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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
마태복음 1장 18-20절
사도신경의 두 번째 부분이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에 대한 내용을 고백한다고 할 때 지난 시간까지 성자의 이름과 관련하여 예수 즉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사실과, 또한 그가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을 받아 선지자직과 제사장직과 왕직을 행하실 분이라는 사실과, 나아가 그는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구속과 관련해서 우리의 주가 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오늘부터는 그리스도의 지위 혹은 신분과 관련해서 살필 것인데, 그리스도 즉 그가 기름 부음을 받으심으로 세 가지 직분,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행하시는데, 두 가지 신분으로서 그 직분을 행하십니다. 하나는 낮아지신 신분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높아지신 신분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 낮아지시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높아지셨습니다.
낮아지심의 첫 번째 내용은 성육신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와 관련해 말씀드릴 때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세 위격이 아니라 하나의 위격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리우스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자가 비록 탁월함과 시간적 순서상 다른 피조물들보다 월등히 앞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이 있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시누스주의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아리우스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자는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기 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고, 성부가 거룩한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주셨고, 죽음으로써 그 진리를 확증했으며, 부활 후에 그를 높여 우주를 다스리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또한 그분은 아버지와 동등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이렇게 증거 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반대로 교회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실제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육체인 것처럼 보이셨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환영에 불과한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우스가 성자의 신성을 부인했다면 아리우스에 반대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려다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축소시켰습니다. 특히 아폴리나리우스라는 인물은 인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육체와 감각적 영혼과 이성적 영혼이 그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성적 영혼을 소유하지 않고 그 자리를 말씀이 대체했다고 주장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의 경우는 가현설주의자들처럼 예수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하늘에서 가져오셨고 마치 빛이 유리창을 통하여 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마리아를 통과해서 오셨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심도 말씀하는데, 그 사실을 사도신경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에 이어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을 통해 고백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5문은 이 부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35문.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은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계속해서 그런 하나님이신데(요1:1, 10:30-36, 행13:33, 시2:7, 골1:15-17, 요일5:20), 그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눅1:35) 친히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진정한 인성을 취하셨고(마1:18-23, 요1:14, 갈4:4, 히2:14),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후손이 되사(삼하7:12-16, 시132:11, 마1:1, 롬1:3) 범사에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빌2:7, 히2:17) 죄는 없으시다는 뜻입니다(히4:15, 7:26-27).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아들이라고 할 때 우리처럼 나지 않을 때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성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이요, 처음이자 나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시작이 없으며 끝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아버지로부터 나신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하신 아들이십니다. 한 마디로 그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성자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골로새서 1장 15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어떤 이들은 골로새서 1장 15절 말씀에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표현으로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 중 가장 뛰어나신 분이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기도 전에 계셨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다를 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 그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친히 인성을 취하셨는데,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20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일반적으로라면 남자와 여자의 동거로 인해 아이가 생깁니다. 알에서 태어나 경주 지방에서 신라를 세운 임금에 대한 거짓 이야기도 있지만, 사람이라면 남자와 여자의 동거로 인한 일반적인 방법 외에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런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일단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요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동거로 인해 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경우 마리아가 잉태된 것을 알았을 때 다른 남자로 인하여 잉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아니기에 다른 남자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간음죄가 성립되고, 간음죄에 대해서는 죽일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에 요셉은 그렇게까지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꿈을 통해 말씀하셨는데,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과 35절에 보면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쉽게 말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하고자 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못하실 것이 없는 능력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요, 만드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리시고 보존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방식은 남자와 여자의 동거를 통한 방식이지만, 예수님만큼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잉태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신비로운 방식, 사람이 볼 때 이적과도 같은 방식, 남자의 씨가 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일반적인 방식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아담의 원죄를 전가 받기 때문입니다.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로마서 5장은 아담과 아담 이래 모든 인류와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데,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이 로마서 5장에는 계속해서 나오는데,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담 한 사람과만 맺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해서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도 인정할 수 없게 되는데, 거기에는 무엇만이 남게 되는가?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만이 남게 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6문에서는 모든 인류가 아담의 첫 범죄 안에서 타락했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아담과 맺어진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도 맺어진 것입니다. 일반적 출생에 의해 아담의 혈통인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 했으며, 그의 첫 범죄 안에서 그와 함께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에서 밝히신 바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결코 자신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문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도 참 사람이시고 의로운 분이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 즉 하나님이신 분을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신다고 할 때 죄를 가지고 태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출생이 아니라 신비로운 방식,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는 방식으로 잉태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이적적인 잉태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과 함께 성령 하나님께서 그렇게 잉태된 그리스도에게서 원죄의 모든 불결함을 분리시키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에 더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순간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육체를 말씀과 본질적으로 연합시키셨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 사이의 본질적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의 중보자는 참 사람이시고 의로운 분이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 즉 하나님이신 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분으로 계시지 않는다면 그가 인성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결코 신적이며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없습니다. 인성으로는 언제나 유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한함을 무한한 가치로 있게 하는 것이 신성입니다. 즉 중보자께서 인성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역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로 사역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은 신적이며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 다시 말해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때가 차매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인가?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본성과 섞여서 어떤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인가? 신성은 무한한 반면 인성은 유한하기 때문에 비록 인성을 취하셨지만 신성에 녹아들어 외적으로만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을 뿐 결국 신성으로만 계시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절반은 하나님이고 절반은 사람으로 계신 것인가? 이런 의문이 교회 역사 안에 있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이던 유티케스(380-456)라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적인 속성이 신적인 속성에 동화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음료를 바다에 부었다고 할 때 바다에 부은 음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인성도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본성, 즉 신성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으로 하나의 존재에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어우러져서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의 본성만 있을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386?-451)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엄격히 구별하였는데, 그 결과 두 본성의 연합이 부정될 정도였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아폴리나리우스(310-390)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우리와 같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참 사람이 되려면 육체와 함께 지성과 이성을 가진 영혼이 있어야 하는데, 육체만 입으셨을 뿐임으로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451년 칼케돈 회의를 통해 두 본성에 대한 공교회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내놓았는데, 이것이 칼케돈 신조입니다.
