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상실의 삽화들: 왜 사람은 중2병에 걸리는가?
봄 (1)
모두는 의자에 이미 앉아 있고,
빈 자리 하나 없이 나 혼자 뱅글뱅글 돌며
'둥글게 둥글게'를 하는 그런 기분 아니?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도
숨이 가쁘도록 원을 달려도
서러워 엉엉 울어도
내 자리는 없더라.
난 그래서 니가 내 자리인 줄로만 알았어.
봄 (2)
당신이 그리워 삶을 찾았고
삶이 그리워 당신을 찾았다.
봄 (3)
"미국인들은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오는 싸구려 가족애를 빙자한 편협한 이기주의로 가득찬 추한 족속들이며, 그들이 만들어낸 전쟁에서 그들이 개죽음당하는 것이야말로 지당한 인과응보이다."
내가 속한 소대에 샌즈라는 한 친구가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샘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친구랄까. 서글서글한 인상에 둔탁한 목소리, 납작통통한 체형, 둔해보이는 몸짓. 그런 외모에 걸맞게 달리기 같은 걸 할 때면, 그 친구는 쉽게 낙오하거나, 무사히 골인을 했다 해도 바로 자기 소화기관의 건강함을 확인하기 일색이었다.
어느 날엔가, 팀 리더의 지시로 머리를 자르러 그의 방에 갔었던 적이 있었다. 아. 물론 그가 팀원들의 머리를 잘라주는 담당이 된 것은 그의 이발 테크닉 때문이 아니라, 소대 내에서 유일하게 바리깡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 그였기 때문일 거라고 난 거의 확신한다.
여튼 간에 영어를 못하는 카투사와, 한국어를 못하는 미군 사이에는 우아한 영적 교감은 고사하고, 단순 작업의 무료함을 씻어줄 음담패설조차도 이루어지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그는 그냥 묵묵히 내 머리를 잘라 나갔고, 난 저녁에 먹은 햄버거에 왜 마요네즈를 넣지 않았던가를 진실로 후회하며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바리깡의 폭주를 잠시 멈추더니,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한 어린 남자아이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뭔가 미묘한 이상함을 느꼈다. 눈 주위나 입의 형상을 비롯해, 전체적인 아이의 모습이 묘하게 일그러진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샌즈에게 물었다. 이게 뭐냐고. 그는 대답했다. 그게 바로 다운증후군 환자의 얼굴이라고. 아 그랬구나. 제8요일이란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그래, 저런 얼굴이었지, 잘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내용을 상기해가며, 샌즈에게 가엾은 아이 같다고 피상적인 감상을 건넸다. 그러자 샌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진 속의 그 아이가 바로 자기 아들이라고,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라고.
카드도 하나 보았다. 그의 침대 바로 옆 벽에 걸려 있던, 크레용이나 색연필 같은 걸로 수작한 듯한 카드였다. 거기에는 정말 삐뚤삐뚤 심오하게 못 쓴 글씨로, "아빠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땐 그냥 참 싫었다. 너무 빨리 잘려서 그 이상 방에 남아 있기 뻘줌하게 만든 내 짧은 머리도 참 싫었고, 5단어 이상의 문장을 얘기할 수 없는 내 짧은 영어도 참 싫었다.
아. 샌즈.. 아.. 샌즈.. 그 말이 그에게 줄 수 있는, 우주에 있는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난 그렇게만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던 중 그의 방에 걸려 있던 십자가와 성경책이 눈에 띄었다.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에게 개신교인지, 천주교인지 별 쓸데없는 걸 물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그는 그런 건 잘 모르고 자신은 그저 신을 믿을 뿐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신을 믿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글쎄, 복잡하게 꼬인 내 종교관을 저렴한 영어로 어찌 설명해야 할지──.
결국 난 여러 길 중 가장 쉬워보이는 길을 택했고, 내가 가지 않은 길들에 대한 미련 따위는 조금도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신을 믿었으며, 난 그렇게 샌즈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을 앞둔 어느 늦은 밤, 그가 막사 밖에 홀로 서있는 것을 보았다. 살짝 그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돌아보는 그의 눈에 눈물이 아른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얘기했다.
