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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2월
연구실에 홀로 앉아 있던 파우스투스 박사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창조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천사들의 끝없는 찬양은 점차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이 과연 찬양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 끝없는 기쁨을 안겨준 이가 바로 내가 아닌가? 차라리 공로 없는 찬양을 얻어내는 것, 그리고 자신이 고문하는 피조물들로부터 경배를 받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롭지 않겠는가?” 그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 거대한 연극이 막을 올리도록 결심했다.[1]
수많은 세월 동안 뜨거운 성운이 목적 없이 우주를 소용돌이쳤다. 마침내 그것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중심부에서는 행성들이 떨어져 나갔으며, 행성들은 차갑게 식어갔다. 끓어오르는 바다와 불타는 산들이 용솟음치고 요동쳤으며, 검은 구름마저 뜨거운 빗줄기들을 겨우 굳어진 지각 위로 퍼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의 깊은 곳에서 최초의 생명 싹이 돋아났다. 그것은 비옥한 온기를 받아 거대한 숲의 나무들로, 축축한 썩은 흙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양치식물들로 번성해 갔고, 바다 괴물들이 번식하고 싸우며 서로를 잡아먹는 동안 급속도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그 괴물들 중에서 인간이 태어났다. 인간은 사고할 수 있는 힘과,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 그리고 굶주린 경배의 갈증을 안고 태어났다. 인간은 이 미치고 기괴한 세상에서 모든 것이 스러져 가고 있으며, 죽음의 가차 없는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 온갖 대가를 치러서라도 짧은 생명의 순간들을 움켜쥐려 발버둥 치고 있음을 보았다. 인간은 말했다. “숨겨진 목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헤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목적은 선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언가를 경배해야만 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에는 경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투쟁으로부터 물러서며, 하나님이 인간의 노력을 통해 혼돈 속에서 조화를 이끌어내고자 뜻하셨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맹수의 조상으로부터 물려주신 본능을 따랐을 때, 인간은 그것을 죄라 불렀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당하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의심했고,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질 수 있는 신성한 계획을 스스로 발명해 냈다. 그리고 현재가 나쁘다는 것을 보면서, 미래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현재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능한 기쁨조차 포기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힘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하나님은 미소 지으셨고, 인간이 포기와 예배에 있어 완전히 성숙해진 것을 보았을 때, 또 하나의 태양을 하늘로 보내어 인간의 태양과 충돌하게 하셨으며, 모든 것은 다시 성운으로 돌아갔다.[2]
그렇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훌륭한 연극이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공연하게 할 것이다.”[3]
이러한 윤곽으로,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세계를 과학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한 세계의 한가운데서, 만약 존재한다면, 우리의 이상들은 앞으로 집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도달할 결말을 미리 알지 못한 원인들의 산물이라는 것, 그의 기원과 성장, 그의 희망과 두려움, 그의 사랑과 신념은 단지 원자들이 우연히 모인 결과일 뿐이라는 것, 그 어떤 열정도, 영웅주의도, 생각과 느낌의 강렬함도 개인의 생명을 무덤 너머까지 보존할 수 없다는 것, 모든 시대의 노고와 헌신, 영감, 인간 천재성의 대낮 같은 찬란함은 태양계의 거대한 죽음 속에서 소멸할 운명이며, 인간 성취의 거대한 신전은 폐허가 된 우주의 잔해 아래 필연적으로 파묻힐 것이라는 점—이러한 모든 것들은 완전히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확실한 것이기에, 이를 거부하는 그 어떤 철학도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러한 진리들의 뼈대 안에서만, 그리고 굴절 없는 절망의 단단한 기초 위에서만 영혼의 거처는 비로소 안전하게 지어질 수 있다.[4]
이토록 이질적이고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이토록 무력한 피조물인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열망을 더럽히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까? 맹목적이면서도 전능한 자연이, 광활한 우주의 심연을 거쳐 오랜 세월 순환하는 동안 마침내 하나의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기이한 신비이다. 그 자식은 여전히 자연의 힘에 지배되면서도 시력을 가졌고,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으며, 자신의 생각 없는 어머니(자연)의 모든 소산을 심판할 능력을 지니었다. 죽음—부모인 자연의 통제라는 표식과 인준—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짧은 세월 동안 여전히 자유롭게 탐구하고, 비판하고, 알 수 있으며, 상상력을 통해 창조할 수 있다. 그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오직 그에게만 이 자유가 주어져 있으며, 바로 여기에 그의 외적 삶을 지배하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대한 그의 우월성이 존재한다.
야만인은 우리처럼 자연의 힘 앞에 자신의 무력함이 주는 억압을 느낀다. 그러나 그에게는 ‘힘’보다 더 존중하는 것이 없기에, 그는 자신의 신들이 경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따져묻지도 않은 채 기꺼이 그들 앞에 엎드린다. 질투에 찬 신들을 달래려는 희망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잔인함과 고문, 타락과 인신의 제사에 관한 기나긴 역사는 비참하고도 끔찍하다. 떨고 있는 신자는 생각할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으니, 그들의 피에 대한 갈증도 가라앉을 것이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몰록의 종교—그러한 신조들은 통칭 이렇게 불릴 수 있다—는 본질적으로 주인이 칭찬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조차 마음속으로 품지 못하는 노예의 비굴한 복종이다. 이상의 독립성이 아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힘’은 마음껏 숭배될 수 있으며, 잔인하게 고통을 가함에도 불구하고 무제한적인 존경을 받는다.[5]
그러나 도덕이 점차 대담해짐에 따라, 이상 세계의 요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예배가 멈추지 않으려면, 그것은 야만인이 만들어낸 것과는 다른 종류의 신들에게 바쳐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상의 요구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며, 벌거벗은 ‘힘’이야말로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대답에 주입된 태도가 바로 그러하다. 하나님의 힘과 지식은 과시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암시는 전혀 없다. 우리 시대에 생존 경쟁에 도덕의 기반을 두고 생존자가 곧 적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나 도덕적 감각에 그토록 혐오스러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다른 이들은, 우리가 특별히 종교적이라고 여기는 입장을 취하여, 팩트의 세계가 어떤 숨겨진 방식으로든 이상 세계와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전능하고 전선(全善)하며,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 하는 것의 신비로운 일치인 하나님을 창조한다.[6]
그러나 사실의 세계는 결국 선하지 않으며, 우리의 판단을 그곳에 복종시키는 데는 우리의 사상이 정화되어야 할 비루함의 요소가 존재한다. 모든 것에 있어서, 비인간적인 ‘힘’의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가능한 한 해방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 좋다. 힘이 대개 나쁘다는 것, 그리고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지닌 인간은 그러한 지식이 없는 세계 속에서 무력한 원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는 다시 선택이 제시된다. 우리는 ‘폭력’을 숭배할 것인가, 아니면 ‘선함’을 숭배할 것인가? 우리의 하나님은 존재하며 악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양심이 창조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인가?[7]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대하며 우리의 전체 도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칼라일과 니체, 그리고 군국주의의 신조가 우리에게 익숙하게 만든 ‘힘의 숭배’는 적대적인 우주에 맞서 우리의 이상을 지켜내는 데 실패한 결과이다. 그것은 악에 대한 굴종적인 복종이며, 우리의 최선을 몰록에게 바치는 희생이다. 힘이 진정 존중되어야 한다면, 사실이 종종 나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잘못된 “사실의 인식”을 거부하는 이들의 힘을 차라리 존중하자. 우리가 아는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편이 더 나을 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우리가 고수하고 또 고수해야 하는 이상들은 물질의 영역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자. 비록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무심한 우주의 승인을 받지 못할지라도, 진리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삶이 도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완전성의 이상에 대한 존경을 유지하자.
