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토요일 아침 밥상
2020. 12. 향기 이영란
물메기 두 마리, 오징어 네 마리, 굴, 톳, 미역, 시금치 한 단, 콩나물 한 봉지, 깐 새우, 갈치 대여섯 마리, 손두부 세 모......
토요일 아침 엄마가 남편과 함께 새터시장에서 우리 집으로 가져 온 장꺼리들이었다. 친정에서 가져온 무와 대봉감 홍시들, 한가득 담긴 마늘망, 밭에서 캐서 다듬은 잔파, 그리고 큰 되로 다섯 되나 뽑은 가래떡 박스를 부엌에 내려놓으니 순식간에 집은 가득 찼다. 나와 아이들은 9시가 다 되어가도록 자고 있었고, 전화를 받지 않아 건장한 아들을 둘이나 두고도 남편은 짐을 옮기느라 두 번을 오르내리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게으름 피우는 겨울 해를 못 기다리고 새벽을 헤쳐 나간 엄마와 남편의 옷에는 미처 다 떨어지지 못한 찬 공기가 서걱거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온 너무 많은 양의 먹을거리와 반찬거리에 기가 질리기 시작했다. 저걸 정리해서 냉장고에 빼곡이 쟁여넣고, 하루종일 다듬어서 나물을 만들고, 전을 부치고 하다보면 토요일 하루가 다 날아갈 것이 틀림이 없었다.
나는 근근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집에 있는 아들들 때문에 어떤 날은 콩나물 국밥집에서, 또 어떤 날은 충무김밥을, 또 다른 날엔 사랑보다 MSG를 훨씬 많이 담은 것처럼 보이는 사랑담은 묵은지김치찌개를 사다 나르며 저녁을 해결하며 살았다. 뭐 돈이 아쉬운 집도 아니니 그게 뭐 대수냐는 소리를 들을 만도 하겠지만, 반찬을 만들어 먹는 일이 스스로 해결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인 황폐함의 영향은 제법 넓었다. 생활전반이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느낌.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왜 소중한가. 그것은 영양가 있고 깨끗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섭생적 의미도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활을 사랑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심성이 인격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재료를 다듬고, 섞고, 불의 온도를 맞추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간도 함께 익어간다.
-김훈 작가의 <연필로 쓰기> 중 「꼰대는 말한다」에서 작가가 젊은이들의 주례사를 서면서 말한 내용(이 대목을 기억하고 있다가 한참을 찾았는데, 예상 외로 짧은 부분에 잠시 등장했고, 나의 기억과는 다른 맥락이었다)
저녁에는 널브러져 있다가도 몇 줄이라도 두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더 사람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일주일에 한 편이라는 최소한의 목표를 깨지 않는 일에 나는 집착했는데, 내려앉은 체력은 그 집착을 비웃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토요일에 반찬을 하고 싶은 마음보다 하루 종일 비몽사몽하며 지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 방식대로 뭐라도 해 먹을 터였다.
엄마는 오자마자 박스를 헤쳐서 가래떡을 덜어내서 아이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비닐에 더운 김이 그대로 갇혀있어 떡은 말랑말랑하고 쫀득했다.
“농사 지은 쌀로 만든 떡 아이가. 시내서 떡을 해봐라. 갈분가리 넣고, 방부제 넣고 해가지고 절대로 이런 맛이 안 난다”
엄마의 높고 요란한 음성이 집 안에 가득 찼고, 나는 장꺼리를 이것저것 챙기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 안의 다용도실은 피곤에 절은 내 머릿속처럼 버려야 할 재활용품, 음식물 쓰레기, 빨래거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래떡으로 배를 채운 식구들은 아침이 급할 이유가 없었지만, 엄마는 제일 먼저 물메기탕을 끓일 물을 올리고 무를 뺃여 넣었다. 싱싱한 톳을 데치고 손두부를 으깨어서 함께 무치는 동안 끓어오른 국물에 메기를 넣었다. 물메기탕이 완성되는 동안 엄마는 가래떡을 여러 봉지에 나누어 담았고, 또 떡국용으로 한 줄씩 펴서 식히고 말리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에서 또 여러 가지 앞뒤처리를 해야했다. 우리 집 부엌이고 또 엄마 혼자서는 되는 일이 아니었다. 콩나물을 삶고, 시금치나물을 데치고, 무를 채 썰고, 또 새우와 굴, 파, 땡초와 양파를 넣어 조그만한 크기의 전을 부쳤다. 그렇게 한두 가지 반찬이 만들어지고, 갈치 몇 토막을 구워서 우리는 늦은 아침을 먹었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물메기탕은 맑고 부드러웠다. 입 안으로 넘어가 위로 가지않고 온 몸의 기관에서 간만에 좋은 음식을 먹어 자기들이 바로 가져가겠다고 아우성치면서 퍼져가는 느낌이었다. 고소한 손두부와 톳나물 무침, 새우굴전, 그리고 며칠 전 시어머니께서 부친 김장김치까지 늦은 토요일 아침 밥상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내가 한숨을 돌리는 동안에도 엄마는 나물을 마저 무치고, 또 나박김치를 담았다. 엄마도 어제까지 일하러 다니느라 힘들지 않냐고, 좀 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사과, 배, 무, 파프리카를 납작하게 썰고, 소금, 마늘, 생강으로 국물을 낸 상큼한 과일이 씹히는 엄마표 물김치였다. 반찬을 거의 마무리한 엄마는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와 마주 앉았다.
