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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의 누정(樓亭)
이 내 빈
겨울 나무는 단아하다. 그 어떤 장식도 가식도 없는 순수로 무장하고 있다. 낙엽을 털어버린 홀가분한 차림 또한 간결하다. 다소 을씨년스럽기는 하지만 호젓하게 한겨울의 정취를 맛보고 싶다면 이곳을 둘러볼 일이다. 어느 날 책을 읽다 말고, 저녁 무렵 산책을 하고 싶을 때 마음에 아무런 준비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물론 혼자일 때 더욱 좋을 것 같다. 혼자일 때 자아를 회복하고 자신을 온전하게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혼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거나 자폐적인 삶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삶을 이끌어 가는 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산에서 동쪽으로 2km 쯤 떨어져 있는 율헌유적지(栗軒遺跡地) 표지석 언덕에 있는 삼기정(三奇亭)과 삼기정유허비(三奇亭遺墟碑)를 천천히 둘러보고 고산면 소재지를 향하여 넉넉한 걸음으로 30분쯤 걷다보면 고고한 자태가 청량감을 주는 고산 천변에 위치한 세심정(洗心亭)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해서 이곳에 인간이 살게 된 것일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 끊임없이 투영되는 미궁 속을 잠시 거닐어 보다가, 한 숨을 돌리고 나면 고산천을 끼고 아득하게 뻗어있는 제방길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길을 따라 무작정 소요(逍遙)하다 보면 만경강의 냄새와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비비정(飛飛亭)에 이르게 된다. 제방길을 지나는 곳에는 여름이면 제법 큰 소리쳤을 제방 숲도 보이고 흰뺨검둥오리며 물총새도 보이고, 물억새며 달포리풀의 흔적도 보인다. 어우보(於牛湺를) 보면서 수탈의 역사를 읽을 수 있겠지만 만경강의 풍류와 이어지는 완주의 누정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정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하고 벽이 없게 지은 다락식의 집으로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이름으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각과 정자를 비롯해 당(堂), 대(臺), 각(閣), 헌(軒) 등을 포함하여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누정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속의 살림집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위주의 유람이나 휴식공간으로 가옥 외에 특별히 지은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또는 흙으로 쌓아올린 축대위에 이층 이상으로 지은 것이 누각이라면 정자는 벽이 없이 탁 트인 건물로 누각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보통이다.
누정은 또한 정자라는 점에서 충청도 이남에 많이 분포한 모정(茅亭)과 비슷하지만, 모정은 주로 농경지를 배경 으로한 정자로써 편액이나 현판은 물론 자체의 고유한 명칭이 없이 주로 농군들의 휴식소로 간편하게 지은 집이라는 점이 누정과 다르다. 누정은 보통 마루로만 되어 있으나 한두 칸 정도의 온돌방이 딸린 경우도 적지 않으나 이와 같은 건물까지를 포함하여 누정이라는 개념으로 통용된다고 할 것이다. 정자가 개인적 수양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인 집단 수양공간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사기’에는 신선들이 누에서 살기를 좋아 하였으므로 황제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선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록 설화적인 전승이지만 누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으며, 인류가 주거용의 가옥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휴식공간으로 누정과 같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신라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볼 수 있으며,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전(口傳)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으로 볼 때 천천정 이전에 누정의 축조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5세기 이전의 우리나라 누정의 역사는 알기 어렵다. 누정은 이처럼 궁전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더불어 군신의 휴식처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차츰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문헌에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누정 가운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누정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경상도가 1,295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 1,070개, 충청도 219개, 강원도 174개, 제주도 6개 순이다. 경상도 중에서는 안동 97개, 산청 83개, 예천 79개, 거창 69개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국역본)’에 따르면 전국의 누정의 수는 885개로 되어 있다. 이 중 경상도가 263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 170개, 평안도 100개, 충청도 80개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누정 중에는 소실된 누정도 있고, 이후에 신축된 누정도 있다. 안동지방에 있는 누정가운데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다른 장소로 옮겨진 것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어 현재의 정확한 숫자를 추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누정이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위치한 것이 그 특징이다.
