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분옥의 수필세계
-사상보다 더 깊은 사람, 사람보다 더 멋진 사랑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 홍랑, 시조 중에서 -
I. 열며
내용이 무엇이든 언술구조가 어떠하든 수필은 제재에 주제를 담아 화살로 쏘아 올려야 문학이 되는 것이다. 정서니, 사상이니, 상상이니 하는 문학의 구성요소도, 참신성, 형상성, 함축성, 탄력성이니 하는 문학의 네 가지 속성을 갖추어도 주제가 전략화 과정을 거쳐 작품 속에 내재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수필의 주제가 인간학을 지향하고 있어도 작문이 되고 만다. 좋은 수필은 반드시 주제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야 한다. 삶이니 진실이니 하는 특성의 실현보다 앞서는 게 수필문학 본질의 구현이다. 실감의 유리와 보수를 통해 미적 정서로 새롭게 태어난 주제가 마치 사과 속에 녹아 있는 영양분처럼 작품의 전체 구조 속에 진리와 함께 숨어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러한 논리를 전제로 할 때, 한분옥의 인물수필은 문학으로서의 격과 프레임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명사형으로 되어 있는 제목에서도 수필의 품격은 드러난다.
<백년의 적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동서양의 위인을 제재로 해서 쓰여진 수필로서 대체적으로 주제가 제재에 실려 간접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취도가 높은 편이다. 형식적인 구조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인식구조에서 오는 내용도 감동을 준다. 여성 특유의 언술구조 속에 나타난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문장의 맛은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항우의 애비 <우미인>에서 신라의 불상의 미학을 묘파한 <반가사유상>에 이르기까지 한분옥 수필 전부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무엇보다도 그녀만의 특유한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 ‘세계인물사’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동서고금의 걸출한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수필집을 읽히게 하는 기본 동력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풍미한 분들의 삶과 그 사상을 그녀 특유의 여성적 감수성으로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어조로 그려나가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II. 펼치며
수필을 읽는 맛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하나는 작품의 전체 구조 속에 숨겨진 주제를 작가가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놓았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며, 다른 하나는 작가의 다채로운 내면 풍경을 따라가며 작가의 인간적 체취를 느끼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수필을 ‘보물찾기’에 비유하는 것이고, ‘인간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시기(詩妓)로 꼽히는 <김부용>의 사랑을 평가하면서 ‘상대는 천하의 현관(顯官) 판서대감이요, 그 상대는 비천하기 그지없는 한갓 수청 기생에 불과하건만 주고받는 사모의 정에 어찌 귀천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한 데서 추론할 수 있듯이 한분옥이 수필 속에서 부르짖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사랑의 위대성’이다.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만들어야 독자를 공감대에 세울 수 있고, 감동의 고지로 몰아갈 수 있다. 이 수필집을 감상하는 포인트는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들에게 한분옥이 내리고자 하는 옷, ‘적의’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다. 그녀는 사생사사,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 역사적 여인들에게 왕후의 대례복을 입혀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한분옥의 인식론적인 관점은 그녀를 초월론적 현상학적 주체로 만든다.
필자는 수필의 참신한 맛은 관조라는 작가의 개성적 묘사에서 우러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체험의 나열화로 얻는 일상적인 느낌보다는 제재의 의미화를 통한 미적 형상화가 주는 참신함이 더 수필적 감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논개>에서도 우리는 ‘적의’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충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작가는 ‘테양이 떠오르는 그날까지’ ‘그대 붉은 혼은 천추에 지지 않는 꽃이 되어’ ‘뜨겁게 태양을 달구는 식지 않는 사랑’ 등의 이미지를 논개의 사랑에 덧씌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분옥의 서술전략으로 인해 수필은 더 문학적 향취를 거둔다. 한분옥 수필은 경험을 넘어 위대한 삶을 살았던 위인들의 사상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찾고, 그 의미에 적절한 이미지를 덧씌우는 정서의 객관화를 통해 독자들을 미적 사유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관조하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서 인물의 소성이 교감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문학성이 수필에 담기는 법이다. 자신만의 렌즈로 걸러진 한분옥의 주옥같은 수필들은 문학보다 더 깊은 철학적 사유 위에서 위대한 인물의 삶을 다양한 이해 방법론을 통해 감성과 지성으로 분석하고 있어 독자의 관심을 충분히 끈다고 하겠다.
