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의 말씀 :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예레미야 7:1~20)
* 본문요약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행하며 연약한 자를 도우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에서 영원히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한 편으로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다른 한 편으로 연약한 자를 압제하는 등의 죄악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예배 장소를 강도의 굴혈이라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말씀하셔도 도무지 듣지 않는 유다 백성들에게
실로의 성소에 행하신 것과 같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 자손들처럼 쫓아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온 가족이 하늘의 여왕을 섬겼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을 그 땅에 쏟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찬 양 : 502장(새 445)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369장(새 218) 내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 본문해설
1. 예레미야의 성전 연설(1~4절)
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성전)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르노라.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4절) :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가 아니라면,
그 예배 때 선포되는 모든 복과 은혜의 선언은 거짓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도 않으셨는데,
누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복을 선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배에서 선포하는 모든 말들이 다 거짓말이 됩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조건(5~7절)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을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으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다른 신들을 섬겨서) 스스로 화를(재앙을)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3. 무익한 거짓말(8~11절)
8) 그러나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너희가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성전)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하고 말하고 있느냐?
이는(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이 모든 가증한 일을 계속 되풀이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워야 할 사회 정의란? :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워야 할 공의와 정의는 가장 힘이 없고 연약한 자가
아무 염려 없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에 참여하면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4. 실로와 같은 운명이 될 예루살렘(12~15절)
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나의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서 한 것과 똑같이 너희가 의뢰하는 이 성전,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도 행하겠고,
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자손을 쫓아낸 것과 똑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 실로의 성소(12절) :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실로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뒤에 세운 옛 성소인 회막이 있었습니다.
실로에 있던 그 회막에는 사무엘 시대까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실로의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의 전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진 성읍이 되었습니다.
5. 꺼지지 않는 진노의 불이 그 땅에 쏟아지리라(16~20절)
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17)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였느냐?
18) 자식들은 나무를(땔감을) 줍고, 아비들은 불을 피우고,
부녀자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어 바침으로 나의 노를 격동시키느니라.
1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만 하는 것이냐?
(아니라), 그들이 자기 얼굴에 수치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냐?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곳에 붓되
사람과 짐승과 들의 나무와 땅 위의 열매에 쏟아부을 것이니,
불같이 불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하시니라.
- 하늘의 여왕신(18절) :
다산의 여신 아스다롯이나 이쉬타르 여신을 말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여신의 제의에 참여하면
다산(多産)과 부(富)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제의는 숯불에 구운 전병을 여신에게 바치는 것과 함께
음란한 성적 제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묵상 point
1. 두 번의 신앙의 부흥의 기회를 놓쳐버린 유다 백성들
1) 남왕국 유다는 망하기 전 두 차례 신앙 부흥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➀ 히스기야 왕 때에
주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해 멸망 당할 위기에 처했던 유다 백성들은
히스기야 왕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르짖어 기도한 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밤사이에 18만 5천 명의 죽어서
극적으로 구원받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기도하는 붐이 일어났습니다.
만일 히스기야가 이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게 했다면
히스기야 시대는 다윗 시대를 이은 놀라운 부흥의 시대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➁ 요시야 왕 때에
그 후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한번 성전 예배의 부흥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이 요시야 왕의 종교개역에 함께 참여하였다면
유다 백성들은 또 한 번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이 두 차례 모두 삶의 변화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➀ 히스기야 왕 때 큰 기적을 경험한 것을 잘 활용하였다면
다윗 시대만큼의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이 질병에서 고침 받은 후 타락하여
신앙 부흥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➁ 요시야 왕 때에도 죄에 오염된 백성들이 왕의 개혁을 잘 따르지 못해
요시야 왕 혼자만의 개혁에 그치고 맙니다.
이 두 차례의 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들과
예배를 드리는 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예배와 기도도 뜨거워졌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성도의 수도 많이 늘어났고
예배 분위기도 좋다면 이는 분명 부흥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삶은 변화되지 않은 채 예배만 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3) 예레미야의 연설 : 이 성전이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4절)
이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에 서서
예배를 드리러 오는 백성들에게 연설을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성전 연설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을 여호와의 전이라고 말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서 드리는 성전 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없으니
이제부터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후일 예레미야는 이 연설로 큰 위기를 맞습니다(예레미야 26장).
➠ 성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려면(5~7절)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려면
다음 3가지 조건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은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들의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복이 내려지게 됩니다.
➀ 유다가 이웃들 사이에 공의(정의)를 행하면(5절)
➁ 유다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아니하면(6절)
➂ 유다가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아니하면(6절)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동시에 사회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함께 참여해야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1) 거짓된 삶, 진지한 예배 ➠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가?
영화 『대부(God father)』의 한 장면입니다.
