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신유 눅14:1-6
바리새인 가운데 한 지도급인 자가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고 거기에 고창병 든 자가 있었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몰려와 예수께서 어떻게 하는가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의 두령이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고창병은 일종의 만성병으로서 일반적으로 그런 병자는 초대하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초대하는 자리에 이 병자도 초대하여 바로 예수의 눈 앞에 앉혀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먼저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십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안식일의 초대
1) 간계를 위한 초대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1절). 예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공박하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바리새인의 두령은 그 지역 바리새인 집단의 지도자였을 것이며, 그가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한 것을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를 고소할 어떤 증거를 찾기 위한 간계에서였습니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는 말씀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난치병으로 알려진 고창병 든 환자를 주님 가까이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더구나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은 예수를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의도를 충분히 아시면서도 그 초대에 응하셨으며,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은 그들의 도전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피한다고 해서 도전이 주님을 같이 피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예수의 인간관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1절). 예수께서 인간을 보시는 관점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소유의 유무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서 구속 사역적인 안목으로 모든 인간을 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바리새인의 두령이라 할지라도, 또 그의 초대에 간계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당신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14:6)
3) 메시야적 기회 주님에게 있어서의 모든 기회는 다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기회로 삼으로시고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어떤 때라도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그의 사역에 자신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은 메시야적 기회였습니다. 주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그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환경을 지배하시고, 또 거기서 구속 사역을 수행할 수 있으셨던 분입니다.
2. 안식일과 신유
1) 문제를 제기하심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일로 인하여 시비가 생겼을 때, 주님께서 먼저 도전적으로 안식일에 있어서의 신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여기에서만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대로 그들의 초대는 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악의적인 간계에서 나온 초대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조성해 놓은 상황을 통하여 그들이 주님에게 도전하고 있음을 간파하였고 그들에게 '대답하여…가라사대' 하시면서 그들의 도전에 역습을 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대답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엿보고' 있던 비겁한 그들은 허를 찔렸음인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비겁한 자들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아니하고 뒤에서 음모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2) 안식일과 생명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절). 고소할 증거를 찾기 위하여 예수를 초청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잠잠하자 예수께서는 고창병 든 환자를 즉시 고치시고 돌려보내셨습니다. 상황에 따라 소신을 변경하는 그런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이상, 안식일에 위험에 처한 생명을 방치한다는 것은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너희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보다 생명은 더 중요한 것이며, 참 안식은 고창병 든 병자가 고침 받은 것처럼,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겸손히 행하라 눅14:7-9
하나님께서 세우신 피조 만물이 나름대로의 처지와 환경에 맞는 자신들의 자리가 있듯이 사람 역시 각 사람 나름대로의 처지와 분수에 따른 자리가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타락과 동시에 무너진 이러한 질서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자신들의 분수와 처지를 모르고 경망되이 행하는 자들에게 분수와 본분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1.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는 것보다는 되도록이면 높이려 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는 우월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신의 부족과 나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 모두는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을 뿐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는 길은 이러한 점들을 인정하고 시인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1)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높은 자를 끌어내려 자신과 대등하게 만들려는 고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심리에서 본다면 자신보다 못하거나 혹은 거의 비슷한 이를 자신보다 높이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님의 제자 되었던 세배데의 두 아들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일이며(마20:20-27), 자기들보다 높음을 인정치 않으려는 주님을 못박은 자들의 경우서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마26:57-68)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셔서 제자들을 높이셨듯이 남을 높이는 것은 곧 자신을 높이는 길이요 남을 낮추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단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며 그것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선적인 본성은 이것을 인정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인 양 숨기고 가장하기를 대부분 좋아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양 덤비고 파헤칩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노력들은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ㅅ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높이며 교만하여 경망되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과 나약함을 느끼고 깨닫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지만 결국은 자신을 높이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눅18:14)
