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유공 묘갈명병서 〔舍人柳公墓碣銘 幷序〕
옛 친구 판서 채백창(蔡伯昌 채유후(蔡裕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게 유영(柳潁)이라고 상투를 올린 뒤로 함께 교유하던 이가 있는데 자가 세이(洗耳)라네. 사람이 크고 바른데다 문장을 잘하지. 마음이 아주 넓어서 외물에 대해 겨루는 바가 없고 직책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우뚝하게 섰다네.”
나는 이렇게 응수하였다.
“지금 세상의 선비가 아니군. 옛사람 중에서나 찾아볼 수 있겠군 그려.”
그 뒤에 백창이 세이를 데리고 왔는데, 얼굴이 희고 키가 컸으며 말을 하는데 속된 기운이 없었다.
지금 그의 고자(孤子 아버지가 돌아가신 아들) 진사 명견(命堅)이 선친의 세계(世系)와 관력(官歷)의 자초지종을 가장에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묘갈명을 청하러 왔다. 아, 자고로 세상에 팔십 노인이 글 짓는 일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명견은 고집을 꺾지 않고 말하기를,
“돌아가신 제 부친께서 비록 집사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한번 보고 뜻이 맞은 점이 집사라면 있었을 것입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지 지금 십여 년이 지났으니 무덤가 나무가 한 웅큼만 되었겠습니까. 불초 소생이 비록 남의 얘기나 듣고 믿는 사람이지만 당세의 글 잘 짓는 군자의 집에 달려가 선인의 글을 영원히 전할 것을 도모하지 않고 집사에게 온 것은 속인과는 나란히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집사께서는 가엽고 애처롭게 여겨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나는 누차 사양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행장을 살펴 보건대, 공의 휘는 영(潁)이고 자호는 유항(柳巷)이다. 진주(晉州) 유씨는 고려 상호군(上護軍) 정(挺) 때부터 알려졌다. 14대가 내려와 휘 윤(潤)은 예빈시 별제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조 참판은 휘 영문(榮門)을 낳았는데 성균관 진사로 태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태복시 정은 휘 격(格)을 낳았는데 정언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은 휘 시행(時行)을 낳았는데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부친이다. 부인은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군수 대화(大禾)의 따님인데 정부인에 봉해졌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공은 아동 때부터 두각을 보여 오봉(五峯) 이상공(李相公 이호민(李好敏))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시를 주어 장려하였다. 네 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모부인(母夫人)이 기르고 가르쳤는데 관대하게 하지 않았다. 아홉 살 때 화분의 매화를 시로 읊었는데,
작은 화분 매화가 웃으려 하니 / 小盆梅欲笑
옥 가지에 봄뜻이 움찍거리네 / 玉骨春意動
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손님이 놀라 감탄하였다. 진안위(晉安尉)가 장남으로 모부인을 도와 공의 공부에 힘썼다.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 공은 부친의 상례와 똑같이 치렀다. 모부인이 돌아가셨을 때 공은 겨우 약관의 나이였는데 혼자 장례를 주관하면서도 예법을 따르고 슬퍼하기를 극진히 하였으니, 듣는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명나라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5)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공의 나이 25세였다. 승문원에서 선발되어 주서가 되었고, 다시 세자시강원 설서로 옮겼다.
임신년(1632)에 전적으로 승진하고, 얼마 안 되어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있다 옥당에 몸을 담았다.
을해년(1635) 여름에 징사(徵士) 강학년(姜鶴年)이 직언을 하다가 죽을 위험에 처하자 공이 수찬으로 혼자 힘을 써 간쟁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시끄러운 말들을 돌아보지 않아 결국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한직으로 밀려났다. 병자년(1636) 봄에 상께서 서용하도록 특별히 명하셨으니 성대한 은혜였다. 공은 조정에서 편안하지 않은 점이 있어 힘껏 구하여 간성(杆城)에 부임하였다.
겨울에 오랑캐가 침범하여 상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영동의 여러 고을이 화들짝 놀라 어지러이 흩어졌지만, 공에게 속한 서리와 백성은 한발자국도 관소를 떠날 수 없었다. 임금이 몽진(蒙塵)하셨으니 비록 관직에 묶여 달려가 문안할 수 없었지만 어찌 편안할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 생각하여 이런 심정으로 뜰에 자리를 깔고 조석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절하였다. 당시 사대부가의 처자들이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고생하며 줄줄이 찾아왔는데 공은 친소를 따지지 않고 봉급을 덜어 구제하였다. 난리가 끝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모두 뼈에 사무치도록 공의 덕에 감사한다고 말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어사가 술 때문에 공을 책망하니 공이 그만두고 떠났다. 백성들이 공을 위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으니 정사가 물처럼 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을에 대간의 직책에 제수하는 문서를 거듭 받았는데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했다. 겨울에 연이어 홍문관과 사간원에 임명하는 명이 연이어 있어서 병을 무릅쓰고 서울에 들어갔다.
무인년(1638)에 천거되어 이조 낭관에 제수되고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직하였다.
