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샤말란과 종교성
<식스센스> <빌리지> <레이디 인 더 워터> <해프닝> 등의 감독인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이 개봉했습니다. <식스센스> 이후 언제나 비평가와 관객들의 차가운 시선을 모면하지 못하던 샤말란이었고, 이번 영화도 세간의 목소리들을 듣자하니 그러한 평가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듯합니다.
늘 샤말란의 영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박한 평가들이 사실 좀 속상합니다. 구태의연한 반전연출중독자쯤으로 취급되었던 과거의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해, 평면적 구성 및 손쉬운 (그렇기에 심오성이 의심되는) 주제의식 등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의 다차원적 오해들이 여전히 샤말란을 바라보는 시선들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이렇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가장 경쾌하고 접근성 높은 방식으로 명료하게 보여주는 감독도 드문데 말이죠. 샤말란의 영화 속 주제들이 쉽게 느껴지는 건 실제로 감독이 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서사성이 거세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그런 서사를 제공할 의도가 없기 때문이고요. 인물들의 묘사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평면적 특성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는 독해방식의 차이라는 것이죠. 쉽고 단순하고 함축적인 진술로 담보될 수 있는 것은, 그 진술로 표현된 것의 상징성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와 같은 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샤말란의 영화는 일종의 종교적 우화와 유사합니다. 그냥 단순한 방식으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고, 관객들이 그들 자신에게 ‘존재하는’ 대로(혹은 만큼) 챙겨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보자면 샤말란은 실상 쉬운(friendly) 감독이 아니라, 불친절한(unfriendly) 감독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샤말란이 이처럼 종교적 우화의 작법을 고수하게 된 데에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크리스찬 학교에서 종교적 주제들과 더불어 성장기를 보낸 경험이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만 해봅니다만,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닙니다. 동의를 구하고 싶은 사실은 그저 샤말란의 필모그래피 속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종교적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의미와 상징성이 초지일관 그 실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잠깐 여기에서 제가 밝혀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성과 영성이란 표현 가운데 전자를 택해 샤말란의 영화를 수식하려는 이유입니다. ‘종교(religion)’라는 영단어의 어원은 ‘다시 연결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보다는 그 자체로 보다 ‘관계성’의 감각을 생생하게 살려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샤말란의 영화 속에서는 늘 관계 속에서만 유일하게 도약되는 미덕들인 사랑, 용기, 믿음, 수용 등이 직접적인 주제의 형태로 보고되어 왔습니다. 혹은 현상학적으로 점검했을 때, 대극 및 이원성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는 관계 자체의 객주관적 특성을 보여주는 쪽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고요. 요는, 종교적으로 지향된 주제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샤말란의 영화에서 또한 이 ‘관계성’이라는 요소는 그의 주된 의도를 견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성은 곧 관계성’이라는 하나의 관점을 놓고서,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거점들을 확보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 아버지와 아들: 탕아의 탄생과 복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 고전적인 관계, 특별히 크리스트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징적 관계에 대해 이 영화는 많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관계성이 담지하는 종교적 실재에 대한 묘사가 이 영화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영화는 인류가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한 어느 미래인 3072년, 인간의 생존에 대한 공포를 초월해 용사가 된 아버지 사이퍼(윌 스미스 역)와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하는 아들 키타이(제이든 스미스 역)를 주요인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이 두 사람은 전투훈련 및 부자간의 친목을 위해 비행선으로 이동하던 중, 유성우에 의해 복구불능의 피해를 입고 한 행성으로 불시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미 낯선 타향으로 화해 인간에게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환경이 되어버린 지구입니다. 깊은 원시림과 호전적인 생명체들, 심지어는 산소마저 부족한 그 공간에서, 구조신호기는 파괴되고, 아버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과거 인간을 멸종위기로 몰아넣었던 ‘얼사(Ursa)’라는 괴물까지 풀려나 그들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미션을 내립니다.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 대신에,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또 하나의 구조신호기를 찾아 구조 요청을 보내라고 말이죠. 그 명령을 받고 일견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두려워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첨단설비들을 통해 모든 상황을 함께 경험하며 제어할 것이고, 완전한 조력을 제공할 것임을 약속합니다.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아버지를 신뢰하며 모험의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마치 인간을 위해 예비된 신의 완벽하고 원대한 계획을 따르는 것처럼요.
