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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우(申錫愚)의 ‘거제 반곡서원’ 추향문과 추배문, 청액소, 고유문 소개>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704년 갑신년에 거제유림 윤도원(尹道元),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 등이 창건한 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은 2024년 올해로 320년을 맞았다. 옥삼헌이 반곡서원의 초대원장(院首)을 맡았고 이어 신수오와 윤도원이 그 뒤를 이었다. 사학기관인 반곡서원은 거제도 유일 서원이며,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뒤편에 소재한다. 거제 반곡서원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거제도 유배가 계기가 되어 창건한 사당 겸 학당이다. 이로부터 거제도는 기호학파 서인(노론)계 학문이 널리 숭상되었다.
송시열 선생은 거제도(약1년 2개월 유배)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집필하였고 거제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마음이 곧 기이다(心是氣).”는 이이의 학설을 옹호해 설명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에 거제유림들이 유배지 배소(동상리 반곡 골짜기)에다 간략한 사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만들어 선생을 추모하였다.
◉ 그리고 지금까지 반곡서원에 관한 여러 제문(祭文)이나 상소문(上疏文), 참배 기문(參拜記問) 등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전하는 거제반곡서원 배향 제문(祭文)은 우암(尤庵) 송시열 제문(祭文),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제문(祭文), 몽와(夢窩) 김창집선생 제문(祭文),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 제문(祭文)이 있고 비문(碑文)은 반곡서원 유허비(盤谷書院遺墟碑)>가 있다.
○ 이번 지면을 통해, 조선후기 경상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쓴 1857년(丁巳) <반곡서원 중수후 고추향문(盤谷書院重修後告追享文)>과 1857년(丁巳) <거제반곡서원 추배 김정문공문(巨濟盤谷書院追配金正文公文)>, 그리고 1861년(辛酉) <거제 반곡서원 사액을 청하는 소(䟽)(巨濟盤谷書院請額䟽)>과 1863년(癸亥) <반곡서원 연액 고유문(盤谷書院延額告由文)>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신석우(申錫愚)가 남긴 거제 반곡서원의 각종 글들을 보고 있자면, 그가 얼마나 거제도 반곡서원을 사랑했는지. 게다가 좌측 바다에 위치한 거제도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고 칭송했으니, 섬 지역 거제도에 대한 최고의 평가였다. 또한 그가 경상감사로 재직 時 거제 반곡서원의 중수(重修)를 시작하게 했고 대사헌으로 영전 후에 반곡서원이 중수(重修)가 마침 끝났다. 1857년에 추향문(追享文) 작성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였고 작성하여 거제도로 보냈다. 이후 그는 거제도를 잊지 않고 김수근의 추가 배향과 서원의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임금께 사액을 청하는 소(疏)를 여러 차례 올린 선생께 삼가 고마움과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 저자 신석우(申錫愚)는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如), 신소(申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광손(申光遜)이고, 아버지는 교리 신재업(申在業)이고, 어머니는 좌참찬 김이탁(金履度)의 딸이다. 판서 신석희(申錫禧)의 형이다. 1828년 진사, 183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주서(假注書)·예문관검열·사간원정언을 거쳐 1838년 용강현령(龍岡縣令), 그 뒤 부교리·병조참판·우승지·양주목사·대사성·이조참의·승지·이조참판 등을 거쳐 1855년 경상도관찰사, 1857년 대사헌, 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1859년 형조판서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0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영국·프랑스연합군에게 광동(廣東)을 점령당하고 북경이 함락당한 때였으므로 귀국하여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니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년에는 「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으로 특별 가자(加資)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그런데 반곡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은, 1690년대 거제 우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1706년 우부승지 허지(許墀 1646~1719) 등의 거제서원 사액 상소 件과 경상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1861년(辛酉) 거제 반곡서원 사액을 청하는 소(䟽)가 있다. 또 1862년 윤8월 이병우(李秉瑀) 等 356명, 11월 김호근(金濩根)等 178명 등, 지금까지 총 5차례의 상소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끝내 사액을 받지는 못했다. 현재 서원 내, 주(主)건물 사당에는 주벽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포함해 총 6분을 배향하고 있는 '우암사(尤庵祠)'와 1881년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의 '동록당(東麓堂)‘을 갖추고 있다.