2.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자리란 곧 명예와 신분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높은 자리일수록 명예와 권세는 말할 필요없이 그 값을 더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자리보다는 보다 높고 나은 자리로 옮겨 앉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자리는 마땅하고 합당한 주인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합당치 못한 사람이 합당치 못한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자신 뿐 아니라 그와 관계하는 모든 환경,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1) 말석에 앉는 것입니다. 말석은 물론 보잘것 없고 낮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석을 권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석을 권하는 것은 본문 다음절에 설명되엇듯이 그것은 참으로 합당한 권면입니다. 언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편치 않은 자리에 불안하게 앉아있기 보다는 미리 말석에 앉아 부끄러움을 면하고 내좇김을 면하라는 지혜로운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먼저 말석에 앉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처사라 하겠습니다. 2)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처지를 아는 것은 곧 자신의 형편을 살피고 파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자신이 먼저 알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은 곧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자신의 한계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또는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열등감에 빠져 자신을 부정적으로 몰고가는 것을 스스로 조정하고 견제할 수 있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지를 아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바로 찾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자신을 믿음에 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행함에 있어 자신을 낮추며 분수에 맞는 자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요구일 뿐 완전하게 이 요구에 응할 사람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처음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아담 이후 타락되어진 본능에 사람이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유1:10)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어진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되어지는 것이요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히11:1)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겸손 눅14:10,11 본문을 보면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들과 그 크신 사랑의 도를 전파하시면서 어떻게 이렇게 일상생활의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실 수 있는가 하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희생의 원리에ㅐ 지나치게 관심을 쏟은 나머지 일상의 세밀히 작은 일에 소홀한 자들을 심히 불쾌하게 여기셨고, 그리고 작은 친절과 선행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통하여 일상 생활 속에서 낮은 자리를 선택할 줄 아는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끝까지 섬김의 위치를 지키는 일 낮은 곳을 선택하는 겸손은 섬김의 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은 인내심과 용기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 청함을 받았을 때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으로 교훈하시기 전에 목격하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상좌를 선택해서 앉는 장면이었습니다. (7절) 그리고 그들이 청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인을 시켜서 모셔왔다는 말인데, 그것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청함을 받은 자들이란 '케클레메누스'인데 이것은 신분상으로 고귀한 사람들을 사람을 보내서 초청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신분이나 품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ㅇ들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러한 욕망을 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써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빌2:6-11)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이나 명예를 가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암시해 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남들이 그 사실을 다 알고 자신을 초청까지 하면서 존경을 표해 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명예를 자기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줄로 알고 감사하며 겸손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2) 낮은 자리가 비어있을 때 상좌는 남들에게 자신을 분명히 내어보일 수 있고, 모든 좌석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말석은 헬라어로 '에스카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상좌로부터 제일 멀리 있는 자리이며, 가장 비천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상좌와 말석을 공히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석을 선택할라고 권하십니다. 우리가 높은 신분에 있다면 자신을 낮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치켜 세울 때 우리는 얼마나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낮은 곳을 선택하는 용기는 자기 실존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언제나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참된 자각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적당한 곳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겸손을 가장한 많은 사람들은 적당한 곳에서 자기를 뽐내며 낮아지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적당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강도 바라바보다 더 흉악한 죄인으로 몰려 무덤에 내려가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2. 