그러나 모험의 초반부터 아들 안에 불신은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모든 상황에 대해 아들이 확보하지 못하는 시야까지도 총체적으로 다 제공할 것이라던 아버지의 시선이 자신이 눈 앞에서 경험한 것들조차도 놓치고 있음을 아들은 감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험이 계속되는 가운데 자신이 경험하는 위기가 심화될수록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만큼의 안전과 보호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하죠. 그렇게 보편적인 물음은 또 하나의 젊은 개체 안에서 숙성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왜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인가?” 더 정직하게는 “신이 존재한다면, 왜 나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가?”
이렇게 실존주의자가 된 아들은 고전적인 투쟁을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그 로고스적 질서와 원칙에 대한 불만을 조금씩 토해내다가, 아버지의 계획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패배하는 지점을 목격하는 순간 끝내 절규하는 존재로 화합니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나요!”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선지해준 경로(길)에서 이탈해, 말 그대로 추락하는 비행(飛行)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렇게 아들은 탕아가 되고, 아버지와의 연결은 끊어집니다.
아들은 이제 고독하고 두렵습니다. 이 잔혹한 세상엔 그 혼자뿐입니다. 그는 실존주의자에서 실존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광야의 메마름과, 타자의 공포, 그리고 영혼의 어두운 밤이 그를 에워쌉니다.
아버지는 이제 고독하고 두렵습니다. 이 잔혹한 세상엔 아들 혼자뿐입니다. 그는 말씀(로고스)주의자에서 말씀의 힘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광야의 메마름과, 타자의 공포, 그리고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고 있는 아들을 에워싸고 싶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부르며, 서로가 서로를 잃어버린 상태, 이것이 정확하게 탕아가 걷고 있는 길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소외함으로써, 신마저 소외되게 합니다. 상호연결의 상실은 영영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탕아에게는 유일하게 희망적인 빛이 아직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더는 거짓일 수 없는 고독 속에 있습니다. 지금 그는 더는 기만일 수 없는 단독자로 존재합니다. 지금 그는 더는 위선일 수 없는 진짜 세상과 만나야 합니다. 그는 실존해야 합니다. 그 유일한 책임은 동시에 유일한 빛으로 그를 끌어당깁니다. 그 책임에 대한 용기는 그를 ‘존재하게’ 합니다. 실존철학자 틸리히가 얘기한 것처럼, 용기는 이미 존재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들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 놓인, 그 베일 사이로 비치는 존재의 진짜 세상을 조우합니다. 생과 사가 교차하고, 에로스와 아가페가 약동하며, 대극과 모순이 공존하는, 로고스의 형태가 아닌, 세계를 움직이는 로고스의 힘 자체를 체험합니다. 그는 하나의 비전(vision)을 성취합니다. 영국의 실존철학자 콜린 윌슨은 여기에서 세계관의 변혁을 바라봅니다. 반항의 표현인 실존인이 존재의 표현인 종교인으로 거듭나는 ‘그때(kairos)’가 바로 여기에 묵직하게 놓여 있습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달립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찾아낸 지 오래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반항으로 아버지와의 연결이 끊겼음을 안타까워하며 부르짖습니다. 그 모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그대로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화답이 닿지 않음을 더 안타까워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시간과 영원 사이에는 이렇게나 심원한 강물이 가로놓여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영원은 과소평가되기를 스스로 거부합니다. 시간 속에 영원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시간은 이미 영원의 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원은 시간 속으로 스스로 돌입해가고, 그 순간 아들은 아버지가 됩니다. 아버지(로고스)의 형태가 아닌 아버지(로고스)의 힘 그 자체가 됩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곧 아들의 뜻이 됩니다. 종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묘사한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와 합일함으로써 하나의 신성한 연합(union)을 형성합니다. 그 연합 속에서 상호연결은 더는 무엇에 의해서도 깨질 수 없는 형태로 완벽하게 부활합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아버지와 함께하는 아들을 해할 수 없습니다. 얼사(Ursa)요? 자양강장제 이름인가요?
