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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와이드 리시버>의 줄거리:
와이드 리시버란 미식축구에서 적진 골라인을 향하여 앞으로 뛰어가서 쿼터백이 패스하는 공을 받는 공격수입니다. 요즈음 공격이 주로 패스를 통한 패턴으로 바뀌면서 와이드 리시버를 미식축구의 하이라이트라고 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선민이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로 와이드 리시버가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왜 지금 이곳에 있고 저곳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을 받아내야 하는 와이드 리시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와이드 리시버
(여호수아 13:1~33)
1.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2.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모든 지역과 그술 족속의 모든 지역
6.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 산지의 모든 주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7.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받아내는 와이드 리시버>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받아내는 와이드 리시버’
와이드 리시버는 미식축구의 포지션의 이름입니다. 미식축구는 한 번의 공격권이 주어지면 네 번에 걸쳐서 10야드를 전진하는 시도를 감행하게 됩니다. 상대방 팀의 수비에 막혀서 네 번 동안 최소 10야드를 전진하지 못하면 공격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10야드 전진할 때마다 4번의 공격권을 가져서, 최종적으로 골라인 넘어 엔드 존에 들어가면 터치다운이 되어서 6점이 주어지고 가산점이 주어집니다. 요즘은 미식축구의 공격패턴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을 쥐고 상대방 수비수의 벽을 뚫고 달려가는 플레이에서, 센터가 공을 잡아서 다리사이로 쿼터백에게 공을 주면, 줄 가장자리에 있는 와이드 리시버가 엔드 존을 향해서 뛰어가고 쿼터백이 공을 던져서 받게 하면 받은 자리까지 공격을 한 것으로 인정이 되고, 엔드 존에 들어가서 공을 받게 되면 바로 터치다운이 됩니다. 요즘은 쿼터백을 미식축구의 ‘꽃’이라고 한다면 와이드 리시버는 미식축구의 ‘하이라이트’라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뛰어가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상대방 수비수들도 공은 다른 곳에 있는데도 막 쫓아갑니다. 이어서 쿼터백이 굉장히 먼 거리에서 공을 던지고 어마어마한 점프력의 와이드 리시버가 뛰어서 공을 잡아내면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데, 이러한 와이드 리시버가 오늘 본문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땅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요단강을 건넌 뒤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정착하기 시작하는데 세 단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첫 단계는 전 민족의 군인들이 공동으로 출전해서 가나안의 주요 거점들을 확보합니다. 맨 처음에 중부의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남부 아모리 족속 다섯 왕의 동맹군을 파훼하면서 남부의 거점을 마련하고, 하솔 왕 야빈이 주축이 되었던 북쪽의 동맹군을 파훼해서 거점을 확보합니다. 두 번째 단계로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보면 아직 정복해야 될 땅이 많이 남았다고 하시면서, 아직 정복하지 않은 곳까지 계산에 넣으시고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단계는 각 지파별로 자기에게 할당된 영토를 완전 정복해 나가는 단계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는 사사기 초반부터 기록이 되어서 결국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완전 정복이 성취되게 됩니다. 이처럼 많은 지역이 미정복 상태로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미리 땅을 분할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전쟁을 종식시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호수아가 늙기도 했거니와 전쟁기간이 5년 이상 장기화됨에 따라서 백성들이 지친것도 맞습니다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핸디캡을 극복하지 못할 리는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동년배였던 갈렙도 이후에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여호수아가 늙은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에는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이 관계를 가지셨고 백성들은 모세를 따랐습니다. 그 모세의 위치에 여호수아가 서면서 모세와 하나님이 가지셨던 그 관계를 여호수아와 가지게 되고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따르게 됩니다. 이제 미정복 땅을 분할하라고 하시고 각 지파별로 자기에게 분할된 땅을 완전 정복하라고 하시는데,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었던 관계를 이스라엘의 전 지파와 각 종족에게로 보편화시키고 확산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할당된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싸워야 될 때에,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과 가졌던 그 관계를 모든 이스라엘 각자가 가지라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민을 사랑하시는 단계적 실현 과정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미 정복지와 땅 분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요단강 동편의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이야기를 자세히 하시면서, 이들은 요단강 서편에서는 땅을 분배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해주시는 과정 중에 14, 33절에서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다”는 이야기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하시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레위 지파는 평생을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중앙 성소가 아니면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 받아서 전국으로 흩어져 갈 때에 다 나뉘어져서 따라갑니다. 이들은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가나안 전 지역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따라가서 이들의 여호와 신앙을 돌보게 됩니다. 땅이 없으니 농사도 짓지 못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이 생업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선민들을 따라가서 여호와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입니다.
