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의 전면에는 晩山(만산)이라 쓴 대원군의 친필편액이 걸려 있다.
만산 선생은 영릉참봉(英陵參奉),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도산서원장등을 지냈으나 1905년 이후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자택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국운회복의 념을 읊었다 한다.
일제강점기때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가 배달 사고가 나서 독립자금을 세 번이나 보냈던 일화도 있다
사랑채 산천옥이다
왼쪽에는 3칸 서당마당이 있고 행랑채 맞은편에 ㅁ자형 정침이 있다.
권진사댁에서 나와 부석사로 향하던 중 닭실마을에 들렀다
유곡마을(닭실마을)은 1380년에 권벌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이다. 마을 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고 하여 닭실마을로도 불린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이 지역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승지로 기록하였다. 마을 이름이 닭실인 것은 동쪽의 옥적봉이 수탉을 닮고, 서쪽의 백운령이 암탉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곡마을은 안동권씨의 세거지인데, 산 아래에 종가가 위치하고 있고, 종가의 사랑채에 청암정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동네길을 걸어가는 운치가 명절때 고향마을 걷는 기분으로 포근하면서도 편안하였다
봉화 청암정(靑巖亭)과 석천계곡(石泉溪谷)은 2009년에 명승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로, 냇물을 끌어 올려 연못을 파고 조촐한 장대석 돌다리를 놓았다.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여있는 형상이다.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모습 그대로 살려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해 세운 집으로서, 위치에 따라 정자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마루가 깔려 있다.
원래 구들방을 놓았으나 꿈에 불등을 달고 괴로워하는 거북이 현몽하여 구들을 없애고 마루로 바꾸었다 한다
청암정 마당까지만 개방한다 안내되었는데 때마침 문화원과 관련된 사람들이 와서 청암정 마루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글씨와 현판 등을 볼 수 있었다
청암정은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1526년(중종 21)에 조성한 정자이다.
권벌은 조선 시대의 문신(1478~1548)으로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이다. 경기도 관찰사ㆍ형조 참판ㆍ한성부 판윤 따위를 지냈으며,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고,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
후손이 영남 남인으로 활동해서 그런지 정자 안 현판에는 조선 남인 명사들의 글과 글씨가 많이 남아있었다
먼저 '청암수석'이란 글씨는 미수 허목선생의 글씨이다.
이것은 후손인 권두경 선생의 현판이다
이 지역 최고의 스승이자 선비 퇴계 이황의 현판이다 퇴계와는 3~5살 차이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한다
연초재 오상렴 공께서도 여기에서 퇴계선생의 운으로 시를 지은게 있다
靑巖亭敬次退溪先生韻(靑巖亭에서 삼가 退溪先生(李滉)의 韻을 빌어 지음)
고개 밖에 기이하게 노는 것 본래 마음에 흡족한데 嶺外奇遊愜素衷
靑巖亭 쓸쓸하여 개인 하늘에 의지해 있네 巖亭寥落倚晴空
구름 뿌리는 아무 일 없이 기둥 밑에 막혔고 雲根妥帖軒楹下
물 기운은 자리 가운데에 드날리고 있네 水氣悠揚几席中
연꽃 향기에서는 君子의 德을 생각하고 荷憶馨香君子德
소나무의 모습에서는 大臣의 風度 보겠네 松瞻冠劔大臣風
찬 일기에 굳은 절개 지금 누구와 같으리 歲寒勁節今誰似
탄식하면서 公을 생각하니 뜻이 다함이 없네 歎息思公意不窮
이것은 채제공 선생의 현판이다
청암정을 빙 둘러 물을 끌어다 대었는데 겨울에 물을 대면 청암정을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암석이 얼었다 녹으며 깨질 우려가 있어 정자에도 영향을 줄까 염려해 겨울에는 물을 빼 놓는다는 설명이다
바로 옆에 충재 박물관이 있어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유물을 볼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 국가보조금과 후선들의 성금을 모아 종가 경내에 작은 규모의 유물관을 지었으나 전시관리 및 주변경관과 관련된 여러문제로 인하여 2007년 현재의 위치에 재건립하였다.
박물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각종 소장견적, 고문서, 유묵등 총5건 40종 482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3,000여 책의 전적을 포함한 각종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한다.
충재박물관을 나와 석천정사로 산책했다
풍광과 함께 겨울철 수풀에서 나오는 신선한 공기 그리고 석천계곡의 맑은 물소리, 아울러 풍수지리적 명당에서 나오는 따스한 온기까지 합해지며 산책길은 더없이 행복했다
선천계곡 사이 난 징검다리를 건너 소나무 수림이 지키는 마을길을 따라 50여 미터 걸으니 석천정사가 나타났다
내성천의 상류, 봉화의 석천계곡은 비경이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협곡은 아주 좁게 파여 S자형으로 큰 굽이를 이루고 있다.
마치 태극의 문양처럼 휘돌아 흐르는 사행천이다. 아름다운 석천계곡을 따라 난 옛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한 굽이 왼쪽으로 돌면, 곧바로 고졸하고 청량하기 그지없는 풍광을 만나게 된다.
여울 건너로 길게 자리한 석축 위의 정자가 창송으로 감싸여 있는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나 다름없다.
정자 앞의 계곡은 커다란 너럭바위, 깨끗한 강자갈과 모래,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계류가 옛날의 순수한 경치를 그대로 간직하며 흐르고 있다.
석천정사는 16세기 중반 충재 권벌의 큰 아들인 청암 권동보가 초계 군수에 임명되었다가 향리로 돌아와 선대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창건한 정자로서 청암정과 함께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및 명승 제 60호이다.
춘양목으로 지어졌으며 주위는 기암절벽과 노송으로 장관을 이룬다.
석천정사를 다시 되돌아나와 봉화를 거쳐 물야면으로 향하는 길 중간 석천계곡을 낀 산 한쪽에는 삼계서원이 있다
삼계서원(三溪書院)은 조선 중종때 명신 권벌(權橃)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우옹이 1588년(선조 21)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601년(선조 31)에 한강 정구(鄭逑)가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당호를 정일당(精一堂), 동재를 사무사(思無邪), 서재를 모불경(母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 각각 명명하였다 그리고 1660년(현종 1)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받았다.
서원에서 다시 부석사로 향하는 도중 물야면에는 또다른 고택이 있다
바로 이몽룡 생가지로 알려진 성이성 선생의 고택 계서당이다
계서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계서 성이성(1595~1664)선생이 살던 곳이다. 성이성은, 창녕 사람으로 남원 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선생의 아들로 인조 5년(1627) 문과에 급제했다. 진주부사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4번이나 어사로 등용되었으며,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훗날에 부제학으로 추서받고 청백사로 녹선되었다.
이 성이성 선생의 묘갈을 우리 약산 오광운 선조가 찬했으므로 동복 오씨와도 관련이 깊다 하겠다
계서당은 광해군 5년(1613)에 성이성 선생이 건립하여 문중자제들의 훈학과 후학배양에 힘쓰던 곳으로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의 사랑채(정면3칸, 측면 3칸)와 중문칸으로 연이어져 있다.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이몽룡이 읊었던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는 시는 성이성이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몽룡과 흡사한 성이성 선생의 행적내용이 계서공파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계서선생일고>, <필원산어>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작자 미상으로 알려졌던 춘향전의 지은이가 성이성 선생으로 추정하고 이 계서당을 이몽룡 생가지로 홍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오늘 해도 얼마 남지 않아 해찰하지 않고 영주 부석사로 직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