이 신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한 분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그는 만사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고백을 하는데, “...우리는 유일하신 한 분 성자시요, 주시요,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는 두 본성으로 인식되지만, 두 본성은 혼합이나 전이나 나눠지거나 분리가 되지 않음을 인정한다. 인격적인 연합은 각 성의 특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인성을 취하시기 전 성자 하나님은 신성으로만 계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때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지 않습니다. 또한 전이되지도 않습니다. 나눠지거나 분리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갈케돈 신조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격적 연합이라고 부르는데, 서로 다른 두 본성이 신비한 방식으로 한 위격으로 연합되어 있으면서도 각 본성의 본질적인 속성들은 완전히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연합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 구별된 본성에 관계하여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신성에 따라서는 참 하나님이시요, 인성에 따라서는 참 사람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 하는 구절도 있고, 또 예수님의 인성을 증거 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구절들을 보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육신을 취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는데, 그분을 보니 마치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것처럼 있다고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2장 24절과 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계속해서 예수님이 인성에 대한 구절들을 보면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처럼 지혜와 키가 자라갔습니다. 신성이라면 자라간다는 표현이 말이 되지 않지만 인간의 몸을 취하셨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4장 2절에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시험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성을 취하심으로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나아가 주리기도 하셨습니다. 주렸다는 것은 배가 고프다는 것인데, 나중에 십자가 상에선 “내가 목 마르다”(요19:28)고 말씀하실 정도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를 느끼셨습니다. 물론 감정도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때론 분을 내셨다는 표현도 나오는 걸 보게 됩니다. 심지어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계시기도 하셨고, 결정적으로는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죽음도 겪게 됩니다. 신성으로는 결코 죽을 수 없지만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죽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그의 참 사람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진정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설명하는데, 잉태되신 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 된 것이지만 마리아의 자궁에서 잉태되실 때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가르치는 교리 가운데 무흠수태(무염시태) 교리라는 게 있는데,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기 위해서는 마리아도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특권으로 원죄의 흠이 없이 보존되었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자궁에 잉태되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만큼 죄는 없으십니다. 마리아는 원죄를 가지고 있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가 없으신 분으로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참된 후손이 되셨는데, 육체적으로는 마리아를 통해 나셨지만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법적으로 아버지가 되심으로, 다시 말해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는데 그런 그가 법적으로 아버지가 되심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소개하고 있으며, 누가복음 3장에서는 법적 아버지인 요셉으로부터 시작해서 맨 첫 사람 아담에게까지 이어지는, 심지어 아담에 앞서 하나님에게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소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32절에서는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구약 다윗의 왕위와 관련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임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 외에도 구약에서 약속하신 바의 성취와도 관련 있는데, 이미 이사야 7장 14절에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신자의 중생 사이에 유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왜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 나셨는가? 우리의 영적 중생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중생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 몸에서 잉태되신 것처럼,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우리의 중생도 사람의 방식, 일반적인 그런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6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고 할 때, 다시 말해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로 원죄와 상관없이 마리아의 몸속에 잉태되어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 그래서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본질적 연합을 이루었다고 할 때 그런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이 우리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36문.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에서 그대는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답. 그는 우리의 중보자시며(딤전2:5-6, 히2:17, 7:26-27, 9:13-15), 따라서 내가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나의 죄를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무죄하심과 완전한 거룩하심으로 가려 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롬8:3-4, 고후5:21, 갈4:4-5, 벧전1:18-19, 3:18, 고전1:30, 사53:11, 시32:1).
두 가지 유익이 있는데, 첫 번째는 그가 우리의 중보자시라는 확실한 믿음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요리문답 15문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란 질문에 대하여 참 사람이시고 의로운 분이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 즉 하나님이신 분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여러 명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가 누구냐?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그런 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데, 그리스도 없는 우리는 출생할 때부터 죄인으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함께 범죄함으로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것이 원죄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죄로부터 자범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가려주시는 분이 누구시냐? 예수님이십니다. 그의 무죄와 완전한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가려주십니다. 가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의 거룩으로 우리를 거룩하다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군데서 증거 하는데, 로마서 8장 3절과 4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5절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에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는 3장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부분만 더 언급하자면 고린도전서 1장 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즉 우리의 의로움과 우리의 거룩함은 누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그가 죄인이었다는 결코 의를 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죄인이었다면 결코 거룩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의로, 그의 거룩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에 고린도전서 1장 31절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만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 안에 있는 것만이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이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지혜요, 그의 의요, 그의 거룩이요, 그의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