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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학생의 길
제5장 신앙과 책임분담
제1절 신앙생활
1. 신앙이 무엇이냐
1) 신앙의 뜻
여러분은 사랑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소망·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고전(13ː23)’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뭐냐? 믿음을 한자로 써 보면 ‘신(信)’입니다. 여기에서 ‘사람 인(人)’자를 떼어내면 ‘말씀 언(言)’자만 남습니다. 믿음이란 결국 사람의 말을 뜻합니다. 이때 말이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계가 없으면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말을 할 때는 벌써 상대적 기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관계가 맺어지려면 믿음(信)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근본이 어디서 나왔느냐? 사랑으로 빚어진 인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연은 자기 멋대로 맺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인연이 맺어질 힘의 여건이 있었고, 목적하는 바의 기준이 서로 부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맺어진 것입니다. (20- 25)
우리가 말하는 신앙은 뭐냐 하면 참된 사람의 인격을 중심 삼고 그 인격을 추구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그런 인격을 추구하며 살아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信)’자를 보면 ‘사람 인(人)’변에 ‘말씀 언(言)’자요, 또 ‘우러를 앙(仰)’ 자도 ‘사람 인(人)’ 변이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사람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중심 삼고 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러러본다는 것은 자기를 중심 삼은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대상을 중심 삼은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가 참된 말씀을 추구해 나가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의 방향을 성립시키기 위한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60- 263)
신앙의 대상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고 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 관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져서 주체에게서 되어지는 사실이 대상에 미쳐지고, 대상에게서 이루어지는 사실이 주체에게 관계되어져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면 뜻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40- 276)
2) 신앙이 필요한 이유
아담과 해와가 만약 타락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의 기준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중심하여 삼위일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난 자녀들은 전부 다 천국에 가는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기도가 왜 필요하고 종교가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 까? 신앙이라는 명사는 인간에게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믿을 필요도 없고 아버지에게 구원해 달라고 빌 필요도 없습니다.그냥 아버지의 품속에 덥석 뛰어들어 아버지를 타고 앉아서 수염을 뽑아도 되는데 믿기는 무얼 믿는다는 것입니까?
(22-283)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개인이 된 후에,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부부가 되고, 그런 부모가 되고, 효자가 되고, 국가와 세계를 이루게 될 때, 그때는 종교가 필요 없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명사가 필요 없고 구주라 는 명사가 필요 없게 됩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일체적인 인연권 내에 서 하나님은 비로소 인간을 대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62)
인간이나 하나님이 고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면, 현실보다 더 낫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까지보다도 차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이 더 낫기를 바라고, 지금의 입장보다도 앞으로의 입장이 더 낫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금후의 문제입니다. 소원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시간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나와 부딪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원하는, 혹은 믿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현실의 자기 입장보다도 더 낫고, 현재의 자기 입장에 무엇인가를 플러스시키는 것입니다.
(27- 94)
2. 신앙의 목적
1) 신앙의 목적이 무엇이냐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입니다. ‘나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 하는 뚜렷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이 목표가 흐려질 때 신앙자의 생활은 무너지는 것이요, 아무리 결의를 하고 각오를 해도 목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백 번 각오하면 뭐합니까? 목표를 뚜렷이 정해 놓고 백 번 결의해야 목표 앞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목표가 희미해서는 아무리 결의를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7- 101)
신앙의 목적이 무엇이냐? 세계를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그 모든 미완성 부분을 갖추어 완성했다는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옛날에 실수했던 것을 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실수했던 것 과 반대로 해야 됩니다. 복귀는 무엇부터 해야 되느냐? 첫째는 말씀이요, 둘째는인격이며, 셋째는심정입니다.
(24-104)
성경 66권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서 하신 말씀이냐? 참다운 하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참다운 하나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허락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따라 나가고 말씀을 지켜 나가는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도 예수님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체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어서는 무엇을 할 것이냐? 예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최고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8-316)
2) 우리의 신앙목표
지금까지의 종교는 개인구원에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신앙자들도 믿는 목적을 자기 개인의 구원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천국도 자기 개인만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정구원, 종족구원, 민족구원, 국가구원, 세계구원이라는 관념은 가져 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구원, 종족구원, 민족구원, 국가구원, 세계구원을 하는데 출발의 기준은 뭐냐? 가정구원입니다. 가정구원의 기틀이 지상에 공고히 세워질 수 있도록 승리의 발판을 조성하지 않고서는 국가구원 섭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지금까지 뿔뿔이 흩어져 국가에 쫓기고 몰리면서 그러한 기틀을 닦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영적인 한쪽 분야만을 책임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32-241)
우리의 신앙목표는 뭐냐? 그저 믿고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가겠다고 해서 갈 수도 없습니다. 어느 관청에 가서 수속 하나 하는데도 글자 하나만 틀려도 다시 해야 하는데, 천국문을 그냥 슬쩍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만부당한 말입니다.