샤말란의 영화는 이처럼 참 쉽습니다. 밥 로스보다 쉬워요. 흔하디 흔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영화, 그 외에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리고 진실합니다.
3.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그 사이를 소요하는 실존의 태도
희랍 문화의 신들은 인간적인 특성을 띤 만큼,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인간의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 당위적 인과율이 보다 강화된 형태로 신들의 특성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유일신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심판하고 처벌하는 절대권위의 존재라는 이미지가 사실은 희랍의 크로노스나 제우스에게서 유래한 이미지라는 건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원형(archetype) 또한 그런 것들이잖아요. 인간이 좌우할 수 없는 모종의 강렬한 심층적 에너지. 그러한 만큼 희랍의 신들과 각종 원형들의 개념과는 상성이 좋은 편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심층적 원리로서, 대표적으로 희랍의 두 신의 특성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태양의 신인 ‘아폴론’이며, 다른 하나는 술과 향락의 신인 ‘디오니소스’입니다. 각각이 대변하는 특성의 경우, 전자는 통제, 질서, 절제, 균형, 이성, 조화, 정합 등으로 표현되며, 후자는 혼돈, 무규칙, 몰입, 자유, 감성, 부조리, 열정 등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개념을 활용해, 니체는 현대문화가 아폴론적 원리에만 주도되고 있다는 비판을 가한 바 있습니다.
이 두 개념의 더 쉬운 형태로는 ‘마을의 원리’와 ‘숲의 원리’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도 물론 다분한 원형적 이미지입니다. 헨젤과 그레텔, 빨간 두건 등의 동화를 보면 주인공이 마을에서 떠나(혹은 버려져) 숲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주된 소재를 이루고 있죠. 그만큼 이 ‘마을’과 ‘숲’의 경계는 심리적으로 아주 고전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을 안에서 인간은 문명을 이루고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즉, 마을은 자연의 야성성을 극복한 후 이루어낸, 안정되고 통제된 질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을 떠나 숲을 조우했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잊어왔던 자연의 야성성과 만남으로써 생존이 위협받는 두려운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정서는 정확하게 ‘공포’입니다. 그리고 좀 더 세련된 표현으로는 ‘외경(awe)’이라고도 부르죠.
흥미롭게도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낯선 자연(즉, 타자)에 대한 이 외경을 가장 근본적인 종교성의 감각이라고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종교학의 고전인 『성스러움의 의미(The Idea of the Holy)』에서 언급한 것처럼, 겁먹은 존재의 경험은 피조물의 원초적 경험이며, 이 원초적 경험은 종교가 뿌리를 내리는 토양이 됩니다. 즉, 종교란 외경의 대상, 그의 표현에 따르면 ‘완전히 다른 존재(Das ganz Andere)’로서의 낯선 절대적 타자에 대한 경험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디오니소스적 원리, 즉 숲의 원리는 우리에게 통제 불능에서 야기한 공포를 제공하는 동시에, 인간이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그 외경의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심원한 종교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얘기입니다.