힘이 나쁘다면, 그것이 그런 것처럼, 우리 마음에서 그것을 거부하자.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여기에 있다. 오직 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창조한 하나님만을 숭배하겠다는 결심, 우리의 가장 좋은 순간들의 통찰을 불어넣는 하늘만을 존경하겠다는 결심에. 행동과 욕망에 있어서 우리는 외부 힘의 억압에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사상과 열망에 있어서 우리는 자유롭다. 동료 인간들로부터 자유롭고, 우리의 육체가 무력하게 기어 다니는 보잘것없는 행성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우리가 사는 동안 죽음의 억압으로부터조차 자유롭다. 그러므로 늘 선의 비전 속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저 신앙의 에너지를 배우자. 그리고 그 비전을 항상 앞에 둔 채, 행동 속에서 사실의 세계로 내려가자.[8]
사실과 이상의 대립이 온전히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불타는 반항의 정신, 신들에 대한 맹렬한 증오는 자유의 주장에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프로메테우스의 불굴의 자세로 적대적인 우주에 맞서고, 그 악을 항상 시야에 두며, 항상 적극적으로 증오하고, 힘의 악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떠한 고통도 거부하지 않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것 앞에 고개 숙이지 않으려는 모든 이의 의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노는 여전히 구속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사상이 악한 세계에 사로잡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란이 솟아오르는 욕망의 맹렬함 속에는 지혜로운 이들이 극복해야 할 일종의 자기 주장이 들어 있다. 분노는 사상의 복종이지만 욕망의 복종은 아니다; 지혜가 담겨 있는 스토아적 자유는 사상이 아니라 욕망의 복종에서 발견된다. 욕망의 복종에서 체념의 미덕이 솟아오르고, 사상의 자유에서 예술과 철학의 온 세계가 솟아오르며, 마침내 마지못해 따르는 세계를 반쯤 정복하게 되는 아름다움의 비전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비전은 얽매이지 않은 관조, 간절한 소망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사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9] 그리하여 자유는 더 이상 삶이 시간의 변화에 종속되는 개인적인 재화들을 자신에게 안겨주기를 요구하지 않는 이들에게만 찾아온다.
비록 포기의 필요성이 악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일지라도, 기독교는 그것을 설파함에 있어 프로메테우스적 반항의 철학을 능가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 중 일부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여전히 실재하는 선들이지만, 어떤 것들은 그토록 간절히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정화된 이상의 일부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포기되어야 할 것이 나쁘다는 믿음은 때로는 그릇될지라도, 길들여지지 않은 열정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그릇된다. 그리고 종교의 신조는 그것이 결코 그릇되지 않음을 증명할 이유를 제공함으로써, 수많은 준엄한 진리의 발견을 통해 우리의 희망을 정화하는 수단이 되어왔다.[10]
그러나 체념 속에는 또 하나의 좋은 요소가 있다. 실재하는 선조차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을 때는 조바심을 내며 갈망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에게 크고 작은 포기는 이르고 늦음의 차이만 있을 뿐 찾아오기 마련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열정적인 의지의 온 힘으로 갈망하면서도 불가능한 좋은 것은 그들에게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죽음, 질병, 가난, 혹은 의무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각자는 세상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운명은 그것을 금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불행이 닥쳐왔을 때 우리의 희망이 무너진 것을 한탄 없이 견뎌내고, 헛된 미련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돌리는 것이 용기의 몫이다. 힘에 대한 이러한 정도의 복종은 공정하고 옳을 뿐만 아니라, 지혜로 가는 바로 그 문이다.[11]
그러나 소극적인 포기만이 지혜의 전부는 아니다. 포기만으로는 우리 자신의 이상을 숭배할 신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신전의 어렴풋한 예감은 상상의 영역에서, 음악에서, 건축에서, 이성의 방해받지 않는 왕국에서, 그리고 슬픔의 손길과 변화의 두려움, 사실의 세계가 주는 실패와 환멸에서 멀리 떨어진 채 아름다움이 찬란하게 빛나는 서글픈 저녁 노을의 마법 속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을 관조할 때 천국의 비전이 우리의 마음속에 형성되며, 우리 주변의 세상을 심판할 시금석과 함께, 성스러운 신전의 돌로서 기능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것들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빚어낼 영감을 동시에 안겨준다.[12]
죄 없이 태어난 드문 영혼들을 제외하면, 그 신전에 들어가기 앞서 통과해야 할 어둠의 동굴이 존재한다. 그 동굴의 문은 절망이며, 바닥은 버려진 희망들의 묘비명으로 포장되어 있다. 거기서 자아는 죽어야 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의 열정과 탐욕은 도살되어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영혼이 운명의 제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굴을 지나 포기의 문은 다시 지혜의 대낮으로 이끌어 주며, 그 광채 속에서 순례자의 마음을 기쁘게 할 새로운 통찰, 새로운 기쁨, 새로운 따뜻함이 빛을 발한다.
