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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 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샬롬!
제 12 장 왜 악이 없는 욥에게 그 큰 고난이 있었나
8.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4절부터 20절까지는 구절 생략) (창3:8-20)
제가 과거에 예수님을 처음 믿겠다고 할 때부터 성경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성영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때였으니까 자기 눈으로 보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저에게 있어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 앞에 선악과 놓고 먹지 말라
하셨지만, 인간이 그것을 먹었으므로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왠지 이상하게 자꾸 못마땅
했었습니다. 저의 질문인즉 '선악과는 하나님이 왜 만들어 놓고 인간이 먹는 죄를 짓게 했는가?'
하는 거였지요. 여러 사람의 설교에서도 그렇고 또 성경의 뜻을 해석해 놓은 주석들도 제게는
명쾌한 해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깨달을 수가 없었기에 설교들과
주석에서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고 제시해 주는 것을 가장 타당성 있는 답일 것으로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필요할 때는 저도 사람들에게 또 그렇게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는 사람을 지어 죄짓게 하신 하나님 사람을 지어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하나님 무엇
인지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 뭔가 이기적인 하나님인 것 같은 생각이 맴돌고 있는 그런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설교를 통해서 주권만 내세우는 하나님으로만 계속 듣다 보니 그 하나님은 주권을
앞세워서 인류 위에 군림하시는 하나님이요, 그런 하나님께 피조물인 인간은 이해가 안 돼도
의문이 있어도 '왜?'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도 감히 그럴 수 없는 존재, 무조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억울한 마음이 있어도 복종만 있어야(물론 복종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하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영님이 저에게 성경을 열어서 보여주시기 전까지 이런
생각들이 마음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겪어왔던 이런 경우를
여러분 중에 어느 정도 동감하는 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성경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그런 오해들을 할 수밖에 없으니 믿음의 능력도 없고 확신 없는 신앙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실제로 영적으로는 지금 다 그런 가운데 있기 때문에 믿음의 능력들 사실
없잖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내용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여자와 대화하시는 것인데 이 대화는 반드시 가져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도 사람들이 인간 양심이 말하는 그런 도덕 정도로
연결하여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여 주시는 분이니 선악과 먹은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하나님께 회개했다면 '내 탓이다'하고 회개했다면 하나님이 이들을
용서해주셨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 속에 저주도 죽음도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찾아오셨는데도
서로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저 여자 때문에 먹었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습니다'하고 서로 핑계 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를 선고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이런 태도가 바로 타락한 죄인의 근성이라고, 이런 정신
없는 말들로 하나님의 뜻을 변질시키고 왜곡시켜 전하는 것들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사람의 양심으로서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지당한 말로 들립니다. '아 맞다 맞아! 이들이
하나님께 회개했으면 사랑의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서 죄 없게 하셨을 텐데'하고 맞장구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 본문의 대화는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 먹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여 용서
받고 끝나야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창조와 에덴동산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었으니 이제 여러분이 이 내용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감이 있지 않습니까? 말씀에 귀를 열고
들었다면 오늘 이 대화의 내용이 '회개하면 용서 받았을 것이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미 알게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들이 여기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람이
회개를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에 비추어 보니 그것이 죄인 줄 알게
된 것이고 또한 회개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아담과 여자가 만일에 회개하여
용서받고 그대로 에덴에 살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뜻을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이 말씀을 불순종한 에덴에서의 죄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실 수 있도록 한 것이고 죄를 대신지고 형벌을 받음으로 값을 치르신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다. 첫 사람의 죄를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이 말하는 죄를 짓는 것들은
자기의 삶에서 그에 상당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확실히 보이신 것이라는 것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죄를 짓는다면 죄의 대가가 반드시 따르게 돼 있습니다.