◉ 한편 거제도 역사에는 동명이인이 몇 분 계신다. 그런데 동명이인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대에 이름까지 비슷해 자세히 구분하지 않으면 간혹 헷갈리는 인사가 있다. 바로 1879년(고종 16) <반곡서원 유허비(盤谷書院遺墟碑)>의 비문을 쓴, 당시 진주목사 동양(東陽) 신석유(申錫遊)와,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반곡서원 <추향문(追享文)>과 <추배문(追配文)>, 그리고 <청액소(請額䟽)>’을 쓴 경상감사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그들이니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 참고로, 거제반곡서원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주벽으로 충헌공(忠獻公)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문청공(文淸公)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부제 학공(副提 學公) 삼호(三湖) 이중협(李重協), 문충공(文忠公)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정문공(正文公) 계산(溪山) 김수근(金洙根)을 추배하고 석다례를 일관 통행하고 있으며, 1868년 고종 5년 무진년에 대원군 서원 폐지령에 의하여 본원이 철폐되었다. 여섯 배향인물의 공통점은 모두 노론의 송시열 학통을 이어받아 의리명분을 중시하며, "선을 다하고 아름다움을 다했다는 뜻" 즉, "목표나 과정 모두 정당해야 한다(盡善盡美)"는 가치를 구현하려는데 있다.
1906년 광무 10년 병오에 향유의 불승모현(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복받쳐 참지 못함)하는 정성으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가을철에 한 번씩 단제를 봉행하여 오다가 1971년(신해년) 거제군이 복군된지도 어언 18년이 지난 때에 거제향교 전교 윤병재(尹炳材)가 반곡서원의 복원을 발의하여 유림총회의 득찬으로 우암사를 중건하고 고재(古齋)를 보수하였으며, 고자실은 도비보조로 개축하는 등 옛 모습을 되찾는 대역사는 4년이 흘러서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원 前, 서원 뒤에는 우암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우암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제당 '우암사'와 왼쪽에는 동록 정혼성(鄭渾性)선생을 모신 '동록당'이 있다. 거제시에서는 거제반곡서원 복원공사를 2010년 6월부터 2013년 5월까지 대지규모 3,182㎡로 확장하고 복원하였다.
◉ 덧붙여, 1689년에 유배와서 5년간 귀양살이를 한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의 유배로, 여기 동상리 마을을 도론동(道論洞)이라 할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났다. 죽천(竹泉) 선생이 유배지에서 서당을 열어 지역민에게 학문을 강의했기 때문이었다. 서원 창건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거제선비(士人) 옥삼헌(玉三獻) 등은 모두 죽천(竹泉) 선생의 거제 제자들이었다. 거제수령 서승태(徐昇泰)가 반곡서원 옛터에 우암의 서당을 처음 세웠는데 강당의 이름을 그의 호를 따서 승석당(勝昔堂)으로 정하였다. 옥삼헌은 김춘택(金春澤)에게서 유상(초상화)을 모셔와 승석당에 봉안하고 묘우 강당을 지었고 또 김진규에게 봉안문을 청하였다.
처음에는 송시열(宋時烈)선생만 배향하다 이후 1726년 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이조 판서에 증직)과 김창집(金昌集)선생 두 분을 배향하였다. 1800년대 중기까지 3분만 배향하다가 1856년부터 민진원(閔鎭遠), 이중협(李重協)선생을 추가로 배사(配祀)했고 1857년에 김수근(金洙根) 선생을 마지막으로 배향하여 모두 여섯 분을 모시고 있다.
○ 반곡서원의 명칭의 변경에 대해 살펴보면, 처음 서원을 세울 때는 '거제우암서원(1690년대초~1704년)'으로 창건 후에는 '거제서원(1704년~1750년대)'으로 불리다가 이후 '거제반곡서원'을 거쳐 '반곡서원'으로 확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 다음 <추향문(追享文)>은 1855년(철종 6)~1856년 사이 경상도관찰사와 1857년 대사헌, 1859년 예조판서를 역임한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의 배향문이다. 해장(海藏)이 경상감사로 재직 때 거제 반곡서원의 중수(重修, 다시 손질하여 고침)를 시작하였고 대사헌으로 영전 후에 반곡서원이 중수(重修)가 끝났다. 1857년(丁巳) 거제부사가 추향문(追享文)의 작성을 요청하였고 해장(海藏)은 기꺼이 글을 작성하여 거제도로 보냈다. 내용은 ‘서원을 다시 중수하고 돌아가신 송시열 스승께 배향합니다. 그리고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을 추가로 배향하노니 신리(神理)가 크게 열리고 향기로움(馨香) 가득하소서.’
