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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사에서 또 20여 분 이동해 김종서 장군 묘에 들렀다
대학시절인가 한번 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혀 새로운 공간의 장소였다
이 곳은 장군면 대교리 산에 있는 조선초기의 장수 김종서 장군의 묘소로서 이전까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김종서 장군묘로 알려졌으나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출범으로 충남 공주시에서 세종시로 편입되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년) 장군은 세종 대 육진개척의 공로자이자 단종 대의 충신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月谷)에서 출생하였다. 그런 연고로 이곳에 묘가 조성된 것 같다
이 곳은 조선왕조 단종 때 수양대군(세조)의 지시로 아들들과 함께 피살되었던 조선의 장수 김종서 장군의 시신을 안장한 묘소로 김종서 장군이 아들들과 함께 수양대군의 부하에 의해 자택에서 피살되면서 역적의 묘소로 낙인되어 지금의 자리에 안장되었다가 영조 때 복위되어 장군묘로 승격된 것으로 안내되어 있다.
지금도 이렇게 세종시로 이전되면서 장군묘 주변을 성역화 및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
세종의 업적 중 자주 거론되는 북방 개척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4군(여연·자성·무창·우예)을 개척한 최윤덕(崔潤德)과 6진(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개척한 김종서(金宗瑞)이다.
특히 김종서는 문관 출신 장수로서 변경에서 세운 공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해 세종, 문종, 단종에 이르는 세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뜬 문종의 유지를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단종을 보필하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희생되었다.
김종서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1383년(우왕 9) 도총제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대범하고 호탕한 기질은 무신이었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
묘역에는 입구 주변에 관리사, 신도비, 홍살문 등이 있고, 묘소로 가는 길에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의 명정 현판을 모신 정려각이 있다.
묘역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싸였으며 한때 역적의 묘소라는 이유로 묘비가 없었다가 영조 때 복위지위에 따라 묘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1963년에 신비(新碑)가 추가로 세워졌다.
1977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12년 충남 공주시 장기면이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폐지되고 충청남도에서 분리독립하면서 충남도 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가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시 문화재로 재지정하였다. 이에 현재는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2호다.
현 세종시 장군면은 김종서 장군에게서 유래된 지명이다.
김종서는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상서원 직장, 행대감찰을 거쳐, 1419년(세종 1) 사간원 우정언이 되었다. 1426년(세종 8) 이조 정랑에 오른 데 이어 사헌부 집의, 황해도 경차관, 좌대언 등을 지냈다.
1433년(세종 15)에는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435년(세종 17)에 함길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어 북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6진을 개척해 조선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김종서의 활동을 세종은 적극 지원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두만강, 압록강 유역에는 여진족이 자주 출몰해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에 세종은 야인(野人)의 본거지를 토벌하고자 했다.
먼저 1433년(세종 15)에 우의정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 절제사로 삼아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정벌하고,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4군을 차례로 설치해 조선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 무렵 김종서는 좌대언으로서 왕명을 출납했다. 세종은 병중에 복잡한 사연을 환관들이 모두 전하기 힘들다며 김종서에게 밤낮으로 공소(公所)에 있으면서 자신의 말을 전하라고 했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 전 김종서에게 그의 사람됨을 물었다. 김종서는 최윤덕에 대해 “비록 학문 실력은 없으나 마음가짐이 정직하고 또한 뚜렷한 잘못이 없으며, 용무(用武)의 재략(才略)은 특이합니다.”라고 했고, 세종은 “전조(前朝)와 국초(國初)에 간혹 무신으로서 정승을 삼은 이가 있으나, 어찌 그 모두가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 그는 수상(首相)이 되더라도 또한 좋을 것이다.”라고 말해 무관 출신이라도 얼마든지 재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김종서를 신임하던 세종은 어느 날 김종서에게 활과 화살을 내려 주며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쏘라.”고 했다. 문관인 김종서에게 병무에 관한 일을 맡기겠다는 암시였다.
김종서는 1433년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두만강 유역을 수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김종서는 동북면 지역의 야인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1435년(세종 17)부터는 함길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어 새로 개척된 지역에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조선의 영토로 정착시키고, 북방 방위를 위한 비변책(備邊策)을 지어 올렸다. 김종서는 무려 7년간 함길도에 머물며 변방을 호령했다.
세종은 동북면 일대의 방위를 중하게 여겨 다른 사람이 아닌 김종서가 반드시 그 자리를 지켜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김종서가 자신의 임무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특별히 명을 내려 그의 모친을 극진히 보살피도록 했고, 모친이 병들었을 때는 수시로 김종서가 어머니를 보고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의 모친은 “너는 빨리 네 직책으로 돌아가라. 네가 능히 성상께 충성을 다한다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다.”며 한사코 아들을 돌려보냈다. 1436년(세종 18) 모친상을 당한 김종서는 세종에게 상소를 올려 어머니의 곁에서 상제(喪制)를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북방의 경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은 김종서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으나 그의 아버지 김추는 무인이었다. 김종서는 키가 5척 정도로 작은 편이었지만 타고난 기질이 대범하고 호탕해 대호(大虎)라고 불렸다고 한다. 거기에다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무예에 못지않은 지략까지 갖추니, 군사를 이끌고 국방을 담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계유정난에 희생되는 바람에 세조와 정난공신들에 의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문무를 겸비한 장군으로서의 그의 위상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까지 높았다.