‘여호와 신앙’이란 결과적으로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가졌던 관계를, 이스라엘 백성들 각자가 자기 삶에서 갖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업 없는 레위인들의 이야기를 두 번이나 반복하시면서 땅 분배가 진행되는 이유는 ‘미식축구의 와이드 리시버처럼 흩어져 분배받은 땅으로 가서 하나님을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를 마음에 가질 수 있는 사람들로 유지되고 지킬 수 있기 위해 레위인이 따라갔던 것입니다.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이 센터로부터 공을 잡았을 때에, 와이드 리시버는 30야드 앞으로 뛰어가는데 쿼터백의 패스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전 지역으로 분산시키시는 것은, 땅 받아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수단적인 목적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그곳에 가서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와이드 리시버가 되어서 하나님을 받아내라’는 것인데 레위인이 그것을 돕습니다.
미식축구에서 와이드 리시버가 공을 잡기 위해서는 상대방 수비수들의 강력한 태클을 피해서 공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레위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내진 그곳에서 하나님을 받아내기 위한 와이드 리시버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방해가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사명도 기본적으로 와이드 리시버의 다름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하늘에서 하나님아버지를 받는 것을 업으로 생각하며 존재하시던 분으로, 하나님아버지를 받아서 하나님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을 갖기만 하시면서 기쁨으로 충만하여서 아버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땅에 존재하는 인격 중에서는 아무도 하늘의 하나님을 받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 와이드 리시버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사람들 사이에서 거하시며 하늘의 하나님아버지를 받는 것을 사명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받아 내시는 와이드 리시버로서 하셨던 모든 말씀과 행위는 예수님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터치다운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예수님이 받아들이심으로 그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와이드 리시버의 사명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뿐만이 아닙니다.
모세의 사명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와이드 리시버였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아내 십보라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양치기로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인도하고 이끌며 리더십을 발휘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40년 동안 양치기 하면서 배운 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데 무슨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쿼터백이 와이드 리시버를 30야드 앞으로 뛰어가라’고 명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와이드 리시버가 점프를 해서 공중의 공을 잡듯이, 하늘의 하나님을 받아내기 위해서 모세가 마음을 하늘로 뻗어서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께서 모세의 육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 앞으로 달려가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앞으로 달려 나가서 공중으로 점프를 해서 하나님을 붙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한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구약 성경에서 가장 전형적인 와이드 리시버로서는 요셉이 있습니다. 창45:4~5절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 본래의 신분을 형들에게 드러낼 때에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쿼터백이 와이드 리시버에게 20~30야드 앞으로 뛰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 땅으로 달려가도록 보내셨다’고 합니다. 기근으로 인해서 죽어갈 근동지역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받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애굽 땅에는 하나님을 받아낼 와이드 리시버가 아무도 없었기에 히브리 종족의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것인데 ‘하나님의 계획을 애굽에서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 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하나님을 받아내라’고 하셨고 요셉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하는 일마다 다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닥쳐서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갑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분노에 차서 보디발의 아내를 죽이겠다며 이를 갈지도 모르지만, 요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받아낼 와이드 리시버로서 감옥으로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총리 자리에 세우셨을 때에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받아내는 와이드 리시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모든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져서 하나님을 받아냅니다. 선교사님들이 몽고,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아프리카로 가시는 것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받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와이드 리시버가 되면 나를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갖기에 올인 하는 것입니다. 내게 왜 가정을 주셨습니까? 가정에서 가족과 더불어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하나님을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왜 내게 직장을 주셨습니까? 직장에서 돈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하나님을 받아내는 와이드 리시버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떻게 역사하실까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받아낼 것이고 어떻게 하나님을 많이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만 신경 쓰면 되는데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위치를 잘 잡으면 됩니다. 쿼터백이 공을 던질 때에 와이드 리시버가 위치를 잘 잡으면 공을 받을 수 있어요.
십자가를 기준으로 한편으로는 세상이 있고 세상이 끝나는 경계에는 십자가가 서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너머에는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부활과 승천까지의 공간이 존재합니다. 와이드 리시버가 공을 잡기 위해 공중으로 점프해서 팔을 뻗듯이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 너머로 쭉 뻗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세상 경계 끝에 서있는데 마음이 십자가의 경계 안으로 돌아와서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골3:2절의 말씀처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인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머물기만 하면, 십자가에 머물기 위해서는 계속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일이나 대상이나 사람을 통해서도 기쁨과 만족을 얻지 않겠다는 것인데,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디서든지 내 기쁨과 상관없고 내 행복과 상관없고 내 만족과 상관이 없다고 믿으며 계속해서 죽어서, 십자가에서 승천까지의 공간에 머물기만 하면 하나님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받아내는 역사가(친밀도) 점점 깊어지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갖고 계셨던 뜻들이 계속해서 이 땅에 터치다운 됩니다.
땅을 분배받아 흩어져야 될 선민들에게 ‘레위인들이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신 이유는, 흩어진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받아내는 와이드 리시버로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인이 하는 일은 여호와 신앙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 어디로 보내져 살게 되시든지, 그곳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의 손을 쭉 뻗어서 십자가 너머 하나님을 받아내는 와이드 리시버가 되셔서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을 통해 터치다운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시장에 있든지 학교에 있든지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내야 하는 와이드 리시버임을 잊지 않게 해주셔서 십자가 생활화가 끊이지 않도록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