무력한 반항의 쓰라림 없이, 운명의 외적인 규칙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동시에 비인간적인 세계가 우리의 숭배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될 때, 마침내 무의식적인 우주를 변형하고 재창조하여 상상의 도가니 속에서 정제함으로써, 낡은 찰흙 우상을 대체하는 빛나는 금빛의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세상의 다채로운 사실들—나무와 산과 구름의 시각적 형태들, 인간 삶의 사건들, 심지어 죽음의 그 전능함 속에서조차—창조적 이상주의의 통찰은 자신의 생각들이 비로소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반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정신은 자연의 생각 없는 힘들에 대한 미묘한 지배력을 확립한다. 그것이 다루는 재료가 더 악할수록, 훈련되지 않은 욕망을 더 좌절시킬수록, 마지못해 저항하는 바위로부터 숨겨진 보물을 이끌어내는 업적은 더 위대해지며, 대립하는 힘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승리의 대열에 합류시키는 승리는 더욱 자랑스러워진다.[13]
모든 예술 중에서 비극은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승리감에 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의 영토 한가운데, 그의 가장 높은 산 꼭대기에 빛나는 성채를 세우기 때문이며, 그 함락되지 않는 망루에서 적의 진영과 무기고, 부대와 요새들이 모두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죽음과 고통과 절망의 군단들과 폭정적인 운명의 비굴한 대장들이 그 용감한 도시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동안에도, 그 성벽 안에서는 자유로운 삶이 계속된다. 그 신성한 성벽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그 모든 것을 보는 고원 위에 사는 이들은 세 번이나 거듭 행복한가. 수많은 세월의 전쟁을 통해 우리에게 값진 자유의 유산을 지켜주었고, 굴복하지 않은 자들의 고향을 모독적인 침략자들로부터 더럽혀지지 않게 지켜준 그 용감한 전사들에게 영광이 있기를.[14]
그러나 비극의 아름다움은 삶 속에서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더 눈에 띄거나 덜 눈에 띄는 형태로 존재하는 성질을 비로소 가시화할 뿐이다. 죽음의 구경거리,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인내, 그리고 사라진 과거의 돌이킬 수 없음 속에는 신성함, 압도적인 경외감, 존재의 광대함과 깊이, 그리고 다함없는 신비에 대한 느낌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고통이라는 이상한 결합을 통해 고통받는 자는 슬픔의 끈으로 세상에 묶이게 된다. 이러한 통찰의 순간에 우리는 일시적인 욕망을 향한 모든 갈망, 사소한 목적을 위한 모든 투쟁과 분투, 피상적인 관점에서 일상적인 삶을 이루는 작고 사소한 일들에 대한 모든 집착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적 동반자 관계의 깜빡이는 불빛으로 밝혀진 좁은 뗏목을 둘러싼 채, 짧은 한 시간 동안 우리가 거친 파도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어두운 대양을 보게 된다. 바깥의 커다란 밤으로부터 차가운 돌풍이 우리의 피난처를 파고든다. 적대적인 힘들의 한가운데서 인간이 겪는 모든 외로움은 개별 영혼에게 집중되며, 영혼은 자신의 희망과 두려움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우주의 전체 무게에 맞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용기로 홀로 싸워야 한다. 어둠의 세력과의 이 투쟁에서의 승리는 영웅들의 영광스러운 무리로 들어가는 진정한 세례이며, 인간 존재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입문이다. 영혼이 바깥 세상과 맞닥뜨리는 그 경외로운 만남 속에서 선언, 지혜, 자비가 태어나며, 그것들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15]
우리가 꼭두각시에 불과해 보이는 저항할 수 없는 힘들—죽음과 변화, 과거의 돌이킬 수 없음, 그리고 헛됨에서 헛됨으로 향하는 우주의 맹목적인 질주 앞에서 무력한 인간—을 영혼의 가장 깊은 성소로 받아들이는 것, 즉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아는 것이 곧 그것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거가 그토록 마법 같은 힘을 지니는 이유이다. 그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그림들의 아름다움은 늦가을의 매혹적인 순수함과 같다. 단 한 번의 숨결에도 떨어질 나뭇잎들이 여전히 황금빛 영광 속으로 하늘을 향해 빛나듯이 말이다. 과거는 변하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 덩컨처럼 삶의 소란스러운 열병이 지난 뒤에 편히 잠든다. 조급하고 탐욕스러웠던 것, 사소하고 덧없었던 것은 모두 사라졌고, 아름답고 영원했던 것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그 속에서 빛난다. 그 아름다움은 그에 걸맞지 않은 영혼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운명을 정복한 영혼에게는 종교의 열쇠가 된다.[16]
외부적으로 바라본 인간의 삶은 자연의 힘에 비하면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노예는 시간과 운명과 죽음이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의 모든 생각이 그것들이 집어삼키는 대상들에만 향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숭배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그것들을 거대하게 사유하고 그들의 무감정한 찬란함을 느끼는 것은 더욱 위대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는 우리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우리는 동양적 예속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에 더 이상 고개 숙이지 않고, 그것을 흡수하여 우리의 일부로 만든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일시적인 욕망의 모든 갈망을 몰아내며, 영원한 것들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것—이것이 곧 해방이며 자유인의 예배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은 운명을 관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운명 자체는 시간의 정화하는 불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그 어떤 것도 남겨두지 않는 정신에 의해 정복되기 때문이다.[17]
모든 유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유대인 공통의 운명이라는 유대로 동료 인간들과 결합할 때, 자유로운 인간은 새로운 비전이 늘 자신과 함께하며 모든 일상의 과업 위에 사랑의 빛을 비추고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의 삶은 보이지 않는 적들에 둘러싸여 피로와 고통에 시달리며, 소수만이 도달하기를 희망할 수 있고 누구도 오래 머물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밤을 뚫고 나아가는 긴 행군이다. 행진을 이어가며 우리의 동료들은 전능한 죽음의 소리 없는 명령에 붙잡혀 하나둘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간다.[18]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시간, 그들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들의 길에 햇살을 비추고, 동정의 위안으로 슬픔을 덜어주며, 지치지 않는 애정의 순수한 기쁨을 주고, 실패하는 용기를 북돋아 주며, 절망의 시간에 신앙을 불어넣는 것은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인색한 저울로 그들의 장단점을 재지 말고, 오직 그들의 필요만을 생각하자—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슬픔, 어려움, 어쩌면 무지함만을 생각하자.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동반자들이며, 우리와 똑같은 비극 속의 연기자들임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그들의 날이 저물고, 그들의 선과 악이 과거의 불멸성을 통해 영원해졌을 때, 그들이 고통받고 실패한 곳에 우리의 행위가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음을,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신성한 불꽃의 불티가 지펴진 곳 어디에서나 우리는 격려와 동정과 고귀한 용기가 빛나는 용감한 말들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몫이 되기를.[19]
인간의 삶은 짧고 무력하다. 그와 그의 모든 인종에게 느리고 확실한 운명이 무자비하고 어둡게 찾아온다. 선과 악에 눈멀고 파괴를 아끼지 않는 전능한 물질은 가차 없는 길을 질주해간다. 오늘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내일은 스스로 어둠의 문을 통과해야 할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타격이 가해지기 전에 자신의 보잘것없는 하루를 고결하게 만드는 고차원적인 사상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뿐이다. 운명의 노예가 지닌 비겁한 공포를 경멸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은 성소에서 경배하며, 우연의 제국에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외적 삶을 지배하는 제멋대로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단죄를 잠시 동안 허용해 주는 저항할 수 없는 힘들에 맞서, 무의식적인 힘의 짓밟는 행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이 빚어낸 세계를 지탱하는 지치지 않지만 굴하지 않는 아틀라스처럼 홀로 버텨내는 것뿐이다.[20]
[1] 러셀은 서두에서 파우스투스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가상 대화를 통해 우주와 인간의 창조 동기를 ‘지루함과 맹목적 권력의 유희’로 묘사한다. 이는 괴테의 원작에는 없는 러셀의 독창적 알레고리로, 전통적 유신론이 말하는 ‘전선(全善)한 창조주’ 개념을 해체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종교적 신앙이 지닌 본질적 의미를 도외시한 채, 종교의 역기능적 단면만을 부각시키는 근대적 합리주의의 환원주의적 한계를 드러낸다. 종교는 단순한 지배자의 유희가 아니라, 인간이 부조리한 실존 속에서 의미와 구원을 갈구하며 도달한 영적·윤리적 응답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2]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와 유신론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인 ‘폭군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자로서의 신’이라는 왜곡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종교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덕적·영적 진화를 거듭해 온 내면적 깊이를 보지 못한 채, 자신이 경험한 제도적 기독교의 역기능과 공포에 기반한 신의 형상(몰록의 종교)에만 사로잡혀 있다. 이는 자신의 비판적 이론과 이면의 심리적 편견을 객관적으로 분리해 내지 못한 환원주의적 한계를 보여준다.