회개한다면 용서야 받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어려움은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첫 사람은 회개가 무엇인지 아는 지각도 지식도 개념도 없습니다. 인간이
회개를 언제 알았어요? 율법을 통해서 보니 그것이 죄구나 하는 것을 알고 회개를 안 것이고,
회개에 대한 지각이 있게 된 것이지 지금 이 본문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회개가 무엇인지도
핑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거짓말에 대해서도 모르고 책임을 전가할 줄도 모르고 책임 전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깨끗하고 순수한 그릇과 같은 때입니다. 그렇기에 첫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언약을 새겨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깨끗한 빈
그릇이어야 영혼에 구원의 언약을 넣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사람이 지은
영적 죄가 그 후손들에게 유전되듯이, 영의 두려움에서 놓여나 안식하기 원하는 소원을 첫
사람의 영에 넣어 그 후손들의 영혼에 그대로 유전되게 하셔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첫
사람의 영에 새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도 인간에게도 오늘 읽은 본문의 대화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뜻으로써, 그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언약을 그들의 영에
담아 주셔야 하고 그 생명의 언약은 영에 소원과 사모함으로 새겨져 그대로 인간이 가진 영의
소원이 되어 흘러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가진 소원이 되어,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그 소원을 따라 예수님이 오셔야 한 것입니다.
지난 말씀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과 첫 사람의 이 대화는 거기에 어떤 것도 개입되어서도 또
보태져서도 거짓이 있어도 안 되는, 또한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그런 꾀도 필요한 것이 아닌,
지금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을 그대로 내놓아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질문하시고 사람은
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 곧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언약에 대한 소망의 계시를
영혼에 새겨야 하는 일로써 이 대화가 인간 역사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 하심이 시작되는
중요한 절차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욥기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3장 8-20절까지 읽었는데 본문 내용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넣으실 신앙에 대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속 말했던 것이지만 바로 이
욥기가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에 넣으신 신앙이 겪는 역사를 함축하여 보이신 계시이자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욥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언제 따로 말씀을 다룰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오늘 그것을 좀 말씀드릴 것으로 합니다. 여러분이 욥기를 알아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과 함께 연결되어 구약의 영적 역사가 열리고 답답한 자기 믿음도 열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과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라서 이를 계기로 구약의 영적 역사가 열리도록 욥기를 대강
말씀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욥의 고난에 대해서 너무 잘 알잖습니까? 욥기1:1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했고 8절 하반에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고 욥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그렇게, 하나님만 섬기는 욥에게 그런
고난을 겪도록 하셨는지 우리 인간으로서는 답답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인간의 머리
로는 이 욥기에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괜스레 원망 같은 것이 들어오지 않더냐 말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존전 앞에 산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에 대한 높은 경외심을 가지고 경외의
삶을 그대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있어서 욥이 자기 양심에 걸리는 일, 양심에 가책을 받거나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는, 양심에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욥을 말씀하시길 그와 같이 온전
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세상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고 하셨
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로서 삶에 그런 흠이 없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그
엄청난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처지에서 보면 욥이 받는 고난이 마땅히 당해도 될
어떤 명분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여러분, 명분이 보입니까? 욥이 그런
엄청난 고난을 받아야 할 명분이 보이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아주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인 것 같아서 하나님께 왜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욥에게 무엇 때문에 그런 고난을 주어 괴롭히시냐 말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읽다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잘 믿으면 뭐해 하나님 마음대로인데,
착하고 의로운,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사람 놓고 사단하고 게임이나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기분 내고 있는 것 아냐?'하는 생각이 들고 힘 빠지고 항의하고 싶고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이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욥 같은 사람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나에게도 고난을 주실 수도 있지
않겠느냐?'하는 생각 때문에 왠지 찝찝하고 미심쩍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는 사람들, 성경의 뜻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치고 그속에 '왜냐?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있느냐?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하는 의문들과 질문이
있을 수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의문이 많이 제기되어 왔고 지금도 사람들에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 앞에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모든 사람이 뭐라고 답변해 주는가
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당연히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의 주권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러냐! 저러냐! 할 수 없는 피조물이다. 이해가 되었든
안 되었든, 피조물인 인간은 그 앞에 복종하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창조주의 주권이다.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것은
굳이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창조주의 주권 위에 올려놔라. 인간이 억지로 알려고 따지고 묻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식의 답변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수년 또는 수십 년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의 이런 내용에 궁금하지도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냥 다 알아져서 궁굼한 것이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사람들에게 이런 일관된 답변을 듣고 있는 제가 영의 동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이것은 아니다'하는 거부가 올라오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그렇
다면 그 하나님은 공산당과 무엇이 다르냐?'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마침내 성영님께서 영의 눈을 열어주시고 귀를 열어주시고 깨닫는 능력을 주셔서
하늘의 뜻이 훤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그 주권으로 어떤 경우든 부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부정적인 쪽으로 집어넣으려고 시험대에 올려 놓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인격에 손상을 입지 않으십니다. 손상 입으시는 분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억울해 하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인간 위에 군림하시는 주권, 인간이 이해하든 못하든 무시하듯 마음
대로 군림하시는 이기적인 주권이 아니라는 것, 이미 말씀드려왔습니다. 인격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도 인격으로 대하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기록된 성경은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
아니요, 알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요, 또한 깨닫지 못할 것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 아닙니다.
