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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와 천국은 다르다!
장례의 다양한 풍습
사람은 죽는다. 죽은 후에 사람은 어디로 갈까? 죽은 후에 사람이 가는 세상을 내세(來世)라고 한다. 아직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야 할 세상이며 다가올 세상이다. 내세에 대한 생각에 따라 장례 풍습이 정해진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바에 따르면 해가 뜨는 쪽으로 머리를 향하여 매장하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발견된다고 한다. 매장의 방향을 그렇게 정하는 것이다. 그처럼 동쪽으로 방향을 정한다는 의미에서 오늘까지 우리는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라틴어 오리엔탈리스(orientalis)는 동쪽이라는 의미요, 오리오르(orioir)는 해가 뜨다는 의미다. 즉, 해 뜨는 쪽, 동쪽이다. 서양에서 기독교의 무덤 방향은 해가 뜨는 장면을 볼 수 있게 하는데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게 하자는 의미가 있다. 이슬람의 무덤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를 향하게 방향을 정한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장례 풍습은 매장이었다. 요즈음은 거의 대부분 화장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전에는 그랬다. 매장은 무덤에 시신을 묻는 장례법을 말하는데 그 때 무덤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을 지관(地官)이라고 한다. 대개 풍수지리를 배운 사람이다. 지관은 산의 맥이나 물길의 흐름을 보고 앞산이 바라다보이는 아늑한 곳에 무덤을 정한다. 그리고 그 넋을 달래며 49제를 지내기도 하며 해마다 기일이면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넋이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해마다 찾아올 것이라고 믿기에 제사를 통해서 음식을 바쳤다.
죽은 후에도 좋은 곳에서 풍족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진귀한 유물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다. 아예 살아 있을 때 모시던 배우자나 종들을 함께 매장하여 죽어서도 섬기라는 의미로 순장(殉葬)의 풍습도 있었다. 죽은 후에 사람은 하늘로 가야 하기에 고인의 시신을 새들이 쪼아먹게 하는 풍장(風葬)도 있다. 그리고 죽은 후에 배를 타고 극락의 세계에 가야 하기에 사막에 배를 만들어 무덤 곁에 묻은 이집트의 왕들도 있었다. 그들은 죽은 후에 심판대 앞에 설 때 혜택을 받기 위해서 주문과 부적을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감싼 천에 첨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이 어떤 세상인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이 죽은 후에 맞이할 세상을 내세라고 한다.
내세에 대한 성경의 설명
세상에는 다양한 장례풍습이 있지만 죽은 후에 가는 세상에 대해서는 정직한 공자(孔子)의 말처럼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이 맞다. 즉, 내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 까닭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르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숨결로부터 온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몸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결에서 온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21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내세관이다. 즉, 몸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늘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것이 기독교의 내세관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또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에서 말하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내세와는 다르다!
기독교에 들어온 세속적 내세 신화
내세가 사람이 죽은 후에 갈 세상이라는 점에서 이생과 내생, 또는 이승과 저승이라는 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저승이나 내생을 위해서 미이라도 만들고 순장이며 부장품을 함께 합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내세는 없기에 화려한 부장품이 매장되어 있는 무덤마다 도굴되며 삼천 년이 지난 미이라가 그대로 발굴되기도 한다. 이집트인들이 생각하는 내세,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내세는 헛것이며 헛된 신앙이었다. 다만 그들의 웅장한 유적이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데 유용할 뿐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 진시황의 병마용갱(兵馬俑坑, 군인과 말의 허수아비가 묻힌 구덩이)이 그 예다.
