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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설리반의 손 헬렌켈러의 꿈 원문보기 글쓴이: 우주인(조영찬)
2022년 6월 26일 하늘언어교회 메시지
여러분 모두들 평안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날씨가 갈수록 더워지고 있네요.
다들 삶이 고단하고 힘든데 날씨까지 가세해서 푹푹 쪄대면 참....
이토록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위안이 될만한 작은 구원이 절실해집니다. 여름철 불볕더위 속에서 찾게 되는 작은 구원은 ‘시원함’이 아닐까요?
시원함을 주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저는 수박과 포도, 산들바람, 냉커피, 아이스크림 등이 떠오르네요.
산바람과 바다의 시원함은 생각만 해도 전신에 전율이 흐릅니다.
거기에 한가지 더! 우리 하늘시민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시원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언어’가 가져다주는 고차원적인 시원함입니다. 언어에는 다른 어떤 체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매력과 마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노래나 춤을 즐기기보다는 주로 언어로 대화를 합니다. 때에 맞고 소통에 적합한 언어는 우리를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언어인 말씀에는 사람의 언어가 가져다주지 못하는 근원적인 시원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고통과 억압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구원, 치유, 하늘나라, 하느님의 사랑 등은 세상이 선사해줄 수 없는 시원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근원적인 하늘언어의 시원함으로 건강하고 활력 있는 여름을 보내시기를 기원하며 이번주의 메시지를 띄웁니다.
이번주에도 강론과 새소식과 일상을 통합한 메시지를 적바림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적바림은 적다의 순우리말 명사형입니다. 언어 표현이 굳어지면 언어의 다양한 맛들을 잃게 되는데 순우리말을 발굴해서 사용하면 언어가 가져다주는 풍요함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1. 6월 26일 오늘은 저의 어머니 윤경진권사님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한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 갑니다.
그래서 오프라인 모임은 가족 모임 후에 개별적으로 만나서 가질 예정입니다.
2. 장모님과 드린 예배
지난주 토요일에는 제 아내가 장모님의 식사 당번이 되어 대전에 갔습니다. 평일에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식사를 챙겨드리는데 휴일에는 자녀들이 돌아가며 식사를 챙겨드리고 있는데 지난 주일이 아내의 차례였습니다. 대전에 간 김에 하늘언어교회의 주일 예배를 대전에 계신 성도들과 드리기로 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오후에 모이기에 오전에는 우선 장모님과 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되었습니다. 장모님은 연세 때문에 기억력이 많이 흐려지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도 내용을 곧바로 잊으시고 예배를 언제 드렸는지도 잊게 됩니다.
이런 분들을 위한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할까요? 학교에서는 한번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언어의 흐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제가 장모님께 설교를 하는 대신 장모님이 저희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한다면 그 말씀을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장모님처럼 오랜 세월을 사신 분께 시답지 않은 설교를 하는 것은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장모님께 질문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모님의 관심은 오로지 자녀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 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장모님은 큰딸 큰아들에서부터 막내까지 바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7남매 모두 하나님 앞에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시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오직 자식들 사랑하는 마음뿐이셨습니다.
우리는 장모님의 말씀을 잘 새겨서 기억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마무리 기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장모님과 같이 기억이 흐려지신 분들께는 아무리 명설교를 해도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장모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말씀하시도록 유도하고 자녀가 경청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에 훨씬 가까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젊은 사위가 말하기보다 장모님이 말씀을 하시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 사랑의 언어를 듣고 기억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 은혜샘교회에서 드린 오후 예배
우리 하늘언어교회는 양적으로 많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소통하고 은혜받기에 딱 좋은 정도로 모이는 것을 지향합니다.
왜냐하면 시청각장애인과 같이 특별한 언어 수단으로 소통해야 하는 이들은 주변에서 통역해주지 않으면 곧바로 소통에서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전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광고를 하자 대전 지역의 시청각장애인이 두 명이나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시청각장애인이 저까지 총 3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제 아내와 봉사자 학생인 박상화자매 이렇게 두 명인데 시청각장애인은 3명이 되니 통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김흥신 형제의 점자단말기와 노트북을 연결하려 했는데 노트북이 오래되어서인지 잘되지 않았습니다. 두 아기를 데리고 온 향숙자매는 계속 아기가 보채서 안고 왔다갔다 하느라 통역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모처럼 만나는 얼굴들이라 다들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조은순 집사님, 송남수집사님, 윤경진 권사님이 참석해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었습니다. 윤경진 권사님은 저의 어머니이신데 팔순인데도 굉장히 정정해 보인다고들 합니다.
