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물은 무엇입니까?(網何也)
마가복음 1:18
이태원교회(梨院)
網漁具也, 彼得 爲漁父, 故有此網, 然則網爲彼得生活之具, 彼得世居海邊, 順承其父之業, 熱心漁魚, 無他虛榮, 深知海事, 又知漁理, 或持網而往水深處, 不得一魚, 又或持往水淸處, 不得一魚, 如此大有經歷, 雖博士, 不及彼得. 今彼得之網有取捨, 夫網者有目有綱, 目有千而綱有一也. 比如信者之德, 有千差萬別, 而其綱則信也. 凡事 以信爲主, 信擧則凡事從之, 如綱擧則目張矣. ◇今彼得 所舍者 何也? 彼得漁夫也. 漁夫而更爲漁夫, 舍取魚之漁父, 更作取人之漁夫, 取魚則爲利不小, 以資一家之生計, 而父祖以來, 以此爲業, 且彼得之勇, 足以凌駕他人, 取魚多多, 必倍他人, 專尙利己主義, 今聞主訓, 甚覺不足流汗則可矣. 而至於榷取害人, 則不可. 羅馬以地中海爲蓮塘, 彼得 欲以加利海爲自家池塘, 如此專利, 此網 非但害人, 亦損神之恩賜也. 故棄之, 棄之之形, 不留晷刻, 直地去之. 直字之義, 甚合彼得之勇也. 大衛以魔鬼姦計, 比之網, 詩九章十五節. 孟子曰 數罟不入洿池, 此不仁之甚, 故不當入也. 彼得 棄如此之網, 不留晷刻, 卽地去之, 眞勇哉彼得也. ◇今所取者, 卽取人之網也. 取之當如何也? 以信爲綱, 以愛爲目. 但成一大網後, 取魚滿網, 此不在自己也, 卽在從主訓也. 主曰 來我者, 我許之故也. 湯張網祝曰 從天而降, 從地而出者, 皆入吾網云, 漁夫必聚而祈禱, 必從主訓投網, 投之深處則投之, 又投之淺處則又投之, 漁夫曰 彼有兩網, 一則死亡, 一則永生. 如此傳道, 加利海多風波, 甚害漁魚, 今日之世 多風浪, 有妨傳道者多矣. 然主必履之如平海, 使漁夫安過也. 神之網 廣張四面, 요나於地中海罹之, 彼得於加利海罹之, 摩西於羅日江罹之也, 以後審判之日, 驅魚入網, 曳出後, 好者 盛器, 不好者 棄之也. 太十三章四七節. 好者 何也? 必由主之血而救贖者也. 彼得如此爲漁夫, 彼得 取如此之網, 五旬節後, 說敎三千名, 悔改受洗, 豈非善漁者乎? 昔姜太公, 八十垂釣渭濱, 文王訪之爲尙父, 使成周室, 今世之漁夫, 取魚不已, 待主訪之, 使升天爲王, 成天國矣. ◇雖不得魚, 勿落心可也. 主釘死後, 弟子洗網欲歸, 主曰 披網得魚, 吾人當預, 則傳道不已可也.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 어구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였기 때문에 그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물은 베드로의 생활도구였습니다. 베드로는 대대로 해변에 살았으므로, 그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아 열심히 고기를 잡았고 다른 허영은 없었습니다. 그는 바다의 일을 매우 잘 알았고 고기 잡는 이치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물을 가지고 물에 들어가서 때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할 때도 있었고, 또 때로는 물이 맑은 곳에서 한 마리도 못 잡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큰 경력이 있어서, 박사라고 해도 베드로의 솜씨를 따를 수 없을 터인데도, 베드로의 그물에는 고기가 잡히기도 하고, 잡히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물에는 물고기를 못 빠져나가게 하는 눈이 있고, 그물을 가라앉혔다가 들어 올렸다가 하는 벼리도 있습니다. 그물눈은 천 개, 만 개이지만 벼리는 한 줄입니다. 비유해 보자면 주님을 믿는 신자의 덕은 그물의 눈과 같아서 천차만별이지만, 그 신앙은 그물의 벼리 같아서 하나입니다. 모든 일에 신앙이 위주입니다. 신앙의 벼리를 한번 들어 올리면 모든 일이 그것을 따릅니다. 마치 그물을 들면 그물눈이 펼쳐지는 것과 같습니다.
◇ 베드로가 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어부인 베드로는 다른 직종의 어부가 되었습니다. 곧,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업을 버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되었습니다. 고기를 잡으면 그 이익이 적지 않아 한 집안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 생업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용기는 다른 사람을 훨씬 능가하였습니다. 그는 고기를 다른 사람보다 갑절로 잡았기 때문에 이기주의로 살아왔었습니다. 로마는 지중해를 자기 집 앞의 연못으로 여기지만,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를 연못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바다를 자기의 이익으로 독차지하면 이 그물은 사람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손상시킬 것으로 깨닫고,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당장 버렸습니다. ‘당장’이라는 말은 베드로의 용기에 매우 합당합니다.
다윗은 마귀의 간특한 계획에 빠진 것을 그물에 비유하였습니다.(시편 9:15). 맹자(孟子)는 ‘눈이 좁은 그물을 웅덩이에 넣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이러한 그물을 잠시도 머물러 두지 않고 당장 버렸으니, 참으로 베드로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이제 낚으려는 것은 사람을 낚는 그물입니다.
사람을 낚자면 마땅히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신앙으로 벼리를 삼고, 사랑으로 눈을 엮어 큰 그물이 만들어야 그물 가득히 고기를 낚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자기에게 있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오는 자를 내가 허락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중국 고대에 상나라 탕왕[商湯]이 들판에 나가자 사냥꾼이 그물을 치며 빌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새나 땅에서 달리는 짐승들 다 내 그물에 들어오너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부들도 이와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 깊고 얕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어부들이 ‘여기에 두 그물이 있는데, 하나는 사망하는 것이고, 하나는 영생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전도한 것은 갈릴리 바다에 풍파가 많아서 고기 잡다가 해를 많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세상도 풍파가 많아 앞길을 방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풍파를 평지처럼 쉽게 하여 어부들을 편히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물은 사면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요나는 지중해에서 걸렸고,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걸렸고, 모세는 나일강에서 걸렸습니다. 훗날, 심판의 날에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건져내서 좋은 놈은 그릇에 담고, 좋지 못한 놈은 버리는 것와 같습니다.(마태복음 13:47).
여기서, 좋은 것이란 주님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자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주님의 그물에 걸리게 했던 것입니다. 오순절에 설교하여 삼천 명 씩 회개와 세례를 받게 하였으니, 이 어찌 훌륭한 어부가 아닙니까?
옛날 중국 주(周)나라 개국공신 강태공(姜太公)은 나이 여든 살에 위수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지내다가 문왕의 방문을 받아 상부(尙父)의 칭호를 받고 주 왕조를 이루게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어부들도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기다려 하늘에 올라가 천국에서 왕 노릇하게 됩니다.
◇ 비록 고기를 잡지 못하더라도 낙심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주께서 못 박혀 죽으신 후 제자들이 그물을 씻고 본업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주님은 ‘그물을 펴서 고기를 얻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준비하며 끊임없이 전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