알에서 사람이 태어났다는 탄생설화(誕生說話)처럼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될까를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사후 내세설화(來世說話)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을 담은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그렇게 준비한다. 일반적으로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인 기원신화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될까를 상상한 이야기가 바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기원설화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의하면 지하의 세계로 내려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신화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지하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튁스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네줄 늙은 뱃사공 카론이 은전 한 닢을 받고 죽은 자의 영혼을 지하세계로 태워다 준다. 강을 건너 저승의 입구에 도착하면 머리가 셋 달린 케르베로스라는 사나운 개가 지키고 있어서 한번 저승에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용감한 영웅 여섯 명 정도만이 지하세계에 다녀왔다고 한다. 과연 그런 사후세계가 있다는 말인가?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디모데전서 4:7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세상의 기원과 개인의 종말 이후에 될 일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바로 신화다. 바울은 그런 신화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늙은 여인들에게나 어울릴 세속적인 이야기’(worldly fables fit only for old women, NASB)라고 영어 성경은 옮겼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내세에 대한 신앙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런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와 뒤섞여 어떻게 각색되는지 살펴보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스튁스의 강은 요단강으로, 저승세계는 가나안 땅으로 자연스럽게 대체된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의 문지기가 베드로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가 예수님께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마 16:19). 그래서 이교도들이 믿고 있던 허탄하고 망령된 사후세계에 대한 신화는 기독교의 사후 내세신화로 둔갑되었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바, 사람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다시 몸으로 살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한다고 하지 않는가?
천국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기독교에 들어온 내세신화는 가장 먼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인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일그러뜨렸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은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실체였다. 그것은 공의와 진실, 사랑과 화목이 어우러진 세상이며, 그런 세상을 예언자들도 계시를 받아 선포했다. 예를 들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될 세상이다. 메마른 광야에 샘물이 터져 장미꽃 만발한 동산이 될 것이다. 모든 남녀노소가 다 예언자가 되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며 아버지들은 꿈을 꿀 것이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을 것이다. 그 세상은 주의 영화로운 날이며, 그 날은 악인들에게는 심판이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었다.
예수님도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의 개막임을 알리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이 그 때 사용하신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이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4:16~21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오리라던 새로운 세상이 이제 너희들 앞에 시작되었다는 천국 선언이며, 하나님 나라 선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때로부터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며 삶으로 보여주시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가르침과 본보기는 세상에는 혁명처럼 느껴졌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눌린 삶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는 것이었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선포했고 천국생활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에게 빛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선한 행실로 드러난 교회의 빛을 보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점점 성장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천국복음 선포는 기독교의 핵심이자 목적이며 오랜 예언의 성취이며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런 천국을 사후 내세신화와 뒤섞어 버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내세 신화로 힘을 잃어버린 천국복음
바울은 로마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은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력하게 선포했으며, 복음의 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롬 1:16). 그 복음이 어떻게 사람의 삶을 바꾸는지, 그 복음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는지, 그 복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헛된 이야기들을 몰아내고 더 밝고 더 매력적이고 더 창조적이며 더 능력 있는 이야기로 채워주는지를 그는 분명히 알았다. 그 때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사회가 어떻게 변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수 있는지를 그는 확실히 알았다. 복음에 그런 능력이 있다.
그 복음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복음이며 하나님 나라 이야기다. 즉,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The Economy of God, 엡 3:8~9)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을 경영하시고 고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런데 그 천국을 사후세계의 일로 바꾸어 버렸을 때 기독교의 복음은 사후세계를 위한 ‘저승보험’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믿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킬 위대한 이야기가 사후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개인의 ‘사후보장성 보험’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면서 복음은 더 이상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며 이 땅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로지 저승세계를 위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담긴 왜곡된 하나님 나라요, 일그러진 천국의 그림이다.
천국(天國)이 내세(來世)와 동일시되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려면 강압을 써서라도 그들의 영혼을 지옥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바울은 말했는데(롬 14:17)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강요와 분쟁과 공포가 자라났다. 이것은 복음전도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의 진술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면 구원 받았다고 여기는 ‘엉터리 복음’을 복음전도의 핵심 기술인 것처럼 전수되고 훈련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들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은 온유함과 따뜻함 그리고 포용성이며, 도리어 전도에 대한 부담감과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강압, 그리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두드러진다.
