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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네번째 설교
제목: 파루시아와 새로운 세상
누가복음 1:46~56
설교 목적: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절기다. 그런데 주님이 오신다는 표현은 성경에서는 주로 헬라어 파루시아로 되어 있다. 이 단어를 흔히 재림이라고 옮기지만 오늘날 사용되는 재림의 개념은 파루시아의 본래 의미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재림이라는 용어 대신에 파루시아를 사용하여 주님의 오심이 가지는 의미를 소개하겠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심판과 새 창조다. 심판은 바로잡는 것이며 새 창조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새 창조에 있다. 주님이 오셔서 열리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곳일까? 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통하여 주님이 오실 때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 어떤 것인지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자 전통과 다르지 않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대림절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궁극적인 목적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림절이 기독교인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임무가 주어졌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설교 개요:
1. 파루시아 – 주님이 다시 오신다
2. 파루시아로 본 재림의 의미
3. 파루시아의 목적 – 심판과 새 창조
4. 마리아 찬가에 드러난 새로운 세상
5.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 파루시아 – 주님이 다시 오신다
성경을 보면 파루시아(Parousia)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인데 누가 어디로 온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군 부대에 사단장이 오는 날이면 부대는 대청소를 하고 긴장을 합니다. 사단장이 오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원수가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도 우리나라는 그 국가원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를 합니다. 외국의 국가원수의 우리나라 방문을 성경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파루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돌 하나도 돌 위에 있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에 큰 재난이 닥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그 도시가 하나님의 메시아를 거절하고 박해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무너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이것은 제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날에는 여러 징조가 있고 난리가 있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가짜 그리스도가 나올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37절)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하는 날은 인자가 임하는 날입니다. 그 날은 번개가 번쩍 하고 치는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듯이 그처럼 갑작스럽게 임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판이 임하는 바로 그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일상생활을 할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때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인자의 임함’(ἡ παρουσία τοῦ υἱοῦ τοῦ ἀνθρώπου, the coming of the Son of Man, 37절)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초기교회 신자들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강림(降臨)이라는 단어가 바로 파루시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심판을 위해서 오신다고 말씀하실 때도 파루시아가 사용되었으며, 초기교회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릴 때도 파루시아를 사용했습니다.
성경은 하늘로부터 구원자가 내려오기를 기다린 백성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저는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인자의 임함, 즉 파루시아라고 말씀하신 것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재림의 개념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다시금 바로잡고자 합니다.
2. 파루시아로 본 재림의 의미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는 믿음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바로잡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노아의 시대 때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흩어 버리시려고 하늘로부터 방문하셨습니다(창 11:5).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도시들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들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노예로 부리는 파라오를 벌하시고 그 백성을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자기 백성을 들이시고 거룩한 나라를 삼으시고 열방을 위한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배신할 때 다시 그 나라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야곱의 자손들은 다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먼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그 압제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때가 차서 하나님은 다시 그 나라들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의 차꼬를 풀어주시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방문은 모두 하나님의 파루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마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다고 소개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지만 그것도 파루시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설명하시면서 ‘인자의 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노아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인자의 임함, 즉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초기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라나타’를 외치기도 했습니다(고전 16:22).