[3]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예: 크세노파네스 등)은 신의 형상이 인간의 문화적·심리적 투사(Projection)임을 날카롭게 통찰한 바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러셀은 종교가 인간 의식의 발전과 함께 어떻게 형성되고 투사되어 왔는지에 대한 거시적·인류학적 통찰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종교를 인간 정신의 숭고한 소산이자 진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 단순한 미신과 억압의 도구로 단정 지음으로써 고대 사상가들보다도 오히려 협소한 역사적 시야를 드러낸다.
[4] 러셀은 원시적 공포와 부족 신앙, 제사 제도의 잔재만을 부각시키며 종교를 인류 이성의 ‘유아기적 산물’로 단정한다. 그러나 이는 종교가 인류의 의식 성장에 발맞추어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하는 역사적·발달사적 차원을 간과한 오독이다. 고대인의 종교적 감성은 단순한 무지와 맹종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자연 앞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우주적 질서에 응답하려는 치절한 실존적 몸부림이었다. 러셀은 근세적 윤리의 잣대로 고대인의 감성을 재단함으로써, 종교가 지닌 내면적·진화적 가치를 포착하는 데 실패하였다.
[5] 러셀이 비판하는 맹목적 복종과 두려움에 기반한 종교(그가 ‘몰록의 종교’라 부른 형태)는, 아이러니하게도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이 가장 치열하게 거부했던 타락한 종교적 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사야, 아모스 등의 예언자들은 형식적 제사와 부족 신적 맹신을 고발하며, 공의와 인자를 구하는 보편적 윤리로 나아갔다. 따라서 러셀의 비판은 종교의 제도적 타락과 역기능을 겨냥하는 데는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하나, 제사에서 윤리로, 부족 신앙에서 보편적 영성으로 진화해 온 종교의 본질적 도약을 이해하기에는 시야가 협소하다.
[6]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신의 형상이 인간의 문화적·심리적 투사임을 통찰한 바 있으나, 러셀은 인간이 신을 상상해 낸 과정을 숭고한 영적·문화적 진화의 소산으로 보지 않고, 오직 ‘두려움과 환상이 낳은 비겁한 도피처’로만 깎아내린다. 정작 그 자신도 ‘일그러진 권력자로서의 신’이라는 자기만의 편견과 상처에 갇혀, 신앙이 인간 실존의 구원과 도덕적 성숙을 위해 어떻게 인류학적·역사적으로 발전해 왔는지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였다.
[7] 러셀은 인간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으나 맹목적 우주 속에서 무력한 원자에 불과하다고 진단하며, 맹목적 ‘힘(Force)’에 굴복하는 노예적 종교를 거부하고 ‘선함과 양심’을 택할 것을 촉구한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맹종에 머물지 않고 도덕적 주체로 일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존 도미닉 크로산 등 진보적 성서학자들이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을 해석한 시각과 흥미로운 접점을 이룬다. 크로산은 원초적 범죄나 수동적 타락으로 이해되던 선악과 사건을, 인간이 신이 정해준 동물적 순종(유아기적 미몽)을 벗어나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책임을 지는 ‘주체적 성숙의 결단’으로 재해석한다. 즉, 러셀과 크로산 모두 인간이 부당한 억압과 맹목적 복종으로부터 벗어나 윤리적 자립을 이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두 사상의 결론은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러셀은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된 주체성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여전히 냉혹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인간이 지향하는 ‘선한 하나님’과 양심은 결국 객관적 실재가 아닌 차가운 현실 속에서 피어난 환상(허구)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으며 구원 없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반면,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선악과를 통한 인간의 ‘주체적 자각’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단순한 조종 대상이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공의와 사랑을 선택하고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적 파트너(동반자)’로 부르시는 거대한 구속사적 초대이다. 러셀의 비판은 인간이 맹목적 숭배를 거부하고 도덕적 주체로 서야 함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지만, 그 주체성을 영원한 절망으로 침전시키는 반면, 신앙은 그 주체성을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책임적 영성과 구원의 길로 완성해 낸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8] 러셀은 냉혹하고 무관심한 우주적 사실 앞에서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비록 외로운 아틀라스처럼 고립될지라도 진리와 아름다움, 선의 비전을 사상과 열망 속에서 끝까지 수호할 것을 역설한다. 이 치열한 분투는 불의한 현실과 침묵하는 하늘 앞에서 온몸으로 맞서며 공의와 사랑의 이상을 부르짖었던 구약 예언자들의 실존적 태도와 놀라운 유사성을 지닌다.