수필을 관조의 문학이라고 할 때, 한분옥의 수필은 조금도 그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관심이 있는 것이면 모두 수필감이 된다. 다시 말해 ‘볼’ 시視의 차원이 아니라 ‘볼’ 견見의 차원으로 나아가서 종국에는 ‘볼’ 관觀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수필은의 출발점이 제재라면, 결승점은 그것의 의미화다. <언로, 시의 길>에서 한분옥은 ‘365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 어쩌다 내리는 밤이슬 한 방울 받아먹은 선인장의 가시 같은 눈물이…. 황량한 고비에서 뜨거운 눈물, 뜨거운 세월이 누른 황하로 흘러간다.’라고 하면서, 고비사막에서 흘리는 눈물이 ‘시의 길’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제의식을 제재와 연결시켜내는 것이 수필을 문예화하는 데 중요한데, 지금까지 한분옥은 이런 일을 잘 해내고 있다. 그녀가 보내온 사십두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관조미학의 토대 위에서 빛나는 인물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언로, 시의 길>은 확실히 남다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아야 할 것을 찾아 조리개를 맞추는 데 남다른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직한 도전을 우리는 수필 <언로, 시의 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뉴월에도 감기 몸살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고 추위는 떠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자락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 그 인정에 애를 태우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날 때 혼자 사막을 꿈꾸었다. 내 속에 있는 황량한 모래 바람과 열기는 고비에 와서 더욱 달달 볶이고 있다. 나는 열차를 타고 가고 있지만, 창밖에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나란히 가고 있다. 나는 어떤 경치를 찾아 나선 것도, 이국 풍물을 보고 즐기려 나선 것도 아니다. 늘 존재의 중심 밖에서 서성거리던 자신이, 존재의 중심을 찾아 무의식에서 내친걸음일 뿐이다.
- <언로, 시의 길> 중에서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역사는 실제 있었던, 일어났던 사실 하나하나를 그대로 말한다. 반면에 문학은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는,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쓴다. 그것은 추측이나 상상, 아니면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 당연히 이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추리와 당위성에 의거한 서술을 말한다. ‘언로, 시의 길’은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나’가 함께 존재하면서 문학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구체어인 ‘고비사막’을 제재로 해서 실감나게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역사보다 훨씬 진지하며 철학적인 진리성에 가까운 것을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문학이 보다 깊은 철학일 때 우리는 위인과 만날 수 있다. ‘나는 열차를 타고 가고 있지만, 창밖에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나란히 가고 있다.’는 진술보다 더 의미있는 철학적인 표현이 어디 또 있을까. 이 수필 외에도 감성의 향기가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우미인> <별리> <에밀리 브론테> <시몬 드 보바르> <마그릿 생어> <이중섭> <연암 박지원> <반가사유상> 등의 작품을 집중 분석해 보겠다. 수필이 요리라면, 구체어는 연상과 상상을 통한 미적 사유로 독자를 유도할 수 있는 조미료라 하겠다.
1. 운명적 사랑과 이별의 정한
칸트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논의 또는 평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의 미학적 또는 심미적 취향은 극과 극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제시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그리고 정당한 기준이 존재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이와 같은 가정 위에서 한분옥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탁월한 해석력에서 가능해진다. 바슐라르 이론에 의하면, 문학적 상상력은 물질적 상상력과 원형적 상상력을 양극으로 하고, 역동적 상상력이 물질적 이미지를 변형 발전시켜 나가면서 미지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가는 탐색자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미는 상상력의 가장 탁월한 활동 그 자체이며, 상상력은 미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의 의식화된 체험 속으로 들어오는 길은 상상의 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로 말미암아 과거의 체험은 인간의 심리 속에서 현재의 체험과 결합되고 재구성되어 사실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체험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한분옥의 수필은 이러한 바슐라르의 이론처럼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한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신문 또는 문학지에 연재해오면서 인물연구에 시달려야 했던 고독과 그 시간을 이겨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앎에의 기쁨, 성취감, 자아실현이 주는 생기발랄함은 그 어떤 연출가도 잡아낼 수 없는 영혼으로 빚은 예술이다. 무엇보다도 고생을 투자해서 얻어가는 정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쉽게 평가할 수 없는,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이 수필집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인물에 대한 그녀의 천착이 주는 감동은 수필에 재미까지 더해 준다. 인물로 본 사상사라고 해도 될 만한 이 작품은 생활수필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인물수필과 마주하고 있다. 깊은 공감과 찬탄으로 가득한 <백년의 적의>는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부딪히는 주제인 ‘사랑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진실을 파헤친다.
예술의 가장 본질적 조건이 상상의 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한 작가는 상상력에 의한 수필의 예술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수필집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예술성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 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사상 감정의 정서화는, 신선한 상징들이 신선한 미적 감각을 우려내어 감동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물론 상상도 관념연상을 일으키지만 진폭이 다양하고 깊기 때문에 작가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대다수의 수필은 위에서 말한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아주 잘된 작품이다.