궁극적인 영광에 이르는 길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단어는 '벗이여'라는 말과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는 왜 우리가 낮은 곳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겸손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1)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줌 헬라어 원문에는 이 단어가 호격으로 '필레'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에는 '사랑하는 자', '친구', '교제를 하고 싶은 마음을 주는 자'라는 듯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친절한 호칭으로 사용됩니다. 겸손함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역겨움을 주는 겸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식된 겸손이거나 오히려 자신을 보이기 위해 과장된 행동으로 하는 겸손이 바로 그러한 겸손입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춤으로써 다른 사람을 높여주며,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데서 오는 겸손은 다른 사람을 편안게 해주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복음전파는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2) 영광을 얻게 됨 영광이라는 말에는 '생각한다', '선하게 여긴다;', '옳게 여긴다', '기쁘게 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영광을 명예와 동등한 의미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개념입니다. 무릇 자기를 낮추는 행동은 많은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비천하게 내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취하신 영광도 바로 이러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선행위 눅14:12-14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회제도를 보더라도 거의가 가진 자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없는 자는 계속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바로 그러한 빈곤한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그의 도움이 필요없는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죄인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1. 자선의 대상 1) 부한 이웃은 도움이 필요없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12절). 이 말씀이 가까운 이웃에게는 도움을 베풀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보상을 바라는 자선은 진정한 자선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당장은 이익이 안 되더라도 후에 큰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돈과 시간을 기꺼이 희생하려 합니다. 부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바로 그와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이지 자선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베푼 도움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다면 그것은 도움을 줄 대상을 잘못 택했기 때문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베푸는 도움은 이 세상에서 그 대가를 다 받게 되므로 하늘나라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마6:2)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12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는 따로 있는데, 도움이 필요없는 부자에게 베푼다면 그것은 낭비입니다. 자신의 세상적인 만족을 위해 쓰여지는 비용은 아껴 두었다가 꼭 필요한 자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2) 가난한 자에게 도움이 필요합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 붖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그들에게 도움을 준 자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 줄 수 없습니다. 이런 보상을 해줄 수 없는 자에게 하는 봉사가 바로 자선입니다. 도움이 꼭 필요한 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베푸는 도움이 순수한 자선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비록 그들에게 베풀어진 자선에 대해 특별히 보상을 해 줄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에게 자선을 베푼 자의 은혜를 끝까지 기억할 것입니다. 또 그들의 아름다운 자선행위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쌓는 귀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마9:12),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입니다.
2. 자선의 대가 1) 행위 자체가 복이 됩니다.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14절). 보상을 바라고 도움을 주는 행위는 그 자체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이므로 진정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그 도움이 손해라고 생각하며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선은 처음부터 보상을 바라고 행한 것이 아니므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행위가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자선 행위는 하늘나라의 상급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보람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보상해 줄 수 없는 자에게 베푼다고 해서 손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자가 우리의 도움을 인해 위로를 받고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 자체가 귀한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늘의 보화를 받게 됩니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14절) 눈 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하늘나라의 축복을 버린다면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면 크나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상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에 대해 아무것으로도 보상해 줄 수 없지만 그들 대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쌓아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선은 최고의 축복을 보장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고의 것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세상 것은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세상 것으로 보상 받으려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이 부활하는 주의 재림 때에 우리가 베푼 자선에 대해 최고의 선물로 보답하실 것입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19:21)