진리를 사랑하고 선악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뇌하는 영혼이라면, 비록 제도적 신앙의 언어를 달리할지라도 인간 내면에 새겨진 양심의 빛을 통해 궁극적 진리의 자락에 깊이 다가갈 수 있음을 러셀의 삶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즉, 러셀의 분투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 인간이 도덕적 주체로서 고결함을 지켜낼 수 있는 보편적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두 전통 사이에는 결정적인 상이점(분기점)이 존재한다. 러셀은 자신이 붙든 ‘선의 비전’을 오직 인간의 양심이 냉혹한 우주 속에서 스스로 빚어낸 허구적 창조물로 보았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의 소망 없이 스스로 세계의 무게를 떠받쳐야 하는 고립된 비극(허무주의)에 갇힌다. 반면, 예언자들이 품은 비전은 인간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록 현실이 침묵할지라도 역사와 존재의 궁극적 근원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서 주어진 계시였다. 러셀의 에세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도덕적 실존으로 서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영적 에너지가 필요한지 증언하며, 기독교 신앙이 그 분투를 고독한 절망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으로 완성해 낸다는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9] 러셀은 부조리한 우주에 맞서는 인간의 태도로 흔히 채택되는 ‘프로메테우스적 반항과 분노’의 한계를 냉철하게 지적한다. 악을 향한 맹렬한 증오와 분노는 정당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의 사상을 악한 세계에 얽매이게 만드는 또 다른 ‘구속’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사상의 얽매임이 아니라 스토아 철학이 가르치는 ‘욕망의 복종(체념과 절제)’에서 솟아난다. 외부의 냉혹한 사실(Fact)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개인적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마음은 비극적 현실을 넘어선 아름다움과 진리의 순수한 관조(Theoria)에 이를 수 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불의한 현실 앞에서 터뜨린 초기적 분노와 항변이, 결국 하나님의 더 깊은 섭리 앞에서 자아를 비우고 순종하는 성숙한 영적 경지로 나아갔던 과정과 깊은 내면적 결을 같이한다. 러셀은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적 지혜와 인간 영혼의 가장 치열한 분투를 종합하여, 차가운 우주 속에서도 정신의 주권과 평정을 잃지 않는 세속적 구원의 형상을 감동적으로 완성해 낸다.
[10] 기독교 신앙의 진리는 인류의 보편적 양심, 철학적 전통,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의 진심 어린 삶과 맞닿아 있는 보편성을 지닌다. 무신론자 러셀의 치열한 분투와 헬라 철학적 관조 속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이상이라는 보편적 진리의 자락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보편성만을 강조하며 각 전통이 지닌 고유한 ‘독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러셀이 도달한 스토아적 체념이 고독한 개인의 정신적 승리에 머물렀다면, 구약성경과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고통받는 자를 찾아오시는 인격적 초월자(언약의 하나님)’라는 대체 불가능한 독특성을 통해, 도덕적 분투를 고립된 절망이 아닌 구원의 소망으로 완성해 낸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보편성의 광장 속에서 각 전통이 지닌 독특한 생명력과 은총의 심장을 올곧게 분별하고 포용하는 데 있다.
[11] 러셀은 젊은 날의 무모한 열정과 불가능한 갈망을 넘어, 죽음과 질병, 가난이라는 실존적 한계 앞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체념과 용기’의 미덕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세상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운명이 우리의 갈망을 금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불행 앞에서 헛된 미련과 원망을 거두고 의연히 견뎌내는 것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풍파를 통과하며 얻어낸 소중한 지혜이다. 철학자의 엄정한 논리 이면에 숨겨진 이 인간적인 성찰은, 러셀이 단순한 차가운 비판자를 넘어 삶의 무게를 정직하게 끌어안으려 했던 깊은 영혼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12] 러셀은 참된 지혜와 자유에 이르기 위해 인간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어둠의 동굴’을 묘사한다. 절망의 문을 통과하고, 자아와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이 도살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순례자의 마음은 새로운 통찰과 기쁨의 대낮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비장한 묘사는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증언한 ‘자아의 파산과 회심의 정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깊은 종교적·실존적 결을 지닌다. 러셀은 비록 무신론자를 자처했으나, 인간 영혼이 진정한 가치와 천국의 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부정과 포기’라는 십자가와 같은 영적 통과 제의를 거쳐야 함을 자신의 삶과 사유를 통해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13] 러셀은 맹목적 우주의 외적 규칙에 굴복하는 것을 넘어, 그 차가운 무관심의 세계를 창조적 이상주의와 상상의 도가니 속에서 정제하여 새로운 빛의 형상으로 재창조해 낸다. 삶의 좌절과 악한 재료들을 도구 삼아 마지못해 저항하는 바위로부터 숨겨진 보물을 이끌어내는 이 과정은, 기독교 신앙이 낡은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의 승리로 나아가는 ‘신자의 성숙 과정’과 놀라운 평행선을 이른다. 러셀은 비록 제도적 신앙의 언어를 거부했으나, 인간 영혼이 절망을 딛고 영적 자유와 창조적 승리에 이르는 회심의 메커니즘을 감동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14] 러셀이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빌어 묘사한 ‘적의 영토 한가운데 세워진 함락되지 않는 성채(자유의 망루)’는,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등 비극작가들이 추구한 ‘카타르시스(정화)’의 영적 구조와 깊이 맞닿아 있다. 비극과 십자가는 모두 고통과 부조리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그 정면을 관통할 때 비로소 영혼의 참된 진실에 도달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죽음과 절망이라는 운명의 폭정 속에서 영혼의 찌꺼기를 씻어내며 비장한 체념적 정화를 이뤄냈다면, 기독교 신학은 역사 속의 가장 참혹한 폭력인 ‘십자가’를 통해 그 비극의 바닥을 뚫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을 계시한다. 나아가 이는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통과함으로써 마음이 넓게 깨어지고 더 깊은 연민과 진리에 이른다는 파커 파머의 ‘깨어진 마음(Broken Open Heart)’ 영성과도 상통한다. 러셀의 비극적 찬가와 십자가 신학은 결국, 인간이 부조리한 현실과 고난의 최전선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 속에서 영혼의 주권과 구원의 승리를 일궈내는 가장 숭고한 영적 성숙의 거울이 되어 준다.
[15] 러셀은 일상의 사소한 집착이라는 ‘좁은 뗏목’을 둘러싼 거친 대양과 차가운 돌풍(죽음과 고통)을 마주할 때 비로소 영혼이 진정한 각성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는 거대한 재난과 폭력, 비극의 한계 상황 속에서 인류가 깊은 영적·윤리적 도약을 이루어냈음을 밝히는 카렌 암스트롱의 종교사적 통찰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통이라는 어둠의 세력과 맞서는 고독한 투쟁은 영혼을 일상의 이기적 갈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진정한 세례’가 되며, 그 불꽃 같은 만남 속에서 비로소 참된 지혜와 자비, 새로운 삶의 언어가 태어난다.