임, 넌 신을 믿지 않냐고, 그렇지 않냐고, 그리고는 친구로서 내게 조그만 부탁이 있다고 했다. 자기를 위해서 작은 기도를 해줬으면 한다고, 그는 말했다.
전쟁이 무섭다고, 이라크로 가는게 너무 두렵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아들과 가족들이 너무나 걱정된다고, 그렇게 울먹이는 그를 마주하면서, 난 아마도, 타인을 위해 하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라던 사춘기 때의 소녀적 소망이 진실로 현실이 될 수 있기를, 딱 그때만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무수한 별들이 그들의 궤도를 따라 운행하며, 달빛이 은은하게 만물을 감싸안은 가운데, 그들의 신이 내려다보는 그 아래로 영어를 못하는 카투사와 한국어를 못하는 미군의 세상은 그렇게 새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오는 싸구려 가족애를 빙자한 편협한 이기주의로 가득찬 추한 족속들이며, 그들이 만들어낸 전쟁에서 그들이 개죽음당하는 것이야말로 지당한 인과응보이다."
샌즈, 그는 바로 그렇게 그의 가족을 너무 사랑하는 '추악한 미국인'이며, 그러한 이유로 전쟁에 나가야만 했다. 그의 추악함에 대해서는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아마도 필요하다면 그에 대한 몇 가지 증언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이것 하나뿐이다.
언젠가 하늘에서 크고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려올 때, 그는 그의 신에게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샌즈는 자신의 뚱뚱한 몸과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가족들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2개의 날개만으로는 턱없이 힘에 부친단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 아니 우리의 신은 생각보다는 꽤나 공평한 편이며, 그런 샌즈를 위해 적어도 4개 이상의 날개를 예비해줄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쩌면 그 날개들은 이미 샌즈에게 주어져, 그의 어깨죽지 밑에서 우아한 선율로 비상할 날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집에 갈 수 있게 되어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나에게, 샌즈는 함께 기뻐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좋은 사람에겐 그처럼 좋은 일이 찾아오는 거라고. 임, 너는 좋은 사람이라고.
───너 역시.
내 기도 따윈 사실 필요치 않다는 걸 그가 알 수 있었을까. '추악한 미국인', 나의 친구 샌즈가 말이다.
부디 어디서든 늘 건강하기를.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늘 행복하기를.
여름 (1)
작은 담벼락 옆 배죽 솟은 해바라기.
"사는 거 참 외롭더라."
'그래, 그래──'
수긍도 부인도 하지 않는
그 하늘거림만 있어도 좋겠네.
여름 (2)
꿈의 공원으로 오세요.
아직도 당신 하나쯤 하늘 끝까지 태워드리기에는 문제없답니다.
거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헤헤, 금방 일어날게요. 진짜에요. 정말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내일이면 모두 철거될 놀이공원이 당신을 위해 꾸는 마지막 꿈.
마지막 인사.
"저와 처음 만난 날의 당신의 웃음처럼, 그렇게 늘, 꼭 웃으면서 사세요."
여름 (3)
저녁 6시 이후의 학교는 어느 곳이나 도시전설의 공간이 된다.
까르르─ 웃으며 내 곁을 스쳐
복도 저 끝으로 달려가는 어린 여자아이의 환영에게
한번 물어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너도 이 세계를 사랑하니?"
그렇다면, 세계는 좀 더 즐거운 신비로 가득찬 곳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을텐데──.
어른의 여름이 되었기에 더욱 믿고 싶은 산타클로스 같은 것이다.
Yes, Virginia, there is a Santa Claus.
가을 (1)
헬로, 앨리스──.
이 잿빛세계를 채색하는 자의 모든 이름아.
떠나버린 것들에 대한 모든 그리움아.
너울대는 그 모든 환영아.
오늘밤도 하얀 토끼를 쫓아
창백한 달빛 아래
그 어딘가를 달리고 있니?
가을 (2)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는다.
또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를 잊지 않는 한 계속된다고도 말한다.
