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新羅(今 慶州) 3
金鰲山色晚蒼々
渲染鷄林一牛霜
万畳伽倻人去後
至今紅葉上書荘
金鰲山빛이 늦게 蒼々한데
鷄林의 一半이 霜을 誼染하였더라.
万畳伽倻의 人이 간 後에
至今까지 紅葉의 上書荘일러라.
金鰲山은 一名은 南山이니 慶州 南六里에 在하였다. 唐顧雲이 崔致遠에게 詩를 贈하되 나는 聞하니 海上에 三金鰲인데 金鰲頭에는 山高를 戴하였다.
高山의 上이여 珠宮貝闕黃金의 殿이며 山의 下이며 千里 万里 洪濤라 하였으니 金鰲山上엔 当時 宮闕이 터 이었고 또 海上에 臨함을 可히 알겠도다.
鷄林은 三国史에 脱解尼斯今 九年 春三月에 金城西始林樹間에 鷄鳴声이 있으니 이 瓠公을 보내어 보니 金色小楨이 樹枝에 掛하고 白鶏가 其下에 鳴하니 瓠公이 돌아와 王께 告한데 王이 人으로 하여금 續을 取하여 열어보니 小男児가 있어 姿容이 奇偉한하였다.
王이 喜 曰 이는 天이 我에게 아들로 주심이라 하고 收養하였더니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혜가 많었다.
이에 이름을 閼智(羅語에 小児란 뜻)라 하고 金櫝에서 나왔다 하여 姓을 金이라 하고 始林을 여鷄林이라 하고 因하여 国号로 하였다.
伽倻山은 陜川北 三十里에 在하니 一名은 牛頭山이라. 上書荘은 三国史에 崔致遠의 字는 孤雲이고 或 云海雲이라 沙梁사람이니 年이 十二에 使舶을 随하여 唐에 入하여 及第가 되고 漂水県尉가 되였더니 續을 考하여 承務即侍御史内供奉이 되고 紫金魚袋를 賜하였다.
차차 黄巣가 叛함에 高駢이 兵馬都統이 되어 치더니 致遠을 불러 従事를 삼았다. 檄文으로서 敵을 이겼고 光啓 元年에 侍読이 되고 翰松 学士를 兼하고 出하여 太山太守가 되었다가 故国에 돌아오니 때는 乱世이다.
다시 仕意가 없어 家를 이끌고 伽倻山 海印寺에 숨어 偃仰終老하였다. 上書荘은 致遠의 読書하던 곳이니 金鰲山北에 在하였다.
高麗 太祖가 興함에 致遠이 그의 受命할 줄 알고 上書하되 鷄林黄葉이고 鵠嶺青松이란 말이 있었다. 後人이 致遠의 所居를 称하니 曰 上書荘이라 하였다.
- 한글
여기 현대 한국어로 고쳐본 번역문입니다:
금주산 빛이 늦게 쌉싸래해지는데
계림의 한쪽이 서리에 물들었구나.
만겹 가야인들이 떠난 후로
지금까지 홍엽 위의 서재를 일컫네.
금주산은 남산이라고도 하며 경주 남쪽 6리에 있었다. 당나라 고운이 최치원에게 詩를 보내며 "내가 들으니 바다 위에 세 금주가 있는데 금주 머리에는 높은 산을 써놓았다. 높은 산 위에는 구슬궁전과 조개궁전이 있고, 산 아래로는 천리만리 넓은 물결"이라 하였으니 금주산 위에 당시 궁궐터가 있었고 또한 바다를 굽어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림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왕 9년 봄 3월에 금성 서쪽 수풀 사이에서 닭 운다는 소리가 나서 고공을 보내어 살펴보니 금빛 작은 새끼줄에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운다고 했다. 고공이 돌아와 왕께 아뢰자 왕이 사람을 시켜 새끼를 잡아 열어보니 어린 아이가 있어 용모가 기이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내게 아들을 주신 것"이라 하고 데려다 기르니 점점 자라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이에 그 이름을 알지(나라말로 '어린이'란 뜻)라 하고 금상자에서 났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수풀을 계림이라 부르고 나라 이름도 그렇게 하였다.
가야산은 삭주 북쪽 30리에 있으며 우두산이라고도 불린다. 상서재는 삼국사기에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라 하였으며 사양 사람으로 12세에 상선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표수현위가 되었다가 계속하여 승무를 삼아 시독궁지어부를 제수받았다.
차차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험이 병마도통이 되어 치게 되자 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았다. 격문으로 적을 이겼고 광계 원년에 시독학사를 겸하여 나가 태산태수가 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니 그때가 난세였다.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가족들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있다가 여생을 마치었다. 상서재는 치원이 책을 읽던 곳으로 금주산 북쪽에 있었다.
고려 태조가 일어나자 치원이 그가 명을 받을 줄 알고 "계림 황엽이요 곡령 청송"이라는 글을 올렸다. 후인들이 치원의 거처를 일컬어 상서재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