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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상세한 예언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는데 이것을 부인하는 학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5절 이후의 문맥은 재림과 천년왕국으로 전환되면서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 성경의 초림 예언들이 나올때 항상 재림도 같이 등장한다는 것을 놓치지 말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초림과 재림이 구약 선지자들에게는 동일 사건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교회 시대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주님이 그에 대한 계시를 안 주셨기 때문에 당연히 몰랐고, 초림과 재림의 시간적 간격을 묘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클라렌스 라킨의 <세대적 진리>에 잘 제시가 되어 있고 럭크만 목사님의 주석서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의 '정신나간', '눈뜬 소경'인 신학자들은 이 기본적인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시편에서 재림 계시가 안 보이는 듯이 무시해 버립니다. 우리는 그런 소경들은 무시하고 진리를 "끝까지 찾아내서" 무식한 자들의 입을 막고 진리가 진리되게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22장>
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하는 말들을 멀리하시나이까?
2 오 나의 하나님, 내가 낮 동안에 부르짖으나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며 밤 동안에도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거하시는 오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를 신뢰하였고 그들이 신뢰하였기에 주께서 그들을 구하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었더니 구원을 받았고, 그들이 주를 신뢰하였더니 수치를 당하지 않았나이다.
6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들에게 멸시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조롱하며 비웃나니 그들이 입술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8 “그가 주께서 자기를 구하실 줄 신뢰하였도다. 주께서 그를 기뻐하시니 그를 구하시게 하라.” 하나이다.
9 그러나 주는 나를 태에서 꺼내신 분이시며 내가 내 어머니의 가슴 위에 있을 때 내게 희망을 주셨나이다.
10 나는 태에서부터 주께 맡겨졌으니 주는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11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고난이 가까이 있으나 도울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고 바산의 힘센 황소들이 나를 둘러쌌나이다.
13 그들이 내게 입을 벌림이 마치 찢고 울부짖는 사자 같나이다.
14 내가 물같이 쏟아졌으며 나의 모든 뼈는 어그러졌고 내 심장은 밀초 같아서 나의 내장 가운데서 녹았나이다.
15 내 기력이 질그릇 조각같이 말랐으며 내 혀는 잇틀에 붙었나이다. 또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들을 셀 수 있으니 그들이 나를 보며 쳐다보나이다.
18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그러나 오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오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혼을 칼에서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이는 주께서 유니콘들의 뿔들로부터 나를 들으셨음이니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내가 주를 찬양하리이다.
23 주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 너희 야곱의 모든 씨들아, 그를 영화롭게 하라. 너희 이스라엘의 모든 씨들아, 그를 두려워할지어다.
24 이는 그는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멸시하거나 증오하지 않으셨고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도 않으셨으며 그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음이라.
25 큰 회중 가운데서 나의 찬양이 주께 있으리니 나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들을 갚으리이다.
26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요, 주를 찾는 자들은 그를 찬양할 것이니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 것이라.
27 세상의 모든 끝이 기억하고 주께로 돌이키리니 민족들의 모든 족속들이 주 앞에 경배하리이다.
28 이는 왕국이 주의 것이요, 주께서 민족들 가운데 통치자시기 때문이니이다.
29 땅 위의 모든 풍요로운 자들이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로 내려가는 모든 자들도 그 앞에 절하리로다. 자신의 혼을 살려 둘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30 한 씨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리라.
31 그들이 와서 태어날 한 백성을 위한 그의 의를 선포하리니 이는 그가 이것을 행하셨음이라.
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하는 말들을 멀리하시나이까?
2 오 나의 하나님, 내가 낮 동안에 부르짖으나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며 밤 동안에도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거하시는 오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를 신뢰하였고 그들이 신뢰하였기에 주께서 그들을 구하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었더니 구원을 받았고, 그들이 주를 신뢰하였더니 수치를 당하지 않았나이다.