그렇게 누군가에 대한 기억만큼 사랑이 남는 거라면,
우리에게 치명적인 순간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그건, 어느날엔가 남아 있는 기억 이상으로
더 애타게 갈망하는 마음을 발견했을 때,
이미 상대라는 존재는 내 세계에 없고
오직 굶주린 내 마음, 내 자신만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럼 무엇을 좋아했던 것일까?
이 물음이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은,
오르골 소리가 느려지며 멎는 그 찰나의 완전한 정적처럼,
우리의 존재가 고독 그 자체로 순식간에 화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그건 우리 삶에서 가장 애달픈 순간일 것이다.
아니, 분명히.
가을 (3)
내가 데리러가야지, 혼자 골목에 남은 그 아이.
붉은 빛에 갇혀 홀로 영원히 술래가 된 그 아이,
내가 데리러가야지.
겨울 (1)
나에게도 성지(聖地)가 있다.
망원역을 나와 동교초등학교쪽으로 향하는
그 주택가 어딘가의 골목길.
아버지가 처음 장만한 작은 이층집이 그 골목 위에 있고,
그가 당신의 어머니에게 보이던 환한 미소도 거기에 함께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현관문을 열고 나선 그가
다시는 그의 어미와 그의 작은 왕자님에게 돌아오지 못했던
그 집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골목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의 작은 왕자님이 떨구었던 눈물방울의 무게를.
저녁이 내리면 그 골목은 유독 신비로 가득찼는데,
요정과 유령은 늘 아이들의 친구였다.
어느 만화의 대사처럼 밤은 정말로 깜깜했고,
그 도시전설의 공간 속에는
늘 친근한 경이로움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어둠의 신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온기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노란 백열등 아래,
밤늦은 나를 마중하러 나온
할머니의 그림자를 졸랑졸랑 쫓아가면서,
홍콩할머니도 결코 우리 할머니의 상대는 될 수 없음을
나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앙그러쥔 할머니의 손에서 전해오는 이 따스한 온기는
영원과의 약속이었다.
당신이 늘 내 곁에 머물겠다는.
말했잖는가. 저녁이 내리면 이 골목은 유독 신비로 가득 찼다고.
그런데 내 그림자가 할머니의 그림자보다 길어지게 되면서부터는,
골목은 나에게 다른 것들도 가르쳐주었다.
처음 술을 마시고 기억이 끊겨 집까지 눈 내린 길을 걸어오면서,
아니 토사물에게 주기적으로 경배하는 순례여행을 하면서
홀로 걷는 이 길이, 세상이 얼마나 차가운지를 배웠고,
어떻든 발걸음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집에 도착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런 것들은 자신이 직접 두 발로 길을 밟아야만
비로소 배울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같은 길이라 할지라도 늘 궤적마다 다른 울림들이 존재했다.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와 장을 보고 함께 팔짱을 낀 채
집으로 향하던 길의 심장고동은
비록 그 아이와의 마지막을 전송하며 돌아오던 그 길의
울음소리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 둘은 똑같이 소중했고,
엄연히 다른 길의 소리였으며,
다르기에 더욱 소중했다.
나의 어떤 기쁨도, 또 어떤 슬픔도 골목은 동등하게 받아주었다.
내가 가진 어느 것도 길 밖으로 흘리지 않고 전부 담아내주었다.
엄마와 같았다.
외롭고 지칠 때면 나는 언제나 옛동네를 찾아 이 골목에 들어선다.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나는 엄마의 탯속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그녀의 오랜 시선과, 새로운 언약과, 변하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며,
다시금 그 길을 되짚어 나온다. 재생한다.
이곳은 나의 성지(聖地)다.
겨울 (2)
겨울에는 역시 모즈코트다. 일명 피쉬테일파카.
뭐랄까. 모즈코트는 늘 이야기를 제공한다.
잃어버린 것들과, 결코 오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끝없이 장대하고, 턱없이 소소한 그런 이야기들의 중심에
놓이게 한다.
