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짐을 서로 지라(互相勞苦)
갈라디아서 6:2
정동교회, 상동교회
1932. 6. 19.
相勞相苦善寫我人類之生活也. 木鐵之工流汗而造器物, 一視之則爲己之生活而就業, 然反視之則不然, 非爲己也, 實爲人也. 木鐵之工不欲造器, 則吾等措手不能, 而今居在家屋之內者, 皆木鐵工之助也. 吾等能讀萬卷書籍者, 皆印刷工之助, 吾等坐食白玉之飯者, 皆農夫之功也. 吾等衣被萬縷之衣者, 皆績婦之功也. 此皆相勞相苦之意, 然不知此意者, 互相嫉視, 互相妨害, 故爭鬪起焉, 是非興焉. 食飯而反賤視農夫, 讀書而賤視印工, 衣服而賤視績婦, 甚不可也. 自己之負自己擔之, 此爲人之本, 而至於擔人之負者, 亦人之本分也. 擔負輕重看人之大小, 華成頓擔美國之獨立, 아부람잉커먼擔黑人之重負, 諸葛亮擔漢室之存亡, 藺相如固趙國之輕重, 然今人諱言擔負, 外言擔負之美而內實諱言, 聲言親切之地, 而一言擔負則疏遠, 此非諱之而何也? 合理之求人不能盡酬, 況多不合理之求乎? 世多不合理之求, 故擔負者皆忌之, 此何甚多? 某先生言養一苦學生, 送東京工夫而卒業後, 通知則欲營商業, 請送千円, 某先生施五百, 而後又請求而不應矣, 此生徒送侮辱之書, 甚至絶交云. 此等無理甚多矣. 合理之求何也? 雖一時無力, 至於依人, 然得力輒奮發勞力獨立自力, 我受人之助, 則我亦施人之求, 行益人之事, 是助人者之本意也. 吾主來世, 受苦者來我云, 故犧牲一身, 擔人之負, 主七百年前이샤야預言曰 擔我等之弱, 負我等之病, 샤五三章四. 主之一生擔負生活也. 主擔我等之軟弱, 非使我等弱也. 欲受助而强也. 天下之强莫過於眞理, 眞理雖一時受屈, 終當强大. 保羅曰 我欲助人, 特施於敎會中信者, 갈六章十. 我等欲助人, 助酒色之人乎? 助善而無力者乎? 故閔牧師之言取以爲終也. 今言弘濟院之形便, 八年前敎會自培材生設立, 有四百坪基址草家數間而已也. 敎友六七十名, 會集主日, 敎生平均六十名, 總集則不能容, 故主日生午後別集, 且夜學生近八十名, 此處貧民窟也, 巫覡甚多, 又多酒家, 生活掃如, 敎友之出力如刮龜生毛. 皆柴商或石工也. 看甚悶然也. 今豫算五百円, 現金一百五十円假量, 魯巽乙牧師百円許諾, 不足二百五十円也. 願僉位助此無力之敎會, 必如閔牧師助人也. 洞人甚望敎堂成立, 而年年不成, 某魔師取人財, 今成瓦屋數十間, 皆外來之人助之也. 洞人言某神堂, 今已成矣. 敎堂尙未成何故也? 聞甚愧赧也.