1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마 27:46, 막 15:34), 이 고백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놋뱀이 되셨다'(마귀들이나 지옥의 죄인들의 대접을 받으셨다)는 의미인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거기서 마신 것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지만 그 기도는 아버지께서 안 받아주셨는데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안 지겠다고 응석 부리신 게 아니란 것입니다. 학자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나사렛 청년"으로 상상하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니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카잔차 키스의 소설, 동명의 영화), "사람의 아들"(이문열의 신성모독적 소설), 이런 식으로 겁쟁이 예수님이라고 모함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신 게 아니다, 그분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고 제자들에게 공공연히 가르치셨다, 그런 분이 죽음 앞에서 피하고 싶어서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했겠는가? 그 분은 그 치열한 6시간 동안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세상 죄인들의 온 죄를 몸에 받으시고, 유기된 상태에 놓이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죄인들은 '죄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모르기에,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을까? 그냥 죽음의 고통만 당하시는 것도 모자라서 그 위에 '진노의 잔'(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까지 퍼부으셔야 했는가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처벌과 그 진노의 몫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으셨고, 또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베드로전서와 같이 실제로 '낫게 된 것'입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벧전 2:24).
2절,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는데 고통의 여섯 시간 동안 절반의 시간 동안 하늘이 캄캄해졌고(천체 이변, 마 27:45)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고통을 차마 보지 않고 얼굴을 가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 동안 '부르짖고, 잠잠하지 아니하셨는데', 빌리도와 헤롯 앞에서 잠잠하셨던 주님은 왜 십자가에서는 침묵하지 않으셨는가? 역시 학자들은 나약한 나사렛 청년의 죽음의 고통 앞에서의 고뇌, 이런 식으로 사설을 풀겠지만 실은 주님께서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죄인들의 모델(유형)'이 되셔서 지옥의 죄인들처럼 고통에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자기 길(넓은 길)로 가는 죄인은 인생의 종점에서 '그가 영원히 짊어질 고통의 십자가'를 발견할 할 것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2천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에서 고통을 경험하신 그것을 죄인이 영원히 지고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6시간만 통과하셨지만 그 자들은 영원무궁토록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3-5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잠시 '환란 성도들의 소망'이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거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4절, 주께서 '그들'을 구하신다, 5절, 또 '그들이 구원을 받았고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나오는데 계속해서 환란 성도의 구원으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서 다른 추측은 필요없이 한가지 확실히 정리할 점은 주님은 환란 성도들의 구세주가 되셔서 그들을 위해서도 피를 뿌려주셨으므로 '환란 성도들' 또한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물론 계명들도 같이 지켜야 하지만, 결국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 끝까지 견디는 성도들이 그들이다, '예수와 상관이 있는 성도들이다'라는 점을 알고 넘어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더라(계 14:12).
6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들에게 멸시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조롱하며 비웃나니 그들이 입술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8 “그가 주께서 자기를 구하실 줄 신뢰하였도다. 주께서 그를 기뻐하시니 그를 구하시게 하라.” 하나이다.
9 그러나 주는 나를 태에서 꺼내신 분이시며 내가 내 어머니의 가슴 위에 있을 때 내게 희망을 주셨나이다.
10 나는 태에서부터 주께 맡겨졌으니 주는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6절부터 다시 갈보리 십자가 현장으로 돌아와서 묘사합니다. 6절, '벌레요', 주님은 지옥에 간 죄인들이 '벌레처럼 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사 66:24, 막 9:44,46,48) '그들의 벌레'라는 뜻은 '그들의 천사'(마 18:10)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 죄인들이 실제 '벌레의 형상'을 하게 되리라는 강한 예시입니다. 벌레처럼 천하게 여김을 받는다, 정도가 아니라 아주 벌레가 되는데, 우리가 죄인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형상이 무지막지하게 큰 '벌레나 뱀'(사 27:1) 같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사탄의 자식들도 아비의 형상으로 '퇴화'하는 '반진화론'(낙원에서 진흙으로, 다시 불못으로)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7-8절, 주님께서는 '죄인들의 죄들'을 지고 '진노의 잔'도 받으셨으며 한 가지 더, 부당한 '조롱들'까지 죄인들에게서 받으셨는데 그 장면은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니라. 선임 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더불어 이와 같이 그들 가운데서 조롱하며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막 15:29-31).
