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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야 영접합니다. / 2017년 4월 9일 주일 예배
본문 / 누가복음 19:1-10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 중에는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그대로 조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들 들어 체인점을 운영하면 본부에서 내려오는 재료와 레시피대로 요리합니다. 요리사는 메뉴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요리사들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데에 열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부 요리를 개발하기 위해 5년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는 새롭고 맛있는 숨겨진 레시피를 찾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얼마 전 권 집사님의 콩나물 전도 그렇습니다. 저는 마트의 진열 된 콩나물을 보면 기껏해야 시원한 콩나물국을 생각합니다. 콩나물 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권 셰프님이 그것으로 전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설교자로서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콩나물로 콩나물국을 생각할 때 뭔가 새롭고 더 맛있는 요리는 없을까 연구하는 자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성도에게도 필요합니다. 생각 없이 한 요리는 먹을 때에도 생각 없이 먹고 맛이 없지만 생각하며 한 요리는 애정이 가고 더 맛있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묵상하고 연구하면 새로운 맛을 보게 되고 더 깊고 다양한 교훈에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과 삭개오의 스토리는 콩나물과 같은 재료입니다. 콩나물국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삭개오의 열성이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기위해 키가 작은 신체의 장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인한 환경적인 장애,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으로 인한 인격적인 편견 등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결단과 회개가 보입니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고 곧 회개하여 변화된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본문을 통해 얻어지는 일반적인 교훈인데 이것도 성도의 믿음에 귀한 은혜입니다.
평범한 음식에 감사하며 잘 먹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가신 그 역사를 통해 성도를 만나기 위해 지금도 찾아오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마지막 일주일 정도를 앞에 두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던 길에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셨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은 여리고 성에 들어오기 전 맹인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그 이전에 관원이었던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께 찾아왔다 고민하며 돌아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청결한 또는 의로운 사람 ’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유대인의 이름입니다. 그는 직업은 세리장입니다. 여리고는 교통의 요지로 상인들이 왕래가 잦은 지역인지라 그곳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지역 세관의 우두머리인데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은 로마의 세금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로마 정부로부터 세금 징수를 위탁받은 세리들은 로마의 권력을 이용하여 상인과 백성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여 자신의 탐심을 채우고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세리들에게는 허가 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면서 형제를 착취하던 세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세리는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정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는 곧 죄인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였으니 백성들이 그를 얼마나 싫어했겠는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의 비난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본문 7절에서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조금 전에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착취하는 저런 죄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비난했습니다.
세리장으로 여리고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삭개오가 부자가 아니었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삭개오가 당연히 부자라 밝힙니다. 여리고 사람들의 삭개오에 대한 인식을 볼 때 그는 정직한 세리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여타의 세리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그는 분명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여 착복하고 재물을 축적한 게 분명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증언하는 고백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에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선언합니다. 이런 삭개오의 고백은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재물이 결코 의로운 방법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여리고의 세관장으로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자가 된 삭개오를, 죄인으로 정죄 받던 그를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삭개오가 여리고를 지나가는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여리고에 오신 겁니다.
본문 3절과 4절에서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말씀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자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여리고에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집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이동했고 조금 전에는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도 있었으니 여리고가 떠들썩한 것은 당연했고 동작 빠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보기위해 이미 주변을 둘러쌓습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삭개오는 예수님께 근접할 수 없었으니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위해 다른 사람보다 대단한 열심을 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삭개오의 열심을 높이 사왔습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열심은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삭개오는 도대체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궁금증을 풀 수 없자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 목 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기다린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간 사람이 삭개오 한 사람이었을까요?