바로 성영님으로 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선악과도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것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여
침범했다 말하고 욥의 고난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마음이니 왜 그런
고난을 허락하셨나 하는 것은 인간이 따질 수 없다, 따지는 것은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니 따지지
마라...., 이런 식의 가르침을 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신앙이 막연하고 확신도 없고 능력도 없는
영적생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작전입니다. 사람들에게 혼미함을 넣어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관계도 물론이거니와 사단의 정체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걸려들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은 크게 몰라도 예수님만 믿으면, 열심히 기도하면,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예배 열심히 참석하면 구원 얻는다는 식의 가르침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려
넣어주고 겁니다. 그렇기에 참으로 생명을 갈구하는 영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으로 고통
하는 영이면 생명 없는 거짓 가르침들에 분명히 영에서 거부가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영이요 생명의 말씀을 목말라하는 영혼을 찾으십니다.
거짓의 말씀도 있고 참말씀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영혼들은 참말씀 앞으로
이끌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욥기의 욥이라는 사람은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아브라함과 동시대 또는 전후에 살았던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는, 욥이라는 그 개인을 놓고 그렇게 순전하고 정직
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했음에도 하나님께 고난을 받더라는 것을 말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아담이 예수님을 예표하고 여자가 예수님으로 구원 얻을 영혼들을 예표하는
것처럼, 욥은 이스라엘 민족 속에 담으실 신앙의 그 영적 역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속에 넣으신 그 신앙의 영적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욥으로 하여금 미리 보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욥 개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이었지만 욥의 신앙은 곧 이스라엘의
신앙으로 그 신앙이 얼마나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야 할지를 미리 예시로 보이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욥은 어떤 경우라도 그 신앙이 무너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기에
어떤 고난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섬김에도
사람으로는 이해 못할 고난을 당하고 '왜냐?'하는 그 의문으로 많은 고민을 하지만 그러나 그
신앙이 결국은 영광으로 나온다는 것을 욥으로 보이신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의 언약을 받고
율법과 성전과 제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로 인하여 사단에 의하여 엄청난 참소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 이스라엘을 지켜보고만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의 행하신 영적 역사에 대하여
욥의 삶을 통해 보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넣으신 신앙은 사단의 끈질긴 참소와 방해와 사주 속에서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한 줄기(삼 겹으로 꼰 줄처럼) 강한 빛이 되어서 계속 흘러내려 가다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질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이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
으로 오셔서, 그러니까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는다고 고백을
누가 했습니까? 욥이 했잖습니까? 이것이 이스라엘 신앙의 열매요, 결론입니다. 그러면 욥이
실제로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그 고백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소망하던 결국을 눈으로
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일으켜 영광을
보게 하실 것인데 욥의 신앙이 그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욥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마침내 나타날 일을 말한 것입니다.
욥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 신앙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앙과
함께 하시며 길을 걸어오신 것이요, 그 신앙이신 분이요, 그 신앙을 통해서 마침내 육신으로
오셨음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핍박을 통하여 그 신앙을 연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게 하신다, 즉 신앙의 결국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신다는 것을 의미한 겁니다.
이스라엘에 넣으신 신앙의 결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 신앙을 단련하신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실 것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절대로 욥 개인의 사건으로 보는 것 아닙니다. 만일에 개인의 사건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면 자기 눈으로 보는 성경일 뿐입니다. 욥기를 통해 자기 신앙을 깨닫는 것은 분명히
있어야 하지만, 개인의 사건으로 본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부작용이 있게 되는지 아십니까?