천국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 눅14:15-20 본문은 22장의 '왕의 잔치'와 거의 같은 소재의 비유이지만 이 장 역시 그 의도하는 바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밭을 산 사람 본문의 세 사람 가운데 그 처음 사람이 '밭을 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농부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어부는 고기가 있는 바다를 필요로 하듯 농부는 농토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밭을 사고 늘리는 것은 농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땅을 샀다'는 것은 농토를 늘리고 재산을 늘렸다는 것인데 영적의미로 설명하면 재산, 즉 욕심을 늘렸다는 것이요, 탐심을 배가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밭을 산 사람은 1) 육적인 재산을 늘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을 줄이는 것보다 늘리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을수록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재산을 모으고 늘리려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세상적이며, 육적인 재산을 늘리고 확장하는 행위는 그것에 의지하고 그것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며 쉼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눅12:15-21) 자연 영적인 일에 둔감하여져서 그 영원한 기쁨과 쉼의 의지를 외면하고 거절하고 묵살하게 되는, 그러나 그들이 기대해 마지 않는 이러한 육적인 가치들은 반짝이고 없어지는 아침 이슬같은 것들로 실망과 좌절로 그 기대에 보응할 뿐입니다. 2) 영적인 교만을 늘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이 가르치는 바 진리를 자기 편리에 따라 해석하고 그 편리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의 영혼의 자리의 밭을 없애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의 영혼의 밭은 잡초가 무성한 황폐한 토양으로 순종과 겸손의 곡식이 자랄 수 없는 무용지물의 밭이 되어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이기심과 고집, 또한 지나친 재산의 증식에만 매달린다면 영원한 천국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고 포기하는 우매함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소를 산 사람 본문에 등장하는 두번째 사람은 '소를 샀다'고 하였는데, '소'는 좋은 의미로 근면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세상적인 '힘'을 나타내고자 할 때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으며, 좀더 비약하자면 '권력'을 상징한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소를 샀다는 것은 곧 '힘과 권력'을 더 얻었다는 것이요 보다더 큰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권력지향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힘을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9절의 주인공이 '힘을 샀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적인 능력을 더 얻었다는 것으로 그는 더욱 사악한 능력을 증가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에게는 천국 잔치는 무용한 것이며, 전혀 참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쁘지 않는 잔치로 여겨져서 이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고 묵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산 소, 즉 새로 얻은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더 크고 아름다운 잔치에 초대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세상적인 힘의 배가는 결국 슬픔과 탄식의 잔치로 이들을 초대할 것이며, 이미 그 잔치의 참석이 예약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힘을 더 얻고자 해야 할 것이며, 그의 능력을 더 얻으려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입니다. 선한 의미에서 권력은 질서의 수단이 되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권력은 곧 파괴와 무질서, 그리고 자기 과시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권력이 쥐어지게 되면 하늘을 찌를 듯이 기고만장하여 사욕과 정욕으로 만족케 하는 도구로 이를 악용하고 남용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듯 영원히 지속되는 권력은 없으며, 악용된 권력의 종말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응으로 끝맺어집니다. 그러므로 소를 산 것을 핑계로 천국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은 그 소의 권력과 힘에 의해 언젠가는 밟히고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3. 장가간 사람 새로 장가 든 사람에게 율법이 약 일년간 병역 등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는 뜻입니다. (신24:5) 그러나 장가를 들었다고 해서 하늘잔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이 율법의 정신을 잘못 악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잔치는 부부가 공히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잔치요 보다더 아내의 기쁨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현실적 육체적 즐거움을 위해 보다 영원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육체적 쾌락의 탐닉은 인간을 백치의 상태로 타락시킵니다.
아직도 빈 자리가 눅14:21-22 본문은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15절) 이들이 식사한 때는 저녁만찬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성경의 본문에 쓰인 잔치라는 뜻의 단어는 '데이프논'으로서 최후의 만찬도 이 헬라어 단어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잔치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교회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일부인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긴박함과 확장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1. 구속사역의 긴박함 본문 21,22절에서는 잔치를 열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초청받아 온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그러한 사실에 대해 그 주인의 분노하였다는 기사로 인해 매우 긴박감이 도는 분위기임을 보여줍니다. 1) 시간이 다 되었음 잔치의 주인이 그 종들을 시켜서 사람들을 청하러 보낸 시간은 잔치할 시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17절) 그러나 막상 종들을 시켜서 사람들을 초청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초청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전에 주인의 초청을 수락한 적이 잇고, 또 그 초청을 기뻐하던 자들이었습니다. (17절) 그래서 주인은 그들의 수효에 맞추어 음식을 장만하고 자리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들의 마음은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잔치 시간이 임박하였고 준비한 음식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그것을 먹지 못해 버려야 할 형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잔치는 자기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구원의 잔치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구속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지만 기왕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메시야 되시는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만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바로 저녁 만찬을 베푸는 시간이었습니다. 