어떠한 사정적인 조건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심정관을 통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보도 없고 퇴보도 없습니다. 일정한 관(觀)도 없고 형(型)도 없습니다. 거기서만은 알파이자 오메가요, 시작이자 영원입니다.
(7- 225)
3. 신앙생활
1) 신앙생활의 정의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개체적인 자기로만 보기 쉽지만 여러분 자체 가운데는 창조의 전체이념(全體理念)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세계적인 생의 가치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개인적인 생의 가치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하여 생활해 나가는 것이바로 신앙생활입니다.
(2-9)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과 일치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하나의 기쁨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결착점을 찾아 나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개체가 얼마만큼 전진적 사랑과 생명력을 지니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32- 19)
신앙생활은 종합적인 생활입니다.
(31- 226)
2) 신앙생활의 제1조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 줍니다. 그 관계를 무엇으로 맺느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무슨 인연으로 맺을 것이냐? 주인과 종의 인연도 아니고 나라와 백성의 인연으로 맺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부자의 인연으로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하나님은 죽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신앙이 멋진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내 목을 자르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그런 신앙 말입니다.
(32- 249)
‘신앙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어라!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귀의해라! 하나님을 중심 삼고 완전히 서라!’ 하는 것이 신앙의 제1조입니다. 어떠한 종교든지 이것이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제1조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둘째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세운 법도와 하나 되라, 법도와 완전히 하나되라 이겁니다.
(87- 123)
선이란 무엇인가? 최고의 선이란 무엇인가? 최고의 기준에 대한 중심성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우주의 최고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의 제1의 신조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전 우주를 포함합니다. 그 러니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맹목적이라도 좋으니까 있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라는 겁니다. 어느 때가 오면 다 해결됩니다. 그 기간에는 여러분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5-116)
우리 신앙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변할 수 있는 이념적인 조건을 갖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변하지 않는 불변의 인연을 회복하되, 그 인연은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요, 자기가 사는 생활권내에서 전체가 하나의 인연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3- 52)
3) 신앙의 출발점
우리 통일교회는 청소년 시대입니다. 인류가 본연의 청소년 시대에 하나님을 대한 때가 있었느냐? 인류시조 아담 해와는 청소년 시대에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아담과 해와를 끌고 나오는데 있어서, 사탄이 자랑할 수 있는 청년 시대로서, 사탄이 자랑할 수 있는 장년 시대로서, 사탄이 자랑할 수 있는 노년 시대로서는 거쳐왔지만, 하나님을 중심 삼은 청소년 시대, 청년 시대, 장년 시대, 노년 시대는 없었습니다.
하나님편에 서서 사랑받을 수 있는 청소년 시대와 청년 시대, 사랑받을 수 있는 장년 시대, 사랑받을 수 있는 노년 시대를 거쳐서 천국가는 것이 본래 이상적인,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갈 길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땅 위에 그런 길을 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늙다리들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신앙은 지극히 팔팔한 청소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일 고귀한 시대는 사춘기입니다.
꽃을 피울 때이고 향기를 풍길 수 있는 때인데, 그런 고귀한 청소년들이 하늘을 위한 사랑과 정열에 불타 하늘나라의 이념을 중심 삼고 건국의 용사로서 등장할 때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60- 73)
신앙자의 출발점은 외적인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양심을 중심으로 그 이상의 문제를 논위(論謂)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하지, 그 이하의 문제를 논위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27- 100)
4) 신앙생활의 방법
종교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참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늘의 참된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핏줄 속에 흐르는 사탄의 피를 점령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는 진리를 중심 삼고 ‘싸워라. 밀어라. 쳐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정면으로 싸워 나가는 것이 종교입니다.