자꾸 자기 자신을 욥에다가 결부시켜서 '나도 저런 고난을 하나님이 주시면 어떡해....,' 하고
염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를 따라서 한편 마음엔 믿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그래도 나는 욥과 같은 고난은 겪지 않았으니까, 욥의 고난과 같지
않으니까 감사해야지 뭐!'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말씀 전하는 선생들도 '여러분, 아무리
그래도 욥의 고난 같은 고난은 당하진 않았지 않느냐'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인간적인 위로 받는 데다 끌어다가 자기 위로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인의 마음에 위로나 얻는 것인 줄로 알 뿐 무슨 하나님의 뜻을 볼 것이며 뜻대로
믿는 믿음의 능력을 갖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욥은 자기에게 왜 그 같은 환난과 그 같은 고통이 있는 것인지 몰라서 왜냐고 계속
하나님께 질문했잖습니까? 이것이 이스라엘의 질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일을 알지
못하여 질문하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전역사가 기록된 성경이 있기 때문에
머리부터 끝까지 알 수가 있게 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일 등, 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희미한 그림자와 같았으므로 왜냐고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욥이 자기에게 임한 이 고난 고통이 왜냐고, 자기 마음에서 풀리지 않는 그 일에 대하여 계속
물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의 백성이 왜 이런 고통을 받습니까?'를
끊임없이 질문했던 이스라엘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심겨진 신앙은 무너지지 않고 그
신앙의 결국을 볼 것이라는 것을 욥을 통해 보여주신 이스라엘의 영적 역사입니다.
제가 욥기에 대해서 따로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좀 더 설명을 할 건데요, 여러분 중에서
욥기가 풀리지 않아 답답한 고민을 안고 있는 분이 있었다면 깨닫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욥기에서 가장 답답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그런 엄청난 고난을 허락
하셨느냐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욥기를 읽어보았을 테니 1장과 2장의 그 서막 장은
창조주 하나님과 사단과의 대화 내용이라는 것은 아는 거잖아요?
첫 사람이 사단의 유혹을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자 그것은 곧 다스려야 할 통치권한이 사단에게
넘어간 것이 돼 버렸잖아요? 그 뒤 하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장면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사단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먹었기 때문에
그것은 영적 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덮어주신다는 표로 양의 생명을
취하여 피를 흘리고 무엇으로 옷을 입혀 주셨습니까? 헤어지지 않는 양의 가죽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가졌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 존전에서의 삶이 되면 사단이 그를
주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사람들이 영적 죄는 가졌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는 자는 사단이 자기 소유로 삼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외는 다 사단의 소유요
주인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하나님을 실패하게
하여 보좌를 취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하여 자기 소유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하나님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 무엇 가지고 유혹했어요? 물질, 먹는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바로
세상이요, 육의 것들입니다. 남성들은 여자, 돈, 권력, 명예 이런 것들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부귀, 사치, 그저 자기 몸 아름답게 보이려고 뭐 좋다는 것 다 발라보고 싶고 몸에다
걸쳐보고 싶고 육체와 자기 정신을 기쁘게 할 사치나 치장에 마음 쓰게 하는 이런 음탕의 것으로
유혹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들의 마음이 이런 것에 있다면 이미 그 마음은 음탕한 것이요
시험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욥1:7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물으니 사단이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했어요. 이 말은, '내 권리로 땅을 돌아다녀보니 땅의 모든 인간이 내게 굴복하여
절하더라, 당신이 지은 땅의 사람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다 내게로 오더라'하는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고 욥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네게로 나갔지만 욥은 아니다'하고 일부러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에요.
