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군(海原君) 건(健)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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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건대 근세에도 기환(綺紈)의 처지이면서 한사(寒士)처럼 살아가는 자가 있는데, 해원군 규창공(海原君葵窓公)이 그이다. 공의 휘는 건(健)이요 자는 자강(子强)이며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성군 공(仁城君珙)이고, 어머니는 해평군부인 윤씨(海平郡夫人尹氏)인데, 좌참찬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휘 승길(承吉)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갑인년(1614, 광해군6) 11월 27일에 태어나 8세 시절 《소학(小學)》ㆍ《대학(大學)》을 읽었다. 10세 때 대내(大內)에 들어가면서 머리에 옥(玉)을 꽂았다가 세자(世子)도 옥으로 된 동곳을 꽂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빼어 품에다 간직하였으므로 상이 그를 크게 기특히 여기고 총사(寵賜)를 내렸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역시 손수 가상하다는 뜻을 붓으로 나타내었다. 무진년(1628, 인조6)에 인성공이 진도(珍島)로 귀양 가 돌아오지 못한 사건은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가 쓴 전은차(全恩箚)에 기록되어 있는데, 공의 형제마저 모두 제주(濟州)로 정배되었다가 을해년에야 양양(襄陽)으로 양이(量移)되었다. 병자호란 때 군부인이 서울에 있었는데 공은 항상 서쪽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애통해하다가 어느 날 길몽(吉夢)을 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군부인이 그곳에 왔으므로 사람들은 효성이 감동된 소치라고 하였다.
당시는 상이 남한산성에 있을 때인데 적의 포위가 날이 갈수록 더하였으므로 공은 종국(宗國)이 염려가 되어 바위에 시를 쓰기를,
꿈속에도 임금께 달려가는데 / 有夢趨丹陛
백등의 포위를 벗어날 길이 없네 / 無謀解白登
하여 충절과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공은 정축년에 풀려났는데, 상이 인성군의 억울함을 본래 잘 알기 때문에 하교하기를 “크거나 작거나 모든 죄를 다 탕척(蕩滌)했는데, 지친(至親)만이 은택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인성의 봉호와 관작을 원상복귀시키고 그의 자식들에게도 모두 직을 제수하라.” 하고 또 담당관에게 명하여 혼취(婚娶)를 정해 주고 필요한 물건을 모두 내려 주게 하였으므로 듣고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을미년(1655, 효종6)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맏형은 폐질(廢疾)이 있는 데다 자식이 없고 중형은 순화군(順和君)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효종이 특별히 군부인의 숙원에 따라 공으로 하여금 종사(宗事)를 이어가게 하였다. 공은 울면서 굳이 사양하였으나 승낙을 받지 못하고 상을 벗은 후 해원정(海原正)으로 봉호를 받고 군(君)이 되었는데, 임인년 겨울 병이 들어 그길로 집안일을 자식들에게 맡긴 채 12월 24일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이 들리자 현종(顯宗)은 놀라고 슬퍼하여 조시(朝市)를 치우게 하고 관원을 보내 조제(弔祭)를 내리는 한편 보다 많은 은휼(恩恤)을 베풀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의 탑곡리(塔谷里) 임좌(壬坐)로 된 둔덕에다 예장(禮葬)을 치렀는데 선조(先兆)를 따른 것이었다. 그후 맏아들로 인한 추은(推恩)으로 예에 따라 가덕대부(嘉德大夫) 겸도총관(兼都摠管)에 추증되었다.
공은 효성이 빼어나 공고(公故)가 아니고는 언제나 군부인 곁을 떠나지 않고 얼굴빛을 살펴 뜻을 미리 짐작하고는 격식에 구애됨 없이 그때그때 알맞게 봉양하였으며, 병환이 나면 직접 탕제(湯劑)를 들고서 잠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서두르면서 목욕 분향하고 하늘에 명(命)을 빌기도 하였다. 전후 상을 당하여는 최마(衰麻)를 몸에서 벗지 않고 미음과 죽으로 때우며 과일도 먹지 않고 3년을 하루같이 보냈으며, 상을 다 마치고도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초상 때나 다름없이 하였다. 계절에 맞추어 성묘하는 일을 한 번도 거른 일이 없었고,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명모(命慕)라고 이름하였는데 그것은 공의 나이 50이 가까웠기 때문에 지천명(知天命)시절까지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자식들을 대하면서는 사랑보다 교육을 앞세웠고 형제 사이에는 우애가 지극했으며 조카들도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거두었고 곤궁하고 의지할 곳 없는 친척이 있으면 데려다 옷 입히고 밥을 먹였다. 내형(內兄)인 윤창문(尹昌門)이 염병에 걸려 죽게 되자 공이 직접 나서서 간호를 하여 결국 그도 살고 공도 아무 탈이 없었는데, 공의 그 의리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사랑을 베푼 여러 일들이 모두 다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일들이지만 여기에 다 쓰지 않는다.
