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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장성으로의 여행>
◉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
필암서원은 하서(河西)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으로 선조 23년에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하서는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이 필암서원은 경상도의 서원들이 대부분 산비탈에 건립된 것과는 달리 야산 아래 평지 로 세워져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에 다시 지었다. 현종3년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주셨으며,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고암(鼓巖) 양자징을 추가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필암’이라 한 것은 하서의 고향(황룡면 맥동)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필암서원은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확연루(廓然樓)....필암서원 앞에 서면 누각에 걸린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의 ‘확연루’의 편액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 작명도 그가 했다. 힘차고 장중한 글씨이면서, 이름 또한 누각 명칭으로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다.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우암은 보수적 정통 성리학자로 북벌론의 중심인물이었다.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우암의 기질이 드러나는 글씨라 하겠다.
확연루의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온 말로, 거리낌 없이 넓게 탁 트여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확연루라고 누각 이름을 지은 연유를 기록한 ‘확연루기’에 의하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해 확연하며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이 특별히 ‘확연’이란 두 글자를 택했다고 한다.
▶ 청절당(淸節堂).....확연루를 통과해 들어가면 강당 건물이 가로막는데, 옆을 돌아 강당 마루에 올라서면 마루 위에 걸린 작은 편액 ‘청절당’이 있는데 처마 밑에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이 강당 건물은 옛 진원현(珍原縣)의 객사건물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청절당이란 이름은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고, 편액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썼다. 이 역시 하서의 인품을 대변한다. 강당 건물 처마에 달린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병계(屛溪) 윤봉구의 글씨다. 사액 편액이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다. 병계는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 문하에서 수학, 우암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 학자다. 강당 맞은편에 있는 사당 ‘우동사(祐東祠)’에는 하서와 고암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편액 글씨는 주자(朱子)의 글씨에서 집자·집획(集字·集劃)한 것이라고 한다.
▶ 양송체(兩宋體).....양송체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두 사람의 글씨체를 말한다. 이들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었으므로 율곡을 사숙한 석봉 한호의 글씨체를 썼지만, 석봉체의 골격을 가지면서도 웅건장중한 무게와 기품을 더해 별도의 품격을 가진 서체를 만들었다. 양송체의 등장에는 배경이 있다. 석봉은 성리학자라기보다는 서예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글씨가 조선의 국서체가 된 것에 대해 사림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 대학자 두 명이 의기투합해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자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우암에게 글을 받고(撰), 동춘당에게 글씨를 받아(書) 비석 등을 세우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우암과 함께 기호학맥을 이은 동춘당 역시 글씨를 잘 썼으며, 우암과 함께 웅건한 글씨체로 널리 알려진 양송체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강당 앞 동·서재의 ‘진덕재(進德齋)’와 ‘숭의재(崇義齋)’ 편액도 그가 썼다.
▶ 경장각(敬藏閣)과 인종대왕묵죽도.....필암서원 사당 앞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건물이 하나 있다. 이곳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1543년) 하서에게 ‘주자대전’ 한 질과 함께 손수 그려 하사한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다. 이 묵죽도는 훗날 하서의 높은 절의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바위 주위에 솟아 있는 대나무를 그린 이 그림에는 인종이 하서에게 그림에 맞게 쓰라고 해서 쓰게 된 화제도 있다. 보기 드문 군신 합작품이다.
‘뿌리와 가지, 마디, 잎이 모두 정미하고/ 돌은 벗인 양 주위에 둘러 있네/ 이제야 알겠다 성스러운 솜씨의 조화를/ 하늘과 땅 훈훈한 기운 속에 잘도 자라난다.’
경장각 편액 글씨는 정조 임금이 초서로 쓴 친필이다. ‘경장각’은 ‘왕가 조상의 유묵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서의 덕행과 절의를 높게 평가한 정조는 하서를 문묘에 배향하고자 할 때, 급히 장성으로 파발을 보내 선왕이었던 인종께서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내탕금을 내려 경장각을 세운 뒤 하서 종가에서 귀중히 간직해 온 묵죽도를 경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게 했다. 그리고 편액 글씨를 친히 써서 내렸던 것이다.