그녀의 무덤가엔 해마다 우미인초(개양귀비) 가 바람에 흐느끼듯 피고 있다. 지금 또한 정치의 계절이다. 그 어느 때보다 권모와 술수가 팽배한 링 위의 주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대의 승리자가 반드시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렇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손을 들어준다는 사실로 존재한다
- <우미인> 중에서 -
항우가 자신의 애비였던 우미인에게 읊은,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온 세상을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추도 가지 못하네/ 추가 가지 못하니 어이하리/ 우(虞)여, 우여 너를 어이 하리’라는 시를 듣고, 우미인은 항우의 칼을 뽑아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마는데, 작가는 이를 ‘이별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갸륵한 용단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우미인의 죽음에 오열하던 항우는 사력을 다한 전투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아갈 수 있었으나 전쟁에서 대패한 장수로서의 책임감에 자신 또한 오강(烏江)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이 글에는 영웅과 미인 사이에 전개된 진실한 사랑의 풍경이 절경처럼 그려져 있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의 세계, 그곳은 성인聖人의 무대가 아니라 야심가들의 지략이 판치는 독무대라는 깨우침 속에 작가는 결말부에 가서, ‘지금 또한 정치의 계절이다. 그 어느 때보다 권모와 술수가 팽배한 링 위의 주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대의 승리자가 반드시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렇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손을 들어준다는 사실로 존재한다’ 라는 메시지를 들려준다. 목숨을 내던지는 진정한 사랑을 역사의 승리자로 환치시킨 데 힘입은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면서 이 수필은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가치를 한층 드높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참패를 통해 역사의 승리자가 된 항우와 자결로 사랑을 보여준 우미인을 다시금 생각한다. 아름다운 사랑은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일까.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공감을 주는 설득력은 필수적이며 또 연상에 의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심상에 의한 참신한 기법 같은 것도 시도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한분옥의 <우미인>이라 하겠다. 이 작품의 발단은, 늦가을 국화를 독자에게 상기시키며, ‘국화를 보면 절개 높은 여인을 생각하게 되고, 불굴의 기백을 지닌 사나이가 생각난다’로 시작하면서, 그녀는 작중 인물, 항우와 우미인 두 사람간의 진정한 사랑을 국화 이미지에 덧씌우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지점에서 우리는 절절한 사랑의 위대한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미인은 살아남아 적군의 전리품이 되어 적장의 노리개가 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정의를 내세웠다가 역사에 참패하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죽게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를 안타까워 하면서도, 작가는 시대의 승리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고수한다. 이 수필은 시대의 승리자보다 역사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정의를 택한 위대한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선조 원년(1568)에 등과하여 북도평사로 변방인 경성에 와 있을 때 홍랑과 고죽은 서로의 고독과 애정을 문학과 풍류로서 정을 나누었다. 신분의 차이로 이루지 못할 사랑을 홍랑의 가슴에 새겨놓고 다음 임지(臨地)인 서울로 훌쩍 떠나가는 임을 영흥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른다. 저문 날 흩날리는 꽃바람 속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어쩔 수 없어 묏버들 가지를 꺾어 자신의 사랑이 지순함을 전한다. 헤어짐의 아픔과 안타까움에 흐르는 눈물 보이지 않고, 차라리 슬픔은 속으로 감추며 시 한 수로 이별을 고한다. 많은 기류(妓類)의 작품이 있고 또 있지만 이렇게 품위 있는 작품은 드물지 않던가. 한갖 기생의 사랑이라 하지만 또 이만큼 격조 있는 사랑이 또 있으랴.
- <별리> 중에서 -
최경창과 부인의 합장묘 밑에 홍랑의 묘를 쓰게 한 최씨 문중 사람들도 대단한 것 같다. 묘 입구에 있는 홍랑의 앞면에는 고죽의 시가, 시비 뒷면에는 홍랑의 묏버들 시조가 있는데, 한분옥은 못다 한 사랑을 죽어서나 한 몸 되어 지내라는 후인들의 뜻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수필은 3년이란 묘막살이 힘든 삶을 이겨내고, 임진왜란 때는 사랑하는 이의 문집을 들고 피난을 떠난 홍랑의 절의를 잘 담아내고 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 이 수필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차가운 진실을 사랑하고, 내면의 고통을 껴안아,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남게 하는 아름다운 예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수필의 화소는 적어도 가치있는 것이어야 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했을 때,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충분히 가치있고, 그 사랑은 누가 봐도 멋지고 아름답다고 하겠다.
한분옥은 죽음을 불사하는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을 다루면서, 다른 수필들과는 달리 왜 홍랑의 이야기를 ‘홍랑’이라 제목을 짓지 않고 ‘별리’라 명명했을까. 만약 ‘홍랑’이라고 하면 이야기의 무게 중심과 축이 홍랑에 더 기울지만, ‘별리’로 하면, 최경창과 홍랑의 이별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이 점을 작가가 잘 간파했다고 하겠다. 작가는 사랑은 헤어짐과 언제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고, 누군가를 사모한다는 것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면서, 그렇다고 사랑 없이 한 세상 산다는 것 또한 서글픈 일이요, 차마 이루지 못할 사랑이란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지고한 사랑은 생명보다 어쩌면 먼저’였던 게 아닐까여기는 작가는 모두에 놓인 ‘묏버들’이란 시 한 편을 상기하는 것으로 발단부를 시작한다. 별리의 안타까운 심사를 묏버들로 형상화한 홍랑의 시를 읽고, 작가는 그 홍랑의 감정에 뛰어들어 그 시 한 편을 우리들 가슴에 심어 천년을 조용히 살아 숨쉬게 한다.
