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 동안 나는 문화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스포츠 등 곳곳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특히 <시사IN>의 ‘경제 프리즘’을 시작하면서 최근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 화려한 무대의 뒷모습들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지금까지의 느낌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곡소리’라는 말이 딱 맞다.
문화 부문, 버티기조차 버거운 형편
반토막 난 증시에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지만, 실물경제의 특성이 강한 문화 부문이 느끼는 체감적 충격은 중소기업보다 더 커 보였다. 대형 영화사 다섯 개가 조만간 문을 닫을 것이라는 루머도 우울하지만, 그 어느 곳도 선뜻 “이 부문이 미래이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다들 지금 버티고 있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 전체 중 경제적으로 보자면 버라이어티 쇼만이 그런대로 버티는, 사실상 유일한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방 불패’라 불리는 드라마는? 불행히도 드라마 부문부터는 ‘붕괴’ 혹은 ‘궤멸적 타격’ 따위 용어가 낯설지 않다. 방송작가는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해 드라마 PD가 직접 나섰다. 최근 드라마 PD들이 협회를 재정비하고, 기자간담회와 워크숍 등의 형태로 직접 위기를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PD들은 지나치게 높아진 배우의 출연료 등 몇 가지 위기 요인을 지적하며, 지난 3년간 한국에서 제작된 미니 시리즈 84편 중 20편 정도를 빼고는 막대한 적자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얘기가 엄살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현 상황을 진단해보면, 한류 거품이 빠지고 난 뒤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MBC <태왕사신기>의 총제작비는 400억원 정도이고, 보통은 200억원대이다. 편당 제작비는 가장 높았던 2005년에 평균 6500만원가량이었는데 이 추세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소소한 제도적 문제를 제외하면 경제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스타급 연기자의 출연료이다. 지난 2000년에는 2인 기준으로 제작비의 10분의 1 정도를 주연들이 가지고 간 데 비해, 지금은 5분의 1 이상이다. 남녀 주연의 호화판 출연료를 위해 100명 가까운 스태프가 힘들게 만드는 게 한국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배우도 할 말은 있다. 편당 제작비가 40억원에 이르는 미국 드라마에 비하면, 한국 시장은 그보다 100분의 1이 조금 넘는 상황이다. 한류급 스타의 경우 여차하면 미국으로 갈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 상황이 눈에 차겠는가? 다행인 것은, 그래도 미국 드라마가 아직 한국에서는 황금 시간대로 내려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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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드라마PD협회(위)는 11월24일 드라마 전반의 정책을 한류 열풍 이전인 2005년 당시로 돌리자고 제의했다. |
자,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한국 드라마 시장은 미국보다 100분의 1이 조금 넘는 규모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자국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한·중·일을 포함해 10개 정도이니, 규모에 비하면 잘 버틴 셈이다. 프랑스도 한국만한 드라마 시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물론, 이는 뒤집으면 그만큼 한국 사람이 드라마에 목숨 걸고, 그만큼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몇 가지 점을 생각하면, 드라마 역시 출연료 등 구조 조정해야 할 요소가 많고, 필요에 따라서는 정부 보조금이 필요할 수 있는 부문이기도 하다. 물론 편당 수천 만원을 가지고 가는 배우에게 보조금을 또 주라고?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문화시장은 제도 시장에 가깝기 때문에, 사회 논의와 협의에 따라 수많은 보완 장치와 약속이 필요하다. 어쨌든 2005년 이후, 한류 열풍으로 부풀 대로 부풀어오른 몸값과 ‘한 방’을 기대하며 드라마에 투자하고 기획사가 만들어지던 거품은 이제 끝났다. 더 이상 한류 열풍에 기댄 몸집 불리기는 불가능한데, 한번 올라간 스타급 출연료가 내려오지 않으니 단막 드라마가 폐지되고, 점점 더 ‘연성 드라마’로 몰려간다. 게다가 작가 시스템 역시 스타 작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서, 드라마 전체는 빈곤한데 그 속에서 부익부 빈익빈은 강화되고 있다.
지역 드라마 지원은 확실한 고용 창출 효과
방송의 경우 보통 공공성과 다양성이 키워드이다. 드라마는 여기에 ‘지역성’이라는 말을 추가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리 정도의 시장에서 수익성을 찾으려면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야 한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과연 ‘지역 드라마’가 가능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부산방송 공채 1기인 진재영을 내세운 <해풍>이 최초이자 최후의 지역 드라마 실험이었는데, 불행히도 실패로 끝났다. 부산에서도 못했는데, 다른 곳이야 오죽할까! 이게 대체적으로 내가 만나본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그럼 과연 이러한 시도는 영원히 불가능할까?
물론 예산이야 만들 길이 많다. 지역 드라마를 문화정책으로만 보지 말고, 지역경제 활성화 정책 혹은 고용정책으로 보고, 지역의 새로운 꿈을 만드는 인프라 정책으로 본다면,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 ‘균특’이라 불리는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에서 예를 들면, 연간 200억원 정도의 예산을 뽑거나 종부세의 일부를 지금 같은 시설 투자가 아니라 문화 투자로 돌린다면, 지역 드라마 계획을 3개에서 5개 정도는 세울 수 있다. 최소한 영남권·호남권·충남권, 그리고 강원과 제주 등에 지역 드라마 축을 만들어서, 지역의 크고 작은 얘기를 담아내게 하는 것, 이런 상상을 해볼 수는 없을까? 물론 서울과 같이 근사한 스타는 없겠지만, 그 대신 지역 스타가 등장하고, 중앙의 화려함은 없는 대신 고용 창출이 이루어질 수 있다. 결국 지방 토호의 땅값이나 올려주려고 중복 도로를 죽어라 만드는 실패한 건설정책이나, 텅텅 빌 것을 알면서도 ‘여기 안 오면 다른 데 간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유치할 수밖에 없는 지방 공단에 비하면, 인건비 비중이 70~80%에 이르는 지역 드라마에 대한 지원이 더 확실한 경제정책 아닌가?
문화의 생명이 ‘얘기 만들기’에 있다면, 각 지역의 국문학과나 인문계열 학생들이 지역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서 습작을 시작하고, 지역별 문화 관련 전문가 200~300명이 생겨나는 지역 드라마는, 이 경제위기의 시기에 시도해봄직한 프로젝트일 것 같다. 물론 문제점이 많이 있는 것도 안다. 누가 ‘지방 방송’을 보겠느냐는 ‘서울 것들’의 편견이 큰 장애물이다. 그러나 그런 식이면, 미드(미국 드라마) 앞에서 버티는 한국 드라마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식이면, 세상에 드라마는 미국 드라마 하나 있으면 되고, 아시아에는 일본이나 중국 드라마만 있으면 된다. 공공성만큼 지역성도 중요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같이 인식하면 좋겠다. 또 다른 위험 요소는, 이렇게 지역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드라마를 만들게 하면, 도지사와 같은 단체장이 결국 단체장 찬가나 만들게 하지 않겠는가? 그럴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민주 절차를 강화해서 극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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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경제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스타급 연기자의 출연료 비중이다. 위는 MBC <태왕사신기> 촬영 현장. | 경제위기가 깊어지면서 드라마도 위기이다. 문화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다양성기금 등 중소형 프로젝트를 살리기 위한 정책적 배려, 승자독식 구조를 완화하기 위한 변화의 노력 등 한국 드라마를 살리려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 메뉴 위에 지역성에 대한 배려라는 키워드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