18세 때 벌써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 항아리(秋水氷壺) 같다’라는 칭찬을 들었던 하서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이에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학문을 닦으면서 평생을 보냈다. 명종 즉위 후 여러 차례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다. 인종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경장각 편액은 왕의 친필이어서 벌레·조류 등을 막기 위해 망을 쳐두었다.
(金麟厚) 김인후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기묘년의 현사 조원기 기준 등을 만났고, 김안국 박상 송순 최산두 등에게 도학과 문학을 배웠다. 중종 23년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중종 26년 성균관 사마시에 오른 뒤 이황 등을 만나 도학을 토론하였다. 중종 3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부정자가 되었고, 명망있는 사림으로서 평가되었다. 홍문관 정자 겸 경연 전적,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맡아 세자를 보도하였다. 이때 세자가 그려준 ≪묵죽도≫ 한 폭과 김인후의 화제(畵題)는 군신 사이의 모범적인 정의(情誼)라고 칭송되었다.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으로서 조정의 기강과 습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뒤 기묘년의 현사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주청하였고, ≪소학≫과 향약의 필요성을 진술하였다. 그 뒤 부모 봉양을 이유로 옥과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중종이 죽고 인종마저 죽자 실의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을사년 이후 관직에 전혀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소쇄원, 면앙정, 식영정, 환벽당, 풍영정 등에서 문사들과 교유하는 등 호남시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쇄원48영> <면앙정30영> 등은 누정미학의 구도를 그려낸 작품으로 그의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다.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 산 절로 물 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는 <자연가>에서는 순리적인 인생관을 나타내고 있다. 허균은 그의 인품과 시격에 대하여 ‘고광이수(高曠夷粹)’하다고 평하였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 붓바위......필암서원이란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일대가 필암리이기 때문이다. 하서를 배향한 필암서원에 쓰여진 ‘필암’은 글자 그대로 ‘붓바위’란 뜻이다. 붓바위는 하서가 태어난 맥동마을 입구에 있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강단져 보이는 붓 모양의 바위인데 바위에 ‘筆巖’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 영조 때 병계 윤봉구의 글씨로 「필암」이란 두 자가 조각됐다. 붓바위는 후덕한 산을 배경으로 솟아난 날카로운 붓과 같다.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가 태어났다고 풍수에서는 말하는데 이 붓바위에 얽힌 전설도 있다. 아득하고 먼 옛날 김도령과 이도령이 글공부에 여념이 없는데 이곳에 사는 백여우는 사람이 되어 사람을 돕으며 살고 싶다고 신령님께 애원했다. 너무도 간절했기에 신령은 밤에만 사람이 돼 일하도록 해주었다. 김도령은 가난하고 마음이 착한데 이 도령은 마음이 좋지 못한 심술꾼이었다. 둘은 과거를 보기 위하여 산속 암자에서 공부를 했다. 밤이 되면 백여우는 김도령을 찾아가 시중을 들어주고 새벽이면 돌아가곤 했다. 그러기를 3년... 과거를 보러 떠나는 김도령에게 백여우는 “이걸 가지고 가시오. 이 붓은 여우 꼬리로 만든 붓이옵니다. 김도령님, 부디 이 붓으로 장원급제하고 금의환향하옵소서”하며 붓을 주었다. 김도령은 이 붓을 고이 간직하고 상경했다. 이 내용을 안 이도령이 이를 시기해 과거보는 전날 밤 김도령의 붓을 잘라 버렸다. 그런줄도 모르고 과거장에 도착한 김도령이 붓을 찾으니 붓은 망가져 못쓰게 돼 있었다. 결국 “내 붓, 내 붓”하며 정신이 돌아버리고 말았다. 한편 백여우는 김도령이 돌아오기만을 이 바위에 올라가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자 이 바위를 핥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지쳐 백여우는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바위를 붓바위(필암)라 하였다고 한다. ▶ 백화정(百花亭)....