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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차를 타고 화이화를 거쳐 펑황꾸청(凤凰古城)으로 간다. 봉황고성은 아름다운 곳이라 하니 구이저우가 아니고 후난 성(湖南省)에 있지만 사실 봉황고성은 구이저우 성과 인접한 곳에 있어 쩐위엔에서 멀지 않다. 우리 기차 시간을 주인집에서 알기에 6시30분에 주인이 우리 방문을 두드려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아침 7시16분 기차라 6시40분에 숙소를 나섰는데 바로 숙소가 기차역 옆이라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대합실에 승객이 별로 없다.
우선 화이화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봉황으로 갈 예정이다. 중국 기차역에는 어디나 물을 끓여놓는다. 뜨거운 물에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쌀쌀한 아침 새벽에 대합실에서 마신다. 나는 늘 컵과 커피믹스를 배낭에 넣고 다니기에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데 이른 아침 사람도 없는 기차역 대합실에서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 잔.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모를 거다. 7시 7분이 되니 기차가 들어와 10분 정차 후에 출발하는데 우리가 탄 기차는 상하이로 가는 기차다. 기차는 어제 본 쩐위엔 고성 옆을 지나간다.
잠시 후 기차는 협곡을 지나는데 협곡이 상당히 깊어 보이고 협곡 물이 흙탕물로 보인다. 유핑(玉屛)이라는 곳에 도착하자 웬 사내가 컵라면을 잔뜩 들고 열차 안으로 올라와 컵라면을 판다. 싼콰이~ 싼콰이(3원)를 외치며 한 번 지나갔다 와서는 두 번째 지나갈 때 양콰이(2원)로 금방 가격이 내려간다. 금방 가격을 내려버리니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 입에 미소가 번진다. 기차 떠나기 전에 얼른 내려야 하기에 즉석에서 가격할인 들어가나 보다.
2시간30분이 지난 9시45분 화이화에 도착하는데 화이화는 무척 큰 도시 같다. 역 앞에 봉황 가는 미니버스가 35원/1인에 호객을 하는데 가격도 비싼 게 아니고 터미널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돼 이 미니버스를 타고 봉황을 가도 괜찮을 듯하지만 우리는 굳이 버스 터미널을 알고 싶어 터미널로 간다. 버스터미널을 물어 기차역 광장 중간에서 역사건물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신호등이 있는 큰 사거리가 나오고 그 사거리를 지나 약간 오르막을 올라 왼쪽으로 가니 그곳에 버스터미널이 있다.
버스 나오는 길로 들어가니 봉황 가는 버스가 보인다. 표도 사지 않았는데 배낭을 맨 우리를 보더니 무조건 타라고 한다. 10시30분에 출발하는 봉황 가는 버스(32원/1인)를 타는데 봉황까지 거리는 100km이고 시간은 3시간이 걸린단다. 봉황 가는 길은 도로 확장공사 중으로 무척 혼잡하고 중간에 공사로 인한 통제로 잠시 섰다가 간다. 아마 이 도로가 완공되면 화이화에서 봉황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무척 쾌적한 도로가 될 것이다. 잠시 내려 다리운동도 한다. 30분 정도 지체하더니 통제가 풀려 다시 진행한다.
30분 늦게 오후 2시 쯤 봉황 퉈티엔(타전:沱田)이라는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으니 100km를 3시간30분 걸린 것이다. 이 터미널은 동쪽에서 봉황으로 드나드는 버스만 서는 곳이고 서쪽방향은 또 다른 터미널이 있다.
※ 펑황 참조
펑황(봉황)
먀오족(苗族)의 고성이 멋지게 보존돼 있는 펑황은, 장자제와 함께 후난을 대표하는 여행지다. 창사에서는 430km, 장자제에서는 230km 떨어져 있다. 주민 중 71%가 투자족과 먀오족으로 이뤄진 샹시 투자족·먀오족 자치주(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에 속한다. 여행자는 대개 장자제를 먼저 여행하고, 펑황에서는 달콤한 휴식을 갖는다.
펑황 시내는 크게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펑황고성(凤凰古城)이라 부르는 구시가지가 여행자에게는 지상낙원이다. 퉈강(沱江) 강변을 따라 먀오족의 전통 목조가옥이 길게 이어지고, 밤이면 황금 불빛을 뽐낸다. 목조 가옥은 낭만적인 객잔으로, 식당으로, 카페로 변신해 여행자들에게 따뜻한 쉼터가 되어 준다. 이른 아침 퉈장을 따라 걸어도 좋다. 물안개 피어오른 풍경이 아름답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주민들에게서 활기를 느낀다.
