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지에서 500여미터 내려오면 허한 허적의 묘역 표지판이 있다
허한(許僩, 1574~1642)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의보(毅甫), 호는 행오(杏塢) 또는 향오(香塢)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지중추부사 한천(寒泉) 허잠(許潛)의 셋째 아들이자 허적의 아버지이며, 인현왕후의 할아버지인 민광훈의 처외삼촌이다.
우리 동복오씨와의 인연을 말하자면 허한은 전주공 오시형의 네째아들 오상석의 처조부이시다 그리고 한천 허잠은 연초재 오상렴 공의 처 5대조이시니 실타래 같은 인연의 끈으로 엮여 있다
선대의 세거지는 한성부였으나 조부 생원 허초(許礎)의 대에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에 자리잡아 세거하게 되었다. 보은 현감, 예천군수(醴泉郡守)를 거쳐 이천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허적(許積,1610~1680)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 정치인이다. 남인의 중진으로 남인 온건파의 지도자였으며 탁남의 영수였다. 1637년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판서,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수상)에 이르렀으며,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였다.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를 주체적으로 시행했는데 그 실무는 호조판서였던 우리 동사공 오정위 선조가 하였다.
허적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 아버지는 부사 한(僩)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했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647년 일본의 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9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을 둘러싸고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에 맞서, 허목(許穆)·윤휴(尹鑴) 등과 함께 3년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뒤 호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662년(현종 3)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4년 우의정이 되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68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송시열의 논척(論斥)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이 득세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수립했다.
1674년 세 번째로 영의정에 재직 중에는 현종이 급서하면서 원상으로 정무를 주관했다. 서인 송시열, 김수항 등을 과격하게 비난하는 남인 소장파들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가 서인의 한축인 민광훈 아들 민유중, 민정중과도 인척이고 김육과도 얽혀져 있어 김석주 등의 서인 무리에 대해 넓은 아량으로 본 것이 나중에 화근이 된 것이다
서인 송시열의 사형을 놓고 남인 내에서 여론이 갈라졌을 때 온건론을 폈으며, 강경파인 윤선도, 윤휴, 허목의 주장에 맞서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가 되었다. 윤선도 윤휴는 서인당에 의해 여러차례 고통을 겪었지만 허적은 순탄대로를 밟아 서인들에 대해 큰 감정이 없었던 탓이겠다 그래서 이후 남인 강경파인 미수 허목과 미묘하게 갈등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국혼물실이란 기치 아래 왕실의 외가로 정권을 쥐고 좌지우지했던 서인 정권이 남인에게 정권이 넘어간 이후 가만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1679년 안마와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1680년 3월 할아버지 허잠이 시호를 추증받은 것을 기념하는 잔칫날, 왕실과 예조의 허락 없이 궁궐의 유악(기름천막)을 빌려쓴 것이 화가 되어, 그해 6월 서자 허견의 여러 가지 비행과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묵재 허적은 1610년 충청도 중원군(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천군수, 이천부사를 지낸 허한(許僩)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원주목사 김제(金悌)의 딸이다.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미수 허목과는 12촌간이었다. 허엽,허난설헌, 허균 역시 그의 6대조의 형제의 후손으로 역시 먼 친족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행오 허한은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의 문인이었고,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그도 아버지의 스승인 정구와 장현광을 찾아가 글을 배웠다. 뒤에 동주 이민구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과 시문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집에서 멀리 40리 길 떨어진 소태면 오량동 청계산 청룡사에서 수학하였는데, 청룡사에서 20리 떨어진 신씨 성을 가진 동문보다 빨리 도착했다. 그의 공부 열정과 지성에 탄복한 어떤 이가 사람을 보내 그를 가마에 태워 사찰까지 인도했다 한다.
하루는 신씨 선비가 허적은 매일 신선비보다 빨리 글방에 도착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허적을 보고 훨씬 먼 곳에서 오는데 어찌해서 글방에는 자기보다 월등하게 빨리 도착을 하느냐며 새벽 길을 떠나는 모양인데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음을 의아해했다. 그러자 허적은 내가 강달고개에 이르면 항상 꽃 가마 한 채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태우고 순식간에 묵봉산을 넘어 청계골 앞에 내려다 주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게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라고 답하였다. 신씨 선비가 괴이롭게 생각하고 또 의아하게 생각해서 내일은 자기가 그곳에 가서 꽃가마를 타고 글방에 가겠다고 주장을 하므로 허적은 그렇게 하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신선비가 날이 밝기도 전에 강달고개에 이르니 과연 한 채의 꽃 가마가 있었다. 신씨 선비가 의아스럽게 생각을 하며 그 옆으로 다가서자 난데없이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신씨 선비 앞으로 가마문을 열고 타라고 하며 발을 내리더니 흡사 날아가는 것처럼 달리는데 요동이 잠시 멈추며 그 장정들이 대화하였다. 어쩐지 이상하게도 무게가 그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으니 무슨 일인가 확인을 하고 가자며 발을 걷어 올리고 들여다 보더니 사람이 바뀌었다며 나오라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즉 허적은 장차 이 나라의 영수가 될 인물이므로 천의(天意)에 따라 우리가 글방까지 모셔다 드리는 것인데 당신은 그렇지 못하니 내려야 된다는 것이었다.
