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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5
고린도후서 13장 13절 [2장 3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은 하나님과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먼저 다루는데, 1항에 이어 지난 시간에 살핀 2항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 영광, 선함, 복됨을 지니시며, 자신 안에서 자신에게 홀로 모든 것에 대한 충족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생명과 영광과 선함과 복됨을 위해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이 필요로 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로부터는 어떤 생명도, 어떤 영광도, 어떤 선함도, 어떤 복됨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만 모든 영광이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안에서,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에게, 피조물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의 샘이며, 그로부터, 그를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피조물을 위해, 피조물들 위에 행하시기 위해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가장 주권적인 통치권도 지니십니다. 그의 시각 안에 모든 것들이 드러나서 나타나지며, 그의 지식은 무한하며, 무오하며, 결코 피조물들을 의존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에겐 우연이나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모든 의논들, 그의 모든 사역들, 그의 모든 명령들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사람들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경배나 예배나 순종이나 그가 그들에게 요구하길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드려야 함이 마땅합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이제 3항에서는 한 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며,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고 할 때 그 관계가 어떠한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신성의 통일성 안에서 한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으로부터 세 위격들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Geneva, KJV]요일5:7, 마3:16-17, 28:19, [한글]고후13:13). 성부는 누구[즉, 성자나 성령]로부터도 존재하지 않고 발생하거나 발출하지 않으십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습니다(요1:14,18).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십니다(요15:26, 갈4:6).
보통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 없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역사 안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 용어가 성경을 통해 알려주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고도 간단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용어가 성경의 내용과 맞지 않다면 교회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의 내용을 더욱 드러내기 때문에 교회는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삼위일체와 관련해 중요한 몇몇 구절이 있는데, 정리해 두어야 할 부분이 두 군데 있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 7절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누락되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요한일서 5장 7절이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인용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로부터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라 이 셋은 하나이니라”(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그리고 이어지는 8절의 경우 우리말 성경은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은 하나이니라”(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삼위일체와 관련해 오늘 본문으로 읽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도 중요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런데 신앙고백서는 이 인용 구절이 14절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 11절이 11절과 12절로, 우리말 성경 12절이 13절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기준으로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축복 기도할 때 주로 사용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각 위격이 자신의 경륜적 은택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고린도 교회 모든 성도에게 나눠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인데, 전체 성경을 따라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용어를 조금 설명하자면 한분 하나님에 대하여 ‘일체’라고 말하는데, 헬라어로는 ‘οὐσία’[우시아]입니다. 라틴어로는 ‘essentia’[에센티아], 혹은 ‘substantia’[숩스탄티아]입니다. 본질, 혹은 실체로 번역이 됩니다. ‘삼위’에서 ‘위’라는 말은 헬라어로 ‘ὑπόστασις’[휘포스타시스]입니다. 라틴어로는 헬라어 발음 그대로 ‘hypostasis’[휘포스타시스], 혹은 ‘persona’[페르소나]입니다. 위격이라고도 번역하기도 하고, 인격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한 본질, 혹은 한 실체에 구별되는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신성의 통일성 안에서 한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으로부터 세 위격들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신성의 통일성 안에 한 본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분명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몇몇 구절을 통해 확인해 보자면,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유일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다른 신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4장 3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열왕기상 8장 6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사야 44장 6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5장 21절에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이어지는 5절에서는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이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불리는 자가 있다, 사람이 그런 대상으로 만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은 하나님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계시다고 가르치는데, 신성의 통일성 안에서 한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으로부터 세 위격들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앞서 요한일서 5장 7절, 그리고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언급했지만 하나님은 삼위로 계십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는 구절은 이것 외에도 마태복음 28장 19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 하나님이 계시며,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또 한 구절이 있는데,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고,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그리스도에게 임하시는데,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들리더란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삼위일체와 관련된 이단 중에 양태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벨리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이 어떠한 구별을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에 따라 많은 이름들이 주어진 것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벨리우스는 삼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단일신론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양태론으로 설명하는 일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은 자신을 다른 시대에 다른 양식으로 계시하신다고 하면서 창조 때는 성부로, 율법을 주실 때는 성자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한다면 사벨리우스주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혹은 한 하나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과 같은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벨리우스주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종종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보게 되는데, ‘나’라는 한 사람에 대하여 여러분에게는 목사로, 아내에게는 남편으로, 아이들에게는 아빠로 불린다는 설명한다면 이것도 양태론입니다.
그러나 방금 읽은 마태복음 3장은 하나님이 양태론으로 계시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들리면서,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에 성부는 성자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성부는 성령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성자는 성령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가르칩니다.