한 번은 연예인들이 군대 위문공연을 왔는데 그 넓은 연병장의 뒤에서 보려니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이선희, 김완선이라고 소개하는데 방실이가 불러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연예인 보려다가 목 빠진 사람 많습니다. 기린처럼 모가지 빼도 소용없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위해 나무위로 올라간 것은 그 상황에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키도 작은 사람이 동작 빠르게 자리 확보에 실패하고 그 많은 사람들을 뚫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삭개오가 신체적인 장애인 작은 신장과 주변에 둘러선 많은 군중들 즉 환경적인 장애와 그리고 여리고의 세리장이며 부자라는 사회적, 인격적인 체통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보기위해 나무 꼭대기로 올라간 것은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삭개오의 간절한 믿음의 표현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삭개오보다 열심을 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성도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결핍과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의지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잃은 양을 찾아오신 주님의 열심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찾는 열성이 없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자기 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잃은 양을 찾아온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자아숭배라는 종교적인 자기 의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삭개오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열심과 그 정성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찾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삭개오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의 열심도 빛을 보기 어렵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을 찾아오셔서 부드럽게 자기 이름을 부르실 때에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했던 그 예수가 자신의 영혼의 목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말씀하셨는데 그 이름만 불러도 성도는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합니다. ‘삭개오’ 그 이름은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인생이며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인생과 인격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그 자리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잃은 양을 찾는 주님의 열심이고 그 주님이 내 인생과 인격 안으로 오셔서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삭개오가 그 인생과 인격 속으로 오신 예수님은 만난 곳은 모양 빠지게도 나무 꼭대기였습니다. 나무 꼭대기에서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날 좀 보소! 하며 나무에 올라간 게 아닙니다. 단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그 화제의 인물을 보고 싶었을 뿐 입니다.
여러분이 깔끔하고 단장하고 있을 때 저를 시내에서 만나면 자신감이 있겠지만 머리도 안 감고 세수도 안했는데 집사님! 하고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인간적인 삭개오는 세관에서 세리장으로 폼 나게 있을 때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던 잃은 양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가 그의 인생이며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를 생각하니 제가 어릴 때 보았던 드라마의 한 주인공이 떠올랐습니다. 시대 배경이 일제 강점기와 광복입니다. 주인공은 가난하고 천대받던 사람인데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잘하여 순사가 됩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을 탄압합니다. 제가 잊지 못하는 장면은 그는 일본의 항복과 대한민국의 광복을 거리로 뛰어나온 시민의 함성을 듣고 알게 되는데 그때 그 사람이 벽에 걸린 일장기를 떼더니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그 일장기에 건곤감리를 그려 태극기로 만들더니 거리로 뛰어나가 시민들과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거였습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인생과 인격을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증언을 합니다. 키 작은 사람, 세리장, 부자, 나무에 올라간 것은 삭개오의 인생과 인격을 특징짓는 말입니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키 작은 자는 힘없는 자와 같습니다. 학교에서 키가 작은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게 보입니다. 우리 작은 아이가 키가 작아서 학교 보낼 때 걱정이 많았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 키에 관심이 많습니다. 큰 키가 세상에서 힘있는 자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키가 작다고 밝히는 것을 보면 그의 신장이 평균에도 한참 못 미쳤나 봅니다. 키 작은 삭개오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없는 자의 서러움을 일직부터 알았을 것입니다. 힘의 지배를 받는 고통과 분노는 그를 강한 힘을 열망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힘으로 당한 고통과 분노를 더 강한 힘으로 갚아 주기위해 세상의 힘을 쫒는 인생과 인격이 된 것입니다.
키가 작은 개그맨 김병만은 수십 개의 각종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합니다. 그가 자격증을 취득한 계기는 자신은 남보다 키도 작고 공부도 그렇고 해서 나도 무엇인가 세상에 어필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속담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는데 작은 사람들이 힘없는 자의 고통과 분노를 알기에 힘을 축적하여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인생의 목표는 세상의 힘입니다. 그는 작은 자로 살면서 그 작은 자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 된 직업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의 순사를 하는 사람들이 백성들의 원성을 샀듯이 로마 정부의 앞잡이 되어 동족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는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일이지만 세상의 힘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세상의 힘 앞에 멸시를 당했던 사람이라면 그 분노를 갚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됩니다.
작은 자 삭개오가 힘있는 자 부자가 되기에 세리보다 좋은 직업은 없습니다. 삭개오는 세리를 통해 미움과 원성을 사고 죄인으로 정죄를 받았지만 그가 원하는 돈 즉 세상의 힘을 손에 넣어 작은 자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는 그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 돈과 권력 앞에 자신을 괴롭히던 큰 자들이 눈치를 보고 떠는 것을 보면서 그의 인생과 인격은 세상의 물질과 그 힘을 숭배하는 물질주의자와 배금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쫒는 기회주의자로 살아온 겁니다. 이것이 삭개오의 인생이며 인격입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권력과 부자의 체면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안목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세리장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에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을 축적하는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힘없는 자신을 극복하기위해 기를 쓰고 올라가는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인생은 세상에서 잃은 양들의 삶과도 같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자 먼 나라로 떠나 그것으로 허랑방탕하게 산 것은 정욕과 탐심의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고자한 것입니다. 저의 인생도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여 강한 자로 드러나기 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힘을 잡으면 약점은 상쇄될 수 있습니다.
