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12회》
12 .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과 박정희 소령
남로당이란 1946년 11월에 조선공산당을 개명한 것이다.
(김일성이 북쪽에 북로당을 창당했기 때문에 박헌영이가 조선공산당을 남로당으로 개명함)
이 남로당 대표는 박헌영이고 그 밑에 김삼룡이 부대표격이었으며 이중업이 조직담당 부장, 그 밑에 군사부 책임자가 이재복이었다.
이 사람이 실질적으로 군 장교들을 포섭하여 군대에 좌익세력을 확산시킨 키맨(Keyman)이었다.
박정희 소령(49년 당시 계급)도 이사람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재복은 1903년생으로 경북 포항출신인데 일본 동지사 중학교와 동지사 전문학교를 나와 평양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1930년대부터 대구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적색노동자 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주로 하였다.
이 무렵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던 이재복은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구미 동아일보 지국장)와 친구로 지냈다. (1905년생인 박상희 씨는 보통학교만 나왔지만 그 지역의 유지였음)
이재복은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1946년 10월 1일을 기해 대구폭동 사건을 배후 조종한 인물이다.
대구 폭동사건 때 박상희 씨가 시민 편에서 경찰과 시위 군중들 사이를 중재를 하고 나오다가 돌멩이를 던지며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형의 사망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교육중이었는데, 전보를 받고 구미로 내려가니, 형의 상가에 이재복이가 와 있었다.
이재복이는 박정희에게 형이 경찰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미 군정 당국에 대해 좋지않은 감정을 토로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줄테니 부탁하라는 말로 감화를 주었다.
박정희는 그 때 이재복이를 처음 봤으며 남로당인줄 몰랐다고 한다.
당시 8연대 경비중대장을 했던 김점곤 씨(예, 소장)는 박정희가 임관하여 춘천 8연대에 보직을 받고 근무할 때 이재복이가 춘천까지 박정희에게 면회를 왔는데 그때 8연대에는 박정희와 신경군관학교 동기생인 이상진 소령이 있었고 경비사관학교 2기 동기생인 표무원과 강태무 등 좌익성향의 장교들이 많았는데, 그 때 같이 어울려 다니며
모두 이재복에게 포섭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표무원과 강태무는 49년 5월 각각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함)
나중에 숙군작업을 할 때 체포된 이재복의 서류에 남로당에 가입한 군 장교들 명단이 500명이나 적혀 있었고 조직도에는 김종석, 최남근, 오일균 등과 함께 박정희도 지도층에 표시되어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박정희 소령(당시)이 김창룡 수사본부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받고 사형언도까지 받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사형언도를 받자 박정희의 명석한 두뇌와 서민적인 인간성을 아끼는 군 상층부에서 살리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박정희를 조사했던 김창룡 소령이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박정희 소령은 이념적인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자기 형의 죽음과 이재복의 꼬임에 넘어가 좌익성 장교들과 어울린 것 외에는 달리 좌익활동을 한 흔적이 없으니, 사형을 면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였다.
그때 방첩과장 김안일 소령과 김창룡 팀장의 연대서명을 받고 미군의 협조와 참모총장 이응준 장군의 재가를 받아 2심 재판부에 제출하여 형집행 정지처분을 받고 군복을 벗는 조건으로 형이 면제되었다.
그 당시 대부분 장교들은 박정희 소령은 인간적으로 절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증거로 북괴의 남침이 있기 3일 전에 박정희 문관이 모친 상을 당하여 구미에 내려갔는데,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그 때 육본 전투정보과 장교들은 "박정희 문관이 우리에게 다시 복귀할 것이다. 아니다 인민군으로 갈 것이다."라고 두패로 나누어 내기를 했는데, 육본이 수원으로 이동하는 6월 27일날 박정희 문관은 수원 육본으로 찾아왔다. 이것을 보더라도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만일 박정희 문관이 공산주의자였다면 자기를 사형 언도까지 내렸던 대한민국 군대에 무슨 미련이 있어서 찾아왔겠는가?
그것도 현역도 아닌 문관인데,, ,
#박정희 소령은 군적에서 삭제되고 낙담하고 있을 때 백선엽 정보국장이 북한정보반장으로 있던 그 정보반에 문관으로 채용하여 일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쟁 때는 장도영 대령이 정보국장을 했는데, 수원 임시 육본자리에서 육군소령으로 복직시켜 주어서 줄곧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대통령까지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해 준 세계적인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