은혜샘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은 수박 등 과일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예배 장소와 다과를 제공해주신 두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예배 메시지는 제가 강대상에서 하늘언어교회가 기존 교회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진행했습니다. 우리교회는 오전에 다른 교회에 참석하고 오후에 신앙에 대한 심화된 이해와 공부를 위해 모임을 갖는다는 것, 그래서 많이 모이는 것보다 소통에 적합한 인원이 모이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 예배의 순서도 이미 오전에 했던 것을 똑같이 반복할 필요는 없고 상황에 따라 꼭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시작 기도를 드리고 나눔의 찬양 즉 봉헌 찬양으로 ‘사랑’이라는 옛날 복음성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저는 수화로 해보려고 했는데 잘 들리지 않아서 노래에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설교 즉 강론은 지난 16일에 천안 밀알선교단에서 했던 내용을 짧게 요약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강한 데서가 아니라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는 말씀으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세상은 1등, 금메달, 최우수, 최고 등에 열광합니다. 2등 아래와 은메달 아래는 대부분 기억에서 잊어버립니다. 즉 온 세상에 2등 아래로는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강함은 하느님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합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약한 이들을 죽이고 강한 이들만 번성시키려는 시도가 지속되어 왔는데 히틀러의 인종 청소가 그 절정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과 장애인과 집시를 학살하고 자기가 속한 아리안족을 번식시키려 했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그것이 세상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약함과 약자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강한 자들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즐겨 사용하시고 그 약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약한 자가 대우받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임을 성경은 누누이 밝히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첨부합니다.
4. 월요일에 조집사님, 송집사님과 함께 시내에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아내와 저의 옷가지를 조금 사고 나서 천안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조집사님께서 저희를 붙들었습니다.
“이대로 가실 거예요? 오늘 저녁에 중촌동에 가서 좋은 시간 가지면 좋지 않을까요?”
조집사님은 무척 바쁘신 분입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들과 어머니를 케어하느라 바쁘시고, 낮에는 장애인 이용자들을 위해 애쓰시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십니다. 저희는 그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더 놀다가 가라고 붙들어도 사양해야 하는데 그렇게 붙드는 손길이 너무 자상해서 염치불구하고 실례하기로 했습니다. 저녁을 함께 먹고 나서 송남수집사님 댁에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극진히 환대해주시고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함께 어울려서 힐링을 맛보게 해주시는 송집사님과 조집사님께 매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5. 푸근한 단골 가게
대전역 근처 구지하상가에 ‘국제사’라는 작은 화장품 가게가 있습니다. 저희 부부가 10년 넘게 들르는 가게입니다.
가게 주인장이신 김예신 사장님께서 갈 때마다 저희를 환대해주셔서 늘 힘을 받고 천안에 돌아올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갈때마다 꼭 식혜를 주문해주셔서 돌아다니느라 생긴 갈증이 시원하게 해소됩니다.
그뿐 아니라 저에게 갖가지 좋은 향수를 시향지에 묻혀서 맡게 해주십니다. 세상에는 눈으로 봐야 하는 물건이 천지여서 저같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아이쇼핑을 즐길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물건을 만져보는 것과 더불어 향수를 맡아보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달리 없습니다.
특히 향수들은 매우 고급의 미적 자극이어서 삶 속에서 잘 활용하면 울적한 기분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물품입니다.
이번에도 여러가지를 시향하게 해주시고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공병에 담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세수를 하고 나서는 그 향을 살짝 뿌려서 맡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6. 실로암 시청각장애학습지원센터에서 정지훈 원장님과 유지선 선생님께서 천안을 방문해주셨습니다.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고 나서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가지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요지는 저를 인터뷰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제작해서 센터 홈페이지에 올리겠다는 것과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강의를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자는 것 등이었습니다.
저는 동영상을 못 보기 때문에 촬영을 좋아하지 않지만 협조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강의는 그동안 공부하느라 지쳐서 당분간 쉼이 필요하고 아직 저 같은 시청각장애인이 강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계속 길을 모색해갈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해 제작된 ‘달팽이별’이 음성 인식이 빨리 종료되는 등 단점이 있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 단말기 회사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천안에 오실 때마다 여러가지 좋은 소식과 함께 선물까지 전해주셔서 잔잔한 기쁨을 선사해주십니다.