1) 반곡서원 중수후 고추향문[盤谷書院重修後告追享文] 1857년(丁巳) /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
腏享先師 돌아가신 스승(先師)께 배향하노니
盤谷之陽 반곡의 양지 바른 곳에
敦修凌夷 뛰어나고 성(盛)한 곳도 쇠약해(凌夷)지니
院宇復光 서원의 건물도 다시 빛나리다.
追配正文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을 추가로 배향하노니
神理洋洋 신리(神理)가 크게 열리리라.
恭薦籩豆 변두(籩豆)의 제기를 공손히 올리노니
歆玆馨香 향기로움(馨香)을 흠향하소서
[주1] 추향(追享) :1857년에 추가로 배향된 조선후기 문신 정문공(正文公) 계산초로(溪山樵老) 김수근(金洙根 1798~1854)의 제문이다.
[주2] 능이(凌夷) : 구릉(丘陵)도 세월이 지나면서 평평해진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성(盛)하다가 나중에는 쇠퇴(衰退)함을 이르는 말.
[주3] 신리(神理) : 신의 이치. 사람의 정신인 마음이 내 스스로(自) 자유의지로 방향을 결정한다는 불변의 법칙이다.
[주4] 변두(籩豆) : 과실을 담는 제기인 변과, 국 따위를 담는 제기인 두를 아울러 이르는 말. 굽이 높은 대나무 그릇은 변, 소채류나 고기 장조림 등 젖은 제수를 담는 나무 그릇을 두라 한다.
● 다음 <추배문(追配文)>은 1855년(철종 6)~1856년 사이 경상도관찰사와 1857년 대사헌, 1859년 예조판서를 역임한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쓴 조선후기 문신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 1798~1854)의 1857년(丁巳) 추가 배향문이다. 광영을 잉태한 명문가 집안의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을 추가로 배향한다는 내용이다. 내외 공직을 역임하며 우공(于公) 같이 일을 하니 학자들이 숭상하고 유생들이 공경하여 이렇게 배향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2) 거제반곡서원 추배 김정문공문[巨濟盤谷書院追配金正文公文] 1857년(丁巳) /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
穹隤毓精 하늘이 무너져 정기를 받자오니
降爲偉人 위인(偉人)이 강림하여
普厥澤施 널리 그 은혜를 베풀어
宗祏生民 종묘사직과 백성을 지켰다.
有金正文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이 있는데
廼惟是克 이에 오직 이를 이겨내었던
胚光名門 광영을 잉태한 명문가 집안이다.
聿肖厥德 마침내 그 덕을 본받아
世著忠藎 세상에 충신이 나타났다.
受報于公 우공(于公)같은 과보를 받아
歷敭外內 내외 공직을 역임했다.
蹟顯班崇 반상에서 숭상하는 자취를 드러내니
儒素淵源 유학자의 연원이다.
見於言行 언행에서 나타나니
聲聞海澨 평판이 해안지방에서도 널리 오르내렸다.
章甫攸敬 유생들이 공경하게 되었는바,
配腏先賢 선현을 배향하니
廟貌更作 사당과 화상을 다시 만들었다.
猗歟英靈 아, 훌륭하여라, 영령이여~
庶幾歆酌 바라건대 이 잔에 흠향하소서.
[주] 우공문(于公門) : 우씨네 집안이란 뜻으로, 음덕을 입어 자손이 번창한 가문을 가리킨다. 사람됨이 공명정대하기에 그가 내린 판결에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죄수는 없었다고 한다.