장군묘에서 옆으로 오면 후손들의 제단이 있다
1440년(세종 22), 김종서는 형조 판서를 제수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변방에서 야인을 토벌하고 6진을 개척하며 보낸 7년여의 세월을 뒤로하고 드디어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비록 변방이기는 하나 그곳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왕의 신임까지 받던 김종서는 조정의 권신들에게는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 사헌부가 그를 탄핵하려 했다. 탄핵 사유는 김종서가 변방에서 기생을 데리고 다니고, 뇌물을 받고,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워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모함일 가능성이 높아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김종서는 상소를 올려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며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고, 전후 사정을 들은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종서를 모함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박호문(朴好問)이었다. 원래 박호문은 김종서의 추천으로 회령 절제사가 되어 야인 토벌에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회령에서 돌아왔을 때 세종이 북변의 일을 물으니 그는 “종서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장수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잘하지 못해 한갓 야인들에게 병사의 위엄만을 보일 뿐이오니, 어찌 능히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속(服屬)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김종서를 깎아내렸다.
그러나 세종은 박호문을 경박한 인물이라 평하고 “종서의 공이 매우 크므로 소인들이 능히 이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새로 이주시킨 인민들을 4진에 안집(安集)시켜야 할 때인데 종서를 체대(遞代)시킬 수는 없다.”며 김종서를 옹호했다. 그러면서 “4진은 이미 안정되었고 그 공은 이미 이루어졌으며, 외방으로 나가서 진무(鎭撫)한 지 7, 8년이나 되는데 가사(家事)를 돌보지 못한 것도 역시 가련하다. 장수를 선택해 도절제사가 될 만한 자로 부장을 삼되 종서로 하여금 친임(親任)하게 하고 매사를 같이 의논하게 해 변방을 방비하는 일을 익혀서 알게 하면, 그로 하여금 종서를 대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그를 중앙으로 불러올렸다.
이때부터 김종서는 중앙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북방에서 호랑이와 같은 장군의 기개를 떨쳤던 김종서는 중앙에 올라와 주요 관직을 맡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일이 역사서 편찬을 주도한 것이다.
1449년(세종 31년) 세종은 우찬성 김종서, 이조 판서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건국 초기에 집필된 《고려사(高麗史)》가 자못 소략(疎略)하니 다시 제대로 갖춰 쓰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1452년(문종 2) 2월에 기전체로 기술된 《고려사》를 편년체로 재편집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편찬되었다. 이번 작업 역시 김종서와 정인지가 주축이 되어 진행했다.
그러나 계유정난 이후 《고려사》의 서문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었고, 그가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널리 반포하도록 한 것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로 매도되었다.
《고려전사》란 1452년에 기전체로 완성된 《고려사》를 의미한다. 《고려사》는 김종서가 죽고 난 1454년(단종 2)에야 비로소 간행되었다.
이곳은 순천김씨 공주입향조 김종서 장군 조부모인 김태영의 묘이다
그 아래 상석만 있는 묘는 김종서 부친 김추(수)의 묘이다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 세종으로부터 서무 결재권을 넘겨받아 정사를 돌봤던 문종은 1450년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당시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문종은 의정부의 삼정승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서는 우의정으로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南智)와 함께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문종이 2년 3개월의 짧은 재위를 끝으로 죽자, 아들 단종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정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은 후로 새로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수렴청정을 할 대비가 없었다. 따라서 정무 처리 권한은 자연스럽게 고명대신인 황보인, 남지, 김종서에게 넘어갔다.
김종서는 황보인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강력한 통치권을 발휘했는데, 언관(言官)들의 직언조차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세조에 의해 편찬된 실록의 기록이라 김종서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지만, 그래도 당시 그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김종서를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황표정사를 했다고 해서 왕의 권한까지 독점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야심가인 수양대군으로부터 어린 왕을 지키는 보호막이 되고자 했다. 그럼에도 황표정사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세종의 삼남인 안평대군이 이들의 황표정사에 가담함으로써 힘없는 왕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의 연합 세력과 수양대군 일파의 대결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대권을 꿈꾸던 수양대군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역시 김종서였다. 《단종실록》에 의하면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역심을 품고 있음을 눈치채고 매일 해가 저물면 갑옷을 입고 동산에 오르내리며 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김종서는 결국 수양대군의 손에 죽었다.
세종이 세손(단종)을 위탁하려 하는데 황희는 이미 아흔 살의 고령이라 김종서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황희는 이때를 내다보고 김종서를 길렀으나 인사권을 마음대로 하고 전횡하다가 계유정난에 희생된 것이다.
한때 북방의 호랑이로 용맹을 떨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후로는 역사 편찬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재상이 된 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신권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김종서. 그의 말로는 이처럼 허망했다. 그는 사후에 영조 대에 이르러 신원될 때까지 역적으로 기록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대범한 기개와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이룩했던 김종서의 여러 가지 업적들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변칙과 배신을 밥먹듯 하여 승자가 되고 그에 따라 역사마저도 죽은 자가 아닌 승자 그들의 편의대로 서술하여 승자의 역사라 칭하는 오늘날이지만 정의와 하늘은 살아있다는 오묘한 진리가 계속되길 바라며 장군묘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