이를테면, 그건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어린 시절 초등학교 앞을 표표히 배회하며,
이제껏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던 것을 또 찾아버리고야 마는
멀고먼 눈빛의 동네백수형과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무언가 기억되지 않는 것들과 소외된 것들의 무게를 알고,
기꺼이 동네꼬마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네는 그에게 있어,
오락실 의자에 앉아 걷혀 올라간 그의 낡은 청바지 밑단으로
살짝 비치는 양말이 샤넬이었다면 그건 더욱 그림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잊을 수가 없는데, 거기에는
"그래도 인나서 밥은 먹고 자그래이──."
그런 모성의 정겨운 주책과 유사한 종류의 어떤 살가움이 있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처럼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어른 제제의 슬픈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모즈코트는 그래서 일종의 제례복이다.
나는 모즈코트의 표피 아래서
그 '인생 좀 아는 동네백수형'이 되고,
우리에게 함께 주어진 이 임무를 알아차린다.
어떻든 여기에 서 있어 주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발자국 수를 세고,
노래가 되지 못한 마음들을 담아내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바보처럼 웃어주는 것이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앞에서라도 그들을 증언해주기 위해.
낙원을 잃은 자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
그 자신의 가슴 속에 다른 이가 숨쉴 수 있는 낙원을
만들어가는 일일 뿐이라면,
모즈코트는 결국 <공사중>이라는 표지판과도 같다.
확실한 건, 언젠가 내가 돌아가야 할 어떤 곳으로,
꿈에도 그리던 그곳으로 돌아가게 될 때,
나는 모즈코트를 입고 있을 것이다.
겨울 (3)
나 얼마나 사랑했던가.
첫사랑의 그 설렘과
가족이었던 친구들과
낮잠을 청하던 낡은 벤치와
도서관 창문으로 스미던 햇살을.
마지막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옆문으로 홀로 나와
처음 들이마시던 차가운 공기와
하얀 입김과
작은 운동장 저편에 빛나던 교회불빛을.
나 얼마나 사랑했던가.
캠프호비를 나와 턱거리를 가로질러
택시에 올라타 동두천기차역으로 향해
기차를 기다리며 친구에게 전화 한 통.
"나 전역했어."
그리고 오래전의 그 아이에게 문자 한 통.
'안녕. 나 전역했어. 잘 지내.'
열차에 몸을 맡기고 덜컹덜컹
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차 안에도 스며
코끝을 시리게 울려도
양팔로 감싸안은 품에 가득하던 건
그 가슴의 따뜻함.
집으로 돌아가던 겨울밤의 평화.
나 얼마나 사랑했던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가족도 없어서.
첫눈이 내릴 때 반사적으로 누를 만한
전화번호 하나도,콩닥대는 심장소리를 전해받을
따듯하고 작은 손 하나도 없어서.
마른 동굴과, 높은 첨탑과, 저녁의 다락방과, 눈 덮인 벤치도,
마음없는 집조차, 이름없는 고향조차, 닿을 수도 없는 어딘가조차도,
나에겐 그곳이 없고, 그곳엔 내가 없어서.
만 가지 유희거리와 하나의 사랑,
혹은, 결코 때우지 않아도 족할 시간들.
내게 없는 다른 것들.내게 속하지 않은 다른 것들.
그리고 나를 떠나간 모든 것들.
그런 모든 것들이어서.
나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 생생함을.
아아, 나 얼마나 사랑했던가.
#2 Secret Sunshine
영화 <밀양> 얘기가 아니라, 중2병 얘기에요. 어차피 결론은 비슷할테지만요.
중2병에 왜 걸리냐고요?
그건 우리가, 이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에요. 인류 최대의 불치병이라는 중2병에 걸려도, 인간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에요.
물론 인간 대신에 죽어야 할 것들은 있어요. 반드시 죽게 되는 것들이 있죠.
