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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은 2인칭 시점의 소설쓰기>의 줄거리: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왜 거짓이 스며드는 것일까요? 예레미야의 예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설교를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거짓 선민들이 생겨나는 까닭이 뭘까요? 그 이유는 선지자들이나 선민들이 하나님에 대해 3인칭 관찰자의 시점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1인칭이나 3인칭의 시점으로만 쓰여집니다만 믿음의 삶은 오직 2인칭 시점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3인칭이 되는 순간부터 삶은 총체적인 거짓 덩어리가 됩니다.
믿음은 2인칭 시점의 소설쓰기
(예레미야 14:1~22)
13.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읍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니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믿음은 2인칭 시점의 소설쓰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은 2인칭 시점의 소설쓰기’
소설의 시점에 있어서 서술자가 줄거리 밖에 존재하는 상태를 흔히 3인칭 시점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서술자는 작품 속의 인물로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먼저 인칭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 이야기를 하고 듣는 나는 1인칭이고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2인칭이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그나 그녀 혹은 사물로서의 그것들을 3인칭으로 부릅니다. 간단히 말해 3인칭은 지금 이 상황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존재입니다.
소설은 이렇게 서술자의 시점에 따라서 구분하게 됩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소설이 쓰였다면 1인칭 시점이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을 관망하는 시점에서 쓰였다면 3인칭 시점이 됩니다. 그런데 2인칭 시점의 소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인칭 시점이 되려면 상대의 입장에서 서술이 되어야 하는데, 결국 이것도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1인칭과 다름이 없습니다.
한편 3인칭 시점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단순히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경우와 전지적 입장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3인칭 시점의 소설은 서술자가 보는 표면상의 모습만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그 남자는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라고 하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묘사한 것입니다. 반대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은 서술자가 소설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 심리상태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시 예를 들어 “그 남자는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며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상태까지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1인칭 시점의 소설과 3인칭 시점의 소설은 분명히 다릅니다.
만약에 제가 소설가라면 “내가 그녀와 결혼을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자마자 나의 운명의 여신은 그 결심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이 우리 집은 달동네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라고 하는 것이 1인칭 시점의 소설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자마자 운명의 여신은 그의 결심이 전혀 무모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라도 하듯이 그를 달동네로 이사 가게 만들었다.”라고 하면 3인칭 시점의 소설이 됩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소설과는 사뭇 다른 믿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이나 ‘주님’이라는 이름은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3인칭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대해 3인칭으로써 그, 그녀, 그것과 같은 존재가 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는다면 큰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믿음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와 대면하고 있는 2인칭의 대상이실 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보다 가장 우선적인 위치에 계셔야만 합니다. 소설은 대부분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으로 이루어지지만 믿음의 삶은 항상 2인칭 시점의 소설이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삶은 하나님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믿음은 곧 하나님의 생각대로 나의 삶을 써내려 가시는 것입니다.
굳이 삶을 하나님이 쓰시는 소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믿음의 삶은 이 세상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인생의 줄거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하나님의 시점에서 내 인생의 줄거리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또 세상에 없었던 허구와 같은 인생의 줄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풀려나올 때에는 현실이 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에 오늘 본문에 대해 ‘믿음은 2인칭 시점의 소설쓰기’라고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을 3인칭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해해서 안 되는 것이 3인칭으로 표현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항상 2인칭의 대상으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도 그렇지 않으실 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계셨습니다. 육체로 사람을 만나실 때에도 실제로는 예수님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이 그들과 대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신비한 관계를 소설에 빗대자면 2인칭 시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예수님에게서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1인칭의 시점으로 세상을 향하던 마음이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2인칭 시점이 되어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향해야만 합니다. 거짓 없는 믿음의 삶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실제 하나님을 만남이 없이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3인칭으로 대하는 삶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거짓이 됩니다.