(18-151)
산꼭대기에 있는 돌과 산 밑에 있는 돌은 같은 종류라 하더라도 입장이 다릅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돌은 밑창으로 구르면 내려갈 가망성이 있지만, 산 밑에 박힌 돌은 산꼭대기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타락 인간이 바로 그러한 입장입니다. 올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잡아 주기 전에는 타락한 인간은 올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케이블카 식으로 하나님이 그런 인간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만든 장치가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고생입니다. ‘잡 아라. 놓으면 죽는다! 옥살박살된다!’이러는 것입니다. 힘이 약하다고 도와 달라 해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착같이 힘줄이 굳어 지도록 악착같이 쥐라는 것입니다. (130-36)
신앙생활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24- 229)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호흡을 해야 됩니다. 또한 거기에 상응하여 영양을 보급해야 됩니다. 보급된 영양소를 우리 몸의 순환기를 통하여 서로 주고받는 데 있어서 어제와 차이가 있다면 우리 몸의 컨디션은 좋지 않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체 리듬과 보조를 맞춰 어제보다 오늘 조금이라도 영양을 더 보급해 주면 우리 몸은 자연히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전진의 터전이 넓혀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반드시 영양제와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정상적으로 호흡하는 것과 같은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즉 독자적인 신앙기준을 중심 삼고 호흡하듯이 신앙노정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흡하는 것과 같이 생명력을 보급할 수 있는 정상적인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상응해서 영양을 보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양제를 어떻게 보급하느냐, 정상적인 생활기준 앞에 정상적인 영양제를 보급하는 보급로를 어떻게 보강하느냐 하는 것이 전방에서나 후방에서나, 전후∙ 좌우∙사방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이 시간보다 다음 시간에 어떻게 하면 보다 낫고 보다 가치 있는 영양을 보급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쁨은 반드시 전진하고 발전하는 데서 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런 내용을 보강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2-64)
5) 체휼적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많은 말씀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에 사무친 신앙생활을 얼마나 해왔습니까?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한 많은 역사를 바라보며 한 많은 뜻을 염려하고 한 많은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까?
사랑의 심정을 내세워 인류를 오라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소개하고 반기려 하시는 기쁨의 마음보다도 우리를 찾아 주시려는 슬픔과 고통이 더 많으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체휼하여 보았습니까? 이런 마음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6-251)
통일신도들은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치는 체휼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름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실감적이고 사실적인 아버지로 체휼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모습을 바라보고 한스러워하시던 하나님 대신 무한히 한스러운 심정을 가지고 울 수 있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바라보실 때 무한히 한스러워하시던 심정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 이후 1600년을 지나 노아, 그로부터 400년을 지나 아브라함, 그로부터 400년을 지나 모세, 또 그로부터 1600년을 지나 예수 때까지 시대시대마다 천적인 사명을 지닌 책임자로서 보내졌던 수많은 선조들이 슬픔과 원한에 사무쳐 싸워 나온 역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실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4천 년을 지나고 6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대표적 섭리의 담당자들이 슬퍼하였던 그 마음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사는 사람들 모두 그들을 대신하여 슬퍼해야 되겠습니다.
(6-251)
체휼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이 슬퍼할 때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매일매일 그런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풀어 드리고 세계 앞에 기쁨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었다 할진대는 나로 말미암아 세계는 수습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32-221)
4. 신앙자세
1) 신앙과 중심 문제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 이 세상은 중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중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중심을 찾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세우시려고 하신 중심을 만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 중심을 세우려고 하는 사상이 무엇이냐? 메시아사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 그 중심된 분을 찾아 모시는 것입니다. 종의 시대로부터, 양자의 시대, 아들의 시대, 부모의 시대까지 차원이 다른 반대를 반복해서 받아 나오기 때문에 비참한 길을 걸으면서 되돌아오지만, 결국 보다 나은 중심으로 보내졌던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가 중심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은 여러분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워진 중심을 여러분이 맞아 그분과 합해야 합니다. 그 큰 중심과 합하게 되면 중심과 더불어 큰 무대에 자신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심을 찾아 모시는 것이 소원이요, 하나님은 중심을 세우는 것이 하나의 소원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소원성취가 되고 하늘의 소원성취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중심을 찾아 모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소원성취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소원성취도 되는 것입니다.
(64-189)
여러분은 신앙자로서, 통일교회의 신자로서 가져야 할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기 전에는 아무리 각오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다 어떠한 일에 부딪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 길을 가다 보면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 여러분을 유인할 것입니다. 달콤하고 귀가 솔깃한 말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 막고 여러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 얼굴을 보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비켜라, 이 요물아. 나는 밤이나 낮이나 이 길을 갈 것이다.’ 해야됩니다. 그거 얼마나 멋집니까?
(118-285)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그리고 목표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여야 됩니다. 신앙생활은 현재보다 더 낫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요구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내용을 지닌 처음 신앙의 중심기준이 불변해야 됩니다.
춘하추동 사시도 일년권 내에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환경이 변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목표 아래에서 놀아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서 놀아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념이 왔다갔다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신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7-112)
2) 절대신앙
① 신앙은 자기부정과 회개를 요구
이상세계가 오기 전에 심판이 와야 됩니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적인 사정과 인연을 그냥 그대로 품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흐르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박차고 뒤로 돌아서서 피해 가는 사람이라야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새로운 이상의 출발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종교는 이러한 내용을 중심 삼고 ‘세상을 버려라.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라. 세상을 가까이하지 말라. 세상과 화하지 말라. 세상과 절단하라. 부정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각심(覺心)을 키우라’고 가르쳐 온 것입니다.
