 할까요? 날씨가 아주 좋거든요.” 의사는 가짜 웃음을 짓는다. 이 새로 온 의사는 이렇게 가식이 많다. 나의 생각은, 마음은, 이 뒷모습만은 보는 비참함과 허무감―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다 이해한다는 듯이 웃는 것이다. 그것도 너무 싫다. 그러나 나는 오늘을 기다려왔다. 산책은 매주 수요일 나는 바보가 아니고 이 병원에 감금되기 전 평범한 사회인이었다. 이런 규칙쯤은 다 알 수 있다. 오늘 산책을 하다가 오른쪽 담버랑을 넘어 ○○생명 빌딩 옥상으로 가, 나는 뛰어내릴 것이다. 신의 뒷모습만은 보는 짓 때위는 그만두고 싶었다. “좋아요 나가요.” 의사는 기뻐한다. 나는 속으로 비웃으면서 그를 따라 나섰다. “봄은 참 아름다워요. 그렇죠?” 담벼랑 쪽에 사람이 없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초조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다 신의 뒷모습일 뿐이에요.” 세계의 일부밖에 볼 수 없는 한계로 감탄하는 의사녀석이 한심했다. 여느때와 같이 또 다른 것에 감탄하며 나에게 친한척을 하며 수다를 떨 줄 알았는데, 별안간 의사는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 녀석이 다시 말을 꺼냈다. “왜 그렇게 비관적이죠 당신은?” 그가 나를 만난 이래로 처음으로 심각한 표정을 해 물어봤다. “비관적? 당신처럼 한계에 대해 무심하고 세계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즐거운 척 가식하며 한심하게 살아가는 게 아닌가?” 화가났다. 또 주제없이 나서고 있다.그런데 화를 내는 것은 그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위 진리! 당신 말대로 진리를 알아내지 못해 슬프다면 그 한계를 안다면,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라도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는 격분했다. “그건 합리화야.”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 때 담벼락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의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 그저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예전의 저와 같으니까요.” 막 오른쪽으로 내달으려고 하는데 의사의 말이 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말을 했다.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네. 한때 우주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죠. 너무나 광할한 그 우주 안에서 이 세계의 뒷모습만을 보고 살아가는 자신이 너무나 미개하게 느껴져 살고싶지 않을 정도였어요. 게다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으니까.” 가슴이 뛰어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멀리 잘 보이지도 않는 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옆에 한 줄기의 빛이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양 갈래에서 격심한 갈등을 느끼다. 결국 계획했던 대로 담벼락을 향해 뛰었다. 뒤에서 고함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옥상에 다다랐다. 거친 자신의 숨소리와 눈 앞의 하늘과 그리고 자신이 딛고 서있는 옥상의 바닥만이 함께있다. 모두 뒷보습 뿐인, 자체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들만이 내가 느낄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죽어야만 한다. 이제까지 자신을 수없이 괴롭혀왔던 일들이 생각난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던 아버지, 그리고 도망가 버린 어머니 뒤에서 흉보기로 재밌어라하는 학창시철 급우들, 아버지의 빚을 갚으라 하고 싶지도 않은 직장생활을 해야 했던 성인기. 그것들은 자신을 옥죄고 있던 신의 뒷모습. 나는 이제 자유로워지려한다. 한 발을 공중에 내딘다. 그런데 그 순간 아마 의사 녀석이 주었던 빛 한줄기가 나머지 한 쪽 발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놔.” 하지만 소용없다. 그 때였다. 뒤에서 옥상 문이 열리고 의사 놈이 걸어오고 있다. 헐떡거리고 있다. “헉헉, 죽지 마요.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또 하나 찾아서 이렇게 기쁜데.”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주저앉았다. 그 순간 신이 뒤돌아보았다. 그 앞 얼굴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나는 그날 진리를 보았다. 그 날로부터 내 주위에 빛이 생겼다. 신은 내게 뒷보습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았기에 내가 뒷모습밖에 바라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의사는 내 고개를 돌려주었고 그가 존재했기에 나는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신이 나를 바라봐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봐 주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를 바라봐 주었다. “고마워요.” 나는 울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그의 웃음이 가식이 아닌 것을 나 또한 바라봐주었다. 더 이상 바라볼 뒷모습 따위는 없고 나와 그와 그리고 앞으로 내가 바라보아야 할 앞모습만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다시 올려다본 하늘에서 모든 것들이 얼굴을 내놓고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차상
〈뒷모습〉
한영고등학교 3학년
이완희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찾아왔다.
5월이 되면 광주시민들의 가슴 깊은 곳에선 저릿한 아픔이 밀려온다. 28년전 그날의 아픔.
지난해엔 광주 5․18 민주항쟁을 소재로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700만 관객을 넘어서며 큰 이슈가 되었다. 영화가 뜨면 뜰수록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관심도 뜨거워졌다.