신성과 세속, 용서와 죄의식, 선과 악 등의 크리스트교적 이원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미국의 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작인 『젊은 굿맨 브라운(Young Goodman Brown)』에서는 이러한 숲의 원리가 대표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브라운은 종교에 대한 심층적 지향이 없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친구로 자신을 소개한 한 노신사의 청으로 함께 근처의 숲을 탐험하게 되고, 그 경험 속에서 그는 종교적 감성을 싹틔우게 됩니다. 마을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브라운은, 숲의 공포스러운 악마성을 경험함으로써 세상의 다른 측면을 엿보게 되고, 함께 걷던 노신사의 정체가 악마인 동시에 자신이 존경했던 마을사람들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세계관의 붕괴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신을 향해 절규하게 되지요.
이처럼 숲은 늘 외경의 대상이자, 모험의 공간이며, 세계관의 변혁을 경험하게 해주는 원리로, 또 그러한 실재로 기능합니다. 일종의 각성장치인 셈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도 이러한 마을과 숲의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다른 행성에 정착할 정도로 발전한 인류의 문명, 다양한 첨단의 과학장비들, 인류를 수호하는 강력한 군대, 그리고 강인한 신념의 아버지.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마을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비행선이 불시착함으로써 아들인 키타이가 홀로 직면하고 살아내야 했던 그 모든 배경은 깊은 원시림입니다. 그 원시림 속에서 키타이는 삶을 배우고, 연결성을 회복하며, 종교적 각성을 이루어내지요.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종교적 감성과 밀착해 있는 숲의 원리의 고전적인 힘을 생생하게 살려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이원적 세계관은 우리에게 큰 혼란을 제공합니다. 그 사이에서 방향감각과 통제력을 잃은 채 내버려진 감각이 불안 그 자체로 강렬하게 경험되기 때문이죠. 실존철학에서는 이를 존재의 ‘피투성(thrownnes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강력한 힘들 사이에서 ‘내버려진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인간이 과연 적절하게 취할 수 있는 태도(attitude)가 있을까요?
실존-종교의 맥락에서는 분명 특정한 태도를 제안합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서 또한 그 태도를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영상화하고 있습니다.
키타이가 비행선에서 내려 숲으로 막 들어서려 할 때, 즉 마을의 원리에서 숲의 원리로 이행되려고 할 때, 그리고 가장 큰 위기상황 속에서 현명한 선택이 요구될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얘야, 일단 무릎을 꿇어라.”
네. 바로 그겁니다. 이미 우리가 자신을 ‘내버려진 존재’로서 경험한다면, 아예 ‘자기 자신조차도 내버리라’는 것이죠. 이는 정확하게 종교적 순종(surrender)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외경으로 느껴질 경우에, 아폴론 앞에서도, 디오니소스 앞에서도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알베르 까뮈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자기 운명을 온전하게 받아들여 살아내는 이는 이미 그 운명을 부여한 신들보다도 높이 있다.” 틸리히 또한 유사하게 얘기합니다.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는 운명의 모든 다신론적인 힘들을 초월한다.” 붓다 역시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관념이 만든 신들을 초월하지 않았던가요.
희랍의 신들이 상징하는 건, 전술한 것처럼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원형적 힘들이죠. 즉,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넘어 아버지와 다시 연결되고, 아버지의 힘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방법론을 실존-종교의 관점에서는 이처럼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샤말란은 역시나 아주 쉽게 그 방법론을 영화 속에서 묘사해내고 있어요. 더는 헷갈릴 수가 없게끔.