현재를 밀고 나갈 수 있고, 미래를 타개하고, 과거를 수습할 수 있는 이러한 각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종교는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21- 136)
종교는 ‘들이 쳐라, 거꿀잡이 해라, 온유겸손해라, 희생봉사해라. 너희들에게 가르쳐 줄 것은 그것밖에 없다.’ 고 들이몹니다. 그것이 올바른 교육입니다. 그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길은 순응의 도리이지 주장의 도리가 아닙니다. 신앙의 도리는 순응의 도리입니다. 자주와 대안과 변론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건 왜? 자기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완전 부정해야 합니다. 부정될 때까지 부정해야 하는 겁니다. (68-316)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제일 문제가 무엇이냐? ‘나’라는 원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다 이겁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해 오고 열심히 노력해 온 전부는 나를 승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의 참소조건에 승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를 부정해야 됩니다. 완전히 부정해야 됩니다. 그래야 사탄이 따라오던 줄이 있다면 그 모든 줄을 완전히 끊는 것입니다. 명주실 같은 것이 쭉 세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면도칼 같은 것으로 싹 잘라 버려야 됩니다.
(122- 13)
신앙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회개를 요구합니다. 회개는 어떠한 회개냐? 역사적인 회개와 시대적인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회개를 바라고 계시고 시대적인 회개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 것을 알고 ‘과거의 모든 죄도 내 죄요, 이 시대에 머물러 있는 모든 죄도 내 죄이오니, 아버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8-322)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웠으면 회개 안 해도 되지 않으냐 이겁니다. 회개 안 하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간이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사는데 왜 이런 역설적인 내용을 제시해서 회개하라고 하느냐?
도대체 회개가 무엇이냐 이겁니다. 회개는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죄 지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죄 지은 것을 알게 될 때는 완전히 부정하고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결국 180도로 전환하는 하나의 표제다 이겁니다. 그러면 회개하면 어떻게 되느냐? 결심하게 됩니다.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 다시는 이 길을 안 가겠다고 절대적으로 작별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과 회개한 후에는 세계가 다릅니다. 180도로 다릅니다.
회개하기 전과 회개하고 난 후에는 천양지판입니다. 옛날에 사탄세계에 있었다 하면, 오늘은 하늘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종교에서는 반드시 제시해야 됩니다.
(101- 92)
천국을 찾아 나가는 사람 앞에는 자기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정성과 극복이 있을 뿐입니다. 천국을 찾고 난 후에는 자기가 있을 수 있지만 천국을 찾아 나가는 자리에는 자기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방식 가지고 안 됩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여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여건이 남아지는 한 그 세계는 사탄권입니다.
우리의 신앙길에서는 자기주장, 자아관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 신앙이란 자아관념이 하나도 남지 않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는다 할 때는 내 자체에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요인이 하나도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 삼고 하나되겠다고 하는 거기에는 자기주장이 없어야 합니다.
주체가 요구하는 대로 완전히 일치해야 합니다.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일편의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천국이 아닙니다.
뱀은 허물을 벗지 않으면 크지 못합니다. 허물을 벗기 위해서는 돌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힘이 몸에 가해져야 허물을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우리 몸의 피와 살에 담뿍 씌워져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벗느냐? 어둠의 세력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지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반대, 전부 반대의 길로 가야 합니다. 완전히 벗기 위해서는 완전히 반대의 길로 가야 합니다.
(46-82)
② 한마음을 가져라
절대적으로 한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한마음도 뜨거운 한마음입니다.
(101-107)
③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귀물이니 보물이니 하는 다이아몬드나 금이 왜 필요하냐? 그것은 모든 물질의 중심으로서 모든 물질을 대표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보석하면 대번에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생각합니다. 과거 사람도 그것을 귀하게 여겨왔고, 지금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미래의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이런 귀한 물건은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필요로 하느냐? 언제든지 모든 것을 비교하더라도 그 비교의 기준이 틀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또 환경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거기에 치우침을 받지 않는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귀하다는 보물들이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그것과 같이하려고 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우리 자신들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이아몬드 이상 굳어야 되겠고, 그 색깔이 금보다 더 아름다워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역사적인 위인, 성현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변하지 않는 이상과 변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또 변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은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74-10)
선생님이 원리를 찾을 때 제일의 비결이 뭐냐? 처음과 나중이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처음과 나중이 같습니다. 변하는 사람은 다 악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철칙입니다. 아무리 좋았더라도 그 좋은 모습이 변해 나가면 악의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밥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런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처음과 나중이 딱 같아야 됩니다. 통쾌한 것은 ‘나는 알파요 오메가’ 라는 말씀을 찾은 것입니다. 됐다 이겁니다. 이 한마디가 찾고 싶은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한, 그 말씀에 기록된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150-96)
신앙의 길은 마음을 중심 삼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어느 종교든지 신앙자에게 변치 않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품은 마음이 10년 후에 변해서는 안 될 것이요, 세월이 흘러서 설령 생애가 끝나더라도 그 마음만은 변치 않고 남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참된 종교입니다.