이 인용문의 결구, ‘한갖 기생의 사랑이라 하지만 또 이만큼 격조 있는 사랑이 또 있으랴’라는 대목은 홍랑 시의 위대성과 항구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별리로 인한 두 사람의 내면을 빈틈없이 묘사해내는 그녀의 형상화 능력은 문학적 가치를 드높인다. 구차한 눈물 보이지 않고 천대 만대 남는 시 한 수로 이별을 전하는 홍랑의 품격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작가의 개성적 시각으로 발견하는 데서 가장 큰 매력이 있다. 여기에 보편성의 공감대를 이루어주는 서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 대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깊은 이해가 있으면, 신분도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홍랑의 ‘묏버들’은 사랑의 본질을 잘 상징하는 징표로 기능하고 있다.
그 누구를 사모해 안으로 가슴 태우며 숭고한 사랑의 완성을 꿈꾸는 계절이다. 오직 사랑 하나에 그리움으로 혼자 뜨겁게 꽃 피우다가 스스로 흩어져 버리기도 하는 이가 소설 속 주인공 외에 또 없으랴만.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존재 확인이며 젊은 날 실존의 한 방식일 것이다. 생애 마지막까지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오직 한 사람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값지게 하는 것인지 더 많은 세월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움이란 인류의 구원의 한 방편인 줄도 비로소 알게 된다
- <에밀리 브론테> 중에서 -
마음속에 있으나 영원히 허상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실체를 소설 속의 인물로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이 가을 한분옥은 스무 살 즈음에 읽었던 <폭풍의 언덕>을 소환한 것이다. 몇 해 전 명작 순례의 길에 올라 폭풍의 언덕, 황량한 들판에 서서 잊혀진 줄로 알고 있었던 사랑의 멀미로 앓았다던 작가는 문학이 있기에 우리는 이 현실의 멀미를 치유할 수 있으며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외로움의 꽃송이가 얼마나 밤새도록 피었다 스러지고 피었다 스러지고 했을까. 마지막에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캐스린의 망령을 보면서 황홀경 속에서 죽는 장면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지만, 잔악한 복수 행위에 치를 떨면서도 히스클리프를 미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브론테의 인물 창조에 작가는 놀라워한다.
죽음 자체도 최후가 아니라 영혼의 개방이며 죽은 자의 망령은 살아 있는 자의 영혼과 신비적으로 교류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사랑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존재 확인이며 젊은 날 실존의 한 방식일 것’이라 한 것도 역시 사랑의 본질에 상상력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목이다. 그녀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삶의 진통과 내면의 진솔한 고백 속에서 태어난다. 사랑의 전개를 풀어내는 탁월한 역량이 수필의 가치를 드높인다.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그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인 셈이다. 마음 속에 있으나 영원히 허상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실체를 소설 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작가의 현실이 안타까움을 불러온다.
이 수필의 발단부는 ‘폭풍의 언덕 요크셔의 황무지에 부는 바람은 거칠었다.’로 시작한다. 사랑과 증오로 얼룩지는 삼각관계의 사랑을 폭풍의 언덕에 비유했던 것이다. 가끔 문맥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게워내는 작가의 고백은 순수한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돕고 있다. ‘내 속에 녹아있는 사랑의 밀도마저 측량해 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이 소설이 주는 힘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는 사랑의 순수함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수필은 삼각관계와 집착적 사랑이 주는 위험 또한 보게 한다. 삼각관계로 인해 세상을 인고로 살아낸 너무도 사랑에 힘들어하는 청춘남녀를 연상하게도 한다. 이 수필에서 작자는 외형적으로 히스클리프와 캐스린 사이 나타난 애증의 갈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애증으로 ‘사랑과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을 다시 소환해내고 있다. 그리고 영혼에 호소하는 사랑의 간절한 절규를 통해서 작가는 진정한 사랑이 지향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2. 어머니 아내 딸, 영원한 여성
작가에게서 통상적인 삶의 형태란 어떤 것인가. 수필가의 경우는 다른 장르와 사뭇 다르다. 전업작가가 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문학 한 길에 엄정하거나 단호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라는 이름에 앞서는 다른 직업인으로서의 이름을 걸어놓고 세상 속에서 만나지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이면이나 속을 후벼 파서 다른 객관적 상관물로 치환하는 것이 수필가의 일이 아닐까. 삶을 삶답게 헤쳐나가며 나를 나답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격렬하게 살기는 어렵다. 남과 다른 관점을 유지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 특수한 체험을 특수한 언어로 말하면서 현실을 살아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여자의 이름으로는 더욱 그렇다. 한분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적 입장에서 세계에 부딪치면서 당연한 것에 회의를 제기하고, 경계에 서서 늘 의문을 토해내며 ‘영원한 여성성’을 주창하고 있다.