권력, 재물, 지식, 명예, 인기, 외모 등 이 세상의 강한 힘이 되는 것을 하나라도 확실하게 잡는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로 세력을 만들고 종교의 권력을 소유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목표를 두고 달려갑니다. 그들의 목표는 성공한 어떤 목회자처럼 되는 것이고 그들의 위안은 누구보다는 성공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열등감을 극복하기위해 기를 쓰고 사는 인생은 아닙니까? 힘없는 자로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제가 나무에서 떨어지니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지 몰랐습니다.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서 내려오니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평안과 자유를 주시려고 기를 쓰고 나무에 올라가는 잃은 양을 찾아 오셔서 내려오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올라간 잃은 양 삭개오에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야!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빨리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무를 것이다. 말씀합니다.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그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힘과 이익을 쫓아 사는 아주 현실적이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작은 자를 극복하기위해 민족을 배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싫어합니다. 그래도 그는 세상의 힘을 얻는 만족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수록 그는 더 물질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뽕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생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삭개오의 인생과 인격이 녹아 버렸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사이는 좀 서먹해집니다. 저희 아버지도 말이 없고 제 기억으로는 한 번도 자상하게 스킨쉽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옛날 아버지들이 다 그렇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교통사고로 누워있을 때 새벽에 기도하고 오시면서 제 다리를 붙잡고 기도하실 때 아버지의 손길이 뜨겁게 느껴지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확 흘러내렸습니다.
잃은 양들이 그 목자를 확인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대화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 내 온 몸에 퍼질 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내가 의심할 때에도 언제나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았듯이 주님이 성도의 인생과 인격에 찾아오셔서 그 이름만 불러도 저 분이 내 하나님이시며 내 목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지금까지 내 만족을 위해 살았던 그 인생과 인격의 모든 것들이 그 말씀과 은혜에 녹아내립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는 빨리 내려와라 말씀합니다. 인생의 목자를 만난 삭개오는 이제 올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내려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를 낮은 곳에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 목자를 영접하기위해 삭개오는 속히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힘으로 내 인생을 위한 자기만족의 나무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높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의 인정과 부러움은 사겠지만 높으면 높을수록 인생은 교만해지고 평안을 잃을 것이며 심판과는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이 찾는 잃은 양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려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기위해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에 오시기 전 또 다른 부자가 주님께 찾아와 영생을 얻기를 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부자가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찾은 것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던 삭개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자는 영생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내려오라 말씀하셨을 때 그는 순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부자의 나무에서 내려오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는 하나님의 찾는 잃은 양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불가능한 일이 부자 삭개오에게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끌려 말씀의 자리에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잃은 양 성도입니다.
삭개오는 나무에서만 속히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고는 본문 8절에서 주님 앞에 서서 믿음으로 회개하며 고백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습니다” 목자를 만난 삭개오가 내려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부자의 자리에서 속히 내려가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여러분은 내려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려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양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 오기위해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걸 놓고 내려가라고요 그건 안 됩니다. 나는 못 합니다. 말합니다.
제가 한 번은 어떤 분에게 장로 직분을 내려놓고 내려갈 수 있습니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던 사람이 돌변하며 삿대질하더니 내가 이 자리에 올라가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며 고함을 지릅니다.
여러분에게 직분을 내려놓는 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에서 내려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물질의 탐욕에서 내려오지 않습니까? 왜 사람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것에서 내려오지 않습니까? 왜 세상을 사랑하는 탐심에서 내려오지 않습니까? 왜 종교적인 자기 의에서 내려오지 않습니까? 왜 육체의 정욕과 음란에서 내려오지 않습니까? 왜 육신의 즐거움과 쾌락에서 내려오지 않습니까? 왜 교 교만과 게으름과 이기심과 자기만족과 자기 힘으로 자신을 의지함과 방탕함과 염려와 근심과 의심과 두려움과 불신의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습니까? 왜 자존심의 나무위로 올라가려 합니까? 자기만족의 나무에서 내려오셨습니까? 언제까지 주님이 그 인생의 나무 밑에서 내려오길 기다리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려가는 사람만이 주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잃은 양의 자리에 섭니다. 목자를 만난 성도에게는 평안과 자유와 기쁨이 넘칩니다. 그 영혼에 주님의 구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 잃은 양을 찾아가셔서 내려오라 말씀하십니다. 내려가는 성도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과 동행하다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는 은혜를 누립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육신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다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