(32- 132)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영원을 중심 삼고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절개를 지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의 중심되는 골자가 있어야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추가 있어야 됩니다. 핵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내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 자체의 슬픔은 영원하더라도, 나 자체의 고통은 영원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고통으로 제시할 수 없다. 나는 하늘부모를 모시고 나왔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늘을 대해 부정의 도리를 세울 수 없다.’하는 철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59- 234)
④ 절대 복종
끝날에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6천 년의 종말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자리에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승리하면, 오시는 주님은 슬픔과 고통과 비참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기반을 닦아 놓지 못할 때는, 오시는 주님은 성도를 대표하여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찾아 세우신 유대 나라가 책임 못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맛보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탕감복귀의 조건이 세워진 자리에서 불리움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절대 복종해야 되느냐? 하나의 주권을 세워서 한 나라, 한 민족을 동원하여 타락된 생활을 칠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명령에 언제까지 절대 복종해야 했느냐? 가나안 칠족을 멸할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노아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복종해야 했느냐? 3대 이상, 즉 손자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13-152)
신앙하는 데 어찌하여 하늘을 중심 삼고 절대 복종이라는 말이 나왔느냐? 기가 막힌 말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에게는 기가 막히게 싫은 말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기가 막힌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심해라. 그 결심을 중심 삼고 직행해라. 직행하려면 결심한 그 목표 앞에 절대 복종해라’하는 것입니다. 복종 안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복종하면 성공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61- 260)
절대 믿어야 됩니다.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절대 사랑해야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의 3대 조건입니다. 절대라는 말에는 유일신앙, 유일복종, 유일사랑이 들어갑니다.
(169-58)
⑤ 하나님을 바라보고 똑바로 가야
사람은 똑바로 가야 됩니다. 사람의 좌우편과 뒤편을 누가 지배하고 있느냐 하면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바른쪽으로 가도 채 가고, 왼쪽으로 가도 채 가고, 뒤로 가도 채 갑니다. 그러니 똑바로만 가야 됩니다. 옳은 말입니다. 똑바로 가라 이겁니다.
어디로 똑바로 가라는 것이냐? 그 목적지를 모릅니다. 막연합니다. 똑바로 가라 하는 그곳이 어디냐? 하나님이 있는 곳입니다. 이게 원리관입니다. 아담이 똑바로 가지 못하고 어디로 갔느냐? 사탄을 중심 삼고 해와는 왼쪽으로 갔고 아담은 바른쪽으로 갔습니다. 사탄이 조종하는 대로 따라갔다가 둘이 갈라졌습니다. 아담 해와를 갈라 놓고 망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탄이 그랬으니, 탕감복귀원칙에 의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담 해와를 하나님에게로 몰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좌, 우, 뒤에서 바위 굴리듯이 몰고 가야 됩니다. 좌우에서 악한 천사와 선한 천사가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義)의 바른손을 들어 악한 천사를 쳐라. 왼손을 들어 악한 천사를 쳐라. 뒷발로 사탄을 차 버려라’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손을 놓아 버리고 좋아하게 되면, 그건 사탄과 악수하는 것입니다. 손만 내밀면 오른편 사탄 천사, 왼편 사탄 천사에 전부 다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끊어 버려라 이겁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다 끊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 하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 신앙세계에서는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왜 그걸 강요하느냐? 이런 사탄 편에서 벗어나야 할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부정에서부터 새로운 방향이 설정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자의 자세를 취하려면 올바로 취해야 됩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알아야 됩니다. 똑바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똑바로 봐야 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고차적인 종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됩니다.
그저 믿으면 된다,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도가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도 기초를 닦고 집을 완성해서 준 공식도 해야 됩니다. 그런 계획을 세워야 됩니다. 뜻을 성취하는 데도 단계적인 계획이 있습니다.
(76- 106)
⑥ 절대 신앙
타락은 뭐냐? 전부 다 갈라 놓은 것입니다. 원수가 갈라 놓았습니다. 하나님과 아담 해와를 갈라 놓았고, 해와와 아담을 갈라 놓았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원수가 됐습니다. 통할 수 없게 됐다 이겁니다. 천정(天情)을 중심 삼고 통할 수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천정 앞에는 서로가 정(情)을 주어야 될 것인데 원수가 됐다는 겁니다. 그 부모와 자식지간에 원수요, 형제지간에 원수를 뿌렸다 이겁니다. 이것을 뿌려 가지고 심어 놓은 것이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가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을 중심 삼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암만 부딪쳐도 본연의 사랑은 역사와 더불어 따라 나오면서 절개 있는 사람을 한 사람씩 세워서라도 연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릴레이경기처럼 릴레이 봉(棒)을 꿰어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착점까지, 달려야 할 목적지까지 이것을 전달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중심 삼고 연결되느냐? 무엇을 중심 삼고 릴레이 봉이 옮겨지느냐? 하나님을 위한 참된 사랑입니다. 절대신앙입니다.