영화가 개봉되던 날. 학교에선 선생님들께서 광주항쟁 이야기를 하시느라 하루종일 수업이 되질 않았다. 우리 지역은 광주와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 광주출신 선생님들이 많은 편이다. 당시 대학생이셨던 문학 선생님. 고등학생이셨던 일본어 선생님.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들 광주항쟁의 산 증인들이셨다.
선생님들께서는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잔혹성에 치를 떠시며 우리에게 설명해주셨다.
“그때 그 공부놈들이 말이야. 얼마나 잔혹했는지 아니?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시민들 을 몽둥이로 때리고, 총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아대고 굿홧발로 짓이기고. 어휴 지금생각 해도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다.”
문학 성생님의 말씀에 같은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같은 민족에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었는지 다들 한껏 열이 받아 보였다.
다들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유독 두 친구는 고개를 박고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쉬는 시간이 되어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두 친구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영화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이루자 청소년단체에서 5․18에 대한 토론회가 열었다. 마침 토론에 관심이 많던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토론회장에 들어서 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우리 반 두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수업시간엔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이곳엔 웬일인지 의아했다.
토론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주로 공수부대의 잔혹성을 꼬집는 내용들이었다. 막바지에 이르러선 하품이 나올 정도로 내용이 비슷했다.
토론회 종료시간이 다 되어가자 두 친구중 민수가 조심스레 손을 들고 마이크를 잡았다. 민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5․18 참여 희생자 이십니다. 항쟁 마지막날 전남 토청에서 허리와 허벅지에 총을 맞고 오는날까지 반신불수로 살아오시다 지난 해 5월 돌아가셨습니다.”
민수의 목소리가 떨림에서 울먹임으로 바뀌었다.
“오늘 여기에 참여하신 여러분께서 공수부대를 욕하셨습니다만 광주시만들은, 아니 적어도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일곱 살때의 일입니다. 어려서 무슨말인지는 몰랐지만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한가지. 전두환이 무기징역을 받고 2년만에 사면되던 그 날. 아버지는 쓰디쓴 소주를 병째 들이키시며 ‘날 때린 공수들은 용서해도 저 능글능글한 전두환 저놈은 죽어서도 용서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공수부대. 그들이 원래 사악한 무리였을까요? 군인이라면 상부의 명령이 있었겠지요? 이젠 공수의 문제가 아니라 수뇌부의 죄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내에 박수소리가 귀가 따갑도록 울렸다.
선생님께서 광주이야기를 하시던 그날. 왜 엎드려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민수가 자리로 돌아오자 이번엔 진혁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여러분께서 그토록 원망하시는 공수부대대원의 아들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실내가 웅성웅성해졌다.
“저도 저희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5․18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으니까요. 아버지께선 공수 11사단 출신이십니다. 마지막날 전남도청에 진압작전을 한 부대지요.”
갑자기 민수의 얼굴이 빨개졌다. 옆에서 친구들이 다독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께선 5월이 되면 항상 술에 쩔어서 생활 하십니다. 그런데 항상 술을 마시면서 우린 어쩔 수 없는 군인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잠결에 아버지께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진 빨갱이 잡으러 간다는 상부의 명령에 따랐다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말 해도 될련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느정도 머리가 익은 나이가 되어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광주 항쟁의 피해자이십니다. 지난 5월 18일 올해도 어김없이 아버진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TV에서 보았습니다. 익숙한 뒷모습. 5․18 망월동 국립묘지에 비석을 하나하나 손으로 어루만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너무도 작고 초라해보였습니다. 저도 모르는 새에 눈에선 눈물이 흘렀습니다. 공수부대원들도 사람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맹수처럼 보였어도 속은 여리고 상처많은 고슴도치처럼 가엽은 희생자입니다.”
진혁이는 뒤돌아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단상위를 올라가 진혁이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민수의 주변에도 똑같은 장면이 보였다.
나는 진혁이의 뒷모습에서 또다른 피해자의 아픔을 느꼈다.
지탄 받아야할 대상은 묘역의 비석을 어루만지는 뒷모습을 가진 공수부대원이 아니다. 죄를짓고도 떵떵거리며 당당한 뒷모습을 가진 수뇌부가 지탄받아야한다.
금남로에서, 전남도청에서 힘없는 뒷모습을 보이며 스러져간 그분들이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건 공수의 원한이 아니라 ‘당당한 뒷모습을 가진이’에 대한 원한이다.
아직도 금남로의 아래에선 그들의 피가 끓고 있다.
‘당당한 뒷모습을 가진이’가 ‘묘역의 비석을 어루만지는 뒷모습’이 될 때 그 피도 가라앉을 것이다.
더 늦기전에 그드르이 정성이 담긴 ‘묘역의 비석을 어루만지는 뒷모습’이 보고 싶다.
오늘도 망월동은 그 성스러운 뒷모습이 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첫댓글 운문이 있네요......?
산문 올려주세영 ㅠㅠ
오타가 첫 줄부터 있어요............
도도한 여자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