사단이 할 일을 하도록 의도적으로 욥을 드러내신 겁니다. 첫 사람이 먹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이것이 죄를 지었던 안 지었던 관계없이 흙으로 된 육체에 붙은 자아의
약점이요 흠이라는 것을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하늘의 완전한 생명이 없는 인간 자아가 바라본 선악과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를 따 먹게 된 사람의 자아는 이제 육체의 본능과 하나가
되었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것들을 받아들인 육의 자아
(사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은 이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살기 원하는 그 육이 깨져야 합니다. 육에서 나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는 신앙,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 인간이 지음을 받은 본분,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것이라는 점을 철저히 배우고 신앙만이 남아야 비로소 예수님이 오시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이 연단 받을 것을 욥을 통해 보이신 것이었다는 것 욥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정말 참신앙은 고난 속에서 육이 깨지고 신앙이 단련되어 나와야 하기에 이스라엘에 메시아
언약을 넣으시고 그 신앙으로 단련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단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 23:10절에 그 신앙 고백 있잖습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메시아가 마침내 연단된 신앙에서 나오리라, 그러므로
거기에 사단의 역할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도 처음에 예수님을 믿으러 나올 때는 그저 내가 바라는 것 '예수님 믿으면 내 집안이 잘
되게 해 주시겠지'하는 등등의, 내가 바라는 요구들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기도들을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보니 자기의 요구들이
문제가 아니라 더 엄청난 문제, 죄인으로 지옥 가게 되었으니, 영에 생명이 없어서 죽게 생겼
으니, 의가 없어 하늘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서 정말 예수님이 아니면
죽을 존재구나 하는 것을 듣고 깨닫게 되니 '아,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고백을 통해 성영님께서 영적 사람으로 나오도록 믿음을
연단 받게 하십니다.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이 되도록 육이 죽는 고난, 신앙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깨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이 훈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앞에 자기와 세상을 다 팔아버리는
것이 되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복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을 깨는 데 사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단을 도구로 하여 신앙의 사람이
육이 깨지고 신앙이 단련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연단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숨겨진 뜻을 알지 못하는
사단은 자기의 한 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온 것입니다. 사실은 사단이 자기 방법을 다 동원
하여 욥을 무너지게 하려고, 자기 앞에 굴복케 하려고 수고하였으나 사단이 실패하고 하나님
앞에 온 겁니다. 사단이 욥에게 미인계도 써 보았고 남의 돈도 얼마든지 속여 자기 것이 되게 할
기회도 주었습니다. 배고픈 거지도 보내 보았고 아무튼지 욥을 유혹하는 데 필요한 방법을 다
동원해 봤는데 실패한 겁니다. 바로 신앙만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하신 것은
'내 종 욥은 사단에게 굴복할 자가 아니고 네 머리를 깰 자가 나올 것이다. 너의 도전한 게임에
욥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욥에게 자기의 꾸민 일을 실패하자 욥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할
방법밖에 없다는 계산을 하고 하나님 앞에 온 겁니다. 욥이 무너져야 하나님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에 인간을 참소할 수 있는 그 권리를 가졌다는 당당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무너지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단 자신과의
게임에서 졌다는 자기 계산을 가지고 그 승리감에 도취해서 자기의 권리 주장을 하러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온 것입니다(계12:10).
나와서 '하나님이 지으신 첫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단 자기의 말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어겨 죄를 범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법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빨리빨리 이
범죄자들을 심판해 버리시지 왜 심판하지 않고 있느냐? 빨리 심판하시라, 그리고 생각해 보시오,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보호해
주시고 잘되게 하시니 그렇지 하나님께서 한번 그의 소유나 그의 복을 쳐 보시오,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 내게 굴복한 자들처럼 굴복하고 들어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넘치도록 복을
주시는데 경외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하고 참소와 이간질을 열심히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창조주로서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사단이 그 권리를
가지고 참소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죄를 대속하여 주실 때까지 사단의 참소와 훼방과 핍박을 받으며 육이 깨어지게
하셔야 했습니다. 인간은 물질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오로지 거기에 마음을 두고 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는 길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하나님께 '욥의 모든 소유
물을 쳐 보세요' 다시 말하면 물질을 다 거두어 가시면 반드시 욥이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욕할 것이니 욥을 시험해 보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요구대로 욥의 모든 소유물을
사단의 손에다 맡기고 욥의 몸은 손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욥의 몸은 성전의 비유입니다.