누정은 지리적 환경과 누정을 건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정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학자나 묵객들의 출입이 있어야 한다. 경상도는 어느 지역보다도 퇴계(退溪) 를 비롯해 많은 사숙문인(私淑門人)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학풍을 이끈 본거지가 경상도인 만큼 학자들이 머문 곳이 많으며, 누정도 많을 수밖에 없다. 경상도는 이처럼 누정이 건립되거나 경영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경상도의 누정 중에는 소박한 초당의 정자가 많다. 경제적 형편이 좋아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가 많은 전라도와는 차별되는 점이다.
누정은 세워진 위치나 건립취지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다. 우선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들 수 있다. 명승지나 경관이 좋은 곳에 있는 누정은 그곳에 오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 흥취를 즐기게 되는 것이 일차적인 기능임은 당연할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누정은 주로 학문을 가르치고 수양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해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시를 아는 선비들이 누정을 휴식처로 삼아 유유자적하며 유흥상경의 흥치를 시로 읊어내며 시단(詩壇)을 이루기도 하였으니, 당대의 학자이며 이름난 시인이었던 김인후(金麟厚)가 무등산 밑에 은퇴하여 지내던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 교유하며 그곳의 광풍각과 제월당을 소요하면서 지은 소쇄원 48영(詠)의 서정시는 이러한 시적 교유로 생긴 누정시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 사람들의 동회(洞會), 각종 계모임을 위해 건립된 경우도 있으며, 이런 것을 통하여 지역여론을 수렴하고 통제하는 마을 공론 형성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활쏘기나 수련장 구실을 한 곳도 적지 않다. 궁궐 및 관아의 누, 성루(城樓) 등은 휴식이나 연회, 감시, 조망 등의 용도로 활용되었고, 사찰의 누는 강당, 사찰사무실, 전망, 종루(鐘樓)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옛 관리와 선비들은 누정을 건립하고, 누정을 유람하며 글을 남기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했으며, 주로 퇴임한 선비나 처사로 지내던 지식인들이 자연 속에 소요자적하거나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며, 정신적 즐거움을 찾고 자연을 배우는 선비문화나 산수문화는 누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누정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누정의 위치는 가장 중요한 공간에 위치하여 마을을 보호하는 감제공간(監制空間)으로 이방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마을을 보호하는 기능, 강변의 홍수 등 재난을 미리 감지 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별장(別莊), 전쟁 때의 지휘본부, 재실(齋室), 치농(治農), 측후(測候)등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누정은 전근대적 사회에 있어 교양인들의 지적활동을 통하여 문화를 생산하는 중심공간의 역할을 해냈으며,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며 시정을 나누고, 당면한 정론을 펴며 경세문제(經世問題)를 술회하기도 하고, 향리의 자제들에게 학문과 인륜과 도덕을 가르치던 지식과 문화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누정 그 자체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포용하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또한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각과 정자를 무대로 하여 펼쳐졌던 누정문화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내 고장의 역사를 조감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완주는 농경문화의 역사적 현장인 만경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강이 갖는 풍광과 더불어 누정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누정이 고산의 삼기정, 세심정이고 삼례의 비비정이다.
∎ 삼기정(三奇亭)
삼기정은 다른 두개의 정자에 비하여 건축년도가 가장 빠르다. 삼기정은 완주군 고산읍 삼기리에 있다. 1439년(세종 21)에 건립된 정자로 ‘고산읍지’에 율헌 최득지(栗軒 崔得之 1379-1455)가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기정은 오랜 세월동안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 오다가 1990년에 복원되었다. 정면 2칸․측면 2칸 규모의 정자는 골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으로 마루의 사방에 난간을 설치하였고, 처마에 단청을 입혔다. 정자 내부에는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신주 기우만(辛州 奇宇萬 1846-1916)이 1912년에 글씨를 쓴 하연(河演)의 ‘삼기정기(三奇亭記)’가 편액으로 걸려있으며, 강암 송성용이 쓴 ‘三奇亭’이라는 현판이 외부에 걸려있다. 정자 옆으로는 최득지의 후손들이 1875년(고종 12)에 세운 삼기정유허비(三奇亭遺墟碑)가 있다.