● 다음 ‘사액을 청하는 소(䟽)’ <청액소(請額䟽)>는 1855년(철종 6)~1856년 사이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쓴 거제 반곡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소(䟽)이다. 지금까지 거제 반곡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은 총 5차례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끝내 사액을 받지는 못했다. 이 글은 먼저 송시열(宋時烈)과 거제도의 반곡서원(盤谷書院) 이야기를 서술한 후에, 추가로 배향된 문청공(文淸公) 김진규(金鎭圭),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참판 이중협(李重協),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의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글의 정리는 저자 신석우(申錫愚)가 사액을 간곡히 당부한다면서 끝맺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예로부터 경남 거제는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 칭하는 곳으로, 가정에서 시와 예를 행하고 선비가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는다. 선대의 학자가 있어 백세의 스승이 되었으니 곧 제사상을 차려놓고 향사를 올린다. 유학의 도가 널리 퍼져있고 학덕이 높은 선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이 있는데 바로 거제도의 반곡서원(盤谷書院)이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는 물론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보호했던 해와 달 같은 선대의 어진 분(先正)이다. 여기 해도(海島)에 귀양와서 거칠고 더러운 풍속을 교화하여 마침내 문명의 땅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선생의 배소(配所)에다 누추한 사당을 지어 신주(神主)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었다. 이후 문청공(文淸公) 김진규(金鎭圭)가 귀양와서 이곳에서 학문을 가리키며 선생의 뜻을 이어갔다. 백성들이 감흥을 일으켜 감탄하며 그를 따랐다. 연이어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이 와서 목숨을 걸고 도를 지켜 하늘을 얻었다. 강대(剛大)한 기개와 정직한 논의(論議), 조금이라도 꺾이고 억누름도 없었다. 유학자의 책무를 다하다가 참혹한 화를 당했다. 그리고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참판 이중협(李重協)도 바로 그러한 분들이다. 충성스러움과 선량함을 더불어 그 진퇴(進退)를 함께 하니 간신들이 두려워했다. 정직한 말과 바른 기풍으로써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머리를 움츠리고 숨을 죽이게 했다. 을사년(1725년)에 재차 은액(恩額, 사액)을 청하였고 여기에 귀양 왔던 두 신하를 추가 배향하는 일을 논하였다. 마지막으로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을 배향했다. 꼿꼿한 기개로써 공평무사하였으며 세상의 교화를 도왔다.
그러고는 저자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저 먼 궁벽한 시골 서원에다 사액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한 번 청하고 두 번 청한다”며, 윤허해 주길 간곡히 청하며 마무리 지었다.
3) 거제 반곡서원 사액을 청하는 소(䟽)[巨濟盤谷書院請額䟽] 1861년(辛酉) 대신하여(代人) /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
삼가 아룁니다. 신 등이 발에 못이 박히도록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나그네가 곤궁하여 한때 다른 곳에 몸을 붙이고 지냈습니다. 정성을 다해 재계하고 분향하고 목욕하여 궁궐 앞에서 우러르며 부르짖은 것이니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어진 이를 존숭하고 도를 존중하는 것을 살펴서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운 전례에 따라 스승을 존경하고 간절히 사모하였으니 많은 선비들의 떳떳한 마음이었다. 세상의 도의가 성하고 쇠하더라도 선비들의 뜻에는 끝이 없으니 이것에 매달리게 되었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신 등이 거주하는 큰 고개 남쪽(영남의 남부)은 예로부터 바다 좌측(海左, 경남 해안)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 칭하는 곳으로, 가정에서 시와 예를 행하고 선비의 풍습이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습니다. 