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가르며 달려 도착한 삼천포항
삼천포시는 1995년 사천시와 통합되면서 사천시로 불리지만 삼천포라는 이름이 정감이 깊다
깊은 정감을 느끼는 이유로...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표현이 큰 몫을 차지할듯?
‘삼천포로 빠지다’는 표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삼천포 사람들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 유래 또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삼천포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 말에 대하여
얼마 전 이 지역 공무원들이 조사한 바로는 이 표현에 대한 유래설이 예닐곱 가지가 되었다
그중 대표적으로...
옛날 어떤 장사꾼이 장사가 잘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장사가 안 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봤다는 說 과...
진해에 근무하던 해군 병사가 서울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기차로 귀대하고 있었다
진해로 가려면 삼랑진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잘못해서 삼천포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게 되었다
그 병사는 귀대 시간을 훨씬 넘겨 도착하여 기합을 받았다는 등등.....
3월의 삼천포항의 아침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할 정도
음력 2월은 영등철이라 해서 년중 바다 수온이 가장 낮고,바람도 많이 불어 수많은 낚시배들은 선착장에 묶여있고
삼천포항의 주 어종인 멸치잡이 선단들도 때가 아직 멀어서 항구에 깊이 잠들고 있다
멸치잡이는 고깃배들이 멸치 떼를 따라 다니면서 잡는 '유자망' 어업방식과 ‘기선권현망’ 어업방식이 있다
유자망 어업방식은 그물을 수면에서 수직으로 아래로 펼쳐지게 한 다음
펼쳐진 그물을 물의 흐름과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게 하면서 물고기가 그물코에 꽂히거나 둘러싸이게 해서 잡는 방식이다
어획성능이 좋지만 대상물을 남획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 동해에서는 꽁치, 명태, 오징어 등을 남해에서는 멸치, 삼치, 고등어, 전갱이 등을...
서해에서는 참조기, 전갱이 등을 잡는 데 쓰인다
부산 기장군 대변항은 전국 유자망 멸치 어획량의 70%를 담당하고 있으며
이렇게 잡아들인 멸치들은 대개 젓갈용으로 가공된다
"기선권현망" 어업방식은
그물을 끄는 2척의 끌배, 1척의 어탐선, 1척의 가공선, 2~3척의 운반선 등 6척 내외의 선박이 선단을 이룬다
어군탐지기가 장치되어 있는 어탐선이 멸치군을 탐색한 후 작업지시를 내리면
끌배는 어구를 끌어서 멸치를 잡아들인다
잡아들인 멸치는 가공선으로 옮겨져 현장에서 바로 삶은 다음
운반선에 의해 육지로 운반되어 자연건조 내지 열풍건조를 시킨다
주로 경남 통영,삼천포, 거제, 여수 등 남해안에 분포해 있고
우리가 먹는 마른멸치(건멸치)의 대부분이 기선권현망 어업 방식으로 잡아들인 멸치들이다
참!!~~삼천포항 하면 뺄수없는 "삼천포 쥐포"
쥐취과 생선은 머리가 크고 몸이 납작하여 살은 먹잘 것이 없다
머리, 뼈, 내장, 껍질 빼면 살은 적다
쥐치는 남해에 흔한 생선이지만 다루기 어렵고 살도 많지 않으니 먹지 않았다
그물에 걸리면 골치가 아팠다. 머리의 ‘송곳’이 그물에 끼이면 엉키기 때문이었다
쥐치는 떼로 몰려다니는데 큰 무리가 걸리면 그물을 버려야 할 정도여서 어부들은 긴 막대기로 쥐치들을 몰아내는 게 일이였다
이런 골치덩어리 쥐취를....