신씨 선비는 겁이 나서 잠시 당황하다가 마음을 고쳐잡고 말을 건넸다. 그럼 나는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고 묻자 그 장정들은 신씨 선비의 얼굴을 살피더니 찰방 관직을 할 상이라며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이 빈 가마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과연 허적은 영의정 벼슬까지 올랐지만 신선비는 찰방밖에 못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호랑이를 타고 40리 길을 등하교하며 수학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다. 문장의 표현력도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을 쓰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문예가 날로 발전하여 사람들이 이를 기특하게 여겼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고, 1637년에 초시와 감시에 합격하여 바로 과거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1637년(인조 15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한림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를 수행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 한성부로 돌아와 1638년 5월 예문관 검열(檢閱), 그해 9월 예문관 봉교가 되었다. 그해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12월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이후 예문관 봉교·홍문관수찬, 사헌부 지평, 다시 홍문관 수찬 등을 지내고 1639년 6월 경연검토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사헌부에 있을 때, 뇌물을 받고 인재를 관직에 등용시킨 이경석, 이시백 등의 사형을 주청하여 대신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하였다.
1648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귀인조씨의 시종이 상전의 세력을 믿고 이권을 청탁해왔다. 그러나 허적은 옳지 못한 일이라 책망하여 되돌려보냈으나 시종은 "조귀인의 말을 듣지 않고 벼슬을 지탱할 수 있겠느냐"며 항의하였다. 이에 허적은 순군을 시켜 시종을 묶어놓고 곤장을 쳐서 죽인 뒤 관아 성문밖에 내다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귀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빙자하다가 죽은 것을 알게 되면 화가 미칠 것이라며 입밖에 내지 말도록 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관찰사 재직 당시 조세를 탕감하고 진상공물의 면제를 받아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의주성을 보수하고 변방을 약탈한 여진인들을 엄단하여 청나라로 되돌려보내 변방의 약탈이 다시 없게 했다. 평안도에서 비밀리에 대동법을 시연해본 그는 대동법의 유익함을 파악하고 후일 김육의 대동법에 적극 지지를 보낸다. 1649년말 임기만료를 앞두고 평양부에 그의 생사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생사당이 세워진 인물로는 선조 때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의 생사당,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의 스승 정구의 생사당 등이 있었다.
1680년 서인이 집권한 후 남인 온건파의 영수 허적의 처리를 놓고 사형과 유배로 의견이 나뉘었다. 허적은 남인이 집권한 후에도 서인 영수 송시열, 김수항을 처형하자는 의견에 맞섰으므로 서인의 일부는 허적을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반대하거나 고민하였다.
김수항과 정지화는 허적이 고명대신임을 들어 사형만은 면하게 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후손인 광산 김씨 김만기 등 서인 강경파는 허적의 사형을 주장했다. 그의 사형을 원하던 숙종은 의도적으로 사형 여론이 우세하게끔 몰고 갔다. 서인인 김수항과 정지화는 그를 극구 변호하였으나, 평소 남인 강경파인 윤휴나 허적의 서자 허견 등을 안좋게 본 숙종은 허적을 사사시킨다.
그 무렵 허적이 윤휴 등과 함께 미리 무사들을 비밀리에 모아 역모를 도모한다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하게 퍼졌고 그 근거로 체부 설치론을 들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훗날 허견의 모역 사건은 남인 정권을 견제, 타진하기 위한 외척과 서인들의 정치보복으로 평가된다.
사후 정조 때에 가서 재상을 지낸 인물이라 하여 특별히 불천지위를 얻어 불천지묘(不遷之廟)로 지정되었다. 충청도 중원군 소태면 오량리(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570-3번지 산에 안장되었고,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674번지에는 그의 별묘(別廟)가 세워졌다.
그가 남긴 글과 상소를 모은 저서 《허상국주의 (許相國奏議)》6책 10권은 1689년 남인 정권이 집권한 기사환국으로 허적이 복관된 직후에 그의 문인, 후손들이 정리하였으나 갑술환국으로 관작 추탈 끝내 간행하지 못하다가 1795년 10월 복관되면서 간행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1801년 신유환국으로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면서 1900년대까지도 보급되지 못하였다. 1910년 이후에 가서야 그의 문집을 다시 간행, 보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