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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3장 16-21절
하나님의 선물이라
지난 시간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의미에 대해 살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아닌 택자라는 의미에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오직 택자만을 위해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도중심적인 설교를 통해 이 본문을 마치 보편속죄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만인구원설을 지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복음 전파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 우리에게는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고 해서 성경의 교리가 아닌 보편속죄, 만인구원과 같은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가 받을 수 없는 해석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오늘은 다시 16절에서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의 공로, 그리고 믿음이라는 세 가지 원인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구원을 생각할 수 없고,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 구원을 논할 수가 없으며, 믿음 역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이상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 세 가지가 다 구원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원인,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 유효적인 원인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랑보다 앞선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그런 선택보다 앞선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입니다(엡1:11 참조). 이처럼 하나님의 뜻, 의지, 선택 그리고 사랑을 뭐라고 하느냐? 유효적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질료적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질료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사실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과 방편으로 정해졌다는 의미에서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선택의 수단입니다. 선택의 원인은 앞서 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을 때 그들을 누구를 통해 구원 받도록 정하셨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도록 정하셨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14:6). 따라서 그리스도는 선택의 수단이라는 차원에서, 원인으로 돌리고자 한다면 구원을 위한 매개체요, 방편이라는 차원에서 질료적 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은 뭔가? 믿음에 대해서는 형식적 원인 혹은 도구적 원인이라고 합니다. 모든 공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되 그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차원에서, 그러나 믿음 없이는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믿음이 도구로서, 그리고 형식으로서 구원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부분 가운데 한 가지가 믿음에 관한 부분인데, 기독교 신앙에 있어 믿음보다 더 많이 말하는 내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이 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말하는 만큼 어떤 면에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의 자리보다는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믿음의 자리를 높여놓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이 믿음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만날 때는 더더욱 심각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 이해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일단 믿음이라고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내용 가운데 한 가지는 인간 스스로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앞에 펼쳐져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마치 인간의 몫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분명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 보면 “믿음을 가져야지만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니 믿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으면 인간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함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일한다고 하는 신인협력의 내용이 그 핵심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유효적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후 문장에 보면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냐? 앞 문장 전체입니다. 은혜에 의한 구원, 그리고 믿음에 의한 구원 모두가 사람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이 전적 부정이 중요합니다. 그럼 뭐냐?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믿음을 형식적 원인, 도구적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오기까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인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는 데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치 복음을 펼쳐놓고 인간에게 그것을 선택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외형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이 그 스스로 믿음을 선택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12절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인간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는 존재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말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택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에서 종종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실 때 그 이면에는 항상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앞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에 마치 그 스스로가 그런 믿음의 주체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내 믿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 믿음은 우리의 것으로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믿음은 하나도 없다, 나 스스로 믿음을 가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믿음의 결과로서 영생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면 믿음의 결과인 영생도 뭐냐?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영생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생각해 보자면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믿음과 영생, 혹은 천국을 항상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결과가 영생이고, 믿음의 결과가 천국이기 때문에 영생이나 천국을 최고 상급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로 가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내용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지금 아브람에게 있어 방패가 되신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 지금 아브람에게 있어 지극히 큰 상급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이상 두려워 할 대상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가장 큰 상급으로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보다 클 수 없고, 혹 오늘 본문에서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그 영생이 하나님보다 더 큰 상급은 아닌 것입니다.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뭔가를 주신다면 주어진 어떤 것들이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는 겁니다.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경우 죽으면 어디에 갑니까? 천국에 갑니다.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의 고통도 없고, 더 이상의 눈물도 없고, 더 이상의 답답함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것 역시 하나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실제로 영생의 가치는 어디 있는가? 영생 자체보다 그 영생을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유기자들의 경우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영원히 받습니다. 단어적으로 보자면 저들도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이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을 위한 영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치인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영생을 약속하고 있지만, 영생이 가장 큰 상급이나 되는 것처럼 인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도 선물로 주시고, 또한 믿음의 결과 영생도 선물로 주시지만, 그것보다 더 큰 상급은 바로 그것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 지난주부터 보아온 요한복음 3장 16절의 가장 큰 핵심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구원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 놓으신 사랑인 것이고, 믿음을 통하여 영생까지 주시는 사랑이라고 지금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는 대상은 누구냐? 여기서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세상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 바로 그들에게만 사랑을 베푸신다는 겁니다. 복음의 보편성으로 보자면 모든 자들에게 복음이 들려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그 사랑 때문에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는 대상은 누구냐? 모든 자가 아닙니다. 복음의 보편성을 통해 모든 사람이 믿는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믿게 되는가? 누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17절도 보시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는가? 그 목적에 대해 심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본래는 어떠하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상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창조 때만 하더라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뜻을 가지고 계시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원 전에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택자를 위해 구원의 방편을 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련하신 방편이 무엇이냐? 바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 짐을 짊어지도록 하는 일이었고,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이시도록 인성을 취하게 하셔서 이 땅에 보내시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그로 말미암은 구원이지, 다른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의 방편을 말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된 구원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비록 니고데모가 유대인으로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열심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구약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없이 구원을 받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는 것은 믿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독특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보통 심판하면 최후 심판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최후 심판 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고후5:10). 물론 택자의 경우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하나도 기억 된 바 되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사실은 죄악 된 어떤 행위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그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그 자체가 벌써 심판을 받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요, 죄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장차 있을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믿지 않고 있는 그 현재가 심판을 받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죄악 가운데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 “이것이 어떻게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묻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규범인 이 말씀이 죄라고 하는 이상 아무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로마서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1:2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혹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매우 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법 없이도 살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위 역사적으로 볼 때 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규범에 비춰보게 되면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말씀 앞에 비춰보면 죄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그 부패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 보면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아가 그 죄는 장차 올 마지막 때 심판을 받게 되지만, 이미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 땅에서 심판을 받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것이 뭐가 심판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또 칭송을 받으면 멋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어떤 사람의 경우 좋은 환경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상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사람의 예만 들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이상 그들의 모든 인생은 심판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헛될 뿐입니다.