천국이 내세와 동일시되면서 구원의 의미도 매우 왜곡되었다. 본래 구원은 삭개오의 집에 임했다고 예수께서 선포하셨을 때 삭개오가 회개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눅 19:9). 예수님의 천국복음에 맞게 삭개오가 살기 시작할 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수전노(守錢奴)로 살았으며 이 세상 나라의 풍조를 따라 살고 있었다. 몸이 아픈 사람이 고침을 받았을 때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축하해주셨다. 그런데 천국과 내세가 뒤섞이면서 구원이라는 말은 ‘사후 천국행 티켓’을 확보한 것으로 즉각적으로 오해되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을 심판하시고 그를 쫓아내시며(요 12:31) 그의 종살이하던 인간에게 참 임금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주시려고 오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을 때 살아난 우리가 사는 방식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래서 나는 구원을 새롭게 정의한다: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내세(來世)는 ‘오는 세상’이다
일반적으로 내세라는 말은 사후세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사후세계를 그리는 신화들은 모두 망령되고 허탄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성경에도 내세(來世)라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오는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2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에베소서 1:21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 성경이 말하는 이 세상은 세상 임금이 통치하던 세상을 말한다. 그를 바울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엡 6:12)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오심은 이 세상의 임금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요 12:31, 16:11).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곧 만 왕의 왕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오는 세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는 세상을 한자로 굳이 쓴다면 내세(來世)가 된다. 하지만 세속에서 사용하는 내세의 의미와는 달리 성경에서의 내세란 오는 세상을 의미한다. 세속의 내세가 개인의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세상이라면 성경의 내세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세상을 말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가까이 왔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오는 세상 곧 내세다. 그리고 그 세상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재림 전이므로 완전히 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대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오늘도 기도드린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오는 세상의 삶을 영생(永生)이라고 한다. 영생을 헬라어로는 ‘헤 조에 아이오니온’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바로 ‘오는 세상의 삶’이다. 오는 세상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는 삶이며 그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그래서 요한은 영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요한복음 17:3
내세에 대한 성경적이고 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영생을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내세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마귀의 종노릇하는 삶과 주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곧 천국 생활은 그 삶의 질이 확연히 다르다.
800년 만의 개혁 느후스단!
이렇게 우리의 생각에 깊이 아로새겨진 그릇된 개념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자신에게 있는 오류를 발견하여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천국에 대한 이해의 오류는 기독교 사상 전반에 왜곡현상을 가져왔다. 복음을 허약하게 만들었고, 하나님 나라를 개인의 사후 상태에 대한 관심사로 전락시켰고, 가장 포용적인 종교인 기독교를 가장 배타적인 종교가 되게 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별로 매력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게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열왕기하 18장에는 용기 있는 청년 왕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나온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열왕기하 18:3~4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어 백성들의 믿음을 고취했던 놋뱀을 사람들은 800년 동안이나 섬겼다. 그 놋뱀을 향하여 분향을 할 때 그 놋뱀을 거룩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 놋뱀에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적 신앙이며 미신적 신앙이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일어나 신앙을 새롭게 하고자 할 때 그때까지 거룩하게 섬겼던 그것을 향하여 ‘느후스단’이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놋으로 만든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부셔버렸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 왜곡된 천국 신앙을 대담하게 깨트리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복음을 바르게 배워보자. 바울이 그토록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다시 배워보자. 500년 전에 루터가 깨부수다가 남겨둔 천당 지옥에 대한 왜곡된 ‘놋뱀’을 완전히 부수자. 루터는 그 놋뱀에서 연옥 부분을 깨뜨렸으나 우리들이 깨야 할 부분은 바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왜곡된 신앙이다. 그 왜곡과 혼합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것에 마음을 쏟게 하는 느후스단을 완전히 박살내고 다시금 순수한 복음의 이야기를 우리 마음에 담아 보자.
<끝>.
추가 자료:
박준홍 전도사의 장례를 마치고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65062611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1)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65763845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2)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66590507
내세와 천국은 다르다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74017056
무슬림의 천국과 기독교인의 천국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68883195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73828826
설교: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1. 우리가 받는 천국, 들어가는 천국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73000141
설교 동영상: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1. 우리가 받는 천국, 들어가는 천국
박준홍 전도사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https://blog.naver.com/newhopechurch1/22146822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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