고성에서 15km 떨어진 남방장성(南方长城)도 볼 만하다. 청나라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은 투자족과 먀오족을 격리시키기 위해서 쌓은 성벽으로, 그 위에 오르면 먀오족의 삶의 터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 위치 : 凤凰县 凤凰北路
• 가는 법 : 1,3번 버스를 타고 城北汽车站 정류장 하차./고성에서 택시로 ¥8~10
도시가 작아서 여행자는 웬만하면 걸어서 다닌다. 터미널과 펑황 고성 사이를 오가는 1번 버스만 기억하면 된다. 요금은 ¥1이다.
삐끼가 대기하고 있어 따라간다. 터미널에서 왼쪽 골목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숙소에 금일유방(今日有房)이라고 쓰여 있는데 돌아다니다 보니 숙소 이름이 모두가 금일유방이다. 깨끗해 보이는 숙소에 들러 방 값을 물어보니 하루에 70원을 부르지만, 이틀을 잘 것이고 비수기이니 숙소 주인과 협상을 한다. 물론 봉황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라 숙박비가 조금 비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중국인이 아무리 상나라 상인의 후예라지만, 한국인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전기장판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없다고 해 1박에 30원에 하자고 하니 난색을 표한다. 우리는 전기장판이 없다는 약점을 잡고 또 2박을 하겠다고 하여 1박에 70원 달라고 하는 숙소를 2박에 70원에 묵기로 한다. 그러면서 절약한 돈 70원으로 전기장판을 우리가 사서 가지고 다니기로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날씨가 추워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면 구경도 제대로 못할테니까. 조각루라는 먀오족 전통가옥은 여름에는 어떨지 몰라도 겨울에는 무지하게 춥지만 나무로 지어 난방은 전혀 되지 않는다. 밖에서 볼 때는 예뻐 보여 사진도 찍고 난리법석 떨지만, 밤에 잘 때는 뼈까지 시려 들어온다. 와이프는 시지앙(西江)에서 밤에 자다가 추워서 다른 이불까지 끌고 와 더 덮고 자도 추워서 양말 신고 파카 내피 입고 나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쩐위엔에서는 주인집에서 사용하든 전기장판을 빼앗다시피 하여 잤을까.
짐을 내려놓고 고성구경을 하며 시내 쪽으로 가 전기장판을 물어보니 가전제품 파는 곳에는 없다고 한다. 어디에 가면 살 수 있느냐니까 모른단다. 몇 군데 다니다가 보니 이불 가게가 보이기에 무조건 들어가 전기장판(띠엔러탄) 있느냐고 물으니 있단다. 가게에선 1인용과 2인용 하나씩 포장을 뜯어, 판매를 위해 검토하던 중인 모양인데 가격을 물어보니 1인용이 40원이고 2인용은 70원이란다. 숙박비 절약한 돈 70원이면 2인용을 살 수 있지만 부피가 커 앞으로 가지고 이동하는 데 불편해 1인용으로 결정하고 깎아달라고 해 1인용을 25원에 산다. 우리 돈으로 1원을 180원으로 환산하면 4,500원인데 이게 종이로 만든 것도 아니고 손난로도 아닌 전기장판을 4.500원에 산다. 아무리 중국산이지만, 그래도 공산품인데 전기장판이 25원이면 도대체 뭘로 만든 것일까? 어쨌든 우리는 이제부터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돌아다니게 생겼다. 이동할 때 전기장판은 포개 접어 배낭에 넣고 다닐 수 있다. 25원짜리 전기장판이 주는 행복, 겪어보지 않으신 사람은 모를 거다.
펑황꾸청(봉황고성:凤凰古城)은 중국 아름다운 고성 중 하나로 소문난 곳으로 퉈지앙((沱江)을 중심으로 고성이 양편으로 위치하며 후난 성 서쪽과 구이저우 성 동쪽 접경지역에 있으며 명, 청대에 지어진 아름다운 고성이라 펑황고성을 산이 아름답고(山美), 물이 아름답고(水美), 노래가 아름답고(歌美,) 그리고 사람이 아름답다(人更美)라고도 한단다. 행정적으로는 후난 성에 유일하게 있는 소수민족 자치주인 상서토가족묘족자치주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의 펑황현(凤凰县)에 있다.