헌신과 희생이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일상의 행복에 젖어들고 있는 것은 무료한 일상을 지나가는 시간의 관성이 아니라 창조의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한 의지의 확산으로 볼 수 있다. 한분옥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해방과 자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환상적 통합론’을 주창한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의식있는 여성수필가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지혜를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튼튼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인간화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인형의 집」의 로라는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며 애원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뿌리치고 집과 가정을 뛰쳐나옴으로써 여성의 해방과 인권을 찾으려 했고, <보봐리 부인>의 에마 부인은 남성과 동등히 자유를 구가함으로써 여권의 신장을 꾀하려 했다. ‘여권 수호성’ 차원에서 오늘날 우리의 여권 운동가들도 남편과 동등한 위치나 그 이상의 자리에 서서 여성의 권익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한분옥은 <시몬 드 보봐르>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보수성의 그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한국 수필계는 여권 확보와 여권 신장을 위해 자기 주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려는 사람보다 전통적 주부의 자리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작가들이 더 많다. 이런 모성원리 속에는 자신의 여성적 운명을 모성의 원천이며, 생명의 씨앗으로 인식하며, 주어진 삶의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여자의 인생이니, 우리는 결코 불행한 여자들이 아니라는 관점도 들어 있다. 그렇다고 한분옥 작가의 ‘영원한 여성성’이 가부장적 가치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소극적인 여성성은 ‘모성’만을 부각시키는 담론 속에서만 존재해왔다. 소극적 여성성은 그 태생부터 조선의 유교적 가부장제와 일제하의 근대적 지식이 기이하게 결합하면서 만들어졌다. 여성의 교육은 자녀 양육이나 아내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에 한정되면서 양처현모론이 등장했다. 이에 따라 본질적이고 초월적인 모성애와 함께 자신이 습득한 근대적 지식을 활용해 합리적으로 자녀를 양육할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한분옥은 모성원리의 본질을 여성의 주체에 둔다. 실존적 선택이야말로 진정한 여권이라는 것이 <시몬 드 보봐르>의 마지막 결구 문장에 놓여 있다.
인류는 태어난 자연적인 그대로 놓여나야 함이 마땅하며 모두를 놓아주어야 할 의무 또한 우리에게 있다. 여성도 태어난 그 자체로서의 여성을 살고 싶은 것만은 사실이다. 본질적인 인간 가치들은 여성적 원리, 진정한 여성성이야말로 인류를 영원히 구원할 것이다, 삶의 한복판에는 영원한 여성인 ‘어머니’와 ‘아내’와 ‘딸’이 함께 하고 있다.
- <시몬 드 보봐르> 중에서
작가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당시 사회의 구속과 억눌림을 대변한 이 논제에 대하여, 여성이 남성에 의해서 길들여지며 종속되어 가는 것에 대한 여성적 분노를 말하고 있다. ‘보봐르의 이론은 21세기에 와서도 여전히 페미니즘의 이론적인 기반으로 논의되어질 뿐만 아니라 인류학적 가치로도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작가가 페미니즘 자체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21세기를 맞아 이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공업화 사회를 거쳐 제3의 물결의 정보화시대를 맞고 있다. 하지만 여성에 관한 가치관은 여성 자신의 태도로부터 사회적 통념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도 여성 자신의 입을 통해서 영원한 여성성의 옹호가 당당히 외쳐지고 있는 현상은 흥미롭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남녀가 공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남녀 관계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한옥분의 <시몬 드 보봐르>는 진취적이며 자아실현을 이룩해가는 여성상을 구현하여 자신의 능력을 키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한편, 여성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아울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성 정체성의 환상적 통합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존에 관한 문제와 가치 규명, 보다 보편적 의미의 획득이 문학이 지향하는 바이고, 수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면, 수필적 관심과 창작적 발상은 모든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신뢰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한분옥의 수필정신은 진정한 의미의 남녀평등 실현을 추구한다. 여성작가가 말하는 여성해방은 근본적으로 인간 평등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야기하고 있는 남성 대 여성 편짜기식 여성운동이 아니라, 현실적인 바탕과 문화전통을 고려해서 부분적인 성역할을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임신 출산에 있어서의 선택권도 존중해주자는 것이다. 여성의 힘이 사회 전반에 필요하고 변화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지혜를 깨닫는 여성이 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제창한 진정한 성역할의 조화 속에 여성의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는 작가의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다. 남녀가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평등의 법칙이 적용되도록 여성 작가가 현실안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 자아실현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자아실현 문제와 상충되는 낭만적 사랑과 관계를 환상적 통합론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옥분은 여성성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라는 봉건적 억압 속에서도 신사임당 같은 여성이 탄생했듯이 여성들은 제도적 현실적인 여러 가지 여성에게 불리한 환경에 살면서 삶이 힘들어도 참고 인내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작가의식은 페미니즘 관점이 아니다. ‘본질적인 인간 가치들은 여성적 원리, 진정한 여성성이야말로 인류를 영원히 구원할 것이다, 삶의 한 복판에는 영원한 여성인 어머니와 아내와 딸이 함께 하고 있다.’는 표현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가치가 드러난다. 한옥분은 기존 질서와 가치의 관점을 재발견하기보다는 한국적 상황에서 여성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여성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의 봉건적 시대에서도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이 나왔으니, 여성적 원리는 인생의 밀알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참된 생애의 도전이고, 자신의 역경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던져 헤쳐나가는 자세다. 주부로서 가정에 묻혀 아이나 남편 뒷바라지만 하고 나태하고 안일한 삶과는 다른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거룩한 이름. 여성이면 누구나 다 어머니가 될 권리를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고 환영받지 못했던, 한갓 여성에 불과한 자신의 몸을 통해서 새 생명이 탄생했을 때 자식을 낳아본 이 땅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몸이 얼마나 거룩하고도 신비로운 존재인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자신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이름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새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누구나 자신에게만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신비한 몸의 구조를 가진 여성은 동시에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 또한 주장한다. 준비되지 않는 어미는 결코 되지 않겠다는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를 스스로 부르짖는 것 또한 여성의 자유의지다.