4. 운명과 자유의지: 소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와 같이 다분히 신학적인 주제를 논하기에 앞서, 인상적인 한 영화를 언급해볼까 합니다. 2012년에 개봉했던 <루비 스팍스(Ruby Sparks)>라는 영화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주인공인 젊은 소설가의 발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실의 여인에게 염증을 느낀 그는 어느 날 루비 스팍스라는 이름의 가상의 연인이 등장하여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소설을 쓰게 됩니다. 루비는 주인공이 연인에게 바라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상상 속에서 소망을 실현한 그는 만족스럽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충격적인 광경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자신이 묘사했던 바로 그 모습대로 루비가 현실의 여인이 되어 자신의 집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감동스러운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하루하루 루비와의 달콤한 시간을 재워가나, 그 연회의 때는 머지않아 종결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루비를 완벽한 여인으로 묘사하게끔 만들었던 그 특성들이, 이제는 주인공을 심적으로 괴롭히는 역기능적 특성들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번 루비의 특성을 수정하여 글로 묘사하고, 그에 따라 루비의 성격은 즉시 변화합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낙원이 찾아오나, 뒤이어 동일한 형태의 갈등 또한 여지없이 발생합니다. 그럴때마다 주인공은 루비를 수정하고, 다시 또 천국, 그 다음 지옥,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갑니다.
좌절스러운 반복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인공은 자신이 창조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루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지쳐가고, 루비 또한 자신이 주인공이 쓴 소설의 인물이며, 자신의 삶이 주인공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인 주인공은 용기를 내어 가슴 아픈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건 자신의 소설 속에서 루비를 해방시켜, 그녀가 과거를 잊고 주인공을 떠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의지를 준다는 결말로 소설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소설을 완성시킨 다음날 아침, 루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따라 멀리 떠나갑니다.
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에요. 시간이 흘러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루비와 재회합니다. 물론 그녀는 그에 대한 기억을 잃은 상태였죠. 그렇지만 루비는 주인공에게 알 수 없는 호감을 느끼며, 그를 다시(혹은 처음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암시를 남기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는 분명 로맨스 영화로서 비교해볼 때,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이나 마크 웹의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등과 유사한 주제의식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상기한 영화들과 조금 다른 변별점이 있다면,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자유와 운명에 대한 보편적인 감각을 표현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크리스트교의 은유에서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물한 이유는 바로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루비 스팍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자유의지 없이 모든 것이 정해진 프로그램처럼 구조화되어 있을 때, 이미 그 안에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제안한 개념에서라면, 존재가 빛을 잃고 대상화된 소유양식만이 창궐하고 있는 셈이죠. 그러나 신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원하지, 소유하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왜 크리스트교의 전통에서 이원론과 타자를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현실적으로 둘로 나누어져 있는 상태의, 나와 다른 타자, 그렇기에 내가 감히 소유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자여야만 그의 자유가 담보되고, 그 건강한 자유를 기반으로 서로를 선택하여 서로에게 참여하고 서로가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의 종교학자인 오강남과 성해영은 이러한 맥락에서 크리스트교의 신비체험이 왜 ‘동일시 체험’이 아니고, ‘합일 체험’인지를 밝힌 바 있습니다.
니체는, 아니 정확하게는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기획을 꿈꾸었던 인물로 해석되는 니체는 이 운명과 자유라는 주제에 대해 우리를 훌륭한 논점으로 이끌어줍니다.
니체가 제안한 철학적 실험 중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의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단 한순간도 전혀 다르지 않게,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우리에게 영원히 반복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니체의 형이상학적 우주관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실험이기에 업이나 윤회와 같은 개념과는 적용되는 범주가 다릅니다. 이 영원회귀의 개념이 본원의 생명력을 발휘하는 건 다음과 같은 우화를 통해서 표현될 때입니다.
_____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을까? 아니면 그대는 악령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을까?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그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킬 것이며, 아마도 분쇄시킬 것이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 것인가?
_____
니체는 이 우화에서 묘사된 질문의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형태로 운명이 부여된 경우, 당신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 다른 니체의 진술에는 그 대답이 직접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오, 그래,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그는 ‘다시 선택한다.’라고 얘기합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렇게 되도록 부여받은 운명을 ‘마치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다시 선택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바로 종교적인 수용, 즉 긍정할 수 없는 것조차 긍정하는 대긍정의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즉 수용할 수 없음에도 수용하는, 수용될 수 없음에도 수용된 자신을 수용하는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타자에 대한 통제권을 내려놓고, 타자에게 적극 다가가기를 선택하는 용기의 움직임만이 숨쉬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의 자유의지를 통해 ‘다시 선택된’ 운명은 이제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운명의 압제와 구속력을 소실합니다. 그건 이제 ‘소명(calling)’이라는 형태로 명명되기 시작합니다. 즉, 소명은 운명과 자유의지가 일치했을 때 발생하는 기적의 사건인 것입니다.