참된 사랑을 찾아가는 데서는 절대신앙이 개재돼야 합니다. 절대 믿지 못하 면 절대사랑이 안 나오는 겁니다.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서, 절대로 믿지 못하면 절대사랑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 절대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이걸 절대 믿어라 이겁니다.
(125-261)
신앙에서 말하는 생명은 둘이 타협해서 나오거나 환경과 인연을 맺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자리는 모든 사람이 바라보고 춤추며 좋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자리는 지극히 고독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절대라는 것은 상대요건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 자리는 지극히 어렵고, 지극히 답답하고, 지극히 고독하고, 위험하다면 지극히 위험한 자리입니다. 그 절대적인 것이 진행하는 방향은 두 방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37-9)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대개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지, 성경을 믿어야 된다니까 믿지 하는 식으로 하지요? 그렇게 믿으면 어떤 사람이 와서 건드리기만 해도 변하는 것입니다. 그저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건들건들하고 꺼덕꺼덕하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이니 나도 절대적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1- 254)
5. 신앙생활의 주의점
1) 마음이 클클할 때
여러분이 신앙길을 가면서도 마음이 클클한 것은 왜 그러냐? 내적 기준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적기준이 떨어져 있어서는 뭘 하더라도 만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내적인 하나님의 임재점에 동화하는 생활,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관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22- 48)
여러분은 자신이 기도를 하든가 정성을 들이면 무엇인지 모르게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을 초월한 힘이 여러분을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를 안테나를 통해 수신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자기 마음에 와서 접선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마음이 곧으면 곧을수록 들어오는 각도와 같은 각도로 반사시키는 겁니다.
(37- 123)
2) 어려울 때
① 어려움에 대한 이해
큰일하는 데는 3분의 1은 반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반대가 없으면 하나님의 공(功)이 없습니다. 그냥 슬슬하는 데는 공이 없습니다. 반대를 받고, 그저 가슴이 들이 타고, 그저 울고불고 해서 고개를 넘어야 ‘아이 좋다’하지, 좋아서 넘으면 좋은 줄 모릅니다. 배부른데 암만 맛있는 것을 줘도 맛있는 줄 모릅니다. 배가 고플 때는 보리밥을 주더라도 꿀떡꿀떡 맛있게 먹습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70- 233)
어떤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서러움에 북받쳐 까닭없는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서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서러움은 자기의 서러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알고 보면 역사적 서러움입니다. 그 서러움은 누가 가져오느냐?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서러움은 누구 때문이냐?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서러움입니다. 그것은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우리 자신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2- 100)
②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환난을 당한다고 낙심하지 말라 이겁니다. 핍박이 찾아온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가 정의의 자리에서, 세계적인 운세 기반 위에 천운을 이어받겠다고 내 스스로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목을 떼어 간다고 해도 사는 것입니다.
(147- 198)
‘환경을 이겨 가자’ 라는 말 속에는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권의 변화에 박자를 못 맞추면 패자가 됩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역사적인 실증이 있다이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문제에 우리의 생사지권(生死之圈)이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를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정면으로 도전해라 이겁니다. 높은 산이 있으면 반드시 골짜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련이 있으면 반드시 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가면, 겨울의 고개를 넘으면 봄은 찾아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엔 여름이 옵니다. 그것이 발전의 현상입니다.
(67-100)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반드시 앞으로 찾아오는 복을 받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하늘의 복을 받아서 인류에게 넘겨 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릇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야 됩니다.
(133-302)
③ 어려움에 대한 선생님의 모습
선생님은 북한 공산당의 감옥에 들어가서 2년 8개월 동안 중노동을 했습니다. 무슨 노동이냐 하면, 비료공장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유산 암모니아를 만드는 공장인데, 그 가루가 컨베이어에 실려 공장 한가운 데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저울에 달아 자루에 가득 넣어 화차에 싣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열처리를 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떨어지는 유산암모니아는 뜨겁습니다. 그것이 식으면 덩어리가 됩니다. 그것을 몇 년 동안 놓아 두면 바위처럼 되어 버립니다. 참으로 힘든 중노동이었습니다. 하루 8시간의 노동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분담이 있습니다. 열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일을 합니다.