곧 어두움이 다가오는 임박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구속사역이 시간적으로 얼마나 임박한 사역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2) 집주인이 노하심 초청받은 자들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약속 불이행이며, 또 그것은 초청한 주인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헬라어로 '오르기스데이스'는 '형벌, 징계'라는 뜻으로, 또 '분노, 복수'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즉 복음의 손길을 업신여기며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에 대한 징계의 때가 임박함으로 인한 구속사역의 긴박성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실제로 초청을 받은 자들에 대한 주인의 분노로 인하여 초청받기에 합당한 자들이 초청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른 쪽에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 초청받은 자들에게는 진노가 되었습니다. 노하기 이전에 마련된 잔치자리는 다 채워야 하므로 복음 전파는 더욱더 시급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할 만한 때에 소유하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자 할 때에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초청받은 자들의 거처 본문에서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보면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의 거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나 성문 앞, 아니면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골목 등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행인들로부터 구걸하거나 적선을 받았던 그러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감히 초청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였습니다. 2) 거절하지 않고 순종한 사람들 그들이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부끄러움이나 수치, 또는 처지를 생각지 않고 순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자들에게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전파된 원인은 가난한 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21절의 '데려오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에이사가게'로서 '몰고 오라, 인도해 오라, 안내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목자들이 목자들이 양을 모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목자적인 사역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와같이 힘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양과 같은 자들일지라도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에게만 베풀어지는 특별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긴박함은 22절에 기록된 종의 대답 속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 종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최선을 다했으나 아직도 빈 자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사역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땅 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아직도 비어있는 이 잔치석을 채워야만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초청된 사람들 눅 14:23,24 바리새인의 두령집에 초대받아 고창병 든 병자를 고쳐주신 다음, 주님은 쉬지 아니하시고 계속 교훈을 하셨습니다. 잔치집에 초대되었을 때에는 상석에 말고 말석에 앉는것이 더 현명하다는 교훈과(7-11), 잔치를 배설하고 누구를 초대할 때에는 갚은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을 초대하는 것이 복된 일이라고 말씀하신(12-14절) 다음에 '큰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이 큰 잔치의 비유 가운데 마지막 초청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잔치집을 채우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초청의 강권성과 구속 사역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지막으로 초청된 사람들 1) 마지막으로 초청된 사람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절) 주인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초청한 사람들은 첫째, 정식으로 초청한 사람, 둘째, 시내와 거리와 골목에서 데려온 가난하고 병든 자들, 세째, 길과 산울가에서 강권하여 데려온 자들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초청자들은 세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로서 마지막으로 성 안에 살지도 못하고 길에서 방황하는 자이거나 산울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완전히 소외되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의 영역 밖에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주인의 집은 채워지도록 섭리되고 있습니다. (엡2:11-13) 2) 유대인들 가운데 구원받을 자들 '큰 잔치'(16절)에 정식으로 초청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 대다수의 유대인들로서 특히 주님 당시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구약 율법 종교의 사슬에 매여 있던 자들이며, 그들은 ① 밭을 샀기 때문에 ② 소를 샀기 때문에 ③ 결혼했기 때문에(18-20절) 등의 이유로 초청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 것에 대한 탐욕과 쾌락 때문에 예수의 구속을 위한 초청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거부되었습니다. (24절)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꺾인 참감람나무 가지로 비유했습니다. (롬11:17,18) 그러나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의 구원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둘째 부류인 시내 길거리와 골목에서 초청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21절)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주님의 주변에 가장 많이 따라다니던 자들이며, 복음의 능력에 감화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잔칫집에 초청되지 않은 자들이며, 소경이기 때문에 밭을 보러 갈 수 없는 자들이며, 저는 자들 역시 밭을 경작할 수 없는 자들이며, 병신들을 결혼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복음의 찬치에 초청하셨습니다.