모세를 통해 지으라 하신 구약 성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전을 상징하는 욥의 몸은 손대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알다시피 사단이 욥의 모든 소유물을 모두 쳐서 욥에게는 오직 자기 몸 하나만
남았지만,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했습니다. 여호와의 뜻대로 될 지라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욥을 시험에 빠지게 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또다시 하나님 앞에
시험하는 자로 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네가 아무리
충동질하여 시험해도 신앙이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또 사단이, 내겐 시험할 권리가 있으니 말씀드린다는 뜻으로 '하나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 재산이 중요하겠습니까? 자기 목숨을 담고 있는 몸이 중요하겠습니까? 자기 목숨
담은 몸하고 소유물하고 바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목숨은 있으니까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의 목숨의 위협받는 뼈와 살을 쳐 보세요. 틀림없이 하나님을 향해 욕할
것입니다'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을지니라 선고하신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육체는 사단이 자기
소유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은 사단이 자기 맘대로 주관할 수 없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욥은 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이 소유할 권한은 없으나 사람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께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러므로 자기에게 시험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욥을 시험해 보라고 살과 뼈를
쳐도 정말 그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지 하나님이 다시 시험해 보라고 하나님을 격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이 권리를 주장하여 나오는 요구에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욥의 몸을 네 손에 붙이겠지만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생명은
해하지 말라!(욥2:6) 성전을 상징하는 욥의 몸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다고
했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로 뒤덮여 진물도 흐르고 고름도 줄줄 흐르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점도 흠도 없는 소나 양의 피로써 거룩케 하신 이스라엘 성전이 결국
부정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로 하여금 짓게 하신 성전, 솔로몬에게 예루살렘에 짓게
하신 구약 성전의 역사가 어떠했습니까? 침략 당해 훼파되기도 했고 이방인들이 점령하여 자기
들의 신전으로 삼아 부정하고 가증한 짐승과 피로 제사하여 더럽혀지는 수난을 겪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이방인들의 풍습과 우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말입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거룩한 백성이, 언약을 받아 가진 거룩한 백성이 지도자들도
백성들도 함께 이방인의 풍습과 우상을 받아들이고 타락의 일을 일삼았기 때문에 외부의 침략을
당하고 성전까지 더럽혀지도록 내주는 역할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 제사를 맡은 제사장들 또한
타락을 일삼고 가증한 제사로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욥의 몸, 살과 뼈를 쳐서 악창이 났던 욥의 몸과 같이 성전도 물질로 지은 사람의
수공(건축)물에 속한 것이기에 백성들의 타락을 힘입어 사단이 권리를 가지고 해할 수 있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구약 성전은 하나님께서 하늘성소(예수님)를 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모형으로 지은 것일 뿐, 그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역할을 다하면 끝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 참이 누구입니까? 참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은 다 사단에게 붙였지만, 거기에 생명만은 해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럼
생명은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인성으로부터 온 것이니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으로
사단이 해할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은 해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그 생명 말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는 생명을
말하는 거예요. 신앙이 있는 것만이 하나님은 생명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의
생명을 취할 권리가 절대로 없기 때문에 생명은 해하지 말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
라엘의 그 신앙은 고난과 사단의 핍박과 훼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흘러가야
했습니다.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가 상징하는바, 생명의 언약, 오늘 읽은 본문 창3:15,16에 또 20절 말씀
속에 넣으신 하나님의 생명의 언약을 가지고 그대로 신앙에서 신앙으로, 즉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져 간다는 것을 욥을 통해 예표로 보이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에 대한 계시를 담은 욥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먼저 욥에 대하여 여러분께 대강 말씀을 하게 되었는데 이해가 되었는가요?