신앙고백서에 보면 ‘한 본질’이라는 말이 있는데, 위격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한 본질이라는 것은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과 성령의 본질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권능과 영원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의 권능, 성자의 권능, 성령의 권능이 같습니다. 또한 성부의 영원성, 성자의 영원성, 성령의 영원성이 같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다른 모든 속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가 불변하시다면 한 본질이신 성자도 불변하시고 성령도 불변하십니다. 성부가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시라면, 동일본질로 계신 성자 역시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시며, 또한 동일본질로 계신 성령 역시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그러므로 한 본질이란 동일 본질을 의미합니다. 결코 유사본질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교회 역사 안에 한 본질, 다시 말해 동일 본질임을 반대했던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리우스 이단입니다. 그는 성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창조한 것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존재이며, 창조의 첫 산물로 피조 된 존재요 따라서 영원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그의 신성을 부인한 것입니다. 당연히 아리우스는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할 때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표현 때문인데, 나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 성자만이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도 동일본질임을 거절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케도니우스주의가 그러합니다. 이들은 성령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에게 부어진 은혜의 선물들로 이해하기를 원했습니다. 창조되지 않는 선물이 아니라, 창조된 선물로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하나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존재만이 아니라 그의 일하심에서도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본래는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했지만, 그런 분이 때가 되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가서 이사야 9장 6절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성경은 성자만이 아니라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사도행전 5장 3절과 4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3절에서는 성령을 속였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4절에서 거짓말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즉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어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합니다(고전3:16-17, 고후6:16). 그런데 어떤 때는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고전6:19). 하나님의 성전은 곧 성령의 전과 같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7절에서 9절도 보시면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여기서 인용하는 구절은 시편 95편 7절 이하의 말씀인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고 있다면, 히브리서 3장은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자에 대하여 피조 되었다고 말했던 아리우스나 성령에 대하여 선물 혹은 피조물이라고 말했던 마케도니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가 되었습니다. 아리우스의 경우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정죄가 되었는데, 이때 고백된 것이 니케아 신경입니다. 또한 마케도니우스주의의 경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와 함께 정죄가 되었는데, 이때 고백된 것이 니케아 신경을 좀 더 보완한 콘스탄티노플 신경 혹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입니다.
그럼 신성의 통일성 안에서 한 본질로부터 세 위격이 있다고 할 때 세 위격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라면, 그러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부는 누구로부터도 존재하지 않고 발생하거나 발출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고백합니다. 또한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다는 것으로 고백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것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위격의 고유성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보면 그 구조가 본질 혹은 실체에 따라 하는 말과 자체 상호 관계를 따라서 하는 말,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를 따라 하는 말로 구분합니다. 본질 혹은 실체에 따라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하는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신의 속성으로 알리실 때 분리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알리실 때 그것은 실체를 따라 하는 말이지 어떤 관계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체를 따라 하는 말은 삼위 하나님께 공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표현들인데, 성부만 스스로 있는 분이 아니라 성자도, 성령도 그러한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성부도 스스로 계시고, 성자도 스스로 계시고, 성령도 스스로 계시기 때문에 세 스스로 계신 분이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스스로 계십니다.
본질 혹은 실체에 따라 하는 말이 이런 내용이라면 자체 상호 관계를 따라 하는 말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성부는 성자가 아니라는 것, 성부는 성령이 아니라는 것,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성부는 오직 성부라는 것, 성자는 오직 성자라는 것, 성령은 오직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성육신과 관련된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은 결코 같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오직 성자만이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임한 것이나, 오순절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한 것도 같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오직 성령만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나 변화산에서 그의 몸이 변형되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결코 같은 삼위일체가 아닙니다. 성자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는 오직 성부가 성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위격 상호 간의 어떤 관계를 나타내면서 표현하는 구절들은 성부는 성자가 아닌 것으로, 성부는 성령이 아닌 것으로, 성자는 성령이 아닌 것으로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다시 신앙고백서의 내용으로 오면, 성부는 누구로부터도 존재하지 않고 발생하거나 발출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데,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말할 때 성부에 대해서는 발생했다, 발출한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성자에 대해서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다고 고백하는데,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시면 독생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말은 아버지인 성부로부터 유일하게 나신 분이라는 것인데, 아리우스의 경우는 나셨다는 것 때문에 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고 말함으로 성자의 신성을 부인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지 실체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실체를 따라서는 성부에게 돌아가는 모든 속성이 성자에게도 돌아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1항에서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다고 할 때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그러한 분으로 계신다는 겁니다. 그는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가장 순수한 영이시라고 할 때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그러한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하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씀합니다. 아들인 성자는 성부로부터 발생하셨는데,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던 그런 발생이 아니라 영원히 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도 보시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즉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는 아들이 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본래부터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는가? 