2. 강권으로 초청된 자들 1) 하나님의 은혜의 무한성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22절). 하나님께서 초청한 큰 잔치집의 자리는 아직도 빈자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무한성과 풍족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빈 자리를 남겨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2)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23절)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달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권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적이거나 강제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설득하고 또 설득하면서 거기에 동의하여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는 사랑의 강권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이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3. 비어있는 자리가 찰 때까지 계속되는 초청 1) 구속사역의 완성기 '내 집을 채우라'(23절).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구속사역이 완성되는 시기까지 '큰 잔치집'의 '빈 자리'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 집을 채우라'고 말씀하시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지구촌의 '길과 산울가'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온 민족에 증거되는 때, 어떤 오지에 이쓴ㄴ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전해질 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자의 수는 차게 될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2) 예정된 구속자의 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자의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절대적인 사항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가 구원받은 사람이냐를 판별하는 능력조차 엄밀한 의미에서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인간은 다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뿐입니다. 그 이상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길 눅14:25-27 본문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즉 주님의 재자된 자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명령이요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주님의 제자 된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 명령에 순종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십자가를 지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를 부정하는 길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는 것이요,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정하는 길은 1)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에는 우리들이 쉽게 순종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참으로 그 명령이 부담이 되어지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며,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경우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친척과 고향을 버리면서까지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예비하셨으며, 노아의 고집스러운 순종은 멸망 가운데 건짐이라는 은혜를 가져왔습니다. 지금 부당하고 부담되어지는 명령이라도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것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축복을 심는 것이요 환란을 피하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2)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자기 중심적 생각과 방법과 행동에는 그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첫조상 아담의 타락의 원인도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정하는 길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2. 박해가 따르는 길 십자가 형벌은 초대 교회 성도들을 괴롭힌 가장 잔인한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큰 핍박의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도에 있어서 다를지는 모르지만 역시 고통의 길이요, 시련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을 따르는 길은 1) 멸시와 천대가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에 주님을 따르는 길은 육체적으로 십자가 등의 핍박이 따르는 길이요, 정신적으로는 (행7:54-60).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님을 따름으로 해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방 종교를 가진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 혹은 이웃에게 뿐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제도나 관습 등이 또한 성도들을 차별하고 천대합니다. 특히 우상과 미신이 성행하는 사회나 고도의 과학과 인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2)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또한 이 생명까지를 버려야 하는 희생의 길입니다. 요한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 희생의 길을 걸었으며, 그 후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이 희생의 길에 서야 했는데, 기독교가 국교가 되기 이전의 로마 지하의 '카타콤'의 성도들이 그러하였고, 이방에 복음을 전했던 많은 선교사들이 그러하였고, 신사참배의 거부와 6.25를 겪은 우리의 성도들 역시 복음을 위해 이 희생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환희와 기쁨의 길이기도 하지만 멸시와 천대와 생명의 희생이 따르는 길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3. 십자가가 우선되는 길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모든 것에 우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앞서 내가 있고 친척, 가족이 있고, 재물이 있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가르치시고 원하시고 바라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지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보다 이것들을 더 사랑하고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호하게 본문에서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다 미워하기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우선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① 친족보다 십자가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는 것처럼 이들을 사랑하되 '덜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들에 대한 의무와 주님에 대한 의무에 갈등이 생겼을 때 먼저 주님에 대한 의무를 우선하라는 것이요, 먼저 하라는 것이지 부모나 친족에 대한 의무를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창22:1-19) ② 명예나 재물 등 귀하고 아기는 모든 것들보다 십자가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입문을 위한 제언 눅14:28-30 본문은 주님께서 한 경망스러운 건축자를 비유로 하여 제자 되는 삶의 중대성을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즉 주님을 뒤따르려는 자들은 자신의 삶의 성격과 그 여로를 심사숙고 한 후에 결단내려야 함을 요청한 것입니다.