본 영화의 이야기로 어렵게 돌아와, <애프터 어스>에는 이러한 소명의 순간이 놀랍게 묘사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바라보는 길,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이 선택해야 하는 길, 이 두 길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순간이 절묘한 연출력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한 명료하게 제시됩니다. 그건, 이미 아버지의 힘에 아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 아들의 자유의지는 아버지에게 다가가기 위해, 혹은 아버지를 다시 선택하기 위해 제공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운명’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도 온전한 이야기입니다. 니체는 자유의지를 통해 운명을 다시 선택하는 이 움직임을 표현 그대로 ‘사랑’이라고 전했습니다. ‘운명애(amor fati)’라고.
5. 신과 인간: 누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카와치 이즈미라는 일본작가의 <삼도천 드릴>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현대적인 감성의 지장보살이 주인공으로 나와, 안타깝게 명을 달리한 소년소녀들에게 다시 한 번 현세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미션 형식으로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화의 종반부에 현세에 돌아갈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도 지장보살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생전에 병약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지장보살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힙니다.
그런 소년에게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눈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그를 도울 수 없어요. 우리가 도와주는 순간, 그가 지금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그의 ‘지금’은 우리에 의해 완전히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오만하게 누군가의 삶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해 그를 실패자나 무능력자로 취급하고 싶은가요?”
그리고, 지장보살은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소년에게 따듯한 미소를 건네며 덧붙입니다. “지장보살이 맴도는 육도는 전부 지옥, 당신의 존재를 원하는 사람들 속에서 구원도 제대로 해줄 수 없는, 당신이 선택한 길은 그런 지옥입니다. 좋은 지장보살이 되기를.”
영화 속에서, 아들이 모험을 떠난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아버지는 비행선의 추락으로 인한 부상이 악화됩니다.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 진통제를 투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진통제의 제반 효과로 기재되어 있는 ‘졸음이 올 수 있음, 의식이 혼미해질 수 있음.’이라는 문구가, 진통제를 투여하려는 그의 팔을 제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그는 버텨야 합니다.
그는 잠도 잘 수 없습니다. 계속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들의 뒤를 쫓고 있는 괴물의 자취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어 아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낯선 환경에 불안해하는 아이가 언제라도 유일한 안심을 찾아 건넬 수 있는 목소리에 즉시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동맥의 파열로 그의 피가 모조리 소실되어 가고 있을 때, 그는 아들의 얼굴에 난 생채기를 걱정합니다. 아들의 실수로 미션이 실패했을 때, 그는 자신의 부족한 계획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자신을 거부했을 때, 그는 그저 묵직이 슬퍼합니다. “여보, 우리 아들과 연락이 끊겼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면서도,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자, 그가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을 지켜보고 있는 그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그렇게 스스로 지옥을 선택합니다.
누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걸까요?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듯이, 이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습니다.
6. after us, who stands?
시각적으로 이 동음이의어는 더 와 닿습니다. 아니 공감각적으로요.
우리 안에? 혹은 우리 위에?
아니에요. 우리가 가장 든든할 때는 우리의 등 뒤를 좇아 지키는 아버지의 시선을 느낄 때입니다. 이를테면,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묵묵히 아이를 전송하던 그 눈길 아시죠? 아이가 걷는 길의 모든 끝까지 영원히 뻗어 있을, 언제든 뒤돌아보면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머물고 있을 그 체온이요. 아가페는 그렇게 성취됩니다.
7. Thank you!
이 글의 끝까지 함께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