앞서 예레미야서에 대한 설명을 드리면서 2장부터 25장까지 12편의 설교가 진행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인 14장에서 15장은 그 중 여섯 번째 설교입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남 왕국 유다를 극심한 가뭄을 통해 심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레미야의 생각에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가올 극심한 가뭄에서 선민들이 어떻게 생존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예레미야가 3차에 걸쳐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남 왕국 유다를 가뭄으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시대적으로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기 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이러한 기근을 통해서라도 그들이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고 또 예레미야의 민족애가 서린 중보기도가 반복되는 가운데, 본문에서는 이 사건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7절을 보면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라고 하였고 또 9절을 보면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해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15절에서도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고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다시 예레미야의 기도가 나타나는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라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설교를 하였고 또 이들의 거짓 설교를 받아들이는 거짓 선민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삶은 하나님이 이들을 극심한 가뭄으로 심판하시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문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민들의 악행이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 하나님의 이름이 갖는 특성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극심한 가뭄으로 심판을 하시게 된 것일까요? 동포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조차도 이 심판이 너무나 가혹하게 여겨져서 중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3인칭으로 불릴 수 없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 대중들을 향하여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상황은 3인칭을 사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신 1인칭이 되시는 입장이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대면하는 예수님은 언제나 2인칭의 입장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바르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향해있는 마음의 발걸음이 멈추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시는 실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때에 대통령은 우리에게 3인칭의 대상입니다. 우리 마음이 대통령에게로 가서 만나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을 예로 들어 봅니다. 100억을 얘기할 때에 3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합니다. 100억을 마음에 두지는 않습니다. 외제 자동차 혹은 명품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름을 말할 뿐 마음에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일단 생각하고 말했다면 마음의 시점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직장 동료와 사장님의 험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사장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 즉시 사장님에 대한 험담은 중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장님이 이 자리에 없는 3인칭의 존재에서 나와 대면하는 2인칭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누구도 사장님을 3인칭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길 수 없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고 그 이름이 생각되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계시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시고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이 계시면 옆에 다른 직장동료가 있어도 사장님과 대면하는 2인칭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과 대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악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우리는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을 지나쳐서 인생과 삶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배우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업을 왜 이렇게 안 되게 이끌어 가실까?”라고 하나님을 3인칭의 대상으로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다고 여기고 있다면 이러한 말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사업이나 건강이나 가족에 대한 모든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관하심을 믿는다면 안 풀린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결정권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 이루어지는 생각과 말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3인칭으로 취급하고 스스로 삶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사사건건 개입하시는 주권자 되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이 말에는 큰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극적으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함입니다. 간단히 말해 몸이 먹고 사는 것처럼 마음이 배부르게 먹고 살기 위해서 삶은 진행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기는 상태에서는 마음은 절대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을 가진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한 예로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맛사 또는 므리바에서 물이 없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결코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기는 상태에서 나오는 말은 비록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다 거짓말이 됩니다.
본문 14절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설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써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존재를 실제로 만나고 보내진 자들에 의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채 하는 설교가 아니라면 다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서 하나님이 1인칭의 시점이 된다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이러한 설교를 했던 자들이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했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르면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거짓 선지자와 같이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선지자뿐만 아니라 선민 모두에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참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을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즉 설교는 지금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듣는 사람들의 인생의 문제와 난관들을 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설교 외에도 교회에서 많은 설교가 행해집니다. 아버지 학교라든지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한 성경공부 같은 모임이 열리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본래 설교는 그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외면하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3인칭으로 여기던 하나님을 2인칭으로 직접 대면하고 부를 수 있도록 하고, 마음이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차적인 삶의 문제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대로 이끌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코 설교자가 청중들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설교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먼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만난 뒤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거짓 선지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르는 동안에는 거짓 엄마 거짓 아빠가 됩니다. 부부가 서로를 대할 때에도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르는 중에는 거짓 부부입니다. 사업장에서 사장 노릇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면 거짓 사장입니다. 설령 대통령일지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아닌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이끄신 결과에 대해 그들의 말이 일치했을 뿐이지 그들이 말한 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3인칭으로 사용하는 모든 자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져가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 말들이 일치하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거짓의 거짓이 참이 되는 정도의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기는 자들이 계속해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선민들이 하필이면 가뭄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 중에서 적당히 골라잡으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굳이 선민들에게 가뭄을 허락하신 이유는 경험하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뭄을 그대로 이 땅에 투영하신 것입니다.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수많은 선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과 대면하고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선민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전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아베나 시진핑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는 것처럼 당장 내 앞에 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전혀 올라오지 않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듯이 땅에 있는 선민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지 않는 가뭄이 심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의 상태를 가뭄을 통해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12절에서는 심판과 함께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세상을 붙잡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2인칭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3인칭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붙잡고 있는 것이 없어야만 합니다.
마음으로는 세상을 붙잡고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는 것입니다. 번제와 소제를 드리며 열심히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을 붙잡은 마음이 하나님을 우상화시켰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을 붙잡은 마음을 죽여야만 합니다. 번제단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고백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여기는 것이고 우상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거짓 믿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2인칭 시점의 소설 쓰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 인생의 소설을 쓰시는 분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했으면 세상을 붙잡은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나님을 2인칭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해 있는 동안에 예수님 안에 들어오셨던 하나님께서 내 안에도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2인칭의 대상으로 마음에 모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서 1인칭으로 활동해나가실 것입니다. 참 아빠가 되고 참 엄마가 됩니다. 참 사장님이 되고 참 신입사원 등이 됩니다. 이렇게 2인칭 시점의 소설쓰기로 인생을 진행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르는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2인칭으로 상대하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 현실이 되는 하나님에 의한 소설쓰기가 나의 인생이 되는 축복을 날마다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