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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행(行)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정공 윤복(丁公胤福)의 신도비명 병서
만력 정사년(1617, 광해군9) 겨울에 목사(牧使) 정후(丁侯)가 선대부(先大夫)의 가장(家狀)을 경세(經世)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제 선공(先公)의 산소에는 법제상 비석을 세워야 하는데, 실적(實跡)을 기록한 비문을 부탁할 데가 없습니다. 이는 대개 감히 가볍게 부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점점 흘러 어느새 지금까지 2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대로 오래 내버려 두면 드디어 민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선조의 덕을 전할 길이 없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명을 따를 수가 없다고 사양하였는데, 두 차례나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선왕(先王) 무자년(1588, 선조21)에 내가 이필(珥筆)의 반열에 있을 적에 아침저녁으로 은대(銀臺)에서 공을 모신 것이 반년 동안이었다. 그 당시에 선왕이 임어(臨御)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정신을 가다듬음이 쇠하지 않아 어질고 뛰어난 인재를 뽑아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어지럽지 않고 아주 전일하였다. 이에 대개 묘당(廟堂)이나 관각(館閣)에서부터 시종(侍從)이나 언관(言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정한 사람과 올바른 선비가 별처럼 벌여 있고 나무처럼 서 있으면서 좌우에서 교화를 도왔으므로, 선왕이 한 시대의 인재들을 조정으로 모아들인 것에 대해 여론이 아름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걸출한 사람을 손꼽을 때면 공이 반드시 그 속에 끼었다.
나는 다행히도 공의 용모와 의범(儀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의론하는 말을 직접 귀로 들어 상세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점으로 보면 내가 목사의 명을 받아들여 이 일을 돕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이에 드디어 끝내 사양치 못하고는 삼가 그 가장(家狀)을 살펴보고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윤복(胤福)이고 자는 개석(介錫)이다. 그 선대(先代)는 나주인(羅州人)으로, 휘 윤종(允宗)이란 분이 있어 고려조에 벼슬해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다. 그 뒤에 드디어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고조는 휘가 자급(子伋)으로, 소격서 영(昭格署令)을 지내고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가 수강(壽岡)으로, 고요함을 즐겨 구차스럽게 벼슬길에 진출하지 않았다.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의 장이 되었는데, 연산(燕山)이 정사를 어지럽게 하자 병을 칭탁하고 물러나 한가롭게 지냈다. 뒤에 중묘(中廟)를 섬겨 병조 참판이 되었다. 조고의 휘는 옥형(玉亨)으로, 병조 판서를 지냈다. 선고의 휘는 응두(應斗)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다. 집안 대대로 효(孝)와 의(義)와 목(睦)과 인(婣)으로 집안사람들을 가르쳤으며, 청백한 이름과 두터운 덕으로 당대에 소문이 났다. 비(妣)는 송씨(宋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는데, 군수를 지낸 송세충(宋世忠)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 갑진년(1544, 중종39) 6월 을미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애를 써서 공부하지 않고서도 재주가 성취되었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그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이로부터 탁용(擢用)됨이 날로 융숭해서 명망과 실제가 모두 드러났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헌납(獻納),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응교(應敎)와 교리(校理),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장령(掌令)과 집의(執義)를 거쳐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옮겨졌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사간원 사간으로 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국자감(國子監)의 장관과 미원(薇垣)의 장관을 거쳐 이조와 병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며, 품계가 승진되어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호남(湖南)에서의 변고가 있어 사대부들이 모두 얽혀들어 당시의 사류(士類)들이 거의 다 연좌되어 폄직되고 쫓겨났는데, 공 역시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중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선왕이 억울한 내용을 살피고는 얼마 뒤에 서용하도록 명하였으나, 언자(言者)들이 전의 논의를 다시금 말해 물러나 집 안에서 지낸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들이 깊숙이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幸行)하였다. 당시에 공은 몸이 몹시 손상되어서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는데도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병든 몸을 이끌고 여러 날 동안 길을 가 서흥(瑞興)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는 어가를 쫓아갈 수가 없었는데 왜적들이 이미 뒤에 바짝 다가온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대대로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어 교목(喬木)의 세신(世臣)이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군부가 파천(播遷)하는 것을 보고도 능히 모시고 가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가슴을 치며 비통해하다가 드디어 병에 걸렸다. 그러던 중 지금의 주상이신 광해군(光海君)이 군사들을 어루만져 주라는 명을 받고 이천(伊川)에 주둔해 있다고 듣고는 샛길을 따라 나아가 알현하였다.
곧바로 병조 참판에 제수되어 광해군을 호위해 성천(成川)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군무(軍務)에 있어서 품의(稟議)하여 재결을 받을 일이 있으면 재신(宰臣)이 마땅히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야 했는데, 공은 병이 이미 고질화되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아갈 수가 없었는데도 달려가서 문안하는 것에 급하여 행재소로 가기를 자청하였다. 길을 가다가 가산군(嘉山郡)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해져서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10월 10일의 일이었으며, 향년은 49세였다.
임시로 가산군의 경내에 장사 지냈다가 왜적들이 조금 물러간 뒤에 배천(白川)으로 모셔 와서 장사 지냈다. 뒤에 다시 토질이 박하고 물이 나 혹시라도 봉분(封墳)이 무너지는 일이 생길까 걱정스러워 용인(龍仁)의 포곡(蒲谷)에 있는 묘향(卯向)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자품(資稟)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지행(志行)이 순후하고 성실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제자(弟子)의 직분을 부지런히 힘썼으며, 벼슬길에 나아간 뒤에도 오히려 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음식을 공양하고 잠자리를 보살피는 등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을 한결같이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하였다. 찬성공(贊成公)이 돌아가신 뒤에는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섬기기를 찬성공을 섬기듯이 하였다. 그리고 과부가 되어 혼자 사는 고모가 있었는데, 이분을 어머니와 같이 섬겼다. 종당(宗黨)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은혜와 의리를 극진하게 하였으며, 외로운 자나 가난한 자를 돌보아 줌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다.