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93번지 백화정은 하서가 태어나고 타계하였던 곳으로 필암서원을 나서 관동천을 거슬러 오르면 맥동 마을에 있다. 백화정은 김인후가 세자 때부터 깊은 신뢰를 나누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조정과 인연을 끊고 낙향해서 건립한 정자이다. 하서가 생전에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술을 마셨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백화정은 근래에 복원돼 옛 정취를 보여줄 뿐 생가는 빈터만 남아 있다. 난산을 바라보며 죽림에 둘러싸인 백화정은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충절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1961년에 복원한 것으로 백화정 뜰에 서면 오른편으로 난산(卵山)이 내다보인다. ▶ 김인후 유허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86번지 하서선생의 유허비 옆에는 정려각과 정려비가 있는데 왼편의 열녀는, 고봉 기대승선생의 딸로서 하서의 손자인 선교랑 남중의 처다. 정유재란 때 친정에서 집으로 가다 일본군을 만나 손목을 잡히자 팔을 잘라버리고 물속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킨 인물이고, 오른편의 열녀 태인박씨 역시 김인후의 손자인 중곤의 처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정유재란 때 피난을 가다가 일본군을 만나자 역시 물속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킨 인물이라고 한다. 열녀비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어사리(御賜梨) 나무는 인종이 동궁 시절 묵죽도를 그려 하사하면서 제시를 짓게 한 후 배 세 개를 내렸는데 한 개를 맛보니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배 두개를 보물처럼 간직하였다가 맥동마을 죽림하에 그 씨를 심었다. 나무는 잘 자라고 열매가 탐스러웠는데 후손들은 이 나무를 어사리라 부르고 정성을 다 해 가꾸고 지극히 애호하였다. 배꽃이 활짝 핀 달밤이면 어사리에 읍하고 성은과 충절을 기리고 감읍하여 취흥에 젖곤 하였다. 어사리는 세 번 노사하였으나 다시 살아나 사백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김인후신도비.....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산25번지 김인후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있는데,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조선 영조 18년에 세운 것으로,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비문 글씨는 이재, 전서는 김진상이 썼다. 전후면에 각 19행씩, 양 측면에 각 8행씩 모두 54행, 1행 54자의 내용이다. 장성 김인후 신도비는 동국 18현에 드는 학자로서 도학과 절의, 문장을 갖춘 그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립 당시의 명유인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고 이재가 글씨를 쓰는 등 기록사료로서의 가치도 커 역사적·학술적·향토사적 가치가 크다.
▶ 김인후 난산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05
백화정 마루에 서면, 들판을 가로질러 동화면 쪽으로 가는 도로 끝자락에 위치한 난산(卵山)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난산비(卵山碑)는 김인후선생이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 맥동마을 앞 난산에 올라 북망통곡한 것을 기리기 위해 현종9년에 세운 비이다. 난산비는 호패형의 일반형 석비로 전면 상단에 전서로 “난산지비(卵山之碑)”, 첫줄에 종서로 “난산비(卵山碑)”라 제하고 이어 찬자(윤행임)와 서자(이익회)를 쓰고 비문을 적고 있다.
비문은 비제(碑題)를 포함하여 모두 31행(전 10행, 좌 5행, 후 10행, 우 6행), 1행 26자이다. 끝 부분에 추기가 있는데 “영력 사계묘 윤정현 근지(永曆 四癸卯 尹定鉉 謹識)”라는 기록이 있어 윤정현이 추기하고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윤정현은 난산비의 원비문을 지은 윤행임의 아들이다. 난산비는 김인후가 인종 승하시 망곡한 것(망곡단)을 기념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선생의 행적과 정신을 알 수 있으며 국상(國喪)에 따른 당시 제도사를 알 수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 박수량 백비(朴守良 白碑)......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산33-1번지
청백리 박수량 묘소 입구에는 ‘아곡 박수량 백비’라고 제목이 붙은 안내판과 ‘청백리 시 諡 정혜공 박수량 선생 백비 입구’라고 적힌 표시석 그리고 경계석으로 둘러진 비석이 하나 있다. 묘소 앞에는 유명한 백비가 세워져 있고 뒤에는 소나무로 둘러져 있다. .