- <마그릿 생어> 중에서 -
그런데 여기서 주요한 포인트는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다. 전통적이라기보다 상당히 진보적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제다.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도 여성 스스로 갖자는 주장이다. 그녀는 인간의 실존을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이 되찾아야 할 권리로 보고 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이름’에서 우리는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명인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 언명은 앞 세대를 걸어간 여성들의 중요한 삶의 궤적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작가는 처음부터 ‘어머니’를 거룩한 이름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 세대의 삶을 보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뱃속에 움틀거리는 태아를 상상해보며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없고 외롭고 슬픈 여자의 존재에서 거룩하고 위대한 어머니로 상승하는 신분 변화를 통해 여인의 삶을 길어 올리고 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 정서가 ‘외로움’과 ‘사랑’이다. 인간에게 외로움과 허전함이 없다면 언제나 만족스럽고 꽉 있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만족감을 오래 누리고 있지를 못한다. 그녀가 어머니의 위대성을 옹호하면서도 누구나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작가는 위의 인용문 제일 앞부분에 있는 ‘거룩한 이름’에 초점을 둔다. 그러고 보면, 앞에서 ‘자유의지’가 임신의 거룩함과 신성함을 반추하기 위한 성찰의 키워드였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한분옥의 작품은 여성이 고수해야 할 현실을 전체적으로 유지해 나가면서 이 또한 거부할 수도 있다는 자유의지에 인격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문학은 한 마디의 말과 구와 절의 바른 해석이 따라야 하고, 전체 주제 파악이 있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수필에 비해서 한분옥의 경우는 경우의 수를 잘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려내는 것만 보지 말고 그 뒤에 가려진 것들, 그리고 더 나가서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여성의 본질, 삶과 애환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3. 예술성의 향취와 자기성찰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중섭>과 <반가사유상> 등의 작품은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자기를 솔직히 들여다봄으로써 큰 감동을 준다. 어쨌거나 나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분옥의 여러 수필에서 나를 찾기 위한 길고도 험한 길을 떠나고 있음이 확인된다는 것은 한분옥 수필의 힘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가 마음을 찾아가고자 하는 것은 잉여 고통을 화두로 삼아서 ‘왜’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드디어 자기와 대면함을 본다. 자기성찰은 자기 그림자와의 대면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인생을 회상하는 일은 단순히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과거를 재음미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어 재조직하는 과정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외로운 것이 인생인 것을 아무리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해도 시퍼런 저 바다를 어찌할 건가. 그리움 그 한 뼘의 아득함이 먼지 속의 심연처럼 가깝고도 멀고 깊고도 깊어 이 청명한 날에 그의 흔적은 뼛속까지 하염없이 진다.’라고 한 <이중섭>에서의 묘사는 한분옥의 언어적 감수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비유적 문장이 연출하는 다의적 의미가 문예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수필 속에서 융이 말한 치료자 원형을 본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본능을 조절하고 더욱 성숙한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의식의 상을 찾아 작가는 서귀포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이 작품은 마음을 열고 숨어있는 자신과 대면하며 이중섭의 천재성의 본질을 밝혀 나가면서 그 과정을 문학적으로 그려가는 탐미적 글이라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수필가란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또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늘상 새로운 예술혼을 찾아 존재하고자 한다. 작가와 일상인은 표면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작가는 생활이 바쁘고 주어지는 시간의 공백 속에서 느끼는 무료함을 자신의 지각을 갱신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수필은 바쁜 생활 속에서 걸러낸 예술가의 삶을 접목시켜 놓은 것이기에 독자의 공감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한분옥 수필군에서 나타나는 의식상의 특징 중 또 다른 하나는 자기만의 창조적 공간을 확보하려는 남다른 애착이 보인다는 점이다. 불확정성의 우주적 원리를 삶의 원리로 적용하여, 예술가 순례에 나선 것이다. 예술가의 향기를 싹틔우는 작품들이 많은 것은 작가의 시야가 내면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예술가들의 삶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은 어쩌면 삶의 외로운 공백을 메워주는 매개로 안성맞춤이기에 작가는 여행의 결과로 얻은 깨달음의 공간에 고독한 사색을 불러들인다고 할 수 있다.