성령에 대해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는데, 성령에 대해서는 낳았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령의 관계는 낳는다는 이런 표현이 아니라,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26절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버지이신 성부로부터 성령이 나오시는 겁니다. 정요석 교수의 글을 참고하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성령께서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직접적인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5장 26절이라고 하면서 성령께서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직접적인 구절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있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구절은 근거구절로 제시하는데, 이때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로마서 8장 9절에서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같이 쓰고 있는데,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는 것을 알리는 본문들입니다. 이때도 영원히 발출하신다고 하는 것은 발출하지 않을 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서 제2장 1항에서 언급한 속성들은 성령에게도 다 돌아갈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즉 성부가 불변하신 것처럼 성자도 불변하시고 성령도 불변하십니다. 성부가 광대하신 것처럼 성자도 광대하시고 성령도 광대하십니다. 성부가 영원하신 것처럼 성자도 영원하시고 성령도 영원하십니다. 성부가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것처럼 성자도 그러하고 성령도 그러합니다. 1항만이 아니라 서두에 요약한 2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상호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발생하셨다, 발출하신다로 표현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령의 발출과 관련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나눠지는 역사가 있었는데, 325년 니케아 신경이 고백되고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고백될 때 니케아 신경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만 한다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좀 더 보완이 되어 생명의 주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내용으로 연결이 되는데, 동방교회는 성령이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오시는 것을 고백합니다. 여기에 대해 나중에 서방교회가 성령은 성자로부터도 나오신다는 것을 삽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라틴어로 ‘filioque’[필리오케]입니다. ‘필리오’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케’는 ‘...도’라는 뜻으로 ‘아들로부터도’ 나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 구절이 처음 삽입할 때가 589년 톨레도 시노드에서인데, 교황 베네딕토 8세는 1013년에 이 구절이 삽입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최종 승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결국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리가 되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앞서 언급한 성경 구절에 따라 성령이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오신다는 것을 고백하는데, 이런 위격 상호 관계 때문에 어거스틴은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첫째, 둘째, 셋째라는 ‘서수’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부는 제1위격, 성자는 제2위격, 성령은 제3위격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성부는 전 신성의 근원이시고, 성자의 근원은 성부이시며, 성령의 근원은 성부와 성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 성령의 근원은 두 근원이 아니라 한 근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 둘째, 셋째라는 말 때문에, 제1위격, 제2위격, 제3위격이라는 말 때문에 우등, 열등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구별되신다는 의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지, 본질 혹은 실체로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등하십니다. 권능에 있어서도, 영원하심에 있어서도, 여기서 표현하지 않는 다른 속성 모두에 있어서도 동등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외적 사역들에 있어서도 위격들에 따라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신앙고백서 2장 1항 중간에서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한 실체 아래에서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외적 사역에 있어서 그 실체의 통일성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삼위일체의 어느 한 위격만을 언급할지라도 다른 위격들도 거기 함께 계신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에 따라 달리 일하시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3절 이하 14절이 그 내용인데, 다 읽지는 않겠지만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면서 4절에서 6절은 성부와 관련해서, 7절에서 12절은 성자와 관련해서, 13절과 14절은 성령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부의 계획, 성자의 구원, 성령의 적용으로 정리를 합니다. 그러나 성부는 계획만 하시는가? 구원과 적용에 있어서는 전혀 일하시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자의 구원도, 성령의 적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육신과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은 오직 성자께서 하셨지만, 그 모든 일을 통한 구원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3장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자는 은혜만을, 성부는 사랑만을, 성령은 교통만을 담당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구별하여 말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시고, 분리되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일하심 역시 분리되지 않은 채 일하십니다.
이제 정리를 하겠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소요리문답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다나시우스 신조로 알려진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다나시우스 신조로 알려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다나시우스의 경우 동방 교부인데, 신조의 내용을 보면 성령이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어쨌든 그 신조에 보면 삼위일체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잘 표현되고 있는데, 삼위일체와 관련해서만 몇 부분을 보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1항에서 11항입니다. 1.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모든 것에 앞서 정통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2.이 신앙을 온전하고 순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한 사람 예외 없이 영원한 멸망을 받고야 맙니다. 3.그 정통신앙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하니 삼위일체이시고 일체로서 삼위이시며 4.위격의 혼합이나 본체의 분리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5.왜냐하면 아버지의 한 위격과 아들의 다른 위격과 성령의 또 다른 위격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6.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다 한 하나님이시며 그 영광도 동일하고 그 위엄도 동일하게 영원하십니다. 7.성부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성자가 존재하며 그런 식으로 성령이 존재하십니다. 8.성부가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자가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령이 창조되지 않으셨습니다. 9.성부가 무한하시고, 성자가 무한하시고, 성령이 무한하십니다. 10.성부가 영원하시고, 성자가 영원하시고, 성령이 영원하십니다. 11.그러나 세 영원한 분들이 아니고, 한 영원한 분이십니다.
21항에서 26항입니다. 21.성부는 무에서부터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22.성자는 성부에게서만 왔으나,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나시었습니다. 23.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왔으나,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나신 것이 아니라, 나오셨습니다. 24.그러므로 한 성부이고 세 성부가 아니시며, 한 성자이고 세 성자가 아니시며, 한 성령이고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25.또 이 삼위 안에는 다른 위보다 앞서거나 뒤서는 위가 없으시고, 다른 위보다 크거나 작은 위가 없으십니다. 26.오히려 세 위가 모두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등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믿는다고 고백은 하는데,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계시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의 믿음이 정당한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경우는 맨 마지막 항목에서 44.이것이 정통신앙(Catholic Faith)이므로, 이를 신실하게(참되고 분명하게)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고백까지 하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좀 더 분명한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