홍치아오(홍교:紅橋)라는 다리를 건너 큰길에는 쩐위엔처럼 전기차(1원/1인)가 다닌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쪽에 커다란 문(西門)이 보여 그 문 안으로 들어가 가니 봏황 조형물이 보인다. 그런데, 봉황 조형물이 내가 생각했던 봉황의 모습이 아니다. 세상에 봉황이라는 새는 상상 속의 동물이라 누가 만들든지 봉황이라고 이름 지으면 다 봉황이 되겠지만, 피골이 상접한 게 너무 앙상한 뼈만 있어 옆에서 바라보니 마치 사마귀나 여치를 보는 듯하다. 발톱이나 부리를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행가로 많은 관광객으로 혼잡한데 지나가다 보니 담벼락 같은 곳에 봉황성(鳳凰城)이라고 쓴 것이 보이는데 예전에 주용기라는 사람이 쓴 글이란다.
다시 큰길로 나와 난화루(南華路)로 나와 북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니 길가에 구두 닦는 사람이 많다. 중국은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구두닦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잠시 더 걸으니 난화먼(남화문:南華門)이라는 문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터지앙을 가로지르는 차가 다니는 다리인 봉황대교가 나온다. 이 다리가 봉황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차가 다니는 거의 유일한 길로 나머지 다리는 징검다리나 나무로 만든 다리뿐이다. 봉황 고성은 바로 강 오른쪽에 보이는 동네를 말하는 것이고 왼편은 과거에는 버린 곳이다. 그 다리 위에는 이곳 봉황을 찾은 관광객이 원주민 옷이나 국적불명의 이상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곳이다.
주변이 아무리 소란스럽고 깔깔거리고 웃어도 무심한 강태공은 오늘도 강 위에 배를 띄우고 세상을 달관한 듯 무심의 마음으로 낚시만 드리우고 있다.
오늘 숙소를 나와 홍교를 건너 큰길을 따라 시내 쪽으로 걸어 서문을 들어가 봉황 조형물을 보고 다시 남화문까지 온 약도다. 그러니 봉황 고성의 외곽만 먼저 둘러보았다. 고성은 위의 지도에 보이는 우리가 걸어간 길과 강 사이에 있다. 원래 봉황이라는 옛 마을은 지도에 보이는 네 개의 문 안쪽이었지만, 지금은 무척 넓은 지역이 봉황이 되었다.
지도상으로는 복잡해 보여도 봉황고성은 퉈지앙(沱江)이라는 강을 따리 형성된 마을로 모든 길은 강을 따라 있고 가끔 강을 건너는 다리만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고성거리는 강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고 북쪽은 강을 따라 술집이나 숙소가 있으며 그 뒤로는 주민이 사는 동네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는 완밍타(万名塔)라고 하는 탑 근처로 그곳부터 걸어 다니며 돌아본다.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게 홍치아로라는 다리인 홍교(虹桥)로 봉황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에 으뜸이다. 원래 이름은 워홍치아오(卧虹桥)라고 했으며 明나라 태조 때 세워졌다고 한다. 다리는 2층으로 되어있고 1층은 양쪽으로 토산품이나 기념품가게로 되어있고 2층은 전망대와 찻집으로 되어 있지만 2층은 전망대로 올라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
퉈지앙은 펑황고성을 먹여 살리는 젖줄이다. 그 강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홍교가 있고 수상 가옥같은 조각루가 있다. 오월 단오에는 龍舟경기가 이 강에서 열리며 강을 따라 성벽이 있고 성곽을 따라 위아래 두래 길이 있다.
봉황고성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초나라 땅이요, 당나라 때는 웨이양(渭陽)으로 불리었으며 청나라 때 비로소 펑황이라 불린 곳으로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성이다. 펑황 고성이 아름다운 성임에는 틀림없지만, 사실은 중원에서 먀오족(苗族)을 견제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퉈지앙(타강:沱江)은 사실상 봉황고성을 외곽에서 방어하는 해자에 불과했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퉈지앙을 앞에 두고 바로 성벽이 아직도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원의 입장에서 반발하는 먀오족을 견제하기 위해 퉈지앙을 해자로 바로 그 강 앞에다 성벽을 쌓았는데 그 성벽은 먀오족을 견제할 뿐 아니라 홍수예방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거리의 악사도 보인다. 멋진 연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나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젊은이의 연주에 귀를 기울여 본다.