이와 같이 선현(先賢)과 선유(先儒, 선대의 유학자)가 있어 백세의 스승이 되었으니 곧 제사상을 차려놓고 향사를 올립니다.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돌아가 의지하니 대개 오로지 유학의 도가 널리 퍼져있어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가 없었고 또한 학덕이 높은 선현과 같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이 있습니다. 전후에 창설 되었던 바, 빙 둘러 오로지 살펴봐도 10군데 정도 있는데 그 중에 거제(巨濟)의 반곡서원(盤谷書院)이 있답니다. 가장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선대의 어진 이로써 이름난 현인이 바른 세상을 만나지 못해 나쁜 일을 당했답니다. 관직에 불러서 응하며 나와(국가로부터 징소(徵召)를 받은 인물) 명나라에 대한 의리에다,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삼았고 임금을 받들어 높이고 백성을 두둔하여 보호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해와 달보다 높답니다. 활과 칼에서 고통을 품게 되면 떼를 지어 사방에서 일어나 짖는답니다. 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매우 급작스럽게 고향을 떠나 백발을 휘날리며 먼 지방으로 쫓겨났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 다니다가 거제도에 이르렀고 붉은 신발을 신고 믿을만한 곳에 부처되었습니다. 아아, 선대의 어진 이는 학문이 정밀하고 유학의 도가 뛰어났습니다.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후손에게 가르치어 전하며 감화시키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대저 어찌 그 뜻을 쉬이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이 해도(거제도)의 한 구역에 다행히 나라의 훌륭한 덕(盛德)과 눈부시게 훌륭함(光輝)을 보았습니다. 때 맞춰 내리는 비에 오랫동안 젖었는데 거칠고 더러운 풍속을 교화하여 마침내 문명의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학자의 지식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여러 백성 또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글을 좀 아는데 활집과 활통 그리고 의관을 갖추었습니다. 대군자(大君子)라는 좋은 향이 그곳에 배여 있습니다. 무엇인가 치우친 듯한데 옛 마을의 인사(人士, 송시열)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높이 받들어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처음 집을 만들어 영정을 걸고 금세 또 집을 넓혀 신주(神主)를 사당에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엄연히 법도를 공경하고 또 중히 여겨야할 것입니다. 영남의 큰 선비의 서원을 삼고자 그 근원이 창시된 처음에 대부분 조치를 하였답니다. 한번 내려준 선배의 키 큰 덕(德)을 입었는데도 감히 많은 인재들의 소견을 지키지도 못하고 외람되게 마음대로 참석하였습니다. 옛날 판서 문청공(文淸公) 김진규(金鎭圭)가 이 서원의 우두머리였답니다. 사우를 세워서 위패를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하며 제사를 올리고 기원했습니다. 모두 그 뜻을 드러내며 사액(賜額)을 청하였습니다. 비록 격식에 벗어났다 할지라도 문청공(文淸公)이 정성을 다해 힘써 본받았으니 이 서원에 지극했다 할 것입니다. 우연히 불운을 만나 곤궁에 이르렀지만 자취를 남긴 변방에 귀양 왔던 이 땅 또한 문청공(文淸公)의 경뢰(瓊雷)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감흥을 일으키고 더욱 두터워져 정성을 다했습니다. 비속하지 않은 그 백성들을 힘써 가르치고 지도했습니다. 읍에 사는 유생들이 기뻐하며 따르고 감탄하며 시를 외웠답니다.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 김진규는 법도를 지키는 세신(世臣)과 임금을 보필하는 현사(賢士)로서 일찍이 스스로 스승(송시열)을 얻었는데 문정공(송시열)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답니다. 그 타고난 자질과 성품이 강개하고 온화하고 아담한 인품을 가졌죠. 학술(學術)에는 어긋남이 없고 의리로써 일을 처리했고 논의에는 곧바로 판단했습니다. 증거로써 공명정대하게 판단하니 선생의 제자인 줄 으레이 알았고 크게 성한 당대 조정의 이름난 신하였답니다. 그리고 옛날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은 자손들이 연이어 충성스럽고 현명하였습니다. 