반면 믿음 가운데 있는 자들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을 소유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분을 소유하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지만, 그분을 소유한 이상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분을 잃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8). 그만큼 하나님이 없는 인생,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사는 삶 자체가 저주요, 심판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있으면 다 잃어버려도 괜찮을 만큼 부요한 자인 것이고, 그리스도가 없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심판이라면, 이 말은 역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질 것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영생을 받은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미래의 일만이 아닙니다. 이미 거듭난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말씀하셨던 겁니다. 이런 복을 받은 자가 누구냐? 우리 스스로는 믿을 수 없는데,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저와 여러분인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깊이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할 때 저들로 하여금 핑계하지 못하도록 심판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예정론을 말하면 꼭 이런 식으로 반발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기하셨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 아니냐?” 그러나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단 한번도 심판의 원인, 정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린 적이 없습니다. 다 자기 죄 때문에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을 뿐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그들이 받는 정죄는 이것이라고 합니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이 왔으면 빛을 봐야 합니다. 그 빛 때문에 어둠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일반 상식으로 볼 때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식을 깨는 것이 인간의 부패성인 겁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과 반대편이 어둠을 더 사랑한 것, 이것이 정죄를 받는 이유인 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겠다는 마음의 상태와 같습니다. 본래 자기 행위가 악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창6:5). 그런 그들에게 빛이 비춰지지만, 그 빛으로 나아오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빛을 더욱 피할 뿐입니다. 본래 악하지만 더욱 더 악으로 향할 뿐입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단지 그들의 행실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외적으로는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상 그 마음의 상태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는 상태인 겁니다. 죄책에 있어 해결이 되지 않는 상태요,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인 겁니다.
20절도 보시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왜 그들이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가? 왜 그토록 빛을 미워하는가? 그 빛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죄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전적으로 부패한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그 선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몇 퍼센트도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마음의 악함을 숨기기 위해 외적인 선으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 그들이 정죄를 받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의 죄 때문인 겁니다. 행위로서 짓는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안에 있는 죄책과 부패성, 바로 그 죄 때문에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 스스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치유책을 멀리하기 때문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으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요14:6), 그것을 거부할 채 끊임없이 어둠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2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빛으로 나아오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특징이 뭐냐?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한다고 말씀합니다. 기준이 뭐냐?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 그 기준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 앞이요, 세상 앞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만든 어떤 법에 따라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부터 인간에게 양심의 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양심의 법을 나중에 요약적으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뭐냐?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신 법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전 인류에게 주신 도덕법입니다. 이 법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그것도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이 법에 저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법이 기준이 되어, 그 법을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자들인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을 매일매일 살피는 자들이 진리를 따르는 자인 겁니다.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하게 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안에서 행하고 있는지 항상 살피는 자가 진리를 따르는 자인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상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그의 말씀으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복음 3장을 통해 거듭남에 대해 살피고 있지만, 거듭남이라는 것은 단지 예수 믿고 영생을 보장받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경우 믿지 않는 것 자체가 분명 정죄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악한 행실임을 증거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무엇으로 그 믿음을 증거 하겠습니까? 당연히 그 행위로서 믿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믿음에 따른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 믿음에 따른 열매까지 선물로 주실 것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따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시제가 다 과거완료입니다. 그럼 실제로 우리에게 다 일어난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의 경우는 미래의 일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영화로운 존재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 이후, 그리고 최후 심판 이후에야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화의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직 완전 성화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주신다면 무엇까지 약속하고 있는 것이냐? 성화까지 선물로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을 살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 앞에서 살피는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일한 규범으로 주신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실도 살피지만, 내적인 마음의 상태도 살피는 자가 바로 진리를 따르는 자인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런 삶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거듭남,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원인이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들까지도 아까지 아니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셨으며, 심지어 믿음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영생까지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질료적 원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형식적 원인은 믿음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 나와 있지는 않지만 개혁자들은 이런 원인과 함께 목적인을 말했는데, 구원을 통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가? 에베소서 1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니까 구원의 목적인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가? 같은 에베소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지만, 좀 더 가깝게 설명하자면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모든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있어 마땅히 가져야 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임과 동시에, 그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도 주시고,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우리는 이 사실이 헛되지 아니하도록 마땅히 우리를 살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 대하여 ‘진리를 따르는 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주의 진리만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를 살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