이 조롱은 우연히 '지나가던 어떤 행인들'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며 사탄이 그의 사람들을 '우연을 가장하여' 보낸 것인데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탄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의 역정'을 도발해서 주님께서 끝까지 참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즉시 내려오셔서 '이 배은망덕한 자들아, 내가 너희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멱살이라도 잡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오래 참으심'은 4천 년 동안 죄인들의 죄를 미리 덮어주시며 보지 않으신 그 '오래 참으심'과 닮았는데 주님은 부당한 모욕과 비방에 한 가지도 항변하거나 '악에 악으로' 되갚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들을 정결케 하는 속죄의 현장일 뿐 아니라 '구원의 대장'(히 2:10)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뒤따르는 성도들이 배워야 하는 '하나님의 엄청나신 인내'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9-10절, '태에서 꺼내신 분이시며'(사 44:1-2; 49:5), 성육신 교리로 인도하는 구절들인데, 어떤 사람들은 불경스럽게도 10절을 '모태신앙'의 근거 구절로 삼기도 하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모태로부터 거룩했던' 인간은 아담 이래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한 명도 없습니다. 주님은 확실히 '여인의 씨'(아담의 씨가 아니라)(창 3:15)로 오셨으므로 이 구절들은 성육신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습니다.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아들이었던 인간은 아무도 없는데, 심지어 아담조차도 초자연적으로 지어졌고, 자궁에서 출생하지 않았으므로 모태로부터 하나님과 부자 관계였던 경험은 한 바 없습니다.
11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고난이 가까이 있으나 도울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고 바산의 힘센 황소들이 나를 둘러쌌나이다.
13 그들이 내게 입을 벌림이 마치 찢고 울부짖는 사자 같나이다.
14 내가 물같이 쏟아졌으며 나의 모든 뼈는 어그러졌고 내 심장은 밀초 같아서 나의 내장 가운데서 녹았나이다.
15 내 기력이 질그릇 조각같이 말랐으며 내 혀는 잇틀에 붙었나이다. 또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들을 셀 수 있으니 그들이 나를 보며 쳐다보나이다.
11절,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 고통의 시간 동안 주님을 멀리하셨고, 도울 자 아무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려 두셨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아버지의 진노를 주님의 면전에 다 퍼부으셔야 우리에 대한 진노가 더이상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12절, '황소들'은 명백히 비유적인 표현인데 마귀의 자식들을 빗대는 많은 짐승들(까마귀, 개, 염소, 돼지, 사자 등)이 있으나 특별히 이 황소는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모세의 백성이 갖고 나온 신이고 사탄은 '황소'의 얼굴을 한 그룹이었고(겔 1:10) 사람들은 사탄(old nick)을 황소의 굽을 가진 사나이로 묘사합니다. 종교인들이나 로마 군인의 껍데기를 한 인간들이 십자가의 주를 조롱했지만 악령들이 그들을 컨트롤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13절, '울부짖는 사자' 또한 베드로전서 5:8로 곧장 인도하는데 사탄은 유다 지파의 사자(계 5:5)를 모방하는 모방하는 '울부짖는 사자'이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 조롱하면서 동시에 모방합니다(공산주의자들을 위한 해방자 예수, 위대한 순복음 복지사업가 예수, 데이빗 커퍼필드 뺨치는 마술사 예수 같은 식으로).