기묘년(1639) 가을에, 어사로 나가라는 명을 받아 관서지방을 안찰하였는데, 시시비비의 논평이 매우 분명하였다. 이듬해에 이조 낭관에서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신사년(1641)에 사헌부 중승에 제수되었는데 탄핵이 일어나도 피하는 바가 없었다. 당시 시강원의 관원은 돌아가면서 심양(瀋陽)에 가야했는데 공이 갈 차례에 공이 아프다는 것을 아는 상신(相臣)이 있어 덕분에 면하게 되었다. 종부시 정에 제수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옮겼는데 역적 권억(權澺)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집에 머물렀다.
임오년(1642)에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체직되고 상의원 정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643)에 성균관 사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태복시 정으로 옮겼는데 병 때문에 도정(導正)으로 옮겼다.
을유년(1645)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을 만나 병든 몸을 이끌고 달려가 곡위(哭位)에 참여하였는데 병이 더욱 심해져 병석에서 시달린 채 한 해를 넘겼다. 돌아가실 때에도 정신이 혼미하지 않아 오히려 입속으로 남자는 부인의 손에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정도이니 군자의 바른 죽음이었다.
공은 밖으로는 유순하고 안으로는 방정하였으니, 타고난 성품이다. 때로는 면전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지만 마음에 쌓아두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기쁘게 교유하였다. 정백창(鄭百昌) 덕여(德餘)는 술에 취하여 좌중을 꾸짖기를 좋아했는데, 공을 보면 같은 연배로 대하고 감히 함부로 하지 않았다.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공훈과 총애를 믿는 것이 한창 심하였는데, 공이 벼슬이 낮은 관원으로 곧장 들어가 앉아서 병자호란에 군대를 버린 일을 책망하자 김자점이 매무새를 바로하고 사과하였으니, 공의 정직함이 일세에 무서워할 것 없음이 이와 같았다. 채백창이 공의 공명정대함을 끊임없이 칭찬하였으니 벗이기에 잘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청년 때부터 관직이 높고 명성이 드러났으나 의복이 포의(布衣)시절과 변함이 없었다. 집은 그저 사방 벽뿐이지만 살림의 유무를 따지지 않았고 친척과 벗을 만나면 비록 문방구를 전당 잡혀서라도 반드시 술을 준비하도록 명하고 반드시 취한 뒤에야 그쳤다. 술에서 깨면 《자치통감강목》 한 책이 반드시 손에 들려있었으니, 세상을 잊지 않는 그의 뜻을 또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옥의 흠은 술을 마시는 것이 지나친 것이었다. 수명이 이 때문에 길지 않아 좋은 재목이 바람에 뒤집혀 동량으로 쓰이기도 전에 중도에 꺾여버렸으니 이것이 공을 아는 자들이 탄식하며 애석해하는 이유이다.
전배(前配)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군수 홍적(弘勣)의 따님으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진사 이진방(李震昉)에게 출가했다. 후배(後配)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인데, 부친의 휘는 윤신(潤身)으로 별제를 지냈다. 별제는 한흥군(韓興君) 조근(趙瑾)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한흥군이 예법으로 가정에 모범을 보였기에 이 숙인(李淑人)은 가정의 훈도를 받들어서 자녀를 예의로 가르치고 제사를 받들되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종신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이 돌아가신 지 8년 후에 생을 마치시니 향년 45세였다.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낳았는데 장남 명전(命全)은 진안위(晋安尉) 적(頔)의 후사로 들어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밑으로 명견(命堅), 명천(命天), 명전(命傳), 명현(命賢)이다. 명천은 종형 감사 석(碩)의 후사로 갔고, 명전은 첨지 예(
)의 후사로 갔다. 명견과 명천은 모두 진사에 올랐다. 명현은 열여덟 살에 연방(蓮榜 생원시나 진사시)에 일등으로 급제하였다. 이진방은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원령(元齡), 두령(斗齡), 구령(九齡)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도사 정시한(丁時翰)과 병조 낭관 윤이제(尹以濟)가 사위이다. 정시한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도원(道元)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도겸(道謙)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모두 일찍 죽었다. 다음이 도진(道晉)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윤이제는 외아들 집경(集慶)을 낳았다. 명전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고 명견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으며 명천은 딸 둘을 두었고 명전은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버지를 잃고 모친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 孤童而敎於母
모친은 어미로서의 도를 얻으셨네 / 母得母道
유약한 동생이 그 형을 따랐으니 / 弱弟而從其兄
아우는 의롭고 형은 인도하였네 / 弟義兄導
훈도(薰陶)가 쌓여 후덕해지니 / 浸灌之積而厚兮
성품은 본래 복희씨(伏羲氏)였네 / 性自太昊
큰 날개 달고 바람위로 날아오르니 / 負大翼也風培
의젓한 봉황의 깃털이라네 / 儼一鳳毛
홀 바로 잡고 조정에 서서 이목을 집중시키니 / 正笏朝端動衆目兮
여건의 패도(佩刀)를 뽑으셨네 / 鞘拔虔刀
그러나 중도에 서릿발 같은 칼날이 꺾이었으니 / 羌中塗而霜鍔摧兮
평소에 품은 뜻을 지하에 묻고 말았네 / 掩素蘊於泉裏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자, 후손에게 복이 있다 하였으니 / 古語曰位不稱德者有後
그대에겐 천리마 같은 뛰어난 아들 다섯이 있다네 / 君有五驥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