아곡 박수량의 묘 앞에 놓인 호패형 빗돌 비석은 글이 써 있지 않은 백비이다. 조선 중기 중종·인종·명종 때의 문신 박수량 선생은 25세에 등과하여 64세까지 39년간을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공직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했을 뿐 명예와 재물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명종은 박수량 선생이 너무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보았더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라고 하였다. 박수량 선생은 1554년(명종 9년) 1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고 유언을 했다. 명종은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며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이다.’라 하고 서해바다 암석에서 돌을 골라 비를 하사하고 ‘박수량의 청백함을 알면서 비에다가 새삼스럽게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 하면서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 하였다. 그리고 그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 비 이름을 ‘백비’라부르게 하였다. 그 뒤 박수량 선생은 1806년(순조 11년) 2월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성군은 박수량 선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하여 군청광장에 모형 백비를 세워 현재의 공직자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 박수량 생가.....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468번지
박수량의 호 아곡은 그의 생가 아곡이라는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다. 박수량 생가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오른 편에 쉼터가 있다. 집 앞에는 청백당(淸白堂) 현판이 있고 집 벽에 ‘아곡 박수량 생가’ 한문 목판이 붙어 있다. 집 앞에 세워진 ‘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및 부조묘’ 안내판에는 ‘이곳은 명종 때 이름 난 선비로 38년 동안 관직생활을 한 정혜공 아곡 박수량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후손들은 여기에 부조묘(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재사를 받는 신위)와 제실을, 청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선생의 청백정신을 지금도 기리고 있다’고 적혀 있다. 박수량 생가로 들어가면 살림집이 있고 집안 왼편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 마당에는 오래된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사당 안에는 가운데에 신위가 있고 벽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등 사군자와 소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지조와 절개 그리고 인의를 중시하는 선비의 상징들이다. 신위 왼편에는 박수량의 신주가 오른편에는 박수량 부인의 신주가 있다. 거기에는 ‘현 선조 고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경연 의금부 춘추관 오위도총부 도총관 시 정혜공 부군신주’ ‘현 선조 비 정부인 유씨 신주’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 홍길동 생가터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산69-1번지>
박수량이 10살인 연산군 6년에 도적 홍길동이 잡힌다.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에 활약한 의적인데 그는 박수량과 같은 동네인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 출신이다. 실존인물 홍길동은 허균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 의하여 다시 민중영웅으로 태어난다. 홍길동 테마파크에 가면 홍길동 생가터가 있고 그곳에 길동샘도 있다.
연산군실록에는 5회에 걸쳐 홍길동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그 기록은 (1)도적 홍길동을 잡았으니 나머지 무리도 소탕하게 하다. (2) 홍길동을 도와준 당상 엄귀손의 처벌을 논하다. (3) 홍길동을 도와준 엄귀손을 끝까지 국문하게 하다. (4)정승들에게 홍길동의 무리인 엄귀손이 어찌 당상의 자리에 올랐는지 문책하다. (5)홍길동의 죄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권농 이정 등을 변방에 보내기로 하다’ 등이다.
홍길동테마파크 내에 있는 홍길동전시관은 2004년5월3일 개관하였는데 홍길동 생가터에서 출토된 유물과 생가 모형, 홍길동 캐릭터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홍길동 관련 영상물을 상영하는 영상관이 마련되어 있다.
◉ 입암산성.........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산20
입암산성의 축성시기는 기록이 없으나 삼한시대의 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 곳은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골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성의 밑부분은 백제 것이며, 상부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기초부분에 종출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천연암반을 이용하여 지표수가 자연스럽게 방출된 점 등에서 선조들의 자연 이용의 지혜를 엿볼수 있다. 서쪽의 갓바위에서는 남쪽으로 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고, 사방이 높고 중간은 넓어 외부에서 성안을 들여다 볼수 없는 천혜적인 요새지다.
