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공원에서 강을 건너면 걸어서 20여분, 차로 5분 안쪽이면 신륵사 입구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걷다보면 먼저 보이는 것은 원호장군 전승비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주목사 겸 강원도조방장으로서 향병을 소집하여 여주 부근의 신륵사·구미포·마탄 등지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여주목사 겸 경기·강원 양도의 조방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가선대부로 승서되었다. 그러나 며칠 뒤 강원감사 유영길(柳永吉)의 명령을 받고 김화부근 전투에 출전했다가 전사했다.
최근에 세운 듯한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탑군이 보인다
대부분 지금의 이 신륵사를 만들어 놓은 공양주들의 공적비나 기원비들이다
그 중 가장 폼나게 비각까지 세워진 비가 있다 바로 김병기의 비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潁). 부사 김이중(金履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김조순(金祖淳)이고, 아버지는 판돈녕 김영근(金泳根)이며, 어머니는 윤치승(尹致升)의 딸이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에게 입양되었다.
1862년에는 삼남 지방으로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민란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설치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구관당상(句管堂上)이 되었다. 철종 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이조판서·어영대장·판돈녕부사직을 두 차례, 호조판서직을 다섯 차례나 거치는 등 관력(官歷)이 화려하였다.
이런 김병기가 이 신륵사에 커다란 재물적 후원, 권력적 성역화를 해낸 인물로 이렇게 거창한 송덕비를 남겼다
조선 후기 서인 노론 출신인 그들은 우리나라 좋은 곳이란 좋은 곳엔 다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숟가락을 얹혔다 그리고 다 그들의 덕분이라 칭송한다 그리고 후대에 교육한다 구룡루중수기 현판을 쓴 이도 김병기이다 비판적사고를 갖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악의 무리에게 세뇌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신륵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지금도 중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나게 강당 모습이 다채롭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단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이 석탑은 백색 대리석으로 조성한 방형 평면의 석탑으로 2층의 기단부를 구성하고 그 위에 중적(重積)한 탑신부를 받고 있는 점은 신라나 고려시대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수법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재(部材)의 세부조형에 있어 전혀 양식을 달리하고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경내의 여러 건물배치와 석탑의 보존상태로 보아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 생각된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중 다층전탑은 높이 약 9.4m.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이다. 지대석 위에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7층의 기단을 쌓고, 4단의 층단을 만들어 밑에서부터 3·5·6·7단째에서 각각 체감되면서 층단이 되었고 화강석을 사용한 점은 기단의 전체 형태와 아울러 이색적이다.
더욱이,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 데 비하여,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넓게 떼어서 면토(面土)를 발랐다. 벽돌에는 둘레에 연주문(連珠文)을 두르고 그 안에 당초문(唐草文)을 돋을새김한 반원문(半圓文)이 있는 것도 있으나 배열방법은 무질서하다.
탑 북쪽에는 이 탑의 수리비가 있는데,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입)’이라고 건립 연대가 명기되어 있어 1726년(영조 2)의 작품임을 알겠고, 이 탑도 이 때 지금의 형태로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전탑 위로 오르면 소소한 소나무 산책길도 있고 가장 뛰어난 한강 조망이 어디에서 보아도 그 아름다움을 표할 수가 없다
다시 일주문으로 나오는 길 1960년대 이 신륵사에 현장학습에 왔다가 조포나루에서 배가 뒤집혀 49인이 희생된 사건도 있어 그 넋을 위령하고 있음도 기억해야 겠다
신륵사를 뒤로 하는 길 계묘년을 맞아 우리를 배웅해주는 예쁜 검정 토끼와도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