서로 노력하여 고통을 나누라고 한 것은 우리 인류의 생활을 잘 묘사한 것입니다. 목수나 대장장이가 땀을 흘리며 기물을 만드는데, 한편으로 보면 자기 생활을 위한 일이기는 하지만, 한편 그렇지 아니하여 실제로는 남을 위하는 것이 됩니다. 만일 목수나 대장장이가 기물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안에는 모두 목수나 대장장이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가 만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다 인쇄공의 도움 때문이고, 우리들이 편히 앉아서 흰쌀밥을 먹는 것은 모두 농부의 공이고, 우리가 온갖 옷을 입고 사는 것은 길쌈하는 여인네의 공이니, 이게 모두 서로 노력하여 고통을 나누어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을 모르는 자들은 서로 미워하고 서로 방해하기 때문에 투쟁이 일어나게 되고 시비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밥을 먹으면서 농부를 업신여기고, 책을 읽으면서 인쇄공을 천하게 보고, 옷을 입으면서 길쌈하는 여인네를 얕보게 되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자기의 짐은 자기가 지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지만 남의 짐을 지는 것도 또한 사람의 본분입니다. 사람에 따라 지는 짐의 무게가 다르니 워싱턴은 미국의 독립을 짐으로 졌고, 아브라함 링컨은 흑인들의 무거운 짐을 졌으며, 제갈량은 한 왕조[漢室]의 존망을 짊어졌으며, 인상여(藺相如)는 전국시대 중국 조[趙)나라의 무게를 짐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짐을 진다는 말을 숨깁니다. 밖으로는 짐 지는 일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사실상 숨깁니다. 친절하여야 한다고 떠들면서도 짐을 지라는 말 한 마디에 소원해지고 맙니다. 이것이 숨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합리적으로 구하는 것도 사람들이 다 응하여 주지 못 하는데 하물며 불합리한 것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에는 불합리한 것을 구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짐을 지려는 이들이 꺼립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말하기를 ‘자신이 어느 고학생을 길러서 동경에 공부를 하러 보냈는데, 그 학생이 졸업한 뒤에 어떻게 사는지 알아보려고 통지를 했더니 상업을 하겠다고 천 엔을 달라고 요구하더랍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준비하여 오백 엔을 보내고 뒤에 또 요구하는 것을 보내주지 않았더니, 그 학생이 모욕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심지어는 절교하겠다’라고 하더랍니다. 이렇게 무리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합리적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한 때 힘이 모자라서 남의 힘에 의지했더라도 힘을 빌리게 되면 분발하고 노력하여 자력으로 독립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남의 도움을 받았으면 나도 역시 남을 구하는 도움을 주고 남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는 것이 바로 남을 돕는 자의 본래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무거운 짐진 자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한 몸 희생하여 남을 위해 짐을 지셨습니다. 주님보다 칠백 년 전에 이사야가 ‘우리의 약함을 담당하고 우리들의 질병을 짊어 지셨다’고 이사야 53:4에 언급함으로 주님의 일생은 짐을 지는 생활로 예언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지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천하에 강한 것은 진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진리는 한 때 굴복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침내는 강해집니다. 바울이 ‘남을 도우려거든 교회 안의 믿는 자들에게 베풀라’고 갈라디아서 6:10에 말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남을 도우려고 할 때 주색을 좋아하는 사람을 돕겠습니까, 아니면 선하지만 힘이 모자라는 사람을 돕겠습니까?
그리하여 민(閔) 목사님의 말을 들어 끝을 맺겠습니다. 지금 홍제원(弘濟院)의 형편을 말해 볼 것 같으면, 8년 전에 교회가 배재학교의 학생으로부터 설립되었는데, 4백 평 터에 초가 두어 칸뿐이고, 교우는 6,7십 명이 주일에 모였으며, 교생은 평균 6십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모이면 교당에 다 들어갈 수가 없어서 주일 학생들은 오후에 따로 모였습니다. 또한 야학생은 8십 명 가까이 되었는데 이곳은 빈민굴이므로 무당들이 매우 많고, 또 술집이 많아서 생활이 아주 가난하기 때문에 교우들 중에 돈을 낼 수 있는 이는 마치 거북이 등껍질에서 털이 생겨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직업은 땔나무를 내다파는 장사꾼이나 돌장인[石工]들로서 보기에도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지금 예산 5백 엔 중에 현금이 1백 5십 엔이고, 노보을(魯普乙) 목사님이 백 엔을 내겠다고 허락하였으니, 부족분은 2백 5십 엔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 무력한 교회를 도와 주기를 민 목사님이 남을 돕듯이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 동네 사람은 교회당이 이루어지기를 매우 바라고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마귀의 술사[魔師]는 남의 재산을 끌어다가 지금 기와집 수십 간을 세웠는데 다 외지인들이 도왔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느 신당(神堂)은 지금 벌써 세워졌는데 교당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하였습니다. 듣기에 너무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