삼기정은 하연이 전라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던 도중에 고산읍에 들렀다가 소풍을 나간 것이 삼기리였다. 그는 이 곳의 냇물(水), 돌(石), 소나무(松)가 잘 어울리는 경치에 마음이 쏠려 삼기라 이름 지어 송판에 글씨를 써주었으니 세 가지가 기이하다는 뜻이었다. 당시에 고산현감 최득지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정자에 거니 이것이 삼기정이다. 하연이 쓴 삼기정 기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산현 동쪽 오리쯤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으니 절벽이 깍아 질렀고 그 아래에는 긴 내가 맑게 굽어 흐르고 위에는 노송이 울창하여 푸르렀다. 그 서쪽에는 평평한 들이 펼쳐있다. 임인년(1422) 봄에 나는 고산읍에 간일이 있어 이 언덕에 오르게 되었다. 연하 초목이 모두 아름답게 내 눈앞에 깔려 있는데 수석과 송림이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이에 삼기라 이름하여 깍은 나무에 글씨를 써주었더니 이제 현감 최득지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가 처음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써 그러한 뜻에서 사양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하건데 사람의 마음은 물건을 보고 감동되는 것으로 눈을 달리하여 보게된 그 느낌은 더욱 간절했다.
맑은 물을 보게되니 나의 천부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바위가 엄엄한 것을 보니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르름을 보게 되어 곧고 굳은 절개를 더욱 높게 하니 이 언덕의 세 가지 물건이야 말로 어찌 경치가 아름답거나 찌는 더위에 재미있게 논다는 것 뿐 이리요. 내가 다른 사람과 소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뒷날에 선비들이 이 언덕에 오르면 느끼고 뜻을 두게 될 것으로 생각할진대 마음을 삼가고 뜻을 길러내는 기회가 족히 되어야 할지라. 또한 목욕을 하고 풍월을 하는 행락도 있을 것으로 전날에 내가 이름을 지은 뜻 거의 이 같을 지다.”
선인들은 자연이 주는 풍취를 관조하며 여유와 너그러움을 배웠으며, 자연을 통하여 인간 본연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확고한 신념을 더욱 곧게하며, 절개를 높게 하는 자기수양은 물론 교훈을 얻게 되고, 절제와 극기를 통한 인간완성의 모럴까지도 추구하려는 자연친화적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지금은 삼기정을 세운 언덕 아래로 푸르게 흘렀다는 냇가와 노송은 사라지고 옛 바위와 삼기정만이 한시대의 기억을 간직한 채 외롭게 서 있다. 현대화로 이어지는 댐 건설과 수로의 변화가 가져다준 결과이다. “산천은 유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고 읊조리던 옛 시인의 싯귀가 아쉬움을 자아낸다.
∎ 세심정(洗心亭)
만경강의 풍류를 더욱 가까이서 맛볼 수 있는 역사적 흔적이 바로 세심정이다. 고산향교 옆에 자리한 이 정자는 만죽(萬竹) 서익(徐益 1542-1578) 선생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강 한쪽 거북바위에 ‘만죽선생유허비’만 남아 있다가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고 고산천의 아름다운 정취를 살리고자 만경강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 7월에 복원되었다.
조선 선조 당시 문신이었던 서익은 1585년 의주목사로 재직시 정여립(鄭汝立 1546-1581)을 위시한 동인이 이이(李珥 1536-1584)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차례 이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파직됐다.
이후 고산으로 내려와 산수를 벗 삼아 주변에 대나무 1만 그루를 심고 고산면 자포골 사인보위에 7평 규모의 정자를 지어 만죽정이라 하고 뜻있는 선비들과 함께 나라를 걱정하며 마음을 씻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서익이 세상을 떠난 후 마음조차 혹 더러워질세라 맑은 물에 씻었다하여 세심대(洗心臺)로 불려오다가 자연스럽게 세심정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세심정은 동쪽 멀리 운장산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햇살과 보름날 떠오르는 만월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어 고산 8경중 하나로 불려지고 있다.