그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에요. 모든 상실의 경험은 우리의 정체성을 치명적으로 위협합니다. 나를 구성하던 것들, 내가 소유하던 것들, 나와 관계맺던 것들, 내가 가치를 두던 것들, 나를 지켜주던 것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던 것들, 정체성과 관련된 이 모든 것에 대해 상실은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그것들을 우리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반드시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를 진정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사실 상실 자체가 아니에요. 고통의 원인은 상실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우리의 무지입니다. 상실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그 무지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아요.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죠. 결과적으로 그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회피하려 하고요.
그래서 또 하나의 신경증이 출현합니다. 상실의 경험은 늘 일상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경험을 미연에 방지하고 회피하기 위해 우리는 현실에 대한 온갖 조작적인 통제력을 동원하려고 하죠.
근데 우리 이미 많이 해봤으니까 알잖아요. 그거 안 되는 거. 공연한 힘만 쓰게 된다는 거 너무 잘 알잖아요. 영화 <에브리씽 머스트 고(Everything Must Go, 2010)>를 보면, 이 상실의 두려움으로 인한 소진의 과정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닉(윌 페렐)은 음주벽으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집으로 돌아와보니,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닉의 소지품은 모두 마당에 내버려져 있었고,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모든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용카드와 은행계좌마저 모두 그의 아내에 의해 막히게 되어 그는 빈털터리가 됩니다. 결국 어쩔 도리가 없는 닉은 마당에서 노숙생활을 하게 되요.
그러나 공공생활에 피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신고를 당해, 닉은 갈 곳 없는 곤란한 처지가 됩니다. 그래서 닉의 절친한 경찰 친구인 프랭크(마이클 페나)는 그에게 조언을 해요. 개인이 여는 벼룩시장이 3일 동안 법적으로 허용될 수 있으니, 이를 기회삼아 소지품들을 정리하고 새출발을 하라고 말이죠.
이렇게 주어진 3일이란 시간 속에서 닉은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현실을 부정하며 음주에 빠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며, 과거의 추억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려고도 하는 등, 상실의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들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과 비슷하게 외톨이 처지인 동네꼬마 케니(크리스토퍼 조던 윌리스)를 만나서야,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일 힘을 내기 시작해요.
결국 케니의 도움으로 자신의 소지품들을 정리하고, 그에 담긴 추억들도 하나둘 떠내보내게 된 닉은, 마지막으로 프랭크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연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요. 자신을 떠난 아내가 프랭크와 함께하고 있으며 닉과 이혼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는 참을 수 없이 분노하지만, 프랭크는 역으로 닉의 음주벽과 외도 때문에 닉의 아내가 얼마나 상처받아왔는지를 전합니다.
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그렇게 혹시나 기대했던 한 조각 희망조차 잃은 채 그는 쓸쓸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의 삶에서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도 당연하지 않게 된 이 현실을 음미하면서, 닉은 자신이 갖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들이었던가를, 그리고 그 귀한 것들을 얼마나 당연한 것처럼 소홀히 대했던가를 다시 한 번 발견합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사라져야만 했었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들이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이죠.
그런 닉 앞에 자상한 이웃인 사만다(레베카 홀)가 다가와, 그를 따듯하게 안아주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직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에요(Everything is not yet lost)."
그리고 영화는 홀로 남겨진 닉을 비추며, 그리고 닉조차도 사라진 거리를 비추며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에는 장미빛 환상은 없어요. 과장된 비극도 없고요. 상실이라는 게 얼마나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실재인지를 차분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인간이 상실 속에서 겪는 아픔과, 그 아픔을 회피하기 위한 모든 절절한 노력들과, 결국 상실이 수용되는 그 자리를, 즉 상실과의 만남을 참 잘 그려내고 있죠.
영화에서도 묘사되듯이, 인간이 더욱 소진되고 더욱 고통받을 때는, 상실을 받아들이려고 움직일 때가 아니라,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움직일 때입니다. 이것 또한 역설인데요.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때 상실은 세상의 모든 것이 되지만, 상실을 받아들이려 할 때 상실은 그저 상실이라는 하나의 존재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만다가 닉에게 전한 마지막 메시지는 정확한 얘기에요.