사류의 영수(領袖)로서 시들고 병든 나라를 위해 곧 대대로 집안에서 전해오며 목숨을 걸고 도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얻었답니다. 순진하고 참된 자질, 단단하고 확실한 지조, 강대(剛大)한 기개(氣槪)와 정직(正直)한 논의(論議), 오랜 시간 동안의 풍파(風波)가 조금이라도 꺾이고 억누름도 없었습니다. 유학자의 책무로써 세상의 도리를 떠맡고 국가와 백성이 위임한 바를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이익과 손해, 화와 복을 도외시하고 오직 의리 있게 보았습니다. 병신년(1716년)에 한 번의 상소문에서 선대의 어진 성조(聖祖)를 위해 패륜의 무리들이 버릇없는 짓거리를 일삼아 호되게 질책했습니다. 진실로 떳떳한 윤리를 바로 세우고자 했을 뿐이었습니다.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지니 신축년(1721 경종 원년)의 대책으로, 종묘와 사직이 높아지고 편안해져 오늘의 아름다움을 이룩하게 한 것인데도 김창집에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민 작당들로 인해서 참혹한 화를 당하여 마침내 먼 물가로 귀양을 갔답니다. 여기 고을은 스승이 앞서 귀양 갔던 곳이라, 곧 저명 인사(人士)임을 알고 바로 알려지니 어느 사이에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깊어졌습니다. 이런 까닭에 선대의 사당에 두 분의 신하를 추가 배향했습니다. 또한 몇 해가 지났고 그 뒤 여러 현인을 추가 배향했습니다. 이와 같이 옛날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 옛날 참판 이중협(李重協)도 바로 그러한 분들입니다. 민진원은 본디 가정의 의리로 따랐고 종주국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충성스럽고 선량함과 더불어 그 진퇴(進退)를 함께 했고 여러 간신들이 두려워 곁눈질했습니다. 정권이 바뀐 날엔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원통한 안건에 무고함을 변명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무성한 공적이자 위대한 공적이었습니다.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바, 여러 사람들에게 칭송받았습니다. 본 서원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주석(主席)이 관장했는데 을사년(1725년)에 재차 은액(恩額, 사액)을 청하였고 부득이 두 신하를 서원에 배향하는 일을 논하였습니다. 진실로 주장하며 잘 가르쳤답니다. 이중협은 곧은 말을 하며 몸을 아끼지 않았으니 나랏일에 매우 간절했습니다. 오랫동안 선비들이 추어올려 자랑하거나 칭찬했습니다. 국가가 위급한 때를 만나 어그러지고 비밀스러운 흉측한 괴수의 흔적을 물리쳤습니다. 직언(直言, 정직한 말)과 정기(正氣, 바른 기풍)로써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두려워 머리를 움츠리고 숨을 죽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여러 군자들과 더불어 함께 찬축을 당했답니다. 또한 일찍이 오랫동안 본 서원을 주관한 장(長)으로써 권하고 장려하는 공(功)이 있었습니다. 많은 선비들이 지금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리움을 그치지 않는답니다. 이 또한 차례대로 배향한 이유입니다. 근세에 이르러 영의정에 증직된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을 추가로 배향했습니다. 가학(家學)의 올바름에 의하고 (또한) 본디 연원이 있었으니 지위와 명망이 높아져 태산과 북두칠성(山斗)과 같았고 도량이 넓고 공평무사하였습니다. 꼿꼿한 기개로써 세상의 교화를 도움으로써 탁월하여 멀리까지 이어졌답니다.
/소중한 선비의 재주로 손을 빌려 도움을 주니 평상시와 같이 편하게 논하였습니다. 선배의 말씀을 모두 기술하여 전하고자 늙어서까지 편집과 교정을 하였으니 새의 날개가 아닌 게 없듯이 모두 선대 유학자의 글입니다. 담박한 흉금과 툭 트인 풍도가 깊고도 높아 오랫동안 동시대를 살아가며 공경하고 우러러보았답니다. 옛 규약에 심원한 운치로써 여유 있게 서원의 일을 주관하며 일을 시행하고 조치를 취했습니다. 임금의 묘정에 배향(陞配)하는 거조가 있는 까닭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갈라짐이 없었습니다. 아아, 이 서원은 규모나 뛰어난 진리(인연) 덕분에 편안하게 누렸습니다. 이와 같이 근엄하여 어렵게 여기고 조심했으며 그러고 예절을 지키며 따랐고 존중했으니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조정에서 너무 지나치게 금지하고 있답니다. 저 먼 궁벽한 시골 서원에다 사액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한 번 청하고 두 번 청하면서 오히려 윤허의 말씀을 헤아려 봅니다. 