14절, '물같이 쏟아졌으며', 주님은 '물을 다 쏟으셔야 했는데'(요 19:34), 인간의 오장육부는 물로 채워져 있고 물이 제대로 순환하지 않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생명이 완전히 끝났다는 종결 표식으로 아버지께서는 물을 다 쏟게 만드셨습니다. 부활을 거부하는 현대 사두개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잠시 기절하신 후', 서늘한 바위 무덤에 가서 정신을 차리신 것으로 만드는데 그들에게 '너희도 한번 온몸의 물을 다 쏟고 죽는지 사는지 시험해 보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모든 뼈는 어그러졌고', 십자가에서 주님은 모든 뼈들이 '탈골'되셨는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여섯 시간 동안 있었던 주님의 몸은 바로 세워지지 못하고 구체관절인형처럼 흐느적거렸습니다. 그 장기들도 온전하지 못했는데 '심장이 밀초같이 녹았다'고 묘사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의학자들이 주님의 직접 사인을 검시했다면 '이분은 심장 파열로 돌아가셨다'고 할텐데 아버지께서는 6시간을 정확히 채우신 후에 그 고통을 더 연장하지 않으시고 '일격필살', 심장 파열로 끝내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심장'이라는 기관에 대해 좀더 검토해 본다면 타락 전 아담이 가졌던 '물순환체계'와 현재의 '피순환계'의 차이점을 주목하게 되는데 주님의 심장이 부활 후에 복구(restoration)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살과 뼈'의 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의 손과 나의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고(눅 24:39)
주님께서 부활 후 보여주신 거룩한 몸은 '살과 뼈'가 있는 몸인데 이것은 그 분이 '거룩한 내장들' 또한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수준 높은 진리를 95%의 개신교 목사들은 논의할 엄두도 내지 않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 후에 '음식을 드셨다'는 점에서 하늘의 몸들이 땅의 음식을 먹기도 하며 '배설의 필요성'은 더 없겠지만 어떤 순환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인간들의 심장은 '피를 순환시키는' 목적으로 있으며 부활 후에 인간은 '피순환과 관련한 어떤 기관들'(콩팥, 심장)은 더이상 기능하지 않거나 없을 수 있다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계속 더 이야기하면 그리스도 안의 갓난아기들을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비록 내 콩팥이 내 안에서 소멸된다 해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눈으로 보리라(욥 19:27).
15절, 주님께서는 '목마르다'(요 19:28)고 하셨는데 이는 지옥에 있는 잃어버린 죄인들이 '목마르다'(눅 16:24)고 절규하는 그 모습과 같이 되셔서(벌레) 말씀하신 것입니다. 골고다는 '사망의 진토'(마 27:33, 해골의 장소)이며 원수들이 골고다에서 처형하는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주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의 전 과정을 '성경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16절, 스카랴서 12:10에 같은 예언이 있는데 '개들'(구원받지 못한 남자들)과 '악인의 무리들'이 주님을 에워쌌고, 그 '악인들'은 재림 직전의 '악인들'과 오버랩되는 진노의 자녀들이기에 계시록에서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본다'고 한 것입니다.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시리니,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그대로 되리로다. 아멘(계 1:7).
계 1:7은 환란후 휴거의 상황인데 이때 '주를 찔렀던 그 악인들'은 부활하지 못하므로 '그를 찌른 자들'은 민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에 넘겨주고 거부한 그 유대인들이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17절, 이 방법, 저 방법 써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화나게 해서 십자가에서 중도에 내려오게 하려던 사탄은 계획을 하나 더 발동합니다. '보며 쳐다보나이다', 그들은 '벌거벗은 예수님'의 수치가 드러난 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비웃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최후의 수치감, 자존감을 짓밟으면 저분도 못 참고 그만두리라, 여기고 쳐다보며 피식거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간과했던 것이 있는데 주님은 우리의 죄들 뿐 아니라 죄들로 인한 수치, 모욕, 백보좌 심판석 앞에서 받아야 하는 벌거숭이 수치까지 그 몸에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믿은 사람은 죄로 인해 더이상 하나님 앞에 수치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18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그러나 오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오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혼을 칼에서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이는 주께서 유니콘들의 뿔들로부터 나를 들으셨음이니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내가 주를 찬양하리이다.
18절,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뽑았다, 그 자들이 마귀의 악령에 지배당한 죄인들인데 마귀가 성경을 이루라고 시켰단 말인가? 마귀도 어쩔 수 없는 피조물이라 말씀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주님의 속옷"은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통으로 짠 속옷이었다(요 19:23-24)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통으로 짠 속옷'은 우주를 두른 '하나님의 옷 같은 우주'가 그러한 형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우주는 우주적 시온산(셋째 하늘)을 정점으로 통으로 내려오는 피라밋 모양의 통옷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우주의 모형을 기자의 피라미드로 묘사했습니다. 구약의 장막 또한(바깥뜰, 성소, 지성소) 피조세계의 세 부분(세 하늘들)을 예표한 것입니다.