1. 제자된 삶의 성격을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뒤쫓는 '허다한 무리'(25절)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그 비용을 예산하지 않겠느냐'(28절)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망대를 건축하려는 사람이 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숙의를 하듯, 주님을 좇으려는 사람들은 그 제자로서의 삶의 성격을 먼저 파악해야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군인과농부의 삶의 성격은 다릅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제자들의 삶의 성격은 그 윤리적인 면에서나, 철학적인 면으로 보나 보편적인 인생과는 상반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점을 바로 인식해야만 올바른 계획과 결단을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고난과 희생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고난을 받으시고자 올라가실 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망대를 건축하는 작업은 힘든 일입니다. 포도가 익어가는 초여름 뙤약볕에서 포도원을 지키고자 애쓰는 포도원 지기의 노력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시는 모든 재료들을 원시적으로 자급자족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이 선한 목적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땀흘리고 애써야만 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요 도리입니다. 우리는 게으르고 무위도식하는 인생을 가리켜 '땀 안 흘리며 사는 무리들'이라는 의미로 '불한당'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뒤따르려는 이들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세적인 안일과 행복을 추구하는 세속인들과는 달리 우리들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영생을'(딤전6:11,12)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의 삶은 위로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밑으로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개인적으로는 죄악과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창조적인 삶입니다. 망대를 짓는 일은 땅을 파고 숨는 일과는 성격이 틀립니다. 부단히 세워나가야만 하며, 넓은 지역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멀리 떨어진 많은 사람들의 눈에도 쉽게 띄게 마련입니다. 이와같이 주님과 제자들의 삶은 창조적이며, 증인적인 삶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고전3:10) 그리스도를 삶의 터로 삼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까지'(엡4:13) 인격과 소망을 쌓아 올려야 합니다. 또한 우주적으로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이와같이 제자의 삶은 하나님께로 받은 바 모든 삶의 자원을 사용하여 복음적인 삶의 흔적과 열매들을 창출하고 남기는 삶인 것입니다. (갈6:17) 그러므로 아벨은 '의의 제단'을 남겼고, 에녹은 '부활의 증거'를 남겼으며, 노아는 '구원의 방주'를 남겼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히11:4-8), 또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새 언양의 피(히12:24)를 삶의 표적으로 세우셨습니다.
2. 올바른 판단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비용을 예산하지 않겠느냐(28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1) 삶의 궁극적인 가치를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먼저 자기 삶에서 가장 필요하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 계산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현세의 행복과, 영생의 보장을(히11:20-36), 그리고 현재의 고난과 하늘의 영광을(롬8:18), 죄악과 타협해서 얻는 쾌락과, 속죄의 즐거움 등등, 이 모든 사안들을 심사숙고하고 비교검토하여 인생의 궁극적 손익의 결과를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내게 가장 유익하다는 결론을 얻어내야만 제자로서의 참된 당위성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마13:44-46;눅16:1-8;빌3:1-9) 2) 항상 자신의 한계성을 파악하고 있으라는 권고입니다. 이와같이 신중함과 진지함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자는 끝내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수모와 비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9,30절)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분수와 위치를 잘 파악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지 늘 겸허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교만과 우월감에 취한 자는 제자의 위치를 이미 떠난 자입니다. 그리고 제자 된 위치를 벗어난 이는 개인적인 실패와 수모의 삶을 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과 교제가 막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나의 여러가지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했듯이 지혜로운 주의 제자는 본질적인 자신의 분수를 늘 지키는 자입니다.
올바른 선택 눅14:31-33 본문에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두가지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망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가 있느냐, 하늘의 것에 마음이 가 있느냐가 우리의 선택을 결정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선택에 관해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1) 그것은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31절). 지혜로운 왕이라면 자기의 군대가 적의 군대를 이길 수 있는지 계산해 볼 것입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되면 전쟁을 시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일단 평화협정을 맺고 적이 약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대적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그것은 보통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의 전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채 전쟁에 임하는 위험한 처사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다면 그런 무모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도저히 이길 승산이 없는 상대입니다. 그를 대적하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대적할 상대가 아니라, 화친하여 그의 보호하심을 구해야 할 친구입니다. 그의 보호하심을 받는다면 세상의 어떤 세력과 대적하여도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2) 그것은 세상을 택한 결정입니다.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영적인 가치보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가치보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축복과 세상 제물은 그 가치에 있어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을 택한 자는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모하게 전쟁하려는 어리석은 왕과 같은 자입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썩을 것을 위해 하늘의 영적 축복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 아무리 강한 세상 세력과 결탁하여 공격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권세를 꺽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선택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화친하는 자 1)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32절) 무모한 싸움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이익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은 이미 승패가 결정된 무모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화친하여 그를 우리의 보호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권세를 꺽을 수 있는 자를 보호자로 두었다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이리겠습니까? 