상실을 받아들이면, 그 상실이 아무리 크더라도 모든 것은 아닌 것으로 드러나며, 결국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지는 않게 되는 주체가,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없는 그 주체가 확인됩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에서 얘기하죠.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파괴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
진실입니다. 인간, 그렇게 허약한 존재 아니에요. 허약한 건 우리가 설정한 정체성이지 인간 자신이 아니에요. 인간은 맨날 힐링코드 챙기고 각종 테라피로 치유받아야 근근히 살아갈 정도로 온실 속 화초 같은 존재가 아니에요. 어떤 경험 속에서도, 결코 무너질 수도 소멸될 수도 없는 그 주체가 인간이라는 이름에 담긴 본질적인 그 무엇입니다.
상실의 경험은 바로 그런 인간의 강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줍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상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정체성을 아주 정확하게 과녁으로 삼아, 그 정체성이 죽을 때까지 무한사격을 하거든요. 상실은 그렇게 허약한 정체성을 죽여줌으로써, 정체성이라는 껍데기 안에서 빛나고 있는 그 어떤 강인한 주체가 드러나는 일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렇게 보자면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은 절반만 맞는 셈일 거예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결국 나를 강하게 한다."
여기서의 '나'란 표현이 정체성을 의미할 경우 이 말은 틀립니다. 사실 니체는 실제로 자신이 본 위대한 비전과 자신의 협소한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되었고, 그 분열을 견딜 수 없어 끝내 스스로를 파국에 몰아 넣은 인물이죠. 그래서 '나'를 정체성으로 해석했을 때,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옮겨져야 정확할 것입니다.
"'나'를 죽인 것이 결국 <나>를 강하게 한다."
전자의 '나'는 정체성을 의미하고, 후자의 <나>는 인간이라는 미지의 주체를 의미합니다. 허약한 정체성이 자기 운명대로 허약하게 죽어야, 불멸의 출신을 가진 미지의 주체가 비로소 드러나요.
죽는다는 건 결국 자신을 죽일 그 무언가를 품는다는 얘기거든요. 또한 먹는다는 얘기에요.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먹고 불멸이 되었잖아요. 이건 우주의 기본법칙이에요. 늘, 품는 쪽이 위에 있습니다. 더 크고 강합니다.
그렇게 보면, 상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는지 혹시 느끼실 수 있겠어요?
'얘야, 버릴 준비 되었니?'
'얘야, 놓을 준비 되었니?'
상실의 목소리는, 어린 소녀가 부드러운 바람을 친구삼아 들판을 자유롭게 달려갈 수 있도록 그녀의 자전거를 붙잡고 있던 손을 기꺼이 놓아주는 아빠의 목소리고, 어린 소년이 파란 하늘을 친구삼아 물 위에 떠 있는 깊은 신뢰감을 누릴 수 있도록 수면 아래에서 그의 몸을 받치고 있던 손을 기꺼이 놓아주는 엄마의 목소리에요.
상실이 이와 같은 상냥함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돕기 위해서는, 아마도 이러한 확인이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빠져나갈 길이 없는 벽처럼 상실이 우리 자신을 에워싸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뭘 해도 소용이 없고 그 자체가 너무나 갑갑하고 절망스럽게 느껴진다면 말이죠. 이제 우리가 상실에 대해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인정하세요. 상실 앞에 우리의 무력함을 정직하게 고백하세요. 바로 거기에서 눈부신 역설이 피어나요.
우리가 아무리 뭘 해도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뜻대로 어차피 되지 않을테니 우리가 뭘 해도 상관없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즉, 이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이에요. 그렇게, 우리의 무력함을 받아들였을 때, 역설 속에서 자유로운 미지의 주체가 드러나 우리에게 알려져요.
대표적으로 상실을 통해 우리는 이 자유로운 미지의 주체를 곧잘 경험하곤 합니다. 상실은 삶의 생생함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는데, 그 생생함은 곧 자유의 감각이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특정한 초점의 지엽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확 눈에 들어와 열리며 생생함으로 되살아나곤 하죠.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시야각을 협소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상실은 이 정체성을 죽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에 생생함과, 여유와, 자유의 감각을 회복시켜줘요.