이번에는 비누 냄새가 나는 향수를 선물해주셔서 잔잔한 기쁨을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요즘 들어 한창 향수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제 마음을 어찌 아시고 향수를 다 준비해주셨는지 참으로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날씨도 덥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먼길을 와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 강론 -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9절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제목: 약한 데서 온전함을 드러내는 존재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간질, 안질, 시각장애 등 여러가지 설이 있어서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가시는 수많은 매질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던 바울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애인들에게는 장애가 바로 육체의 가시입니다. 시각장애, 지체장애, 시청각장애 등 그 어떤 장애도 우리에겐 무거운 십자가이고 육체의 가시입니다. 이 장애라는 가시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장애를 포함한 약함을 나쁜 것, 열등한 것, 제거하고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불구자로 태어난 아이나 여자아이는 유기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만큼 육체적인 결손과 장애와 가시를 멸시하고 경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생각대로 열등하고 약한 사람들을 없애고 강하고 결함 없는 사람들만 존재한다면 세상이 살기 좋은 곳이 될까요? 인류 역사에는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의 인종 청소였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과 장애인과 집시 등을 저급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보고 순수한 아리안족만 우월한 종족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열등한 종족으로 낙인찍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우월한 인종이라고 생각한 종족을 번식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대재앙을 인류에 몰고 왔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으로 건강하고 온전한 사회이며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약하고 병들고 열등한 사람이 없으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인종차별, 여성차별, 장애인 차별이 끝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치우친 사상을 따라가는 길은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 차별과 학대로 얼룩지고 폭력과 살륙이 난무하는 비극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아 보이는 생각이나 사상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추종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을 건강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에 비극과 전쟁을 몰고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과 말은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절대화하거나 전적으로 추종하는 일은 극도로 조심하고 삼가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약함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성경에서는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다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똑같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모두가 하느님 형상을 입었다면 모두에게 온전함이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특히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하느님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수자와 약자들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흔히 원죄론을 들먹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약함과 장애와 질병이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수자와 약자의 존재는 범죄 이전부터 있었던 창조의 원리였습니다. 아담에 비하면 이브가 약자이고 소수자였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무슨 잘못을 범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강한 남자와 약한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남자의 굳셈과 여자의 섬세함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약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즉 인간은 강하기만 한 남자만으로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섬세한 여자가 있어야 온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강자인 비장애인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약자인 장애인을 통해 보다 온전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체의 가시, 약함, 장애 등은 세상 사람이 보는 것처럼 열등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균형을 이루려는 하느님의 온전한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세상의 한 축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약함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자원이자 풍요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제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바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장애와 가시를 장점과 자원으로 보는 성경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힘에 집착하고 가시를 열등하게 여기더라도 믿는 이들만큼은 그러한 눈을 거부하고 하느님이 주신 눈을 받아서 약자와 장애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소수자, 약자, 장애인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시각으로 약자들을 바라본다면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약함은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만 교회는 오히려 약함을 은혜의 통로로 여기고 자랑까지 할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갈수록 퇴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약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약자와 장애인을 잊어버리고 등한시한다면 하느님의 온전하심에서 멀어져가는 길이기 때문에 교회로서 본질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런 교회들은 세상의 이익집단과 다름없는 강자 중심, 약육강식의 집단으로 퇴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안에서는 약함이야말로 은혜와 계시의 통로이며 구원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약한 자는 존재함 자체로서 하느님의 온전하신 능력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약한 이들을 열등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세상의 관점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신앙인의 도리가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약한 이들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보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해나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게 만드신 약자들을 자꾸 보기에 안 좋다고 보는 세상의 관점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약한 이들은 바로 하느님의 진정한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장애가 육신의 욕구를 이루는 데는 약점이 되지만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는 오히려 강점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적인 관점으로 약한 자들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하느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약한 데서 온전함을 드러내는 존재" 제목부터가 이미 은혜를 다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 님은 배울 점도 많고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롤모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도는 성경적인 눈으로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으로 하느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고 그 의미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저부터요......
맞습니다. 바울은 약함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제발 고쳐달라고 하소연했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그 약한 데서 능력이 온전해진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약한 자들, 장애인, 노인, 마음의 병을 앓는 이 등 수많은 약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도대체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주어진 것입니까? 이렇게 하소연하며 살지만 하느님은 그 약함을 통해 하늘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분임을 계속 가르쳐주고 계신 듯합니다.
저도 이 삼관의 멍에를 벗어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소원했는데 끝끝내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두손 두발 다 들어야 비로소 그분의 능력이 나의 약함을 통해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