. 서럽다. 서러움과 그리움 아득함이 동시에 교차해 내가 들고 있는 찻잔이 파르르 떨린다. 누구에게나 외로운 것이 인생인 것을 아무리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해도 시퍼런 저 바다를 어찌할 건가. 그리움 그 한 뼘의 아득함이 먼지 속의 심연처럼 가깝고도 멀고 깊고도 깊어 이 청명한 날에 그의 흔적은 뼛속까지 하염없이 진다. 가족이 없어진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무와 구애도 없이 그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은 예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처음과 끝이 살얼음 같은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서로 포갠 인생은 그 자체가 바로 삶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 <이중섭> 중에서 -
한분옥 수필의 세 번째 특징은 위 인용 작품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천재 미술가 이중섭은 예술에 대한 욕망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한옥분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있던 시간들에 나름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집의 특성 중의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한분옥 수필을 말하라고 한다면 거울이다. 반사면을 잘 닦아야 얼굴이 잘 보이듯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늘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기가 바로 서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수필가로서 글을 쓰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이 바로 자기 정체성 찾기라 할 수 있다. 한분옥 수필의 상당수가 자기의 내면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건강한 자아를 갖기 위한 작가 나름의 노력이라 하겠다. 무의식의 저편에 순진한 모습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실체와 만나는 일은 종교에 심취하는 일보다 의의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된 판단으로 오만해지기도 하고, 겸허한 자세를 갖기도 한다.
‘서럽다. 서러움과 그리움 아득함이 동시에 교차해 내가 들고 있는 찻잔이 파르르 떨린다.’고 하면서 고독과 마주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내면의 자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바람이 스치면 물결이 일렁이듯 인간도 어떤 사물과 접할 때, 물결이 일듯 감정이 인다. 여기에 자기를 묻는다는 것, 어떤 사물에 취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수필적 자아다. 한분옥은 서귀포시의 ‘이중섭 문화의 거리’가 보행자 우선거리로 지정되어 차가 없는 것을 틈 타서 시민과 관광객들 사이에서 하염없이 걸어본다. 고독과 친구가 되는 일은 일상의 권태를 전지해 내는 일과 같을 것이다. 한분옥의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잃어버렸던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되찾는 작업임을 밝혀내고 있다는 것은 수필의 치료성을 더하는 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여 함께 따라 죽는 일은 과연 칭찬 받을 일인가? 왜 아내가 죽었을 때 따라 죽는 남편은 단 한 사람도 없는가?” 연암 선생은 <열녀함양박씨전>에서 당시 사회문제가 된 열녀들의 자살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하였다. 시댁의 가문에 열녀문을 세우기 위해 남편을 따라 죽는 여인이 자신의 피붙이 딸이나 여동생이라도 열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할 수 있을까를 문제 제기한 선비였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학습으로 읽었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조선시대 여인들의 숨 막히는 삶이 가슴 먹먹해진다.
- <연암 박지원> 중에서 -
한분옥은 <연암 박지원>에서 선생의 삶과 인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선생의 아들이 쓴 글과 처남이 쓴 글도 찾아서 소개하고, 연암의 일신수필이 우리나라 근대수필문학의 효시임을 밝히고 있다. 수필가로서 당연히 연암의 다루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열하일기는 위대한 문장으로 자리 잡게 하는 문체상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묘사”라고 하였다. 수천 년 동안 관념적인 문체로 길들여진 시대에 자유자재로 미묘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위대한 문체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한분옥 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 중 하나는 충분한 텍스트 인용을 주제 구체화를 필요로 하는 대목에서 잘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성을 잘 파악하여 수필의 문체적 특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넌지시 말해주기도 한다.
한분옥 수필의 가장 강한 특징은 손맛의 유려함이다. 존재의 집으로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그녀는 문학의 재미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구축한다. 그녀는 참신한 발상과 비유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작가는 연암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 노비와 나눈 이야기, 연암에 대해 아들이 쓴 글, 처남의 제문, 어느 하나도 예사로 취급하지 않는다. 서양이 보는 것을 중시하는 시각문화라면, 우리 동양은 듣는 것을 중시하는 청각문화라 할 수 있다. 이 수필에서 노비와의 대화는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의 청각문화와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인용할 때 처음에는 아들, 중간에는 노비, 그리고 끝에는 처남의 자료가 잘 갖춰져 있어 명료성을 준다. 특히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돕는 발단부 묘사는 매우 역동성이면서 시청각적 이미지의 보고다. 발단부에 제시된 인물의 구체적 특성은 수필 감상에 흥미를 더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수필을 읽는 매력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깊은 사색의 세계를 맛보는 있다는 데 있다. 회화화하여 현실의 삶에 투사시켜 내는 작가의 저력으로 그녀의 작품은 예술적인 향기를 풍긴다고 하겠다.
모란에 이끌려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인데 꽃이 피는 날의 쓸쓸함을 또한 어찌하지 못합니다. 모란이 피는 오월의 한나절, 반가사유상 앞에 앉았습니다. 앞모습이 아닌 약간 비켜서 옆모습을 보고 앉았습니다. 눈을 반쯤 내려 뜨고 몸은 약간 앞으로 굽힌 듯 다소곳한 자세인 국보 78호 금동 반가사유상입니다. 사유상(思惟像) 앞에 앉으면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한 얼굴이, 알듯 말듯 선뜻 떠오르지 않아 안타까울 때가 많았습니다.
