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단의 정책은 세상의 방식과 크게 달랐다. 1926년 범교단적으로 교단총부에서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학교교육을 기독교 성도들이 받는 것은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각 교회에 교육중지령을 내렸다. 그 내용 중에 주요 임원(목사와 감로)들을 위시하여 직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시행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회들은 당황했으며, 이에 대해 찬반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우리 교단의 체제상으로 보아 이에 불응하면 모종의 징계를 받게 된다는 것은 명확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에 순응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끝까지 불응하다가 그 부모가 징계를 받았으며, 일부는 현실을 외면하는 가혹한 처사라 하여 불만을 토로(吐露)하고 아예 교단을 떠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으며, 그 중에도 젊은이들 가운데 불만과 원성이 높았다. 이 일로 인해 동아기독교회는 십 수 년 동안 인재양성이 정지되어 손실이 많았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리라 본다. 물론 이 일을 주도한 분은 펜윅 선교사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 군력을 투입시켜 식민지(植民地)정책을 펴왔으며, 안으로는 일본식 학교교육을 실시하여 국민들에게 세뇌를 시켜 황민화(皇民化) 하였다. 이 사실을 예의주시한 펜윅 선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성경에 위배되는 자연과학 교육으로 천지만물은 우연히 조성되었고,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된 것이라는 다윈의 진화론을 배우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침략국가이며 무신론자들에 의해 세워진 일제식 학교교육에 기독의 어린이들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해 내린 처사였다. 심지어 펜윅 선교사는 두 눈으로 지옥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천국 가는 것이 옳다고까지 말했다 한다.
일제의 학교교육은 일본 우상을 숭배하게 했다. 신사참배를 한국 교회들이 대부분 수용한 것은 어쩌면 그런 일제 교육을 받아들인 것과도 상관이 있었을까? 그리고 보면 펜윅 선교사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던 지도자였다. 동아기독교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로 교단이 폐쇄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총부의 지시에 순종했던 이들을 지켜보면,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그 후손들이 자자손손 신앙을 지키며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교단의 정책에 따라 계속해서 한학(漢學)을 배우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비록 세상 학문이라 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낙오하게 되므로 상급학교에 진학하도록 종용하셨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44년 소학교를 졸업한 뒤, 외숙이 있는 평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