19절, 주님께서는 계속 도움을 간구하셨는데, 주님께서 완전히 버림받아 죽어 부활하지 못하신다면 사탄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 세상이 오기 때문에 간절히 죄인들을 위해 간구하신 것입니다.
20절, 주님의 '혼'의 가치는 영원하고 무한한데, 모든 죄인들의 '혼'이 가진 가치가 우주와 바꿀 수 없는 것(마 16:26)과 비교해 보더라도 수많은 혼들을 구속하신 주님의 혼은 구원받은 죄인들의 혼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개의 세력', 악인들은 역시 '개'로 비유되는데 신천지 이만희나 그를 따르는 자들은 '개'가 목사라고 했으므로 십자가 사건 때 주님께 짖어댄 그 '개들'(로마 병사들과 유대 종교인들)은 누구인지 모를 것입니다. 무지한 자들은 무식한 대로 버려두면 됩니다(고전 14:38).
21절, '사자의 입'은 '개의 세력'과 같은 자들이고 21절에 특별한 단어가 나오는데 '유니콘의 뿔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시 92:10).
그러나 주께서 나의 뿔을 유니콘의 뿔같이 높이셨으니 내가 신선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리이다(시 92:10).
유니콘은 비유나 전설의 동물이 아니며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언급되는데 즉, 셋째 하늘에 실존하는 '유니콘'이라는 뿔달린 말의 뿔에 재림하신 예수님의 뿔(왕의 권세)를 비교하시는 것입니다.
유니콘은 '설화들에 따르자면' 무섭게 긴 뿔을 가졌고 성질이 나면 뿔로 받아 버리는데, 유니콘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련사가 필요하다, 그런 식입니다. 이 유니콘들이 재림 때 하늘 군대들과 함께 내려오는 것을 볼때(사 34:7) 재림과 관련된 '전쟁 준마'임은 알 수 있습니다.
유니콘들이 그들과 더불어 내려오며, 수송아지들이 수소들과 함께 내려오리니 그들의 땅이 피로 흠뻑 젖게 될 것이며, 그들의 흙이 기름으로 윤택해지리로다(사 34:7).
창조 과학자들은 욥기의 붉은 용 리비야단과 적그리스도 비히못을 공룡으로 바꿔 버린 후에 성경이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가르치지만 우리는 그렇게 여겨서는 안되고 자기가 이해 못하겠다고 해서 유니콘을 코뿔소로 바꾸는 학자들에게 수긍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22절,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회중 가운데서', 이런 표현들은 히브리서 2:10-12과 연결되는데 환란 때 히브리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시고 그들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는 히브리인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환란 끝에 히브리인들을 박해한 이방인들은 염소로 간주되어 영원한 불로 들어갑니다.
23 주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 너희 야곱의 모든 씨들아, 그를 영화롭게 하라. 너희 이스라엘의 모든 씨들아, 그를 두려워할지어다.
24 이는 그는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멸시하거나 증오하지 않으셨고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도 않으셨으며 그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음이라.
25 큰 회중 가운데서 나의 찬양이 주께 있으리니 나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들을 갚으리이다.
23절, '야곱의 씨들의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임박한 구원에 대한 소망의 기쁜 소식인데 '주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으로 압축 요약됩니다. '영원한 복음'(계 14:6)은 대환란 끝에 선포되는데 재림 직전에 천사가 선포하며 그 골자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 돌리라'입니다.
24절, 주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의 시간 동안 거부당하셨지만 그로 인해서 그를 구원의 대장으로 따르는 무리들은 환란 끝에 회복되고 '주의 얼굴을 보게 되는데'(히 12:14) 즉 22절 이후로 문맥은 대환란 끝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환되었습니다.
25절, 다윗 자신의 서원을 천년왕국에서 갚겠다는 고백으로 보이는데 혹은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 대해 그들의 회복을 간구하신 서원들이 천년왕국 때 이루어진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6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요, 주를 찾는 자들은 그를 찬양할 것이니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 것이라.