성경을 보면 파루시아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날은 보통 심판의 날입니다. 구약에서는 주의 크고 두려운 날, 주의 권능의 날이라고 소개되며, 신약에서는 인자의 날, 또는 주의 날이라고 소개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어그러짐을 바로잡기 위해서 개입하시는 사건을 성경은 파루시아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보면 파루시아는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언하시면서 바로 그 날이 인자가 임하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대의 침공으로 멸망했을 때 바로 그 날이 인자가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 권능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는 날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파루시아가 나옵니다. 주께서는 밧모섬의 요한에게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네번이나 주셨습니다. 밧모섬의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편지에 써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억압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통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은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이 속히 오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권면하셨습니다. 주님이 로마를 심판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대로 로마는 기독교 신앙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로마를 방문하시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고 말씀하실 때, 밧모섬의 요한은 대답하기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계 22:20). 그리고 그 파루시아는 성취되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저는 예수님의 오심을 파루시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재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들이 재림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약속대로 주님은 예루살렘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심판하셨습니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용을 사로잡고 바벨론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로마제국임은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모든 약속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십니다. 전에 노아의 시대나 모세의 세대, 이스라엘과 바벨론, 예루살렘과 로마제국을 통치하셨을 뿐 아니라 지나간 2천년 동안의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이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신앙은 주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주관하시며 바로잡으시고 완성하실 분임을 믿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 시대에 파루시아, 즉 임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 야고보가 2천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주의 강림하심이 가까이 왔다고 믿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야고보서 5:8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2천년 전에 하셨는데 아직도 오지 않으셨으니 정말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또 어떤 분은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 중에 생전에 주님이 다시 오심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재림에 대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파루시아라고 하며 그것은 단 한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찾아오시는 분임을 이해할 때 그 의문은 해소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언제나 땅을 감찰하시며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분입니다(대하 16:9). 그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실 때마다 파루시아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강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강림하심을 통해서 심판과 새 창조가 일어납니다.
3. 파루시아의 목적 – 심판과 새 창조
이제 우리는 파루시아가 주의 임하심이며, 주의 강림하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재림이라고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파루시아는 이 땅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은 모든 세대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많은 분들에게 낯선 개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이 끝장나고 성도들은 들림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죄인들은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께서 어떤 제자들의 생전에 예루살렘의 심판을 위해서 오셨고, 밧모섬의 요한에게 말씀하신 대로 로마제국의 심판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 세상을 끝장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파루시아의 목적은 심판과 새 창조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개입하시는 사건을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날을 ‘인자의 날’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복을 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찌 이 세상을 그냥 버려두시겠습니까? 주님은 늘 이 세상을 주목하시며 돌보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인간에 의해서 다시 공허하고 혼돈하게 될 때마다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시대에 세상의 혼돈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일을 창조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하나님이 야곱을 언제 창조하셨습니까?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지나게 하셨을 때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홍해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건짐을 받고 애굽의 군대는 수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산에서 언약을 통해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그 백성은 새롭게 지으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목적은 이 세상을 바로잡아 새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포로에서 건지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이사야 65:17~19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천지는 하늘과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을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바벨탑 심판으로 세상은 더 이상 한 언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꾸밀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건지셨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처럼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때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주님이 강림하심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처럼 세상을 새롭게 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이미 낡아지고 파괴되어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절을 보내면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릴 때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은 파루시아이며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하셔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어떤 세상을 소망했을까요? 그들이 파루시아를 기다리면서 고대하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나서 부른 노래를 소개합니다.
4. 마리아 찬가에 드러난 새로운 세상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태는 목수 요셉의 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 당황했습니다. 그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라고 일러줍니다.
마리아가 산동네에 살고 있는 친척집을 방문했을 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제사장 부부로서 나이가 늙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나타나 아이를 낳을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제사장이었던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만났을 때 임신 6개월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마리아를 환영합니다.
그렇게 석달 동안 친척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면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마침내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때가 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깨달았을 때 마리아는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이 노래에는 마리아와 같은 유대인들이 주의 날에 세상이 어떻게 새롭게 될지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1:46~56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46절부터 49절까지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50절부터는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에서 하나님은 어떤 어그러짐을 바로잡으십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긍휼을 베푸십니다(50절).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시며 비천한 자들을 그 자리로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자는 빈손으로 그 집에서 나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대리인인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셔서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으실 때 가장 먼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십니다.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시도했던 자들을 흩어 버리셨던 것처럼 교만한 자들의 시도가 아무 소용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온 세계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하무인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그들이 권세를 가지면 약한 사람들은 큰 고통을 겪습니다. 거기서 한숨과 눈물, 그리고 절규가 터져 나옵니다. 그런 세상이 어그러진 세상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가 장차 출산을 하고 그 아이가 다 자라나 그리스도로서 일을 하게 될 때에 어떤 세상이 열릴 것을 바라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이며 마리아에게 그런 믿음을 가르쳐 준 조상들의 믿음입니다.