고려말 몽골에 대항할 때에 송군비 장군이 몽골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국난극복의 요충지로서 효종 때에는 성을 개축하여 둘레 길이가 2795보에 달했다. 또한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성내에 흐르는 계곡물로 만들어진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을 더 파서 물걱정이 없게 되었다.
성안에는 5개의 사찰이 있었고, 승장 1명을 두었으며, 각종 무기를 두는 군기고와 군량 7천석 이상을 비축할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은곳이 많은데다 남북의 두문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웅장했던 성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으며, 피와 땀으로 내 나라를 지키려던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매우 유서깊은 호국유적이다.
지금은 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성곽과 윤진의 순의비가 있고, 가을 억새는 장관을 이룬다
◉ 백양사......북하면 백양로 1239(약수리 26)
백양사는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 33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호남불교의 요람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5대 총림 중 한 곳인 백양사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치달려와 남원, 순창 일대를 거쳐 장성 지역으로 뻗어 내려온 노령산맥의 백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 당시 백암사로 명명됐으며 고려 덕종 3년 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뒤에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선 선조7년 환양선사가 백양사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 이어 1917년 만암 대종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백양사란 이름은 하얀 양을 제도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 소멸하여 다시 천국으로 환생하여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백양사를 오늘에 있게 한 분은 만암 종헌 대선사로 스님은 30년 가까이 백양사에 주석하시면서 불사에 전력하는 한편 소실된 강원을 다시 개설하여 600년 강원 전통을 이으며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내신 서옹 큰스님께서는 2003년 열반에 드시기 전 까지 운문암 운문선원에 주석 하시면서 눈 푸른 납자를 제접하며 심혈을 기우려 후진 양성에 전력을 쏟으셨다. 또한 서옹 큰스님께서 ‘참사람’ 운동을 펼치시어 ‘참사람’ 참선 수련회를 통해서 백양사를 스님만의 참선 수행 도량이 아니라 재가자들의 참선수행 도량으로 문을 개방하셨다.
백양사는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기도가 영험하여 속발 성취하고 청량한 기운이 샘솟아 정신수양에 가장 좋은 도량이라고 전해 온다. 백양사 산내 암자로는 참선수행 도량인 운문암과 물외암, 금강대, 청량원, 비구니 선원인 천진암이 있고 기도 도량으로 영험있는 약사암과 영천굴이, 서편에 계곡과 산수가 울창하고 빼어난 청류암과 홍련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양사는 임진란, 정유재란, 갑오농민개혁 때에는 백양사 스님들이 역사와 민중의 고난에 함께해온 전통이 있다. 또한 백양사를 중창하신 만암스님께서 민족교육의 산실인 광성의숙을 설립하였고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을 설립했으며 해방 후에는 광주 정광중고등학교를 세워 사회교육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 백양사소요대사부도.......백양사소요대사부도는 백양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석종형의 양식을 구비한 높이 156cm 규모의 석조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은 하부가 매몰되어 상면만 보이고 있다.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각 면에는 초화문이 조각되었는데, 1면에만 거북 동물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모서리와 각 면에 1구씩 모두 단엽 8판의 복련을 배치했는데, 간지에는 간엽을 표현했다. 상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석종형으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과 같이 하대·유곽·상대·용뉴를 표현하고 있다. 하대는 2줄의 돌출된 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내면에는 게(蟹)를 비롯한 8구의 동물을 조각했다. 이처럼 8면에 동물을 배치한 것은 팔부신중을 의도한 것이며, 게가 표현됨은 바다가 멀지 않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구현된 것이다. 유곽은 4개소에 배치되었는데, 내부에는 9개의 유두가 배치되어 범종의 그것과 양식상 같음을 알 수 있다. 상대는 탑신부의 상단부에 2줄의 돌출된 선으로 구성했는데,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단엽 20판의 복련이 중첩 시문되었다. 이처럼 탑신부는 완전히 범종의 양식을 구현하고 있는데, 하대와 유곽의 간지에는 모두 4마리의 용을 조각했다. 전면에는 위패형의 액 내에 '소요당(逍遙堂)'이라 음각되어 있어 소요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위패형의 하단에는 상·하 5판의 앙·복련이 양각되었다. 상륜을 구성하는 용뉴는 4마리의 용두(龍頭)가 석종을 움켜 물은 상태인데, 간지에는 운문이 조각되었고, 정상에는 보주가 마련되었다. 전체 높이는 156cm이다.