항상 방 하나를 깨끗이 치워두고 도서(圖書)와 송죽(松竹)을 벗하며 시를 읊으면서 유유자적하였는데, 시는 초당(草堂 두보(杜甫))을 주로 삼았고 글씨와 그림 또한 정묘하여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칭하였다. 때로는 종친들과 모임을 갖고 술과 글짓기와 노래로 즐기기도 하였는데 풍채가 넘쳐 흘렀으며, 산수(山水)를 너무 좋아하여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혹 술병을 차고 혼자서 가 돌아오는 것도 잊고 거닐곤 하였다. 저술로는 시문(詩文) 7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공의 배위는 풍산 심씨(豊山沈氏)로 처사(處士) 위(闈)의 딸인데 풍산군(豊山君) 귀령(龜齡)의 현손이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가 효성스럽다고 하였고 시집와서는 시어머니가 어질다고 하였으며, 지아비 섬기기를 공경으로 하였고 종족을 은혜로 대하였다. 자기의 입고 먹는 것은 검소하면서 제사에는 있는 힘을 다하였고, 사친(私親)의 상사에도 정성을 다해 장례와 제례를 도왔으며, 자기 몫으로 받은 전토와 재산을 모두 형의 아들에게 주고는 털끝만큼도 간여하지 않았고 나이 어린 시누이를 길러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남편을 여읜 후로는 항상 미망인으로 자처하면서 머리 손질도 하지 않고 얼굴도 매만지지 않은 채 일생을 늙었다. 정묘년에 와서 병이 위독하자 상이 의원을 보내 약물과 맛있는 반찬 등을 보내왔으므로 세상이 모두 영광으로 여기었다. 6월 6일 세상을 마쳤는데 임종시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빛이 없었다. 장례는 공과 같은 묘역에 하였으며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이 묘지명을 썼다.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는데, 연(沇)은 화창군(花昌君), 양(湸)은 화선군(花善君), 연(渷)은 화산군(花山君), 정(㵾)은 화춘군(花春君), 비(淝)는 화천군(花川君), 조(洮)는 화릉군(花陵君)이고, 딸은 군수 심정기(沈廷耆)에게 시집갔다. 화창군의 두 아들은 맏은 무풍부정(茂豊副正) 근(根)이고 다음은 무계수(茂溪守) 식(植)인데 모두 후사가 없고 딸은 민언겸(閔彦謙)에게 시집갔으며, 계자(繼子)인 양평정(陽平正) 장(檣)이 공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화선군은 밀창군(密昌君) 직(樴)을 계자로 삼았다. 화산군은 아들이 셋인데 맏이 바로 밀창군이고 다음이 낙창군(洛昌君) 당(樘)이고 다음이 능창군(綾昌君) 숙(橚)이며, 딸은 일곱인데 지평 송택상(宋宅相)ㆍ조면(趙緬)ㆍ진사 남태승(南泰承)ㆍ진사 권세륭(權世隆)ㆍ민덕환(閔德煥)이 사위이고,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화춘군은 아들이 둘인데 맏은 바로 양평정이고 다음은 서평도정(西平都正) 요(橈)이며, 딸이 다섯인데 성윤장(成胤長)ㆍ윤사룡(尹師龍)ㆍ최방서(崔邦瑞)ㆍ김몽상(金夢祥)ㆍ윤경증(尹慶曾)이 사위이다. 화천군은 여성군(礪城君) 즙(楫)을 계자로 삼았다. 화릉군의 계자는 바로 능창군이고 서녀(庶女)가 둘 있는데 김경진(金慶晉)ㆍ서종주(徐宗周)가 사위이다. 군수는 1남 사성(師聖)을 두었다. 내외로 증손 현손이 총 80여 명이 된다.
아, 예로부터 귀개공자(貴介公子)들이 특이한 재질이 있는 자도 많았었지만 나라 법에 얽매여 진취할 희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쓸 곳이 없어 성색(聲色)이나 구마(裘馬)의 밭에 빠져버리고 마는 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공만은 그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독서(讀書)에 몰두하고 효(孝)와 의(義)를 돈독히 행하였으며 여사로 문장(文章)까지 하여 이른바 한묵(翰墨)에 종사하는 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불후(不朽)의 것이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억하건대 옛날 황파(黃巴 기사(己巳))의 봄에 심 군수(沈郡守)가 회덕(懷德)에 있으면서 공의 여러 아들들의 간청에 따라 우암(尤菴) 문정공(文正公) 송 선생(宋先生)에게 공의 묘도 문자를 청해 오자 선생이 허락을 하였는데, 때마침 탐라(耽羅)의 길을 떠나게 되어 붓을 적실 겨를이 없었다. 그때 내가 곁에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잘 아는데, 지금 와서 화릉군ㆍ밀창군 등 여럿이 다시 나에게 그 일을 부탁해 왔다. 나는 심 부인(沈夫人)의 척손(戚孫)으로서 공의 자초지종을 꽤 자세히 알기 때문에 삼가 그 줄거리를 추려 묘석(墓石)에 새기게 한 것이다.
[주-D001] 백등의 포위 : 오랑캐에게 포위된 것을 말함. 한 고조(漢高祖)가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도리어 7일 동안 백등에게 포위되었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당시 청 나라 군사에게 포위된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