시바, 칼키, 피닉스, 시무르그, 이러한 신화적 상징들이 드러내는 것은, 죽음을 통해 재생하는 새로운 삶의 은유잖아요. 실존철학자들도 공통적으로 진술하듯이, 죽음에 대한 열림은 곧 삶에 대한 열림이기도 해요. 그 크기는 동일해요.
우리에게 분명 이러한 경험이 찾아올 때가 있죠. 아, 참 아름답다, 오늘은 참 죽기 좋은 날이네, 음, 다 충만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겠구나, 그건 바로 온전함의 경험이거든요. 언제 어디서라도 죽을 수 있는 자는, 곧 언제 어디서라도 살 수 있는 온전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어떤 자리에서도 죽을 수 있는 자는, 어떤 자리에서도 결코 죽지 않는 자에요.
이것 또한 존재의 황금률이잖아요. 혹시나 죽은 자를 기적으로 살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미 죽은 자를 또 죽이는 것은 기적으로도 불가능해요.
<죽은 자는 두 번 죽지 않아요.>
그러니 상실 앞에 부디 죽으세요. 아낌없이 죽는 나무가 되세요. 그래서 그 거름으로 무엇도 죽일 수 없는 생명의 나무를 키우세요.
상실은 분명 우리의 현실에 뚫리는 구멍이에요. 뭔가를 잃은 것처럼 우리가 느끼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그 상실된 현실의 구멍을 한번 살펴봐보세요. 구멍은 뚫린 크기 그대로 이미 햇살로 채워져있어요. 거기에는 분명 그 틈새로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어요. 현실의 틈새가 생겼기 때문에 비로소 빛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낼 수 있게 된 거예요.
땅바닥만 보며 걷고 있던 우리가, 어떻게 하면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갈 수 있을지만을 유일한 현실로 생각하던 우리가, 문득 우리의 현실에 뚫린 구멍을 발견했을 때, 땅바닥에 비치는 틈새의 햇살과 조우했을 때, 땅의 소속이 아닌 그 빛의 어떤 미지감을 감지했을 때, 그때서야 우리는 이 빛의 시원을 찾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겠죠. 그리고 태양은 이렇게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하늘은 이렇게나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될 거예요.
네, 그렇네요. 상실이 상냥한 이유는 그 정체가 바로 따듯한 햇살이기 때문이었네요. 은근하게 숨겨져 있어 우리가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지만, 그건 우리를 소생시켜주는 빛에 다름 아니었네요.
그럼 이제 이 상실의 햇살 아래 포근하게 몸을 뉘여봐요. 아까 우리의 무력함은 고백했잖아요.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상실이 그의 일을 알아서 하도록 그냥 그대로 몸을 맡기세요. 우리의 설움과 아픔을 부드럽게 만져주는 그 손길에 아마 눈물도 주룩 흐를 거예요. 그렇게 울다가, 많이 울다가,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편히 잠드세요. 상실이 모든 정성으로 우리를 보살피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
그리고 우리가 깨어났을 때 할 일은, 그냥 웃는 거예요. 이제 자신을 전부 다 드러낸 그 햇살 앞에, 끝없이 파란 하늘 아래, 이 삶의 생생함 위에 놓인 우리를 발견하고는 그냥 웃는 거예요. 모든 것을 잃기는 커녕, 아직 아무 것도 잃지 않은, 아니 잃을 수도 없는 우리 자신을 확인하면서요. 그게 상실이 주고 간 선물이에요. 짧은 메시지와 함께요.
"당신이 그렇게나 소중하게 느끼며 잃는 것을 서러워한 그 모든 것들만큼, 당신 또한 바로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에요. 당신 또한 잃어질 때 그렇게나 서러울 그런 존재에요. 그러니 늘 웃어요. 그 웃음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거예요."
The Frames - Lay Me Down
And lay me down
나를 눕혀주세요
In the hallowed ground
이 신성한 대지 위에
Down by your side I will stay
내가 머무를 곳인 당신의 곁에 눕혀주세요
So lay me down
그렇게 나를 쉬게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