많은 선비들이 한을 품었으니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옛날을 돌아보면 서원을 창설하였는데 숙종 30년 갑신년(1704년)이었습니다. 곧 마음대로 서원을 설치하는 것을 거듭 금하는 법령의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 그 땅에 남겨준 은덕을 비호하고 그 사람들에게 교화를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진실로 한번 휘파람 불고 한번 쉬는 장소뿐만 아니라, 모두 서원에 알맞도록 일으켜 세웠습니다. 또한 국가뿐만 아니라, 먼 지방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고 태평한 시대에 선비들이 교화를 널리 파급시켜 특별히 나타난 도(道)를 밝혀 널리 알리고 속히 뒷마무리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이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서로 인솔하여 일제히 호소했습니다. 삼가 원컨대 임금의 어질고 밝은 지혜로 조용히 심사숙고하셔서 하늘에서 내리듯 사액을 내리는 명(命)이 올 것입니다. 서원의 모습이 더욱 소중하고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한답니다. 그래서 유학자(斯文)에게도 다행이고 세상의 도리에도 심히 다행스럽습니다. 신 등은 지극히 두려워하면서 간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伏以臣等重趼跋履 寄寓旅瑣 齋誠熏沐 仰叫天閽 豈有他哉 諒以崇賢重道 晠世之美典 尊師寓慕 多士之彜衷 世道汚隆 士趣端否 寔斯之繫 伏願聖明試垂察焉 臣等所居大嶺以南 自古稱海左之鄒魯 家服詩禮 士習絃誦 若有先賢先儒爲百世之師 則俎豆而享祀之 墠宇而依歸之 殆遍一道 指不勝僂 若夫先正臣文正公宋時烈之祠 前後所創設 環一省而有十所焉 而巨濟之盤谷書院 爲最重焉 何者 先正以名世之賢 遭不世之遇 出膺徵召 以明大義於天下爲己責 尊主庇民 措斯世於日月之上 及乎弓劒抱痛 羣吠四起 蒼黃去國 白首遜荒 自北轉南 而巨濟實爲赤舃信處之地 嗚呼 先正學精道大 繼往開來 功化所被 夫豈易量哉 惟玆海島一區 幸覿盛德光輝 久涵時雨 敎化荒陋之俗 遂變文明之域 學者知有方向 氓庶亦能感發 耕漁而解文字 韔箙而襲冠裳 其所薰習於大君子者 若有所偏 故邦之人士 愛慕尊尙 始也刱舍揭影 旋又拓堂妥靈 儼然䂓矱之尊且重 爲嶺外大儒院 而原其刱始之初 凡所措畫 一稟先輩長德 未敢以多士之見 猥參而擅行焉 而故判書文淸公臣金鎭圭 首主是院 揭虔之儀 享禋之祝 皆出指意 而宣額之請 雖格不行 文淸之殫誠效力於斯院則至矣 及夫躬丁否運 跡屛嶺海則是地又爲文淸之瓊雷 於是因地興感 益篤其誠 不鄙其民 務加誘誨 邑之章甫 忻慕感誦 曷有其蔇 鎭圭以法家拂士 早自得師 大見賞於文正 盖其資禀剛介而濟之以溫雅 學術精專而裁之以義理 言議直截 鑑識公明 不問知爲先生弟子 而蔚然爲聖朝名臣者也 若夫故領議政忠獻公臣金昌集 忠賢系胄 士流領袖 爲國殄瘁 乃其家傳 衛道守死 乃其天得 純實之資 堅確之操 剛大之氣 正直之論 正直之論 無少摧抑 擔世道斯文之責 佩國家生民之寄 置利害禍福於度外而惟義是視 丙申一䟽 爲聖祖爲先正 痛斥犯分悖倫之徒 固已扶植彜倫 大定國是 辛丑大策 宗社尊安 式克今休 昌集則慘被搆誣 遂謫遐澨 是府又爲其涪州 則人士觀感 於焉益深 故腏享兩臣於先正之祠 亦有年所 其後追配諸賢 若故左議政文忠公臣閔鎭遠 故參判臣李重協是已 鎭遠素秉家庭之義理 深懷宗國之憂虞 與忠良同其進退 而爲羣壬之所側目 及乎當軸於改紀之日 以辨聖誣伸寃案爲急務 其績茂功偉 國史之所紀 輿人之所誦 若於本院則久管主席 乙巳之再請恩額 曁兩臣陞配之論 寔主張倡勸焉 重協謇謇匪躬 懇懇循國 久爲士類所推詡 値邦家危急之際 斥㐫魁詭秘之跡 直言正氣 使羣㐫縮首屛氣 而竟與諸君子同被竄逐 亦甞久主本院之長 有勸奬之功 故多士至今嚮慕不已 此又所以次第配腏者也 至若近世以贈領議政正文公臣金洙根追配 以其家學之正 素有淵源 位望之隆 不啻山斗 廓然大公 以扶世敎爲硬脊之任 卓然遠紹 以重儒術爲藉手之資 平居譚論 皆是傳述前輩之言 到老編校 無非羽翼先儒之書 冲襟曠度 久爲幷世之所欽仰 遺䂓遠韻 猶餘主院之所施措 故陞配之擧 衆議無歧焉 嗚呼 斯院安享之䂓模義諦 有如是之謹嚴難愼 則禮貌之隨以尊重 居可知矣 特以朝有濫疊之禁 地處遐僻之鄕 宣額之恩 一請再請 而尙稽允兪之音 多士之齎欝 容有極哉 粤稽院宇刱設 在於肅廟甲申 則其無拘於疊設申禁之令也審矣 其地之衣被遺澤 其人之薰炙嘉惠 亶不止一嘯一憇之地皆建書院之比也 且以國家栽培遐陬之士氣 覃布聖代之儒化 不容不亟圖闡彰表異之道 臣等不避猥越 相率齊籲 伏願聖明穆然深思 誕降宣額之命 俾重院貌而慰士情 則斯文幸甚 世道幸甚 臣等無任屛營祈懇之至]
[주1] 경뢰(瓊雷) : 해협(海峽) 이름이다. 중국 광동성 뇌주반도(雷州半島)와 남해도(南海島) 사이에 위치한 경주해협(瓊州海峽). 일명 뇌주해협(雷州海峽)이라고도 하는데 홍콩 등지나 원남해협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주2] 산두(山斗) : 태산과 북두칠성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세상 사람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는 사람
[주3] 구무(搆誣) : 남을 해치기 위하여, 터무니 없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미어 만듦.