수산물검사소 출신의 강봉희(작고)라는 분이 일본에서 쥐포를 보고 귀국해
1960년대 말에 이를 가공하여 일본에 수출한 것이 "삼천포 쥐포" 역사의 시작
허나...생선을 조미하여 건조하는 방법은 일제시대부터 있었고
삼천포에는 ‘화어’(花魚)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전하고 있어 쥐포의 역사를 일제시대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다
요즘 여객선을 타려면 마치 공항에서 처럼 신분증을 확인 시킨후 승선하게 된다
바람 한점없는 고요한 바다를 가르며 세종1호는 드디어 사량도를 향해 거친 숨을 몰아쉰다
이런 디지털 쾌속정이 아닌 아날로그 카페리호를 타고 선상에서 바닷 바람을 맞다보면
그 옛날 중학교때 음악선생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돈다
음악선생은 가정 형편상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지 못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었던 모양이다
대학에 진한을 못한 그는 트럼펫을 짊어지고 전국 무전여행을 떠,다녔고
여행중 목포에서 제주가는 카페리호 선상에서 저녁 일몰시간에 갑판에서
황홀한 일몰을 즐기는 여행객들 앞에서 자신의 음악 생활에 최고였다고 자부할수 있는 트럼펫 연주를 시작했다
키 크고 정말 잘 생겼던 젊은 청년의 트렘펫 연주에 선상의 여인들은 마치
1969년10월 세종회관에서 클리프리처드의 공연때 팬티,브레이져를 날리며 열광하던 모습과 비슷했고
이 연주로 인해 나머지 제주도 여행은 그야말로 여이들 속에서 꿈결 같았다고 한다
개인적인 사생활이야 어찌 되었건
그 청년은 특별한 과정을 통하여음악선생이 되었고 당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외형적인 장점을 표현하는데 눈에 띄는 형동을 많이 했었다
일례로...목욕탕에 들어갈때 예나 지금이나 빨가 홀딱 벗고 탕속에 들어가는것이 보통인데
그는 꼬추만 딸랑가리는(꼬추브레이져) 일본식 팬티를 입고 탕속에 떡 버티며 촌넘들 기를 팍 죽였다
그런 그가 서울 숙대를 졸업하고
병아리 교사생활을 시작한 백선생과 좁은 당진읍내를 들었다 놓는 연애를 시끌벅적한 시작한다
쪼끄만 중학생이 어떻게 선생님들 연애사를 그렇게 빤히 쾌 뚫냐고?
이들 연애에 결사적으로 초를 치려 마음먹은 사람이 바로 나의 둘째누나....
둘째누나는 이선생과 나이가 비슷했고 백선생은 우리 집에서 잠시 하숙을 했었다
그래서 둘째 누나는 팔을 걷어 부치고...."그 시끼 하고 연애하면 너는 불행해져!!"
그렇게 얼마후
음악선생은 평화의 봉사단 일원으로 당진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찰스와 의형제를 맺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갈때 백선생에게 잠시 다녀오겠다며 홀연히 찰스를 따라 떠나고 말았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후
둘째누나는 마치 백선생의 친언니가 되는듯 닥달하기 시작했다
"그 새끼는 절대 돌아 오지 않는다!...그러니 정신 차리고 고무신 꺼꾸로 신어라!!"
하지만 백선생은 순애보를 기대하며 그를 기다리고,기다리기를 몇년
젊고 청순했던 백선생도 나이가 들어 가면서 기대했던 순애보의 꿈을 접고 깊은 마음의 상처을 안은채 조용히 당진을 떠났다
백선생이 그렇게 당진을 떠난후
정확한 기역은 아니지만 내가 군입대를 앞두고 있을때 쯤~!@#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더니....
"백선생이 다 늙어 이제는 시집 간단다! 그러니 네가 서울에 올라갔다와!!"하시며 거내 주시던 축의금 봉투
P,S: 일단 시간상 이야기를 쉬겠습니다
집에 최첨단 컴터가 있기는 하지만 아들넘이 공부한다고 거의 24시간 붙들고 있고
좌판도 영문판이여서 한자를 치기도 매우 힘이 듭니다
좋은 주말들 보내시고 담주에 출근해서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좀 짧게 써야 하는데ㅛ....술 취한 사람 주정하듯이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ㅋㅋ
첫댓글 백선생님 그~ 이후가 궁금하네요 직업을 두가지 가지셔도 될거 같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