최근에 저는 어떤 집사님에게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고 어떤 세상이 열리겠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은 우리가 주님이 오시면 공중으로 들림 받아 천국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에 대한 성도들의 기대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믿고 소망하고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보면 제자들이 기대하던 것과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종종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큰 차이가 있으며,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신앙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세상이 열릴 것인지에 대하여 성경이 들려주는 것을 따라 생각하고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대림절을 바르게 지키고 신앙인으로서 바른 자세로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이를 낳은 한 여인이 생각납니다. 그 여인은 아이를 갖지 못해서 애태우는 심정으로 기도하던 한나입니다. 한나가 간절한 기도 끝에 아들 사무엘을 낳아 자신의 서원대로 하나님께 그 아이 사무엘을 드린 후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삼상 2:1~10). 그 기도를 보면 마리아의 기도와 유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마리아의 기도와 한나의 기도를 보면 둘 다 하나님이 이 세상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을 흩어버리시고 힘있는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십니다. 부한 자를 빈 손으로 내보내시고 가난한 자를 흙먼지와 거름더미에서 올리셔서 귀족들과 함께 앉는 영광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 힘 센 자와 약한 자, 자손이 많은 자와 적은 자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까? 부유하고 세력이 크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세상을 이루고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힘없고 약하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없는 사람은 작은 허물도 모조리 캐내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아는 범법행위가 있지만 소환 한번 받지 않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지켜야 할 것이 돈이나 지위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신뢰입니까? 금년 할로윈 축제 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애타는 마음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나라는 어떻습니까? 법과 원칙으로만 사람을 대하면 사람의 인격과 마음을 바르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냉랭하고 싸늘한 법조문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법조문은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가르쳤습니다(고후 3:6).
마리아의 찬가를 들으면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세상이 될 것인지를 다시금 배웁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가는 대탈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낡고 어그러진 세상이 바르게 펴지며 한숨과 괴로움이 기쁨의 노래로 바뀌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그런 세상이 오겠습니까? 그런 세상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비천하게 사는 사람은 가장 중심에 자리를 잡고 기지개를 켜고 그의 재능을 꽃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다같이 기뻐합니다. 그런 기쁨과 평화와 당당함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고 다시 오셔서 그런 세상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5.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내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금년 대림절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우리와 온 세상에 좋은 소식입니까? 우리는 성탄절이 되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성탄 캐롤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찬송은 어떻습니까? ‘기쁘다 주님 다시 오신다!’ 또는 이것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 속히 오시니 우리는 정말 기쁘다!’ 주님이 2천년 전에 오신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기쁜 일입니까, 아니면 두려운 일입니까? 아니면, 곤란한 일입니까?
우리는 성탄절을 한 주간 앞두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오심은 사실 동일한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심판과 재창조로 나타날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며 힘으로 사람을 얕보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시며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고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시면서 그들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는 날에 의인들은 기뻐하며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원통함은 풀리고 눌린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자기의 역량을 펼칠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오실 때 열리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열리는 세상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들이 모두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아침에 구상하시고 꿈꾸셨던 세상이 마침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세상에서 만민은 하나님을 우러러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만국백성은 평화와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만민이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과 번영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주시려고 주님이 다시 오실진대 우리가 그 날을 바라보고 우리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주님이 속히 오겠다고 말씀하실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이미 오신 주님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간은 대림절 4주째입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성탄절이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인 것처럼 주님의 다시 오심도 우리에게 기쁜 날이 되도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일주일 후에 목자들처럼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경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할렐루야!
<끝>.
설교 요약: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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