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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간츠펠트 효과와 십자가생활화>의 줄거리:
의도적으로 빛과 소리가 완전히 차단 된 곳에 장시간 머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실험상으로 우리의 뇌는 절대 고요와 암흑을 견뎌내지 못하고 온갖 환상을 불러오는 환각현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독일의 심리학자인 볼프강 메츠거는 간츠펠트 효과(Ganzfeld effect)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간츠펠트 효과가 십자가 복음 이해에, 또한 선민들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다른 신들 섬기기의 이유를 밝히려는 노력에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간츠펠트 효과와 십자가생활화
(사사기 10:1~18)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간츠펠트 효과와 십자가 생활화>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간츠펠트 효과와 십자가 생활화’
모든 사람들은 감각포화 상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감각포화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감각 자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한순간만이라도 마음을 분산시키고 자극하는 감각과포화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평화와 쉼을 얻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적 상태는 이러한 감각 자극으로부터 도망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1930년대에 독일의 심리학자 볼프강 매츠거가 인간에게서 시각을 완전히 차단한 상태에서 장시간 머물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연구했습니다. 시각을 완전히 차단하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시각이 완전히 차단된 것을 “간츠펠트(Ganzfeld)”라고 하는데 독일어의 ‘펠트’는 영어의 ‘field’를 말하고 ‘간츠’는 ‘전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츠펠트 이펙트’는 영어로 ‘total field effect’로 ‘시야(visual field)자체를 완전히 차단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사람이 머물게 되면 편안히 쉬면 좋겠는데, 우리의 뇌가 암흑을 버텨내지를 못하고 환각이나 환상을 만들어 내서 ‘본다.’는 감각을 계속해서 작용시키지 않으면 못 견딘다고 합니다.
이 간츠펠트 이펙트의 범위를 확대해서 우리의 색(보고), 성(듣고), 향(냄새 맡고) 미(맛보고), 촉(느끼고)의 감각을 차단하면 인간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각이 차단되어도 뇌가 끊임없이 작용하면서 육체의 색, 성, 향, 미, 촉의 감각 대신에 환상을 만들어 내는데 그 환상의 내용이 가지가지로 굉장히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을 의지해서 살아가며, 뇌가 오감이 차단되는 것을 싫어하여 환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데, 신앙인인 저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심리학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뇌가 앞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을 근거로 살고 있다고 마음이 믿고 있기 때문에, 감각이 차단되면 죽음으로 인식하게 되어서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싫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감각을 살려내려고 하다 보니 환상과 환각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심리학자들은 이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되었고 당신을 알려주셔서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 너머의 세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오감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이 모르는 세계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복음에 연결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 간츠펠트 이펙트는 목욕탕 같은 곳에 사람을 데려다 감각의 80%정도를 차단하면 명상에 깊이 빠졌을 때와 같은 효과를 얻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하는데, 나머지 20%가 내가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에 감각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 마음의 평강을 준다는 것입니다. 감각 포화상태가 우리 마음을 쉴 새 없이 괴롭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차단되면 죽음을 두려워해서 환상과 환각을 보는 이유는 감각이 죽으면 죽는 것으로 알기 때문인데 감각이 차단되면 죽은 것과 같은 것 아닙니까? 마음은 육체 안에 갇혀서 죽지 않았는데 감각이 없으면 두려워하므로 20%라도 감각을 주어서 안심을 시켜주면 감각이 적을수록 마음은 평안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십자가 생활화와 연결이 되는 것일까요?