다시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자기들의 벗은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선악과를 먹자 눈이 밝아져 벗은 것을 보게 되었고, 곧 두려움이 들어와 그것이 하나님이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자신들에게 임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벗고자
옷 입기를 사모하는 영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곧 행동으로 나타나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거였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부르신 것 아닙니다. 아담과 대화하시겠다는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아담이 자기에게 처한 상황을 그대로 고하게 하시려고 아담을 이끄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신 것은 네가 지금 어떤 처지에 처해 있기에, 네가 어떤 처지가
되었기에 숨었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기에 내 얼굴을 피해 숨었느냐?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 물음이 영혼에 들리지 않습니까? 책망이 아니라 애틋하고 애절하고 잠시도 안 보면 안 되는,
보고 있어야 하는 깊은 사랑이 담긴 하나님의 이 물으심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저는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이 음성이 나에게 하시는 음성으로 들려서 벅차
오르는 눈물을 눈에 그렁그렁 달고 '아버지 제가 아담이었군요, 제가 아담이었습니다, 제가 아담
입니다' 눈물로 답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아담을 보니 그 아담에게 예수님이
계시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예수님도 함께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이 같은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다소 알게 된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이 창조의 사건들을 통해서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것과 같은 영적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밀 같은 창조의 뜻을 직접 본 것처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악과를 먹고 나무 뒤에 가서 숨은 이 아담의 모습이 눈앞에 그림으로 그려지면서 그가
보이는데 얼마나 순진무구한지 그냥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나 안 보나 눈치 살피면서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 같은 그 모습이 너무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아담에게 그렇게
사랑이 갈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생각만 해도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네가 무엇을 하였기에 숨어 있느냐? 왜 내 얼굴을 피해 있느냐?'하시는 물음에 아담이
1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일, 자기가 지금 경험하는 일, 자기에게 처한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
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어기고 내가 먹었으므로 내가 누구인지 보게 되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한 겁니다.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일, 자기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하나님께 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1절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 물으심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가르쳐 주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말한 자가 없는데 네가 너의 벗은 것을 알고 네가 스스로 벗었음을
고하는 것을 보니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은 게로구나,' 여러분! 얼마나 자애
롭고 사랑스러운 음성입니까? '아니, 그래, 내가 먹지 말라 한 실과를 그새 못 참고 따 먹은
거냐? 그 죄를 짓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네가 나무 뒤에 숨었구나' 이런 정죄가 아니라 자애
로운 음성으로 '네가 그것을 먹은 게로구나 누가 네게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지었구나! 하고
일러준 것도 아닌데 네가 스스로 네 모습을 보고 고하는 것을 보니 내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은 게로구나' 하나님의 애틋한 대화예요. 먹은 것 몰라서 물으신 것 아닙니다. 지금
아담을 버림받은 죄인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아담의 이 대화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서의 모습을 눈을 열어서 보았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12절에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했습니다. 아담의 이 말은 꼭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
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주셨을 때 아담의 그 감탄과 환호하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한 몸을 이루라 하신 대로 자기 몸에서 나온 한
몸인 여자에 대해 아담이 하는 말은 이기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말하는
사람들이 전부 다 '여기서 회개했으면 좋았을 걸, 내가 하나님 말씀 듣고도 먹었으니 잘못했
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했으면 용서받았을 것이고 그러면 이 땅에 죽음도 안 들어오고 저주도
받지 않았을 텐데 아담이 핑계대고 그래서 세상에 저주가 들어오고 죄가 들어왔다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시는 이런 식의 유치하고 빗나간 설교를 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한 이 말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고자질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선악의 실과를
먹고 아담에게 주어 아담이 먹게 된 것은 곧 예수님께서도 먹은 것과 같이 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예표한 아담이 고하여 이른 것은 이제 그것이 공식적인 것이 되었
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먹지 않았지만 이제 먹은 것처럼 되었다는 것의 선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3:22에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실화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공식적이 되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중 하나 같이 하시므로 예수님도 선악과를 먹고 죄지은 자처럼 심판을 받아야 하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선고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다음 하나님께서 이제 누구에게 물었습니까?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여자가 꾐에 의해서 먹었다는 것을 그대로 고함으로써 여자를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한 사단에게
또한 선고가 내려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고 사단은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실 역사가 진행될 것임을 15절부터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욥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잘 알게 됐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속에
넣으신 하나님의 역사, 신앙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신 예표로, 욥을
통해 함축하여 보여주신 것이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으니 이제 욥기에 대해서 오해가 없는
말씀이 되었다는 것 믿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누구를 예표해요? 예수님이지요? 또 여자는 누구를 예표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교회입니다. 욥의 사건은 무엇을 예표한다고요? 이스라엘 신앙역사 라는 것 이제
이해 되었지요? 여기까지 여러분께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열리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상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어 말씀드릴 것은 다음 주에 연결해서 그대로
들어가겠습니다. 모든 영광 삼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제12장 왜 악이 없는 욥에게 그 큰 고난이 있었나. p275-p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