▶ 백양사 극락보전 ....백양사 극락보전의 정면 문짝에 표현한 장식은 문짝의 궁판에 시문한 문양으로 괴수를 표현하였다. 머리에는 뿔이 나있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빨은 드러내고 있으며 입에서 서기를 내뿜고 있는 모습이다
▶ 백양사 명부전.....백양사 명부전 명부전 건물의 정면 문짝에 장식한 무늬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귀문의 얼굴만을 표현하였다. 입은 벌린 상태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며 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 쌍계루.....쌍계루(雙溪樓)는 백양사의 성보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식이며 백양사의 본 가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1370년에 무너진 뒤 1377년에 복구되었으며 이 과정에 정도전·이색 등이 기문을 남겼다. 특히 1381년에 작성된 이색의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므로 ‘쌍계루’라 이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천왕문......이 건물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명 '봉황문'으로 불리는 사천왕문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로, 정면 가운데 칸은 사찰의 통문 역할을 하고, 좌우협 칸에는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장대석 기단위로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이익공을 두고, 3포 이상의 집에 있는 꾸임 새인 첨차도 가졌다. 이는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병용한 절충식이다. 내부의 천장은 가운데 종보 위로는 우물천장을, 전 후면으로는 빗천장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사용하고, 서까래와 부연을 설치한 겹처마이다. 측면에는 풍탄을 설치한 맞배지붕이다. 사천왕문은 한말 대웅전 증축과 함께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범종루...사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우아하게 놓인 건물이 범종루이다. 1937년에 건립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형식의 2층 건물이다. 1층에는 범종이 걸려 있으며, 2층에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이 걸려 있다.
▶ 백양사 비자나무.....백양사 비자나무북하면 약수리 산 115-1천연기념물 153호 (1962. 12. 3)40ha, 5,000여본비자나무는 주목과의 상록침엽교목(常綠針葉喬木)이며 높이 20m, 가슴높이의 둘레가 6m에 달한다. 가지는 대생(對生) 또는 윤생(輪生)하고 잎은 호생하지만 밑부분이 비틀려서 두 줄로 배열한다. 잎은 딱딱하고 짙은 녹색이며 뒷면은 갈색이지만 주맥과 가장자리는 녹색이고 6-7년간 달려 있다.
꽃은 2가화 또는 간혹 1가화이며 열매는 대가 없고 도란형(倒卵形) 또는 타원형이며 길이 2.5-2.8㎝, 지름 2㎝로서 두께 3㎜정도의 종의(種衣)로 싸여 있다. 종자는 타원형이며 길이 2.3㎝로서 다갈색(茶褐色) 껍질과 적갈색 내피가 있다. 꽃은 4월에 피어서 열매는 다음 해의 9-10월에 익는다. 목재는 색깔과 향기가 좋아 고급 가구재로 쓰고 종자는 약용 및 식용으로 한다. 거의가 사찰경내(寺刹境內)에 분포하고 있으며 비자나무의 자생(自生) 여부(與否)는 아직 모르고 있다. 심은 것이라면 내장산(內藏山)에서 자라는 것이 보다 북쪽이 된다.
비자나무는 중국(中國)에는 없고 일본 남쪽에 분포(分布)하는데 지금은 서울에서도 장소에 따라 월동(越冬)이 가능(可能)하다. 백암산과 내장산에는 남쪽 식물인 굴거리나무가 제대로 자라고 있는 점으로 보아 자생분포(自生分布)의 가능성(可能性)도 있으나 단정(斷定)하기는 어렵다.
백양사 비자나무림은 우리나라 비자나무 자생지 중 가장 넓은 분포지를 푸조나무, 작살나무, 회나무, 단풍나무 군락, 굴거리나무 군락 등이 비자나무와 더불어 다양한 식생을 구성하고 있어 식물분포학적 ·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