27 세상의 모든 끝이 기억하고 주께로 돌이키리니 민족들의 모든 족속들이 주 앞에 경배하리이다.
28 이는 왕국이 주의 것이요, 주께서 민족들 가운데 통치자시기 때문이니이다.
29 땅 위의 모든 풍요로운 자들이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로 내려가는 모든 자들도 그 앞에 절하리로다. 자신의 혼을 살려 둘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26절,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이고(시편 37:11, 마 5:5) 그들은 마태복음의 주의 산상수훈 계명들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을 슬그머니 교회에 영적 적용하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이 시대에 선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자들은 구원의 교리를 썩게 만드는 누룩들입니다.
27절, '세상의 모든 끝이... 주께로 돌이키리니...민족들이 주 앞에 경배...' 이런 사건은 한 가지도 교회사 2천년 동안 성취된 바 없으며 이 시대 끝까지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재림과 천년왕국 때 있을 사건입니다(시 2:10-12, 사 2:2-4, 말 1:11, 슼 14:16-19).
28절, 27절과 마찬가지로 '왕국이 주의 것', '주가 민족들 가운데 통치자'였던 적은 이제까지 없었으며 망령들린 카톨릭 교황이나 개신교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지금 땅을 통치하고 계신 것으로 만들기 위해 WCC 교단 교회들을 땅끝까지 확장하려고 해도 그들의 악한 계획에 동조하면 안됩니다.
29절, 천년왕국 때는 아직 '사망'이 불못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진토로 내려가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래도 천년왕국=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주장하는 망령들린 학자들에 동조하겠습니까? 사망은 천년왕국이 오롯이 찬 후에야 불못에 들어갈 것이고(계 20:14) 그 전까지 수명은 나무처럼 길어질지라도(사 65:22) 죽음을 보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천년왕국 동안에도 사망과 관련이 없기에 영광스러운 첫째 부활에 참여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30 한 씨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리라.
31 그들이 와서 태어날 한 백성을 위한 그의 의를 선포하리니 이는 그가 이것을 행하셨음이라.
30-31절, 30절은 매우 중요한 예언인데 "한 씨"는 이사야서 53:10에 예언된 그 씨입니다.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였기에 주께서 그를 고난에 두셨도다. 주께서 그의 혼을 속죄제물로 만드실 때 그가 자신의 씨를 보리니 그가 자신의 날들을 늘릴 것이요, 주의 기쁨이 그의 손에서 번창하리라(사 53:10).
'한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서 천년왕국 때 '의인들의 회중'(시 1:5)으로 여겨지고 천년왕국 때 통치자로서 만왕의 왕이신 분을 보좌하는 왕같은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여겨진다'는 것은 교회가 주께서 낳으신 세대로 '간주된다'(칭의 구원)는 말입니다.
'태어날 한 백성'은 '중생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교회시대 성도'(요 1:13; 3:5)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 해석의 핵심은 선포하는 '그들'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을 '사도들'이라 본다면 은혜의 복음을 전해서 이방인들이 새로운 출생을 하게 되어 '한 백성'(교회)이 된다는 말씀이라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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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담아갑니다. 벌써 22편이네요. 시편강해 올안에 완성되면 좋겠지만 150편까지라 올안에는 완성되기는 어렵겠네요. 대신 저는 올안에 시편강해 83편까지 올라왔으면 좋겠어요.
저에게는 완성이 목적이 아니라 핵심적 내용을 어떻게 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까지 시편 강해한 내용을 다 보셨다면 제가 무엇을 강조하는지 어디에 촛점을 맞추는지 아실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은혜복음과 왕국복음, 교회와 환란성도 뒤섞어선 안되고, 시편은 재림 예언이 풍성하니 그것을 찾는자, '복있는 자'(시편 1장)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한번도 시편을 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 정말로 내가 엄청나게 헛되게 믿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시는 그 계기가 되라는 목적에서입니다.
형제님^^감사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쉬지도 못하시구^^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