신앙이란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셔서 순간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늘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가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차피 인간의 육체가 지닌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으로 포착이 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관계하고 믿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 감염된 오감을 통해서 찾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마음이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자극에 의해서 감염되기 때문입니다.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은 오직 세상 것들을 감각해서 마음에 전달하기 때문에 세상에 감염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아봐야 오감을 초월해 계신 영이신 하나님과 내 마음의 만남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실제로는 영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구분해 내자면 다른 신을 섬기는 셈인데, 이것이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죽음을 자처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붙잡음으로 내 감각이 차단된 상태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십자가를 통해서 마치 내 감각이 죽은 것 같은 느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는데 ‘죽는다.’는 것은 ‘감각이 없다’는 것이고 ‘감각 자극에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간츠펠트 이펙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감각 자극을 차단하여 죽은 사람처럼 믿음을 통하여 간츠펠트 이펙트가 나타나게 될 때에 우리 마음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동선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색, 성, 향, 미, 촉의 자극에 대해서 죽고 간츠펠트 이펙트 안으로 들어갑니다.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십자가로 간츠펠트 이펙트로 들어가면 약속에 따라서 주님과 함께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서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이 만나게 되면 마음에 충만함이 생기고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 오감을 통해서 포착되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총알처럼 발사되어 나갑니다.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은 내가 가는 곳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맛을 느끼고 냄새 맡는 대상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발사되어지는 통로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사사 돌라와 야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이 각각 20여 년 동안 사사의 역할을 한 것 만 나오지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을 행했는지는 언급이 되지 않는데 이들의 이름만 거명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다음에 이어서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또 섬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제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토록 여러 이방민족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신들을 섬긴다.’고 하니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크게 회개를 합니다. 전에는 환란에 처했을 때 원망과 불평 섞인 울부짖음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신들을 되풀이해서 섬기게 되는 현상 자체에 주목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들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왔지만 이름만 나온 것은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구체적인 업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그 현상 자체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사사들이 머물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금방 다른 신을 섬기기를 반복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간츠펠트 이펙트로 설명이 됩니다.
다른 신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라고 하고 1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고 하는데 이 모든 신들을 하나로 묶어서 통칭하여 ‘바알들을 섬겼다’고 하는데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여기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들을 섬겼다.’는 것은 신의 정의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신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정의를 내리면 신은 어떠한 존재입니까? 내 마음에 만족을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존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은 진공을 원치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주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비어있는 상태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진공상태로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끊임없이 마음 안으로 무엇인가를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이 마음이 타락 이후로 이 세상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열려있는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이 열려있는 관문을 통해서 끊임없는 자극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되어서 세상에 감염된 상태입니다. 세상에 감염된 상태에서는 이 세상이 정한 가치들인 내게 만족을 줄 수 있고,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서 기쁨을 주고, 행복의 근거가 되어줄 수 있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오감의 관문을 통하여 마음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선민들이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유가 첫째는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마음의 진공 상태를 채우려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그 마음이 세상에 갇혀 있다 보니 세상과 접하게 되는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의 관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극에 반응하게 되고 세상에 감염되고 맙니다. 세상에 감염된 상태로 세상에서의 기능적 신들로 여겨서 내게 만족과 기쁨을 주고 행복의 이유가 되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가치들을 마음으로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바알들을 섬기는 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혼합 종교 상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우리도 마음으로 바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돈 좋아하는 것이 바알들을 섬기는 것이고,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나 부흥 좋아하는 것도 바알들을 섬기는 것으로 마음이 감염상태로 빠진 것입니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간츠펠트 이펙트입니다. 우리 마음이 감각 과포화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에 빠져나와야만 하는데 그 유일한 길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합니다. 끊임없이 오감을 통해서 마음에 자극이 주어지고 세상에 감염된 상태로 세상이 정한 가치가 없으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가치가 생기면 기뻐하다가 또 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아서 지금도 내 마음에 색, 성, 향, 미, 촉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이 세상의 자극에 대해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간츠펠트 상태인 차단된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에, 그 죽음에는 약속이 주어지는데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내 마음을 주님의 동선을 따라 하늘로 끌어올려 주셔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감각이 차단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나, 하나님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전념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조건인 간츠펠트 이펙트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서 충만하게 된 뒤에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발사되게 됩니다. 돈이나 음식,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발사되는 것입니다.
왜 선민이 계속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기능적 의미의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었습니까?
간츠펠트 이펙트를 우리 자신에게 실현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십자가 생활화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날마다 죽으라.’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오감을 통하여 마음으로 들어오는 자극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은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십자가에서 내 마음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주님 따라 먼저 하나님께 반응해야 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극에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선민은 세상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게 됩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에 우리 삶의 현장은 감각과포화 상태입니다. 간츠펠트 이펙트를 십자가를 통해서 나에게 실현시켜야 합니다. 사장님이 부당하게 나무랄 때도 ‘나는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면 나무라는 사장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대상을 향하여 이렇게 간츠펠트 이펙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약의 선민들의 반복적인 다른 신 섬김은 결코 우리와 무관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 안에서 저희들에게 온전한 간츠펠트 이펙트가 실현됨으로서, 우리 마음은 오감을 통해 주어지는 감각을 벗어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만난 상태에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다시금 오감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이웃을 향해 이 세상에서 사건들을 향해 상황을 향해 뿜어져 나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