[16] 러셀은 셰익스피어 《맥베스》의 덩컨 왕 비유를 통해, 삶의 소란스러운 탐욕과 열병이 지나간 자리인 ‘과거와 죽음의 영역’이 지닌 깊은 고요와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우주의 맹목적 질주와 죽음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한계를 거부나 분노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성소로 깊이 받아들이고 관조할 때 인간은 비로소 운명을 정복하는 자가 된다.
모든 조급함과 이기적 갈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이 초월적 아름다움은, 고대인들이 거대한 우주 앞에서 느꼈던 신성한 경외감(Numinous)과 깊이 맞닿아 있다. 러셀은 스스로 무신론자를 자처했으나, 삶의 비극적 한계를 통과하며 도달한 이 경지 속에서 역설적으로 ‘종교의 열쇠’라 부를 만한 깊은 영적 각성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17] 러셀이 설파한 ‘자유인의 예배’—즉 이기적이고 일시적인 욕망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영원한 진리와 관조의 열정으로 영혼을 불태우는 태도는—단순한 철학적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치신, 장소와 형식의 맹목적 예속을 뛰어넘어 인간 영혼이 도달해야 할 ‘영과 진리의 예배’의 본질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피의 제사와 우상숭배를 넘어 공의와 내면적 진실로 나아갔듯, 러셀의 에세이는 헛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영혼의 성소에서 진리와 마주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영적 해방의 지평을 기독교 신앙의 거울 앞에 고스란히 비추어 준다.
[18] 러셀은 죽음과 고통이라는 밤길을 함께 걷는 인류의 긴 행군 속에서, 우리가 ‘공통의 운명’이라는 가장 강력한 유대로 동료 인간들과 결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묵상의 끝에서 발견하는 보편적 진리의 최종 목적지는, 서로를 가르는 배타적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인류 전체를 품어내는 ‘연대의 유대감’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과 모든 종교, 그리고 만민이 함께 닦아나가야 할 진정한 ‘지구신학(Global Theology)’의 터전이다. 유한성과 고통이라는 공통의 운명 앞에서 서로의 손을 잡을 때, 비로소 인류의 모든 일상의 과업 위에는 영원한 사랑의 빛이 찬란하게 떠오르게 된다.
[19] 러셀은 에세이의 마지막에서, 인간이 서로를 정죄하는 인색한 저울을 내려놓고 고통의 밤을 함께 걷는 ‘어둠 속의 동반자’로 서로를 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타인의 필요와 아픔을 돌아보고, 그들의 삶 속에 신성한 불꽃이 지펴지도록 용기와 위로를 건네는 이 실천적 당부는 지구의 미래를 위한 가장 숭고한 보편적 도덕률이자 윤리이다. 이는 배타적 도그마를 넘어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무한한 긍휼을 베푸셨던 예수의 마음과 맥을 같이하며, 기독교 신앙과 인류의 선한 양심이 마침내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지구신학적 연대’의 가장 아름다운 실천적 열매가 되어 준다.
[20] 러셀은 에세이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서,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물질의 질주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궁극적인 태도를 선언한다. 그것은 비겁한 공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은 성소에서 경배하며, 제멋대로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을 지켜내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힘의 짓밟는 행군 속에서도 자신의 이상이 빚어낸 세계를 지탱하며 아틀라스처럼 홀로 버텨내는 이 비장한 영혼의 자화상은, 갈등과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주어지는 가장 고결한 평화의 지침이자 지혜이다. 철학자의 가면 뒤에서 인류를 향해 건네는 이 정직하고도 용기 있는 제안은, 편견을 넘어 인간 영혼의 깊은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위대한 울림을 남긴다.
A Free Man’s Worship
December 1903
To Dr. Faustus in his study Mephistopheles told the history of the Creation, saying:
“The endless praises of the choirs of angels had begun to grow wearisome; for, after all, did he not deserve their praise? Had he not given them endless joy? Would it not be more amusing to obtain undeserved praise, to be worshipped by beings whom he tortured? He smiled inwardly, and resolved that the great drama should be performed.
“For countless ages the hot nebula whirled aimlessly through space. At length it began to take shape, the central mass threw off planets, the planets cooled, boiling seas and burning mountains heaved and tossed, from black masses of cloud hot sheets of rain deluged the barely solid crust. And now the first germ of life grew in the depths of the ocean, and developed rapidly in the fructifying warmth into vast forest trees, huge ferns springing from the damp mould, sea monsters breeding, fighting, devouring, and passing away. And from the monsters, as the play unfolded itself, Man was born, with the power of thought,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and the cruel thirst for worship. And Man saw that all is passing in this mad, monstrous world, that all is struggling to snatch, at any cost, a few brief moments of life before Death’s inexorable decree. And Man said: There is a hidden purpose, could we but fathom it, and the purpose is good; for we must reverence something, and in the visible world there is nothing worthy of reverence! And Man stood aside from the struggle, resolving that God intended harmony to come out of chaos by human efforts. And when he followed the instincts which God had transmitted to him from his ancestry of beasts of prey, he called it Sin, and asked God to forgive him. But he doubted whether he could be justly forgiven, until he invented a divine Plan by which God’s wrath was to have been appeased. And seeing the present was bad, he made it yet worse, that thereby the future might be better. And he gave God thanks for the strength that enabled him to forgo even the joys that were possible. And God smiled; and when he saw that Man had become perfect in renunciation and worship, he sent another sun through the sky, which crashed into Man’s sun; and all returned again to nebula.
Yes, he murmured, it was a good play; I will have it performed again.”
Such, in outline, but even more purposeless, more void of meaning, is the world which Science presents for our belief. Amid such a world, if anywhere, our ideals henceforward must find a home. That Man is the product of causes which had no prevision of the end they were achieving; that his origin, his growth, his hopes and fears, his loves and his beliefs, are but the outcome of accidental collocations of atoms; that no fire, no heroism, no intensity of thought and feeling, can preserve an individual life beyond the grave; that all the labours of the ages, all the devotion, all the inspiration, all the noonday brightness of human genius, are destined to extinction in the vast death of the solar system, and that the whole temple of Man’s achievement must inevitably be buried beneath the debris of a universe in ruins--all these things, if not quite beyond dispute, are yet so nearly certain, that no philosophy which rejects them can hope to stand. Only within the scaffolding of these truths, only on the firm foundation of unyielding despair, can the soul’s habitation henceforth be safely built.