우리가 대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상의 권세입니다. 그리스도와 동맹을 맺고 악한 세상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대적하는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화목케 되기를 바라십니다. (골1:20) 사도바울도 그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 순간적인 감정이나 유혹에 의해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자기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 정확히 판단하여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그리스도와 화친하는 것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2) 그것은 세상것을 포기하겠다는 결정입니다.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가는데 방해물이 됩니다. 그것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지 못한다면 십자가는 무거운 짐으로 우리를 억압하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키기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자신의 몸 까지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늘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되고 거추장스러운 세상 것을 버려야 합니다. 썩어질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 것에 쏟고 있는 관심과 애정을 주께로 돌려야 합니다. 아무리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담대히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 눅14:34,35 철저한 자기 부인, 자기 희생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26절에서 주님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3절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르러서는 제자를 소금에 비유합니다. 소금은 짠 맛이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녹아서 사라짐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제자를 소금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곧 철저한 자기 희생적 존재임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제 소금에 대해 좀더 깊게 생각하면서 우리 주님의 제자 된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소금의 몇가지 기능 소금에는 사실 두가지 기능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맛을 내는 기능과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본문에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심으로서 몇가지 기능을 더 추가하십니다. 1) 맛의 기능입니다. 소금의 가장 큰 기능 중의 하나는 맛을 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달지 않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맵지 않은 음식, 새콤하지 않은 음식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 즉 간을 맞추지 않은 음식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소금만 가지고는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소금이 없으면 비록 아무리 많은 음식이 놓여 있어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은 조미료 중의 조미료요, 맛을 내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조미료라 할 수 있습ㄴ다. 성도는 세상에 대해 바로 이러한 기능을 해야 합니다. 성도가 빠질 때 세상은 스스로 무의미를 느끼고 무기력을 느끼고 무가치함을 느낄 정도로 성도는 세상에서 맛을 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진한 맛, 예수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를 풍겨 주어야 합니다. 애굽에 팔려 간 요셉과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와, 바사에 끌려간 모르드개와 에스더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2) 부패방지의 기능입니다. 소금의 또 하나의 기능은 부패 방지의 기능입니다. 소금이 있는 곳엔 부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소금은 음식물을 부패시키는 세균을 용서치 않습니다. 접근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패해서는 안 될 곳에, 혹은 부패할 우려가 있는 곳에 우리는 소금을 뿌립니다. 성도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패할 염려가 있고 부패해서는 안 될 곳에 그가 있음으로써 부패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패를 방지할 곳에 자원하기 이전에 세상이 먼저 그를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행실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특별히 소금에는 뻣뻣하고 팔팔하느 것들이 순하고 부드럽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뻣뻣한 배추에 소금을 넣어두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배추는 부드러워집니다. 팔팔한 생선에 소금을 뿌려두면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생선의 그 팔팔함은 수그러듭니다. 성도는 세상에 대해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교만한 자들, 강한 자들을 인격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부 끄럽혀야 합니다. 더 이상 교만해지지 않도록 신앙으로 그들을 제압해야 합니다. 4) 자기 희생의 기능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모든 기능을 위해서 소금은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자기 스스로 녹아야 합니다. 녹아서 음식물 속으로 침투해야 합니다. 밀알이 썩어야만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듯이, 소금은 녹아야만 자기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곧 성도의 사회를 위한 희생의 존재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도는 입으로 세상을 깨닫게 하고 가르쳐 주는 자가 아니라 희생함으로 알려주는 자인 것입니다.
2. 소금을 필요로 하는 세상 예수께서 성도를 소금에 비유하심은 간접적으로 세상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닏나. 즉 세상은 그대로 두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부패하는 상하기 쉬운 음식과 같고, 그대로 두면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맛은 없는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저 혼자서는 무가치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의미를 두고 가치를 부여하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두신 것입니다.
3. 맛을 잃은 소금 '그 맛을 잃었으며'. 우리가 더럽다고 얼굴을 돌리는 인분조차도 거름으로는 유익하게 쓰입니다. 그러나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아무데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소금은 짠맛이 있어야 짠맛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짠맛을 잃으면 그것은 버려져 오직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만일 성도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맛, 향기, 인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세상에 예수를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성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비참한 존재일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