공은 평상시에 항상 장엄한 모습을 견지하여 일찍이 나태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상대를 접함에 있어서는 또 겸손하고 화락하며 즐거운 모습으로 하여 경계를 두지 않았다. 평소의 성품이 고요하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여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으며, 벗으로 허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당시의 올바른 사람들이었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공무(公務)에서 물러난 뒤에는 곧바로 책을 펼쳐 읽었으며, 선현(先賢)들의 격언(格言) 가운데에서 특히 수용(受用)하는 데에 절실한 것을 보면 그때마다 곧바로 기록해 두었다가 가슴속에 새겨 실천하는 데 대비하였다. 특히 《논어(論語)》를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베껴서 고요한 때면 매번 단정한 자세로 앉아 책을 펼쳐 놓고 읽었다. 경악(經幄)에 있을 때에는 강설하는 것이 정확(精確)하면서도 뜻을 곡진하게 설명하였으며, 대성(臺省)에 있을 적에는 논의를 펴는 것이 평이하고 관대하였으며, 토여(吐茹)하지 않았다.
공은 자상하고 측달하여 남을 구제해 주고 상대방을 이롭게 해 주는 데에 이르러서는 또 한평생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일찍이 영남 지방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을 적에는 당시에 변방 백성들을 쇄환(刷還)하는 일이 있었는데, 사실대로 판별하지 않아 원통하다고 하소연하는 소리가 하늘 끝에 닿았다. 이에 조정으로 돌아온 날에 곧바로 듣고 본 바를 진달해 아뢰어 완전히 풀어 준 자가 많았다.
공의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절제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런데도 지위와 향년이 공의 덕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이치를 논하는 자들이 의혹되었다. 그러나 공이 죽은 지 13년이 지난 뒤에 조정에서는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의 공훈을 추가로 기록하였으며, 공의 아들인 호공(好恭)과 호선(好善) 역시 모두 녹공(錄功)되었는바, 법제상 은혜를 미루어 추증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추증되어 영의정에 이르게 되어 추증하는 은전이 황천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서는 지난날에 의혹스러워하던 자들 역시 조금은 의혹이 풀리게 되었다.
공의 배필은 한씨(韓氏)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한경상(韓景祥)의 딸이다. 아녀자로서의 덕과 부인으로서의 현숙함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고양(高陽)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이장(移葬)하여 공의 묘에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장남 호약(好約)은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고, 호공(好恭)은 정랑(正郞)으로 있으며, 호관(好寬)은 지금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있고, 호선(好善)은 지금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고, 호서(好恕)는 지금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있다. 이들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호제(好悌)는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호검(好儉)과 호문(好問)은 모두 요절하였다. 또 딸 다섯을 두었는데, 첫째는 한기(韓頎)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참판 남이신(南以信)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이영후(李榮後)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 원문빠짐 -, 다섯째는 정문건(鄭文建)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側室)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호익(好益)이다. 참봉 호약은 딸 셋을 두었는데, 이전(李佃), 이시화(李時華), 김전(金壂)에게 시집갔다. 정랑 호공은 아들 넷에 딸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언찬(彦瓚)으로 진사이고, 둘째는 언욱(彦頊)이고, 셋째는 언숙(彦璛)으로 참봉의 후사가 되어 제사를 받들고 있다. 큰딸은 좌랑 조길(曺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군수 호관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언황(彦璜)으로 진사이다. 목사 호선은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언유(彦瑜), 언원(彦瑗), 언벽(彦璧)이고, 딸은 진사 안헌징(安獻徵)에게 시집갔으며, 하나는 어리다. 진사 호제는 아들 둘에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이름은 언경(彦瓊)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어쩜 그리도 후사(後嗣)들이 빼어나고 번성하단 말인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은 이미 - 원문 1자 빠짐 - 뜻 곧은 데다 / 旣□而貞
영민하고 민첩하며 맘 고요했네 / 旣敏而靖
또한 이미 행하는 데 독실하여서 / 亦敦于行
베풀어서 정사하는 데에 펼쳤네 / 施及有政
어느 누가 빼어남을 풍성히 주고 / 孰豐其粹
오랜 수명 주는 데는 인색하였나 / 以嗇其永
하늘의 뜻 어찌 정해지지 않아서 / 天豈不定
기수가 그 칼자루를 잡게 하였나 / 氣司其柄
내가 공의 뜨락 안을 바라다보니 / 我瞻公庭
뜨락 안은 평평하고 길쭉도 하네 / 其平侹侹
뜨락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던가 / 維庭何有
난초 쭉쭉 자라나고 옥 빼어났네 / 蘭茁玉挺
하늘의 뜻 일정하지 않다 한다면 / 謂天不定
이 집안의 남은 경사 한번 보시게 / 視此餘慶
지나친 짓 하고서도 복 받은 자들 / 彼淫而福
상서로운 것 아니고 재앙인 거네 / 匪祥匪眚
용인이라 포곡 땅의 저 산기슭엔 / 蒲原之麓
샘이 있어 맑은 물이 퐁퐁 솟누나 / 有泉瀅瀅
공의 행적 새겨 놓은 빗돌 있나니 / 有鑱其珉
지나가는 이들 필시 공경할 거리 / 過者必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