How, in such an alien and inhuman world, can so powerless a creature as Man preserve his aspirations untarnished? A strange mystery it is that Nature, omnipotent but blind, in the revolutions of her secular hurryings through the abysses of space, has brought forth at last a child, subject still to her power, but gifted with sight, with knowledge of good and evil, with the capacity of judging all the works of his unthinking Mother. In spite of Death, the mark and seal of the parental control, Man is yet free, during his brief years, to examine, to criticise, to know, and in imagination to create. To him alone, in the world with which he is acquainted, this freedom belongs; and in this lies his superiority to the resistless forces that control his outward life.
The savage, like ourselves, feels the oppression of his impotence before the powers of Nature; but having in himself nothing that he respects more than Power, he is willing to prostrate himself before his gods, without inquiring whether they are worthy of his worship. Pathetic and very terrible is the long history of cruelty and torture, of degradation and human sacrifice, endured in the hope of placating the jealous gods: surely, the trembling believer thinks, when what is most precious has been freely given, their lust for blood must be appeased, and more will not be required. The religion of Moloch--as such creeds may be generically called--is in essence the cringing submission of the slave, who dare not, even in his heart, allow the thought that his master deserves no adulation. Since the independence of ideals is not yet acknowledged, Power may be freely worshipped, and receive an unlimited respect, despite its wanton infliction of pain.
But gradually, as morality grows bolder, the claim of the ideal world begins to be felt; and worship, if it is not to cease, must be given to gods of another kind than those created by the savage. Some, though they feel the demands of the ideal, will still consciously reject them, still urging that naked Power is worthy of worship. Such is the attitude inculcated in God’s answer to Job out of the whirlwind: the divine power and knowledge are paraded, but of the divine goodness there is no hint. Such also is the attitude of those who, in our own day, base their morality upon the struggle for survival, maintaining that the survivors are necessarily the fittest. But others, not content with an answer so repugnant to the moral sense, will adopt the position which we have become accustomed to regard as specially religious, maintaining that, in some hidden manner, the world of fact is really harmonious with the world of ideals. Thus Man creates God, all-powerful and all-good, the mystic unity of what is and what should be.
But the world of fact, after all, is not good; and, in submitting our judgment to it, there is an element of slavishness from which our thoughts must be purged. For in all things it is well to exalt the dignity of Man, by freeing him as far as possible from the tyranny of non-human Power. When we have realised that Power is largely bad, that man, with his knowledge of good and evil, is but a helpless atom in a world which has no such knowledge, the choice is again presented to us: Shall we worship Force, or shall we worship Goodness? Shall our God exist and be evil, or shall he be recognised as the creation of our own conscience?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very momentous, and affects profoundly our whole morality. The worship of Force, to which Carlyle and Nietzsche and the creed of Militarism have accustomed us, is the result of failure to maintain our own ideals against a hostile universe: it is itself a prostrate submission to evil, a sacrifice of our best to Moloch. If strength indeed is to be respected, let us respect rather the strength of those who refuse that false “recognition of facts” which fails to recognise that facts are often bad. Let us admit that, in the world we know, there are many things that would be better otherwise, and that the ideals to which we do and must adhere are not realised in the realm of matter. Let us preserve our respect for truth, for beauty, for the ideal of perfection which life does not permit us to attain, though none of these things meet with the approval of the unconscious universe. If Power is bad, as it seems to be, let us reject it from our hearts. In this lies Man’s true freedom: in determination to worship only the God created by our own love of the good, to respect only the heaven which inspires the insight of our best moments. In action, in desire, we must submit perpetually to the tyranny of outside forces; but in thought, in aspiration, we are free, free from our fellow-men, free from the petty planet on which our bodies impotently crawl, free even, while we live, from the tyranny of death. Let us learn, then, that energy of faith which enables us to live constantly in the vision of the good; and let us descend, in action, into the world of fact, with that vision always before us.
When first the opposition of fact and ideal grows fully visible, a spirit of fiery revolt, of fierce hatred of the gods, seems necessary to the assertion of freedom. To defy with Promethean constancy a hostile universe, to keep its evil always in view, always actively hated, to refuse no pain that the malice of Power can invent, appears to be the duty of all who will not bow before the inevitable. But indignation is still a bondage, for it compels our thoughts to be occupied with an evil world; and in the fierceness of desire from which rebellion springs there is a kind of self-assertion which it is necessary for the wise to overcome. Indignation is a submission of our thoughts, but not of our desires; the Stoic freedom in which wisdom consists is found in the submission of our desires, but not of our thoughts. From the submission of our desires springs the virtue of resignation; from the freedom of our thoughts springs the whole world of art and philosophy, and the vision of beauty by which, at last, we half reconquer the reluctant world. But the vision of beauty is possible only to unfettered contemplation, to thoughts not weighted by the load of eager wishes; and thus Freedom comes only to those who no longer ask of life that it shall yield them any of those personal goods that are subject to the mutations of Time.
Although the necessity of renunciation is evidence of the existence of evil, yet Christianity, in preaching it, has shown a wisdom exceeding that of the Promethean philosophy of rebellion. It must be admitted that, of the things we desire, some, though they prove impossible, are yet real goods; others, however, as ardently longed for, do not form part of a fully purified ideal. The belief that what must be renounced is bad, though sometimes false, is far less often false than untamed passion supposes; and the creed of religion, by providing a reason for proving that it is never false, has been the means of purifying our hopes by the discovery of many austere truths.
But there is in resignation a further good element: even real goods, when they are unattainable, ought not to be fretfully desired. To every man comes, sooner or later, the great renunciation. For the young, there is nothing unattainable; a good thing desired with the whole force of a passionate will, and yet impossible, is to them not credible. Yet, by death, by illness, by poverty, or by the voice of duty, we must learn, each one of us, that the world was not made for us, and that, however beautiful may be the things we crave, Fate may nevertheless forbid them. It is the part of courage, when misfortune comes, to bear without repining the ruin of our hopes, to turn away our thoughts from vain regrets. This degree of submission to Power is not only just and right: it is the very gate of wisdom.
But passive renunciation is not the whole of wisdom; for not by renunciation alone can we build a temple for the worship of our own ideals. Haunting foreshadowings of the temple appear in the realm of imagination, in music, in architecture, in the untroubled kingdom of reason, and in the golden sunset magic of lyrics, where beauty shines and glows, remote from the touch of sorrow, remote from the fear of change, remote from the failures and disenchantments of the world of fact. In the contemplation of these things the vision of heaven will shape itself in our hearts, giving at once a touchstone to judge the world about us, and an inspiration by which to fashion to our needs whatever is not incapable of serving as a stone in the sacred temple.