한 조의 하루 책임량은 1,300가마니로 8시간 이내에 끝내지 않으면 식량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주는 밥은 작은 공기로 1.7공기 가량입니다. 반찬은 아무것도 없고 국은 된장국이 아닌 소금물입니다. 그것을 먹고 8시간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중노동을 시켜서 죽게 하는 것이 공산당의 작전입니다. 여기에 들어 와서 3년이 지나면 모두 죽어 나갑니다. 반드시, 틀림없이 죽게 됩니다. 먹을 것을 잘 주지 않고 중노동을 시키기 때문에 이 공장에 들어오는 사람은 우선 죽어 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세상 보통 사람은 하루에 세 끼 기름기를 먹고 최고로 하여도 하루 700가마니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공장은 그 배(倍)에 가까운 양을 해야 됩니다. 먹을 것은 적어서 큰 입으로 세 입이면 끝나버립니다.
그러고서 중노동을 하니까 아침을 먹고 공장으로 향하는 그 길에서 벌써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리를 끌고 가서 아침부터 일을 합니다. 그것은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주는 밥의 절반만 먹고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인간은 빵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밥으로는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밥의 반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기까지는 반 달이 걸렸습니다.
내가 절반 먹고, 남은 반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정신적으로 행복한가, 날마다 얼마나 감동의 양을 크게 하는가가 문제였습니다. 정신적 위안은 실로 큰 것입니다. 생활은 과학적입니다. 노동하는 가운데서도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동시간이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언제나 세계적인 여러 가지 일을 상상하는 겁니다. 아침 8시에 감옥을 출발하여 10시에 공장에 도착합니다. 10분간 화장실에 갈 시간이 주어 집니다. 벌써 죽고 싶을 만큼 피로해집니다. 위가 녹아 버릴 정도의 쓰라림을 느낍니다.
그래도 그 일을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휴식시간만을 머리에 그리는 것입니다, 비료 40킬로그램을 자루에 넣어서 그것을 들어올리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모두 그것을 싫어했습니다.
선생님은 모두가 싫어하는 이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이 어려운 일을 계속하면 죽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힘든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것 외에는 살아 낼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가장 어려운 일을 맡아하라!’ 그렇게 전진적으로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루에 1,300가마니 이상 넣고 운반하는 것이니까 이미 쉴 틈이 없습니다. 이것을 8시간에 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료를 자루에 넣고 저울에 달아서 가마니를 옮기는 데 5분에서 10분 걸립니다. 선생님은 평균 5분간에 해치웠습니다. 다른 사람은 15분 걸립니다.
이렇게 시간이 걸려서 책임분담을 다할 수 없습니다. 비료산을 헐어 가는 것 이니까 저울을 이동해 가는데, 5미터 이상 저울을 움직였다가는 늦어 집니다. 그래서 많이 움직이지 않고 넣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모두들 이 방법에 따르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혼자서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모두 역시 양심이 있는지 선생님이 1,300자루 가운데 반 이상을 혼자서 하니까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모범노동자였습니다. 공산당으로부터 매년 모범노동상을 받았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선생님이 교육했습니다. 몸은 유산에 해를 입습니다. 머리가 빠지고 피부를 짜보면 물이 나옵니다. 6개월이 지나면 반드시 각혈을 하게 됩니다. 대개 폐병이라고 생각하고 낙담하기 때문에 죽어 버립니다. 기껏 1년 반이나 2년밖에 견디지 못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밥을 얼마만큼 먹고 싶었는가 하는 것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밥이 어느 정도 그리우냐? 죽는 경지를 넘을 정도로 밥이 그립습니다.
공장에 나가지 못하는 때는 반드시 밥이 반으로 줄어듭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철칙입니다. 병이 나더라도 다른 사람과 같이 한 그릇의 밥이 그리워서 죽을 힘을 다해 나갑니다.
그리고 최후의 힘을 다하여 일하고 돌아와서 저녁밥을 먹으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것을 전투를 하다시피하면서 빼앗아 갑니다. 선생님은 그런 가운데서 인간의 깊은 곳까지 연구했습니다.
먹을 것을 그리워하는 만큼 내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가? 선생님은 매일 비 교 대조하면서 지내왔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밥 한 덩어리를 먹기 위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만인의 탕감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일에 대해서 불신하는 것 같은 태도는 절대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유명했습니다.
(35- 185)
선생님은 성격이 굉장히 급한 사람입니다. 한마디 욕을 먹더라도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누구한테 한 대 맞으면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또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극단적인 특성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그런 기질을 갖고 있고, 그런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슨 운동을 해도 내가 이기고 만다는 그런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머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 내게 비참한 경지, 내 성격으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그런 경지가 많았습니다. 창피하다면 그 이상 창피할 수 없는 경지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극복해 나온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선생님과 같이 불같은 성격이 있을 터인데, 성격대로 하게 되면 세계를 전부 다 쓸어 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꿋꿋이 참으셨기 때문에 세상이 남아진 것입니다.