봉황 고성에는 어제 본 서문이 있고 봉황 대교에서 홍교 방향으로 강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북문이라고 있다. 예전에 중원에서 이 부근 소수민족을 서로 편을 갈라놓기 위해 만든 성을 지키는 문이다.
성문으로 통하여 안으로 들어오면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성벽 길은 성벽 위로도 걸을 수 있고 아래로도 걸어 다닐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성문 위에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했다. 말 잘 듣는 먀오도 격리시켜야 할 먀오족도 이제 더는 없다. 성벽에 바짝 붙어 많은 집이 있는데 그 집들은 대부분 숙소이거나 기념품 가게, 음식점이다.
봉황에는 고기를 소금에 절이고 훈제하여 파는 가게가 많다. 불에 구워지고 또 통째로 갈기갈기 찢어져 가게에 걸린 돼지의 모습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아이러니하다.
흐르는 듯 마는 듯 흘러가는 퉈지앙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린다. 마을이 성 안팎으로 돈을 벌고 있는 셈이다.
띠아오자오로우(弔脚樓)라는 먀오족의 집은 한족에 수도 없이 밀리고 얻어터지고 쫓겨 이곳까지 내려오다 보니 넓은 땅보다는 산비탈이 한족의 공격에 미리 조망하고 수비하기도 좋고 여차하면 산으로 도망하기 좋아 주로 비탈을 이용하여 집을 짓다 보니 비탈을 이용하여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이용하기 위해 석축을 쌓고 삼나무를 이용하여 다리처럼 생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로 집을 짓어 그 모양이 다리가 달린 누각처럼 보여서 조각루라 불렀다고 한다. 출입구는 2층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데 1층은 주로 축사로 이용되고 2층이 거주공간이고 3층은 곡식저장이나 생활용품 보관 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렇게 지어 이웃 간에 조망권과 일조권도 완벽히 해결하였고 집이 주로 물가에 자리 잡다 보니 통풍이 원활하여 습기 예방을 위한 방편도 되었다. 사람 사는 풍습이나 환경은 모두 그 지역의 풍토에 맞게 개선되어 가는 게 인간의 삶인 것 같다.
좁은 성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홍교 부근에 오면 동문을 만나게 된다. 이제 남문이 남았는데 거리에 표시된 이정표에는 분명히 남문이 있어 남문이 있던 자리로 물어물어 찾아가 보니 남문이 있던 자리는 안내도만 남아 있고 지금은 빈 공터로 남아 있다.
성문 간의 거리를 볼 때 봉황 고성은 그리 큰 성이 아니다. 이제 네 개의 문을 모두 보았으니 고성은 사실 그 안이 고성이겠지만, 지금은 봉황이라는 마을 전부가 고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날씨가 쌀쌀하다. 저녁을 먹고 옷깃을 여미고 봉황고성의 야경을 보러 나간다. 봉황고성의 밤은 다른 곳처럼 대부분 유흥음식점뿐이다. 우리 같은 나이든 사람에게는 이곳도 조명 외에는 밤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다. 퉈지앙에서도 소원이 종이배에 불을 켜 강에 띄우고 있다. 밤에 산책하며 보는 봉황고성의 모습은 또 새로운 얼굴니니 아무리 힘들어도 밤에 또 고성으로 나와 걷는다.
봉황고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홍치아오에서 완밍타(만명탑:万名塔) 방향인데 그 옆으로는 완숴궁(万寿宫)이 있고 그 건너편으로는 강남수향(江南水乡)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조각루와 건물이 강을 따라 연이어 이어져 있어 많은 미술학도가 그 모습을 스케치하고 캔버스에 담기 위해 언제나 바글거리는 곳이다.
홍치아오(虹桥)에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큰길에는 초저녁부터 많은 가게가 야시장을 이루고 있다. 여러 가지 과일도 팔고 식사도 하며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안개속의 봉황은 새로운 얼굴이다. 얼른 옷을 주섬주섬 입고 고성의 아침을 찾아나간다. 고성 안은 대부분 돌아본 듯해 오늘 아침엔 완밍타라는 만명탑 아래인 퉈지앙의 하류 방향인 아래로 걸어간다. 이곳은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기에 무척 한가한 지역이다. 한국인 관광객도 이곳은 별로 찾지 않을 것이다.
어제 이곳 봉황 고성을 올 때 지난 다리가 보인다. 저 다리를 지나며 바라본 이곳의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치는 게 무척 아쉬웠는데 바로 그곳이 봉황의 한 자락이었다.