마늘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이야기 보따리도 함께 풀리기 시작했다. 촌에는 남편이 먼저 죽은 여자들이 많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이기도 할 것이다. 대개 큰 소리를 치거나 고집을 부리는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던져진 병과도 타협하지 못하고 먼저 떠났다. 소심하고 발걸음이 조용하고 섬세한 남자들은 여자들 곁을 오래 지켰다. 남은 여자들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은 돈, 사랑과 관심, 가족의 온기였다. 홀로 남은 여자들은 외로움과 사랑의 부재의 공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해서 외로움이 당연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남편이 먼저 죽은 여자들에 대해 말했다.
"혼자된 여자들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할 수는 있지. 그래도 아무리 살기가 외로봐도 그렇지. 우찌 한 두 남자도 아니고, 몇 명인지도 모르게 집 안을 들락거릴 수가 있노. 촌에 눈하고 말들이 얼마나 무서븐데. 쪼깨 좋은 옷만 입고 가봐라. 저 년이 남편 먼저 보내놓고, 옷만 빼입고 바람 피러 다닌다고 그란다. 우리 동네 지세포(아줌마)는 서울 아들집에 갔다 와가지고 얼매나 울어쌌는지. 며느리가 시어미가 하도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닝깨, 저그 손자한테 손도 못대그로 했다고 안하나. 그 집 서울내기 며느리도 너무 하기는 했지마는 지세포 그기 그리 대접 받그로 했다. (우리집 앞에)부연네는 그 뭐시고 박근혜당(태극기부대) 거어 빠지갖고 밤만 되면 그리 나간다. 아이고, 나이가 들면 곱게 들어야 할긴데, 사람이 여러 질이라. 부연네가 아들들이 장개도 안가고 속이 썩는 거는 이해로 하지마는 그래도 택시기사도 오고 가스집 남자도 오고 이 남자 저 남자 우찌 그리 사는고 이해가 안되는 기 천지다. 자식 부끄러버서 우짤라꼬."
그 아주머니들이 지나친 면도 있었지만, 홀로 남겨진 여자들에게 던져진 막막함은 그 무엇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울 터였다. 앞뒤 가리지 않는 그런 행동들은 그만큼 자신의 상황이 견디기 힘들다는 반증이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엄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함께 손가락질 할 처지도 안될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엄마 곁의 빈자리는 어떻게 무엇으로 채우고 있을지 나는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저렇게 딸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식과 손자들에게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싶어하는데, 그걸 할 기회조차 잘 주지않는 내 옹졸하고 치졸한 마음을 가진 나를 쥐어박고 싶어졌다. 엄마의 마음 속 구석에 묻어놓고 있는 비밀스런 이야기도 나왔다.
"내가 청곡 공장 다닐 때 최이사님이라고, 그 사람이 나한테 그리 잘했니라. 너그 아부지 아플 때 병원도 마이 데리고 가고, 나를 그리 챙깄는데, 최이사님한테 아부지 돌아가신 것도 안 알렸는데, 그거 말 안했다고 억수로 섭섭해 하더라. 나는 그런 거 오만데 알리는 것도 싫다. 그 최이사님이 그 뒤부터 맨날 카카오톡 메세지를 보내온다. 좋은 말, 좋은 음악 그런거. 그거 보고 억수로 위로가 많이 되지마는, 저거 똑똑은 마누라 있는데 내가 뭐 우찌하겄노. "
그랬다. 엄마라고 맘에 담은 남자가 없을까? 그 최이사님은 불필요한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맞겠지만, 또 그런 짝사랑할 대상 하나 조차 없는 것도 황폐한 일이었다. 내 감정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나이에 다시 사랑할 남자가 생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내 경험의 폭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영역 안에 것만 겨우 보고 말할 수 있는 주변머리를 가진 인간일 뿐이었다. 남편을 보내고 20여년을 살면서 박완서 작가 그 자신에게도 스쳐갔을 노년의 사랑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시절 내 눈을 가리고 오로지 한 남자만 보이게 한 그 맹목의 힘을 딸은 지금 정열이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열이라 해도 좋고 정욕이라 해도 좋았다.
지금 조박사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그게 없었다. 연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 있었다. 정서로 충족되는 연애는 겉멋에 불과했다. 나는 그와 그럴듯한 겉멋을 부려본 데 지나지 않았나보다.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빠안히 모든 것이 보였다. 아무리 멋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닥칠 늙음의 속성들이 그렇게 투명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 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데나 함부로 터는 담뱃재, 카악 기를 쓰듯이 목을 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 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댔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 제 입 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 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도 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재고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불가능을 꿈꿀 나이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박완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중 「마른 꽃」에서 발췌
엄마가 스물 서너 살쯤, 동생이 돌 무렵이었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내 의식의 기억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분이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엄마를 보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쏟은 사랑의 분량과 방법들이 보인다. 아버지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삶을 통과해 낸 힘의 원천은 사랑받은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식과 손자들에게 토요일 아침 밥상을 차려주고, 그 밥을 양껏 먹은 우리보다 더 큰 기쁨과 에너지를 얻어서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내 몫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것이 계산하고 정리가 되어지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