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원 - 십자가를 내가 지고 - 8. 십자가를 내가 지고
1 우리 부부는 서로 이해하고 돕고 살아왔다. 나는 남편을 이해하고 도왔으며 남편은 나를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1962년, 첫 아기를 낳아 36시간 만에 잃는 인생의 쓴잔을 맛보았다.
2 나는 부유한 집의 장녀로 태어났지만 결혼 후 너무 고생이 심하였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첫 아기(진영)를 임신하고 축복가정 임지에 나가 전도 활동을 할 때 먹을 것이 없어(전남 여수 개척 당시) 산에 올라가 쑥을 뜯어다가 먹었다. 또 전도 나가다가 길에서 빈혈로 쓰러졌던 일도 있었다. 또 아기를 해산하고 임지에 나갔다 오니 있을 곳이 없어 창고 같은 곳에서 몸을 의지하기도 하였다.
3 그러나 선생님께서 핍박과 환란을 당하시면서도 복귀의 길을 걸어오신 것을 생각하며 온갖 어려움도 참아냈다. 기필코 뜻을 이루어드리겠다는 신념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진영이를 등에 업고 전도 다니며 성지에 가서 정성 들이고 다닐 때였다. 진영이가 영양실조에 걸려 잔병이 그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순천 보건소에 가서 소장에게 보이니 이렇게 잘생긴 아기가 영양실조에 걸리다니 불쌍하다고 하며 비타민을 많이 주었다.
4 1966년, 전국적으로 식구 4배가 운동을 하는 때였다. 서울에 1, 2, 3, 교회가 세워졌는데, 아빠가 제3교회장 임명을 받고 식구를 분배 받아 신설동에 새로 교회를 마련하였다. 교회장 부인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도를 하고 심방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활동하였다. 폐품 수집을 하여 전도 비용으로 쓸 때에도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였다.
5 어느 날, 정 장로님(정명균씨 부친) 댁을 심방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전신에 식은땀이 나더니, 마침내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다. 마침 동행하는 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교회에 연락을 하였다.
6 나는 교회로 업혀가서 방문을 잠그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버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보지 마시고 아버님의 뜻을 생각하여 이 몸을 온전케 해주시옵소서” 기도의 정성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로 며칠 후부터 차차 회복되었다.
7 교회장인 아빠는 고생이 되어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4배가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였으나 제3교회는 4배가를 달성하였다. 이때 교회에서는 20명이 넘는 식구가 함께 살면서 전도에 힘썼던 것이다.
8 나는 내 생애를 돌아볼 때 고생이란 잘 몰랐던 내가 어떻게 그런 고생의 길을 굳세게 걸어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생님과 원리의 힘이라고 믿는다.
9 생활을 담당한 나는 외판원, 보험사원, 보따리 장사, 통화당 안내원, 양장점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어느 때는 너무 과로하여 소파에 쓰러졌는데 왼쪽 뺨 땀구멍에서 분수와 같이 물이 쭉 뻗어 나왔다. 그래서 피부과에 달려가 보니 너무 과로하여 나타난 현상이며 머리로 올라갔다면 죽었을 것인데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하였다.
10 나는 해산 후에도 단 며칠도 산후조리할 시간이 없었다. 사업을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기를 해산할 적마다 5, 6kg씩 체중이 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이 과로에서 온 것이었다. 가정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으나 장사 밑천이 한 푼도 없었던 나에게는 모든 돈을 3부 이자로 차용하여 장사를 시작하였다. 생활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이자의 날짜와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11 드디어 1970년 12월 1일, 축복가정 부인들이 3년 전도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진영이가 6세, 의숙이 4세, 진천 2세, 승숙이 1세 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또 양장점을 정리하고 임지로 떠났다.
12 아빠가 임지까지 데려다주었었다. 임지는 충북 보은군이었으며 나는 제14조 조장으로 12명의 대원과 함께 전도에 전념했다. 며칠 후 아빠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당신이 용감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결단을 내릴 줄은 미처 몰랐다”라고 쓰여 있었다.
13 나는 사회의 반대, 학교로부터의 퇴학, 모든 이들의 비난도 물리치고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그 힘은 선생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저렇게 고생하시는데 나도 미력하나마 선생님을 위해서 어떠한 고생도 참고 견디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29년간의 신앙생활을 생각할 때 내 나이 49세가 된 지금 오로지 감사와 감격할 따름이다.
14 그 후 나는 1년간 전도 활동을 하다가 1971년 12월 1일부로 전국 순회사의 발령을 받고 만 3년간 순회사로 일하였다. 그리고 국제여성승공연합 사무처장으로 시무하다가 1981년부터 협회 가정부장직을 맡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