- <반가사유상> 중에서
반가사유상에 대한 글을 마지막으로 한분옥의 다섯 번째 수필집은 막을 내린다. 이 수필은 여타 다른 수필과는 달리 평어체가 아니고, 경어체를 활용한 것이 특이하다. ‘습니다체’는 상대방을 공경하고자 할 때 쓰는 어체이기 때문에 아마도 작가는 마지막까지 읽어준 독자에 대한 예의의 표시로 아니면, 천년의 신비를 담은 불상을 이야기하면서 차마 평서체인 반말을 하기가 좀 거북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42편의 글에서 오직 한 편만 그것도 마지막 글에, 사람도 아니고 불상에 대한 느낌을 적으면서 어체를 다르게 설정한다는 것은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란 추측이다. 경어체는 평서체보다 훨씬 친절하고 다정다감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작가가 독자와 한결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 된다. 보통 평서체로 쓰면 전부 평서체로 하는데, 이 수필만 경어체로 쓴 이유를 추측해 보는 것도 이 작품을 감상하는 포인트가 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아무래도 불상의 부드러운 느낌을 적는 데는 경어체가 더 잘 어울릴 것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었으리라 본다.
작가는 반가사유상을 보면서 ‘바다 밑이 깊을수록 수면은 오히려 고요하듯이 차마, 고독을 고독이라고,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고요한 미소가 있기까지 어느 여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번뇌를 감히 짐작해 봅니다.’라고 적고 있다. 불상의 표정에서 한 여인의 아픔을 읽어낸다. 그 여인은 가난한 집안의 맏며느리였고, 그녀의 남편은 소실을 거느리고 사는 남자라는 사실이다. 본처와 소실 사이가 아주 좋았다는 삽화는 이 수필의 백미다. 작가는 칠순 생일을 맞은 이 본댁 여인의 미소에서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발견한다. 이는 체험을 통한 자기 수양의 한 방법으로써 수필이 영혼을 치료하는 데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삶의 온갖 억압 기제 속에서 틀어박혀 새로운 사고나 도전을 거부하며 살아가게 할 순 없다. 수필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하고 영혼의 치료사인 까닭이다. 작가는 불상에 대한 사유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가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상심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역할극을 하는 것이다. 한분옥은 타인과 화해하고 세상과도 화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수필 <반가사유상>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Ⅲ.
이 책은 시조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울산의 원로작가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쓴 수필답게 많은 장점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필집에 담긴 인물들은 한분옥의 감성적 접근에 의해 그 이미지가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런 감성에 의한 설득방법은 독자로 하여금 연상과 상상의 세계로 빠지게 한다. 여기서 작가가 비유를 통해 관념적인 메시지를 감각화시키기 때문에 독자는 상상과 연상에 의해서 주제를 구체화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작가의 인물 분석이 매우 탄탄하고 치밀할 뿐만 아니라 사료를 대단히 깔끔한 솜씨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인물사는 팩트로 몰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그와 같은 경우를 볼 수가 없다. 팩트만큼 의견, 생각, 느낌도 많다. 팩트에 밀착하면서도 적당하게 거리를 두면서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데서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만날 수 있다. 다루기 힘든 정치인 미술가 음악가 등 다른 영역의 위인도 작가의 손에서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우리 앞에 놓여진다.
한분옥 수필이 주는 맛이 어찌 손맛뿐이겠는가. 향기 또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사람의 내면을 투시하여, 역사적 인물을 되살리고 기억해 주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인간적인가. 동서양의 뜨겁게 산 사람들의 삶을 수필로 써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어느 한쪽에 한정하거나 치우치지 않고 동서고금의 위인을 비교적 폭넓게 다루었다는 것도 장점으로 보인다. 문학가, 음악가, 미술가, 무용가, 배우 등 예술가뿐만 아니라 군인 정치인, 장군, 기녀 등 두루 눈길을 주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한다. 풍부한 사료와 폭넓고 깊은 논의로 인간세계를 그려나가는 이유를 발견해 낼 때의 감동은 더욱 크다. 기억해야 할 인물의 가치를 독자 자신이 상상력으로 이해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땅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경우와 같다. 모두冒頭에 놓인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라는 홍랑의 시조 ‘묏버들’ 에 담긴 뜨거운 열정 하나, 진실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의 의로운 결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은 얼마나 큰가. 한분순의 수필은 그 위대한 사람들의 삶과 사랑, 사상과 어록이 함께 하기에 누구나 읽고 나면, 이보다 더 이상 감동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분옥이 구사하는 언어는 적절한 표현의 옷을 입고 있어 감동을 준다. ‘적의’는 조선시대, 왕후가 입던 붉은 비단에 청색의 꿩을 수놓은 대례복이다. 왜 제목을 ‘백년의 적의’라고 했는지 그 의도를 찾아보는 것도 이 수필집을 재미있게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백년의 적의>에서 독자들은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발견의 놀라움은 미적 감동을 준다. 다만 바슐라르가 주로 사물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논한 것과 달리 한분옥의 경우는 한 생을 열정적으로, 의미있게 산 사람들의 열정적인 멋을 그려내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인물에 자신의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이것은 자기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많이 이용된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위대한 인물 앞에서 작아지는 한분옥 작가를 발견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최고의 쾌미다. 이 책의 문학성과 그녀의 성실성에 찬탄하며 한분옥의 문학적인 전도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