사탄에게 복수하려고 해도 그 이상 하나님이 참으신 것을 알고 회개하고 나왔기 때문에 오늘의 통일교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려움, 그러한 억울함과 분함을 참으면서 나오신 하나님의 뜻을, 이 복귀의 뜻을 내가 어찌 더럽힐 수 있으며 어찌 흠을 낼 수 있겠느냐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참고, 그런 자리에서 극복하고, 그런 자리에서 용서해 주고, 그런 자리에서 사랑하자 할 수 있는 길을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65- 328)
여러분에게 아무리 억울하고 분한 일이 있더라도 선생님의 억울하고 분한 것에는 못 미치는 것입니다. 레버런 문이 아무리 원통하고 비통하더라도 하나님의 분하고 원통한 일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참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심정적 유대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슬픈 이면에 하나님의 심정적 역사의 길이 넓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106-119)
3) 신앙의 시험
목숨을 걸어 놓고 신앙길을 가려면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사탄의 시험, 선지자들의 시험, 천사의 시험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교인들은 무사통과할 수 있습니다.
(14-202)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고 신앙의 길을 찾아 나가게 될 때, 우리가 나가는 길을 무엇이 가로막게 되는가? 먼저 자기도 알 수 없이 생겨나는 의심이 앞길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또 죄악의 시험이 가로막을 것이고, 예기치 않게 엄습하는 사망의 힘이 갈 길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심의 고개를 넘어야 되겠고, 죄악의 고개를 넘어야 되겠으며, 사망의 고개를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2- 10)
학생 가운데 일등하는 사람을 가리기 위해서는 시험문제를 어떻게 내느냐 하면, 누구도 풀지 못하게 어렵게 내는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일수록 어떤 문제를 찾느냐 하면, 쉬운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어려운 문제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시험 문제를 쉽게 내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절대로 좋은 선생님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사탄이 제일 싫어하고 제일 나빠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패, 사탄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패, 그러한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학생치고 시험치기를 좋아하는 학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험은 안 치면 안 됩니다. 시험치는 것은 싫어하지만 시험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시험과 숙제를 내 주는 곳이 어디이고, 사탄이 시험과 숙제를 내 주는 곳이 어디냐? 하나님의 시험을 치르는 장소하고 사탄의 시험을 치르는 곳은 같을 수 없습니다.
사탄의 시험장소가 어디이고, 하나님의 시험장소가 어디냐? 간단합니다. 외부세계는 사탄의 시험을 치르는 장소요, 내부세계는 하나님의 시험을 치르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문제는 어떤 것이고, 하나님의 시험 문제는 어떤 것이냐? 정반대입니다. 정반대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132-225)
4) 신앙생활 중 주의점
신앙자들과 불신앙자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불신앙자들은 가정을 중심하고 사회생활만 하면 되지만 신앙자들은 가정을 중심하고 사회 생활뿐만 아니라 교회생활도 아울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36)
신앙자들은 까딱하면, 까딱하기만 하면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1- 39)
신앙생활하다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타격을 받고, 또는 어떤 사람 때문에 자기 갈 길을 못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의 마음을 어떻게 작용시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4- 65)
신앙길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한 길, 자기가 바라보는 그런 길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길은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도의 지도자들과 인연맺어서 높은 단계로 하나씩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 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야 비로소 예수님과 관계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2- 164)
신앙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 삼고 화내는 것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니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욕심을 중심 삼고 화를 냈다가는 몽땅 걸려 버립니다.
여러분은 생애노정에서 이러한 문제 등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정지하고 있는가, 전진하고 있는가, 아니면 후퇴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32- 34)
나는 어떠한 타입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이러한 타입이기 때문에 이러한 분야에 맞는다. 나는 이러한 소성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길을 위해서 가야 된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해야 할 사명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교육의 책임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사업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기의 본심, 마음의 소리, 즉 첫번째에 느끼는 그 감각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봄을 맞이하면, 그 봄날이 덥다든가 춥다든가 하는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아침은 기분이 어떻다고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온도의 차이에 따라 피부에 접촉되는 감촉이 틀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를 척 대하면 그 사람의 신앙 정도가 얼마나 올라갔느냐 하는 것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정도가 낮은 사람들을 몇 번만 대하면 금방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싫어지는 것입니다. 싫어지는 그 마음은 보면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기 마음의 감정을 통해 몇 퍼센트의 자신을 갖느냐 하는 것을 검증해서 그 실적기준을 세우고 생활의 표준을 세워서 조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한테는 선생님이 언제나 같이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같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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