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우리가 한낱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해 삼종지의에 간섭할 바 아니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자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2천만 동포들이 3개월간 담배를 피우지 않고 대전을 모집한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케 할 것이오, 전정에 아름다움이라. …(중략)…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하해가 가는 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로 적으므로 큰 것을 도우나니 ㉠뜻있는 부인 동포들은 다소를 불문하고 혈심으로 의연하와 국채를 청산케 하시면 천만다행이겠음. -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8일-
(나) 오인의 운명을 여하히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차등사(此等事)가 모두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기 불능하도다. 하고(何故)오 하면 알고야 동(動)할 것이오, 알고야 일할 것이며 안 이후에야 정치나 외교도 가히 써 발달케 할 것이다. 알지 못하고 어찌 사업의 작위와 성공을 기대하리요. …(중략)… 그런데 교육에도 계단과 종류가 유(有)하야 민중의 보편적인 지식인 차(此)를 보통교육으로써 능히 수여할 수 있으나 심원한 지식과 온오한 학리는 차를 고등교육에 기(期)치 아니하면 불가할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유위(有能有爲)의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중략)… 그러므로 오제(吾儕)는 자(玆)에 감(感)한바 유하야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 ㉢ )의 설립을 제창하노니 자매형제로 내찬(來贊)하여 진(進)하여 성(成)하라. - 「( ㉢ ) 기성회 발기 취지서」 - |
<작성 방법> ◦밑줄 친 ㉠의 대표적인 방법을 1가지 서술할 것. ◦밑줄 친 ㉡의 간부로서 자료 (가)의 운동 참여로 인해 구속되었던 인물의 이름을 쓸 것. ◦괄호 안 ㉢의 설립 운동을 주도했으며 신간회 회장이었던 인물의 이름을 쓰고, 사회주의자들이 괄호 안 ㉢의 설립을 반대한 이유를 서술할 것. |
해설 :
∙ ㉠여성들이 가락지 등의 패물을 팔아서 국채를 갚으려 한 활동
∙ ㉡양기탁
∙ ㉢민립대학설립운동 회장 : 이상재
∙ ㉢에 대한 사회주의 입장 : 강습소와 야학 등 대중교육기관의 설립이 더 시급
[세모 한국사 p.572] 양기탁
6) 국채 보상 운동(1907)
① 일제의 차관 제공 등에 의한 경제 예속화
② 대구(서상돈, 김광제) ⇨ 서울(국채 보상 기성회)
③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지원
④ 금연 운동, 여성들의 적극적 참여(비녀, 가락지 등)
⑤ 일본 탄압: 베델 추방 공작,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 횡령으로 구속
[교재 p.664] 신간회 회장, 이상재
(4) 신간회(1927)
1) 배경
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분열, 자치론의 등장(이광수, 최린)
② 치안유지법(1925)
2) 전개
①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1926), 3부통합운동 추진(만주)
② 6·10 만세운동, 조선민흥회, 정우회선언
3) 성립
① 결성: 1927. 2. 15 비타협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 연합
② 주도: 이상재(회장), 홍명희(부회장), 안재홍, 권동진, 김준연, 허헌
[한국사 비상 p.144]
국채 보상 운동 일본은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에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 정리, 정부 부채 정리, 수리 토목 공사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차관을 도입하도록 강요하였다. 차관은 일본이 한국에서 경찰 기구를 확장하거나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시설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 결과 대한 제국은 1년 예산과 비슷한 규모에 해당하는 1,300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차관 도입으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이 심해지자,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에 진 빚을 갚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어 1907년 김광제, 서상돈 등의 제의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국민이 성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전 국민적인 모금 운동으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성에서는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고 전국에 약 20여 개의 국채 보상 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농민, 상인, 학생, 지식인뿐만 아니라 부녀자, 승려,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음주를 절제하였으며, 여자들은 생활비를 절약하고 비녀와 반지 등을 팔아 성금을 냈다. 일본 유학생과 국외 동포들도 성금을 보내왔고, 고종 황제와 정부 대신들도 금연을 하면서 동참하였다. 그 결과 약 19만 원의 성금을 모았다.
그러나 일제는 이 운동을 주도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성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탄압을 가하였다. 이후 국채 보상 운동은 중단되었고, 모금된 돈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기금으로 전달되었다.
[한국사 해냄 p.191]
이상재(1850~1927)
독립협회 활동 당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신간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었는데, 사회장에 1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시민의 한국사 p.220∼221]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대한 사회주의 입장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계속되는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 더해 1923년부터 전국적으로 가뭄과 수해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원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강습소와 야학 등 대중교육기관의 설립이 더 시급하다며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는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상화 속에서 지방 유력자들의 참여도 저조해 모금운동이 어려워지자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중단됐다. 총독부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견제하는 한편,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