마피아 두목이 부하들을 시켜 적대자들을 살해하게 하고는
그 시간에 자신은 세례받는 아이의 대부가 되는 의식을 치릅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이 마피아 두목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
세례를 받는 아이의 대부가 되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삶을 살면서 드리는 예배는
거짓 예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성전이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4절)
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 왜 거짓말이라는 말씀입니까?
성전 예배가 형편없었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배는 오히려 법과 원칙에 따라 경건하고도 엄숙하게 제대로 잘 드려졌습니다.
헌금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이 드렸습니다.
적어도 예배의 형식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부흥한 교회의 모습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배의 형식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의 일이 문제가 아니라 성전 밖에서의 일이 문제였습니다.
➠ 성전은 만능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마치 무슨 요술 지팡이라도 되는 듯,
어떤 흉악한 죄를 지었든 간에
그곳에서 예배만 드리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라도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생각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 거짓 예배에 빠져든 유다 백성들
1) 거짓 선지자들의 무익한 거짓말에 빠져드는 유다 백성들(8절)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익한 거짓말에 의존한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이웃과의 계명을 위반하며 드리는 예배도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그들이 드리는 예배도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십계명의 6, 7, 8, 9계명을 모두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드리는 예배의 장소는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신실한 삶과 함께 드리지 않는 예배는 복과 은혜의 구원의 능력을 상실한 예배입니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그들의 성전과 예배는 결코 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무조건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은
무익하면서도 무서운 거짓말이 됩니다.
➠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도 실로와 똑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2~15절)
하나님께서 실로에 있는 이 회막을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실로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던 곳입니다.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예루살렘 성전 역시
실로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2) 예레미야 선지자의 중보의 기도조차 금지하신 하나님(16절)
소돔성 때는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했고(창 18:16~33),
아론의 금송아지 때에는 모세가 중보기도를 했습니다(출 32:11~14).
이처럼 예언자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조차 금하십니다.
사람이 중보기도해서 멈출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을 진격할 느부갓네살 왕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4.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조차 금지하신 이유 : 거짓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1) 가나안의 하늘의 여왕신에게 경배하는 유다 백성들(16~18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가나안의 하늘의 여왕 신의 제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며 즐거워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이십니다.
이런 제의에 가족들이 각자가 따로따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가족 단위로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나무를 줍고 아비는 불을 피우고 어미는 여신에게 바칠 전병을 굽습니다.
이것은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유다의 모든 사람이
다 하늘의 여왕신의 제의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 단위로 참여하는 가나안의 이 여신의 제의는
결국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행하는 집단적 제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집단으로 함께 우상 앞에 절하면서 음란한 행위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2)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빠짐없이 잘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교회 밖에서 이런 삶을 살고 있었으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는 여전히 드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 자체만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절차에 따라 착오 없이 예배를 잘 드리고 있으니
밖에서 무슨 일이 있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부족함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3)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전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거짓 종교를 실로의 성전 파괴의 예를 들어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의 찬송을 부르는 태도나, 기도와 말씀을 들을 때의 자세와 같이
예전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드려졌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의 삶이 바르지 않으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예배가 됩니다.
그들의 삶이 함께 변화되지 않는다면
성전 예배가 아무리 철저하게 잘 준비된 예배라고 할지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 중보기도를 중단시키신 것은 : 심판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뜻입니다(16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중보의 기도를 중단시키신 것은
유다를 향한 심판이 결정되었고,
이미 그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바벨론 군사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아직 회개의 기회가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지만,
회개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만큼 너무나도 죄의 즐거움에 깊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지만 실상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모든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꺼지지 않는 불을 유다의 온 땅에 쏟아부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땅의 사람은 물론 짐승과 나무와 나무의 모든 열매까지
모두 다 사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 묵상 : 하나님의 기다림에도 그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기다리기에 능하신 분이시지만,
한없이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도 이처럼 중보의 기도를 중단시키시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1) 참된 예배 개혁이란?
참된 예배의 개혁은 예배의 순서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을 어떻게 부르고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도,
예배의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는 문제도 아닙니다.
참된 예배 개혁은 그들의 삶의 변화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동시에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삶을 변화시키며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면
아무리 멋진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한낱 강도의 굴혈 밖에 안 됩니다.
2)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되려면
최근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면
많은 경우에 성도들끼리의 대화 때문에 상처를 입고 신앙을 떠났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이 너무 쉽게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좋으신 분인 줄을 알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싫어서
다시는 교회 나가지 않겠다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 묵상 : 참된 예배 개혁은 예배와 삶이 함께 변화되는 개혁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려면
예배 그 자체보다 예배 밖에서의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성도 간의 대화, 집에서 가족들과의 생활, 이웃들과의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뜨겁고 활기찬 예배를 위한 노력과 함께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함께 되어야만 합니다.
* 기도제목
1.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과도 사랑하게 하옵소서.
2.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예배를 드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3. 중보기도 : 가까운 이웃 중에서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