Except for those rare spirits that are born without sin, there is a cavern of darkness to be traversed before that temple can be entered. The gate of the cavern is despair, and its floor is paved with the gravestones of abandoned hopes. There Self must die; there the eagerness, the greed of untamed desire must be slain, for only so can the soul be freed from the empire of Fate. But out of the cavern the Gate of Renunciation leads again to the daylight of wisdom, by whose radiance a new insight, a new joy, a new tenderness, shine forth to gladden the pilgrim’s heart.
When, without the bitterness of impotent rebellion, we have learnt both to resign ourselves to the outward rules of Fate and to recognise that the non-human world is unworthy of our worship, it becomes possible at last so to transform and refashion the unconscious universe, so to transmute it in the crucible of imagination, that a new image of shining gold replaces the old idol of clay. In all the multiform facts of the world--in the visual shapes of trees and mountains and clouds, in the events of the life of man, even in the very omnipotence of Death--the insight of creative idealism can find the reflection of a beauty which its own thoughts first made. In this way mind asserts its subtle mastery over the thoughtless forces of Nature. The more evil the material with which it deals, the more thwarting to untrained desire, the greater is its achievement in inducing the reluctant rock to yield up its hidden treasures, the prouder its victory in compelling the opposing forces to swell the pageant of its triumph. Of all the arts, Tragedy is the proudest, the most triumphant; for it builds its shining citadel in the very centre of the enemy’s country, on the very summit of his highest mountain; from its impregnable watchtowers, his camps and arsenals, his columns and forts, are all revealed; within its walls the free life continues, while the legions of Death and Pain and Despair, and all the servile captains of tyrant Fate, afford the burghers of that dauntless city new spectacles of beauty. Happy those sacred ramparts, thrice happy the dwellers on that all-seeing eminence. Honour to those brave warriors who, through countless ages of warfare, have preserved for us the priceless heritage of liberty, and have kept undefiled by sacrilegious invaders the home of the unsubdued.
But the beauty of Tragedy does but make visible a quality which, in more or less obvious shapes, is present always and everywhere in life. In the spectacle of Death, in the endurance of intolerable pain, and in the irrevocableness of a vanished past, there is a sacredness, an overpowering awe, a feeling of the vastness, the depth, the inexhaustible mystery of existence, in which, as by some strange marriage of pain, the sufferer is bound to the world by bonds of sorrow. In these moments of insight, we lose all eagerness of temporary desire, all struggling and striving for petty ends, all care for the little trivial things that, to a superficial view, make up the common life of day by day; we see, surrounding the narrow raft illumined by the flickering light of human comradeship, the dark ocean on whose rolling waves we toss for a brief hour; from the great night without, a chill blast breaks in upon our refuge; all the loneliness of humanity amid hostile forces is concentrated upon the individual soul, which must struggle alone, with what of courage it can command, against the whole weight of a universe that cares nothing for its hopes and fears. Victory, in this struggle with the powers of darkness, is the true baptism into the glorious company of heroes, the true initiation into the overmastering beauty of human existence. From that awful encounter of the soul with the outer world, enunciation, wisdom, and charity are born; and with their birth a new life begins.
To take into the inmost shrine of the soul the irresistible forces whose puppets we seem to be--Death and change, the irrevocableness of the past, and the powerlessness of Man before the blind hurry of the universe from vanity to vanity--to feel these things and know them is to conquer them.
This is the reason why the Past has such magical power. The beauty of its motionless and silent pictures is like the enchanted purity of late autumn, when the leaves, though one breath would make them fall, still glow against the sky in golden glory. The Past does not change or strive; like Duncan, after life’s fitful fever it sleeps well; what was eager and grasping, what was petty and transitory, has faded away, the things that were beautiful and eternal shine out of it like stars in the night. Its beauty, to a soul not worthy of it, is unendurable; but to a soul which has conquered Fate it is the key of religion.
The life of Man, viewed outwardly, is but a small thing in comparison with the forces of Nature. The slave is doomed to worship Time and Fate and Death, because they are greater than anything he finds in himself, and because all his thoughts are of things which they devour. But, great as they are, to think of them greatly, to feel their passionless splendour, is greater still.
And such thought makes us free men; we no longer bow before the inevitable in Oriental subjection, but we absorb it, and make it a part of ourselves. To abandon the struggle for private happiness, to expel all eagerness of temporary desire, to burn with passion for eternal things--this is emancipation, and this is the free man’s worship. And this liberation is effected by a contemplation of Fate; for Fate itself is subdued by the mind which leaves nothing to be purged by the purifying fire of Time.
United with his fellow-men by the strongest of all ties, the tie of a common doom, the free man finds that a new vision is with him always, shedding over every daily task the light of love. The life of Man is a long march through the night, surrounded by invisible foes, tortured by weariness and pain, towards a goal that few can hope to reach, and where none may tarry long. One by one, as they march, our comrades vanish from our sight, seized by the silent orders of omnipotent Death.
Very brief is the time in which we can help them, in which their happiness or misery is decided. Be it ours to shed sunshine on their path, to lighten their sorrows by the balm of sympathy, to give them the pure joy of a never-tiring affection, to strengthen failing courage, to instill faith in hours of despair. Let us not weigh in grudging scales their merits and demerits, but let us think only of their need--of the sorrows, the difficulties, perhaps the blindnesses, that make the misery of their lives; let us remember that they are fellow-sufferers in the same darkness, actors in the same tragedy as ourselves. And so, when their day is over, when their good and their evil have become eternal by the immortality of the past, be it ours to feel that, where they suffered, where they failed, no deed of ours was the cause; but wherever a spark of the divine fire kindled in their hearts, we were ready with encouragement, with sympathy, with brave words in which high courage glowed.
Brief and powerless is Man’s life; on him and all his race the slow, sure doom falls pitiless and dark. Blind to good and evil, reckless of destruction, omnipotent matter rolls on its relentless way; for Man, condemned to-day to lose his dearest, to-morrow himself to pass through the gate of darkness, it remains only to cherish, ere yet the blow falls, the lofty thoughts that ennoble his little day; disdaining the coward terrors of the slave of Fate, to worship at the shrine that his own hands have built: undismayed by the empire of chance, to preserve a mind free from the wanton tyranny that rules his outward life; proudly defiant of the irresistible forces that tolerate, for a moment, his knowledge and his condemnation, to sustain alone, a weary but unyielding Atlas, the world that his own ideals have fashioned despite the trampling march of unconscious 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