정자 아래 세심보(洗心洑)를 중심으로 고마리 군락과 노랑어리연꽃, 외개연꽃, 자라 등 다양한 수생․수변식물들이 대규모 군락을 형성하고 있어 최적의 자연생태 학습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평소 세심보 이래 돌 틈 사이에 자라사리 등이 서식하고 있어 비가 온 뒤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일명 ‘구멍치기’라는 낚시를 하고 있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특히 세심정은 고산향교를 옆에 끼고 있어 풍류를 즐기는 유흥상경의 기능은 물론 학문과 수양을 위한 교류의 장과 지역여론 형성 등의 역할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방인의 출입을 감시하거나 조망하는 기능도 수행 했을 것으로 보여 지는 풍류문화적 전통을 잘 간직한 누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비비정(飛飛亭)
완산 8경중의 하나인 비비정은 비비낙안(飛飛落雁)으로 유명하다. 달빛은 천만 쪽으로 탄저(灘渚)에 부서지고 어화에 꿈을 실은 고깃배가 오르내리는 한내(寒川) 백사장 갈대숲에 사뿐이 내려앉는 기러기 떼를 비비정에 올라 바라봄이 한폭의 수묵화를 닮은 정경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유난히 차갑다 하여 한내라 불렀는데 물이 깊고 모래사장이 넓어 그곳에서 생산되는 무우는 전주 팔미로 이름이 높았으며, 군산이나 부안에서 온 소금 배와 젓거리 배와 같은 황포돗대가 동포(봉동교)까지 쉴새없이 오르내리고, 백사장 한편에는 큰 시장이 열려 파시를 방불케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비정에서 바라보이는 전라선 철도와 삼례천이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파란만장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속에 민중들의 애환과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비비정이 있는 삼례(參禮)는 옜날 북쪽에서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全州)로 진입하는 호남 최대의 역참(驛站)이 있던 곳이다. 관리들이 말을 갈아탔던 곳이다.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삼례에서 이리가면 이리(裡里)요, 저리가면 전주요, 그리가면 금마요, 고리가면 고산이라 하여 사통하며 팔달했던 교통의 요충지로, 이도령이 남원 가던 통로였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내려갔던 곳이다. 동학혁명군이 대대적으로 집결하여 서울로 향하던 곳이었고, 대한민국 1번국도가 관통하는 곳이고, 조선시대 9대로 가운데 전주, 남원, 통영으로 가는 6대로가 분기하는 곳으로 호남대로는 비비정 옆을 지난다.
비비정은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남쪽 언덕위에 세운 정자이다. 완산지(完山誌)에 의하면 1573년(선조 6년)에 무인 최영길(崔永吉)이 별장으로 건립하였으며 그후 철거 되었다가 1752년(영조 28년)에 관찰사 서명구(徐命九)가 중건하여 관정(官亭)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비비정을 비비정공의 9세손인 최창렬이 1901년전북 임실군 성수면 계월리로 옮겨갔다가 1998년에 복원되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은 최영길의 손자 최양의 청탁을 받고 비비정기(飛飛亭記)라는 기문(記文)을 쓴 것인데, 송시열은 기문에서 조업(祖業)으로 무관을 지낸 최영길과 그의 아들 최완성, 손자 최양을 언급하고, 당시 무관들은 권문에 아첨하여 뇌물이나 바치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은 청고한 인물이어서 정자를 일으키어 풍아하게 살았고, 최양은 살림이 넉넉하지 못함에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난 일이라 칭찬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비비정이라 이름한 뜻을 물으니 지명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대의 가문이 무변일진대 옛날에 장익덕(張翼德)은 신의와 용맹으로 알려졌고 악무목(岳武穆)은 충과 효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두 사람 모두 이름이 비자였다.
비록 세월은 오래 되었다 할지라도 무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장비(張飛)와 악비(岳飛)의 충절을 본 뜬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다 할지라도 뜻은 큰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써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비비정 아래로 한내라 부르는 삼례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주변으로는 드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깊은 산속에서 물이 흘러 형성된 소양천과 고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이자 전주천과 삼천천이 합류하여 만경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40-50년 전만 해도 잔풀하나 없는 모래밭이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고 전해지는데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만경강은 동․식물 뿐 아니라 곁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수없이 많은 것을 제공해 왔다. 그 중에서도 여가문화의 공간과 상황을 제공함으로써 풍류를 즐기고 여유로움을 갖는 누정문화가 꽃 피웠졌을 것이다.
비비정 또한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풍류를 즐기며 시정을 나누던 멋진 문화공간이 아니었겠는가.
註; ⌜아름다운 완주문화재 하권⌟(비지정문화재)-완주문화원 발행(2010.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