완밍타 앞으로 오른쪽으로는 홍치아오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퉈지앙의 하류인 곳이 사진속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다가온다. 봉황고성에는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된다.
봉황 대교 아래에서 출발한 놀잇배는 이곳까지 내려오는데 중국인들이 무지하게 많이 배를 타고 내려오는데 누각형 배 위에는 먀오족 아가씨가 있어 늘 배가 가까이 다가오면 간드러지게 노래 한 자락 부르면, 배에 타고 있는 관광객이 답가를 구성지게 부른다. 놀잇배는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상류로 돌아간다. 그러다 보니 여기부터는 배도 다니지 않고 관광객조차 찾지 않은 곳이지만 이곳에도 무척 많은 놀잇배가 있어 호객행위가 대단하다. 그러나 배 삯은 고성을 오르내리는 배에 비하여 저렴하다.
상류와 하류를 갈라놓았지만, 퉈지앙을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내려간다고 볼 게 사실은 없다. 다만, 징검다리 아래는 그곳에서 뱃놀이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보니 이곳 풍경조차 무척 한가하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시 고성 방향으로 올라가려는데 길가에 있는 이정표에 심종문 묘지라고 보인다.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위치를 물어보니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봉황이 낳은 문인인 션총원(沈從文)의 묘가 있다는데 올라가 봐야 하지 않겠나? 잠시 내려오다 보니 오른쪽 산 위로 올라가라는 푯말이 보인다. 묘지는 바로 언덕 중간에 있다. 묘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그의 책이나 그 밖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어 그가 썼다는 삐엔청이라는 책을 뒤적여보지만 짧은 내 실력에 책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오화석으로 묘비를 만들고 묘지 위를 돌로 덮어놓은 무척 소박한 묘지다. 그는 이곳 봉황에서 숨을 거둔 게 아니고 북경에서 죽어 이곳에는 그의 유골 일부만 묻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호남 봉황인이라고 했는데 봉황에서 태어난 그는 평소 이곳을 무척 사랑했고 그의 작품 세계도 주로 그 무대가 이 부근의 일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먀오족 출신으로 왜 먀오인을 내세우지 않고 봉황인이라고 했을까? 베이징에서 활동하려면 먀오인이라고 하시는 게 부끄러웠나?
먀오족의 공연 중 목욕탕 의자처럼 생긴 의자 두 개를 흔들며 추는 반덩우(판등무:板凳舞)라고 부르는 의자 춤이 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지만, 예전에 우리 어린 시절 목욕탕에 가면 바로 먀오족이 춤출 때 쓰는 의자처럼 생긴 나무 의자에 앉아 목욕했다. 옛날 아낙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밤에 변변치 못한 신랑 흉도 보고 자식자랑도 하며 놀다가 끼가 다분히 많은 한 여편네가 흥이 나면 앉았던 의자를 들고 벌떡 일어나 옆의 아낙 의자를 뺏어 두 개의 의자를 부딪치며 소리 내 박자를 맞추며 구성지게 한 곡조 뽑기라도 하면 함께 있던 아낙도 어울려 빙글빙글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반덩우(板凳舞)라고 부르는 전통춤은 이렇게 시작된 것 같다. 살풀이면 어떻고 한풀이면 어떻습니까? 여편네 속에 쌓였던 한을 함께 둘러앉아 노래라도 부르며 이렇게 풀고 나면 한결 시원할 것이다. 신명 나게 어깨춤도 추어가며 소리라도 질러대면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가슴 짓누르던 응어리가 뻥하고 뚫어지는 기분일 것이다.
그런데 먀오족에만 이런 전통춤이 있다. 다른 마을에서도 끼가 많은 아낙이 수 천 년간 내려오며 같은 행동을 했겠지만, 핏속을 흐르는 끼가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기에 일회성으로 끝이 났을 것이다. 어떤 행위가 부족마다 어울리며 후손에게 전해지며 자주 행하다 보면 풍습이 되고 전통이 되어 그 부족을 대변하는 행위예술이 되는 것이다.
먀오족을 감시하기 위한 성루다. 중원에서 협조하는 먀오족과 반항하는 먀오족을 나누기 위해 남방장성을 쌓았고 그 장성의 중심에 봉황고성을 짓고 그 성 위에 이런 누각을 만들어 감시하였다.
션총원(심종문:沈從文)의 옛집이다. 아마도 말 잘 듣고 중원에 순응했던 먀오인의 후손이었을 것 같다. 이곳 봉황 고성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들리는 명소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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