[주4] 범분(犯分) : 제 신분과 처지를 돌아보지 않고 웃어른에게 버릇없는 짓을 함.
[주5] 은액(恩額) :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특별한 은전을 나타내는 일로 사액(賜額)과 동의어(同義語)
[주6] 탄강(誕降) : ‘하늘에서 세상(世上)에 내린다.’는 뜻으로, 임금이나 성인(聖人)이 세상에 남을 이르는 말.
● 다음 축문(祝文) <반곡서원 연액 고유문(盤谷書院延額告由文)> 즉, ‘반곡서원에 사액을 내리기를 바라는 이유를 고하는 제문’은 1855년(철종 6)~1856년 사이 경상도관찰사와 1857년 대사헌, 1859년 예조판서를 역임한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쓴 사당에 모신 분들에게 고하는 고유문(告由文)이다.
이 당시 전국에 서원의 난립으로 인해 사회문제가 다발생하여 전사청(典祀廳)에서 제사를 금지하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하기도 했다. 저자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이 글을 쓸 당시인 1863년엔 「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으로 특별 가자(加資, 정3품 이상의 품계)되었다. 이 해 1863년(癸亥) 설날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다음 거제 반곡서원 고유문을 썼다.
4) 반곡서원 연액 고유문[盤谷書院延額告由文] 1863년(癸亥) / 신석우(申錫愚 1805~1865)
우리나라는 어둡고 우매했는데 공(公, 송시열)이 실제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경뢰(瓊雷)를 반나절만에 건너니 공(公)이 실로 첫 번째였습니다. 이 서원에는 주벽(主壁)이 있는데 실로 그 이후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러 공(公)들을 정중하게 모셨으니 이 작은 서원에서 (계속)이어지게 하소서. 어찌 공에게 보답하겠습니까? 시골 사람들의 술을 올립니다. 오랜 세대 동안 존경받는 스승으로서 기꺼이 우리는 제사를 올린답니다. 전사청(典祀廳)에서 제사를 금지하니 우리 늙은이들은 두렵습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3번이나 부르짖었습니다. 유구한 제사이니만큼 정성을 다해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사액의 은혜를 빛나게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당의 모습이 더욱 검푸릅니다. (저는)집안에 작은 화살통을 이어 매달아 벼슬을 천거 받고 술 한 통을 받았습니다. 물처럼 망망하나 좌우 모두 흠향합니다. 설날 아침에 붓을 묻혀 공경하게 고하고 공경하게 받듭니다.
[吾邦貿昧 公實牖之 瓊雷半朝 公實首之 有主斯院 實繼其後 肅肅諸公 儒宮一畝 曷云報公 鄕人之酒 百世宗師 肯我享否 靡秩典祀 惕我耆耉 曠代三籲 誠格悠久 恩額頒煌 廟貌增黝 庭繫尺楅 官薦一卣 洋洋如水 旣左旣右 聿諏元辰 虔告祗受]
[주1] 경뢰(瓊雷) : 해협(海峽)이름. 중국 광동성 뇌주반도(雷州半島)와 남해도(南海島)사이에 위치한 경주해협(瓊州海峽). 일명 뇌주해협(雷州海峽)이라고도 하는데 홍콩[香港] 등지나 원남해협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임.
[주2] 전사(典祀) : 조선 말기, 장례원에 속해 제사의 일을 맡아보던 칙임 또는 주임의 벼슬

첫댓글 **참고 : 부제 학공 이중협은 경주 이씨 중에 부제학공파다. 고려 시대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의 후손 중에, 조선 중종 때 홍문관부제학과 이조판서를 역임한 청호공 이계린을 파조로 하는 지파 중 하나다. 주요 세거지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리와 경북 안동시 등이 있다. 그래서 그의 생존 뜻에 따라 '副提(부제) 學公(학공)'이라고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